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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전쟁에서 몰랐던 사실 7가지

by uesgi2003 2022. 3. 5.

요즘 손쉽게 BBC 자료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BBC 자료입니다. 

 

나폴레옹전쟁에서 몰랐던 사실 7가지

The Napoleonic Wars in 100 Facts의 저자 옘 두두쿠Jem Duducu, author가 25년간의 전쟁에 대해 7가지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나폴레옹전쟁은 유럽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유럽강대국의 충돌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1차대전 이전의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이 전쟁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7가지다.

 


1. 젊은 나폴레옹은 전망이 어두웠다.
보나파르트Bonaparte(이탈리아어 부오나파르트Buonaparte) 가문은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령의 지중해 섬인 코르시카Corsica로 이주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코르시카 귀족이었고 젊을 때에 결혼했다. 부모에게는 나폴레옹이라는 첫아들이 있었는데 4년 후에 죽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성장하면서 이탈리아어를 사용했다. 당시 코르시카 기준으로는 부유했기 때문에 그와 형 조제프Joseph는 프랑스 군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5살에 파리 사관학교École Militaire에 입학했다. 엄청난 기회였지만 1학년일 때에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고향의 가족은 수입이 없었고 프랑스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2년 과정을 1년만에 마쳐야 했고 58명 중 42등의 성적으로 겨우 16살에 장교에 임관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출신배경을 숨기려다 보니 농부의 억양으로 말해서 놀림을 받았다. 다른 소년들은 비교적 여유있고 배경있는 가문출신이었고 사교댄스에 능숙했지만 나폴레옹은 정원재배가 고작이었다. 해군이나 포병장교를 꿈꾸는 소년에게는 그다지 좋은 스펙이 아니었다. 

1791년, 유럽전역으로 전쟁이 확전되었고, 나폴레옹은 평온한 마을의 수비대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코르시카의 가족을 방문했다. 당시만 해도 10년 후에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휘관으로, 그 이후에는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얻을 지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젊은 나폴레옹와 나이든 나폴레옹입니다. 역시 머리숱이 중요합니다.


2. 영국해군은 도시를 공격했다. 
1801년,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언제라도 프랑스진영에 가담할 수 있었고 그럴 경우 덴마크는 영국본토를 공격할 수 있었다. 
파커Parker제독은 영국전함을 이끌고 덴마크를 위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영국해군이 도착하자, 덴마크함대가 해안포대를 등지고 정박해있어서 정면공격은 자살행위였다. 파커의 부하였던 넬슨Nelson부제독은 명석한데다가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그는 덴마크방어선의중에서 취약한 남쪽 끝을 공격했고 전함과 포대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졌다. 
파커는 넬슨의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근접포격전의 피해를 보고는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넬슨은 명령을 받았다는 깃발을 올렸지만 퇴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망원경을 안보이는 눈에 대고 통신장교인 토마스 폴리Thomas Foley에게 ‘폴리, 당신이 알 듯이 나는 외눈이야. 가끔은 마음대로 안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넬슨은 포탄이 퍼져 비명이 울리고 나무조각이 날아다니는데도 코펜하겐Copenhagen의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장교들은 넬슨이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넬슨은 정중한 어조로 코펜하겐에게 항복조건을 보내면 덴마크군의 포격이 피해를 거의 주지 않았다고 착각하게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엄청난 지략이었다.

그의 계책이 적중했고 코펜하겐은 항복했다. 무엇보다 1,000~1,200명의 병사가 사상되었을 뿐이고 영국전함은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덴마크군은 50% 정도 더 많은 병사를 잃고 기함 단네브로Dannebrog와 2척을 잃었다. 

치열한 전투 후에 휴전에 합의했다. 파커는 함대를 몰아 스웨덴으로 가서 발트해의 무장중립동맹armed neutrality league에서 탈퇴하라고 설득했지만 거부되었다. 파커는 스웨덴과 코펜하겐의 실책 때문에 해임되고 넬슨이 승진했다. 

3. 모든 국가가 선전전propaganda war을 사용했다.
나폴레옹전쟁이 인쇄매체를 선전목적으로 사용한 첫 번째 전쟁이 아니었지만 온갖 신문이 비난과 중상으로 흘러 넘쳤다. 그 당시의 지도자는 언론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적대적인 4개의 신문이 총검 1,000개 보다 더 무섭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여론보다 형상화imagery가 더 강력하고 지속력을 가졌다. 나폴레옹도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기강화self-aggrandisement를 노렸다. 예를 들어 알프스산맥을 넘는 유명한 그림(프랑스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1801~1805년에 그린 작품)은 나폴레옹과 군대가 알프스산맥을 넘는 장면은 무척 강하게 형상화했다. 

 


나폴레옹은 황제즉위로 유화로 영원히 남겼고 자신과 아내 조세핀Josephine은 휘황찬란한 황실복을 입은 인물화를 남겼다. 나폴레옹이 직접 무덤을 기획하지 않았지만, 무덤도 인간 사이의 신인 아도니스Adonis를 주제로 해 최고의 권력을 형상화했다. 그는 최고의 지휘관이었지만 체격이 작았고 코도 휘었다. 

 


나폴레옹은 지휘관인 동시에 절대독재자가 되어, 프랑스 언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영국언론은 군주와 지휘관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의회민주주의덕분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냉소적인 만평을 그렸다. 

예를 들어 영국은 국민의 반감을 일으키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보니Boney라는 별명을 붙였다. 보니는 공포나 조롱의 대상이었고 영국매체가 만들어 전국적인 인기를 모은 존불John Bull과 정반대였다. 불은 맥주를 마시며 뚱뚱한 몸매의 애국자로 영국을 의인화했다. 

 

 


만평 속의 나폴레옹은 작은 키를 숨기려고 큰 모자와 장화를 신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작은 키가 아니었다. 프랑스 계측단위가 영국과 달라 그런 오해가 퍼졌는데, 나폴레옹은 그 당시의 평균 키보다 약간 컸다. 

지금도 나폴레옹의 키가 작다고 오해하는데 200년 전의 영국 선전전이 그만큼 효과적이었다는 뜻이다.

4. 아르헨티나를 침공해서 스페인을 격파할 수 있었다.
1806년, 영국은 거의 10년 넘게 계속 참전 중이었다. 대륙의 동맹은 프랑스군에게 계속 패배하고 있었고 영국은 바다에서만 큰 기여를 했다. 그렇지만 영국해군제독 윌리엄 피트William Pitt와 홈 릭스 팝햄Home Riggs Popham은 1년 동안 프랑스의 주동맹인 스페인을 위협하려고 애썼다.

스페인의 남미제국은 거의 무방비상태였다. 영국의 남미침공을 막기 위해 스페인군을 파병해야 했고 그만큼 나폴레옹의 전력이 약해졌다. 팝햄은 프랑스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침공하는 것이라고 단독결정했다. 

리오 델라 플라타Río de la Plata침공작전에서 최대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를 한 달 동안 점령했다. 기대했던 스페인군은 오지 않았고 엉뚱하게 현지인의 저항에 밀려났다.

 


1807년, 영국은 더 많은 병력을 보내 몬테비데오Montevideo를 점령하고 몇 개월 동안 주둔했다. 그리고 바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다시 노렸지만 이번에는 스페인군과 지역민병 연합군에게 밀려났고 병력의 50% 이상을 잃었다.

영국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스페인정규군 파병이 목적이었지만 현지민병의 격렬한 저항으로 리오 델라 플라타는 영국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그 여파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스페인은 식민지가 단독으로 영국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좋아했지만, 식민지는 스페인에게서 훨씬 많은 권한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의 침공으로 전국이 전장으로 변했기 때문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1810년, 남미식민지는 5월혁명May Revolution을 일으키고 스페인총독을 몰아내고 첫 번째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1816년 7월, 남미연합주United Provinces of South America가 독립을 선포했고 나중에 아르헨티나가 되었다. 당시 스페인식민지 6곳이 내전을 벌이면서 자연스럽게 스페인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영국은 작전에 실패했는데도 스페인을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프랑스의 전력을 갉아먹는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1806~7년 작전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 

5. 스페인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이 끝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가톨릭 종교재판은 12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스페인종교재판은 1478년, 아라곤Aragon의 페르디난드Ferdinand 2세와 카스티야Castille의 이사벨Isabella 1세가 가톨릭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시작해 무척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15세기 말에 이교도와 배교자를 대상으로 악명높은 종교재판을 벌였고 19세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스페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카를Charles황제는 국민들이 군주뿐만 아니라 교회의 부와 권력에 대해 의문을 가질까봐 염려했다. 그는 스페인종교재판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획일적인 가톨릭조직은 프랑스혁명의 계몽주의와 전혀 맞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현대화라는 구실로 가톨릭의 권력을 해체했다. 

프랑스가 몰타Malta를 침공해 중세때부터 존재한 구호기사단Hospitallers의 해체시켰다. 나폴레옹도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켰고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공하면서 조제프가 스페인종교재판을 완전히 중단시키려고 했다. 
조제프가 1808~1813년 동안 스페인왕위에 있었지만 오랜 관습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결국 1814년에 종교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1826년, 마지막으로 교사가 처형되었는데 불순한 이교도 사상을 가르쳤다는 이유였다. 1834년, 종교재판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6. 워털루결전은 비 때문에 지연되었다.
1815년 6월 16일에 꺄뜨흐 브하Quatre Bras와 리늬Ligny전투를 벌인 후에 병력이 거의 그대로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워털루결전은 17일에 벌어졌어야 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이어졌다.

나폴레옹의 오른팔인 네Ney원수는 꺄뜨흐 브하에서 2차전을 벌이려고 할 때에 이미 영국군이 전장을 비운 것을 알았다. 이제 연합군을 빨리 찾아야 했다. 17일,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전초전을 벌이는 동안 하늘이 어두워지고 몇 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졌다. 

웰링턴은 1년 전에 이미 그 일대에 있어봤기 때문에, 경사면이 최고의 방어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워털루라는 벨기에의 작은 마을 근처 구릉을 따라 경사면 뒤에 병력을 배치했다. 

웰링턴은 프로이센군의 통신을 기다리며 워털루여관에서 밤을 지새웠다. 밤 2시 정도에 드디어 전령이 왔고 웰링턴은 지휘관회의를 열고 명령을 내렸다.

블뤼허Blücher는 영국군과의 합동작전을 두고 그나이제나우Gneisenau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는 병력을 최대한 집결시켜 나폴레옹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나이제나우는 영국군을 믿지 않았다. 

반면에 나폴레옹은 이상할 정도로 우유부단했다. 그루시Grouchy가 예정보다 늦었고 나폴레옹은 한밤중에 주변을 산책했다. 그는 그루시에게 워털루로 오지 말고 와브르Wavre 방면으로 계속 진격하라는 애매모호한 명령을 보냈다. 
나폴레옹은 농가에서 잠들었다가 근사한 아침을 먹었다. 지휘관들이 웰링턴에 대해 걱정하자 나폴레옹은 ‘귀관들이 웰링턴에게 패전했기 때문에 좋은 지휘관처럼 생각하는데, 웰링턴은 능력없는 지휘관이고. 영국군은 수준이 떨어지고 그냥 아침식사 정도에 불과하오’라며 꾸짖었다. 

6월 18일 오전, 나폴레옹은 전날 폭우가 쏟아진 땅이 어느 정도 굳을 때까지 전투를 미뤘다. 기병과 포병의 전개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네에게 전선지휘를 맡기고 자신은 최전선에서 몇 km 떨어진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보였는데 치질 때문에 말을 타고 전선을 지휘할 수 없었다. 

 


7. 워털루는 프랑스의 마지막 전투가 아니었다.
워털루에서 결정적인 승패가 갈렸고 나폴레옹의 권력이 산산조각났지만 연합군은 프랑스 수도로 진격해 나폴레옹정부를 해산시키고 루이 18세의 복귀를 노렸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생각은 달랐다. 워털루전투에 투입되었던 65,000명 중 25,000명이 죽고 9,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담Vandamme장군이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파리 남쪽의 작은 마을에서 프로이센군을 기다렸다. 
웰링턴군도 진격 중이었기 때문에 반담이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프로이센군이 그대로 수도로 들어가게 할 수도 없었다. 

파리의 주 방어선은 세느Seine강 북쪽에 펼쳐져 있었고 연합군은 이 방어선을 피해 남쪽 방향으로 접근했다. 반담은 영국군보다는 프로이센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1815년 7월 2일, 이시Issy 주변에서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밤, 파리의회는 항복여부를 협의했지만 나폴레옹의 가장 충성스럽고 뛰어난 원수인 다부Davout가 반대하며 반담이 프로이센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일, 프랑스군은 포격과 함께 진지에 틀어박힌 프로이센군을 공격했다. 격전 끝에 물러났다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프로이센군을 공격했다. 하루 종일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프로이센군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반담은 전병력을 투입하지 않았고 프로이센군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켰다. 프랑스군은 파리로 퇴각했다. 

 


프로이센군은 퇴각하는 반담을 추격했고 일부 선봉부대는 파리 외곽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직후 프랑스군은 일방적인 휴전을 선포했고 영국군이 프로이센군에 합류했다. 연합군은 쎙클루St Cloud궁에서 프랑스대표와 만났다. 급하게 만든 서류와 함께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쎙클루궁은 1870년에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공격할 때에 파괴되었다. 

 


나폴레옹전쟁은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 단편적으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사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무대가 이집트에서 러시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벨기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나폴레옹전쟁의 여파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