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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전쟁 (1부) - 배경설명, 사기와 전투피해

by uesgi2003 2022. 3. 16.

리들리 스콧영감님이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나폴레옹 영화를 촬영 중이라고 해서, 나폴레옹전쟁에 대해 연재를 할 생각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중간에 관심이 다른 곳으로 튀면 중단될 수도 있고요.

주요 전투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하게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당시 프랑스와 대프랑스동맹군의 상황, 편제, 무기, 전략과 전술 등에 대해 정리할겁니다. 

영감님 벌써 84세인데, 정말 대단합니다. 

 

참고로 하나만 머리에 넣어두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람들, 특히 전설적인 전략가 나폴레옹은 우리가 오해하듯이 어리석지 않습니다. 겨울에 원정을 떠나지 않았고, 대열을 갖춰 천천히 전진하고 근거리에서 일제사격을 주고 받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전쟁 전문가인 로리 뮤어Rory Muir의 자료를 주로 인용했습니다. 

 


베스트팔렌Westphalia대위 폰 린징겐Linsingen은 보로디노Borodino전투 전날 밤을 담담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기록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는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부대원을 살펴보게 되었다. 춥고 딱딱한 땅위에서 자고 있었다. 부대원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용감한 병사들인데, 몇 명이나 내일저녁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찢기고 피흘리며 전장에 쓰러져있겠지. 
밤사이에 러시아군이 빠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지난 몇 주동안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 영원한 공포보다 차라리 끔찍한 최후가 낫다! 전투와 승리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보로디노전투에서 양측 30만명 정도가 전투를 벌여 최대 8만명 정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프랑스군에서만 최소한 11명의 장군이 전사했을 정도입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듯이, 러시아는 무작정 초토화작전으로 퇴각만 한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였고 (정말 말도 안되는 한심스러운 왜곡인) 겨울이 아니라 러시아군의 항전으로 나폴레옹의 대육군을 전멸시킨 것입니다. 

보로디노전투는 겨울이 한참 남은 9월 7일에 벌어졌고 나폴레옹은 9월 14일에 모스크바에 입성했다가 10월 19일에 퇴각합니다. 맹추위가 시작될 때에는 이미 병력이 6만명 아래로 줄어들어 패잔병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감정이 일반적이었고, 병사들은 죽음과 부상위험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기꺼이 반겼다. 존 무어John Moore군의 병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1808년 12월 24일, 스페인 사아군Sahagun에 있었다. 심장은 희열로 요동쳤다. 완전무장을 하고 공격에 나설 대열에 섰다. 모두 희망을 말했다. “놈들을 박살내고 승리를 즐기자”라고 말했다. 지루하고 끔찍한 추격보다 차라리 짧은 격전을 원했다.’

제국근위대Imperial Guard의 19살병사 장 바레스Jean Barres는 원정의 고통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도 처음에는 기대에 차 있었다.
‘불로뉴Boulogne로 가지 않고 원정을 떠나서 만족스러웠다. 전쟁을 기대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젊고, 건강하고, 용감했기 때문에 어떤 적과의 전투라도 좋았다. 더구나 행군은 진절머리가 났다. 머리, 팔, 다리를 잃더라도 원정은 즐거운 소풍처럼 느껴졌다. 
파리를 떠나 농촌, 요새, 전장을 보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주둔지에서 보낸 지루함, 4개월의 행군, 피로와 비참함보다 전쟁이 더 나았다. 근위대는 다른 부대보다 훨씬 고통이 심했다.‘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고 날씨가 좋았지만 너무 길었다. 바레스는 병에 걸려 식욕을 잃고 고열에 시달렸다. 그는 병원후송을 거부했고 마차에도 타지 않았다. 여전히 흥분에 휩싸여 스트라스부르크까지 행군했다. 
‘나보다 상태가 좋았던 병사들이 병원에 있다가 죽었다... 원정중 병원후송된 병사들은 완전히 잊혀졌다. 그들은 병때문이 아니라 무료함으로 죽었다.’
라인강을 건너고 며칠 후, 그는 낙오되었고 며칠 동안 부대를 찾지 못했다. 음식도 없고 말을 건넬 동료도 없는 암울한 시간이었다. 간신히 복귀했을 때의 안도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 행군 중 낙오는 정말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오스트리아군이 울름Ulm에서 항복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전투를 벌일 기회가 없었다. 
‘신병도 고참처럼 영광을 맛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전투를 벌였다면 정말 기뻤을 것이다.’ 
다시 다뉴브강을 거슬러 행군에 나섰고 처음으로 악천후에 야영을 했다. 
‘누울 짚이나 태울만한 나무가 없었고 북풍이 몰아쳤다. 끔찍한 밤을 보냈다. 반쪽은 뜨거웠고 다른 반쪽은 너무 추웠다. 10월 중순이었다.’
몇 주 후에 빈에 도착했지만 도시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다시 다뉴브강을 건너 러시아군을 추격했다. 결국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에서 주둔했는데 3개월 동안 1,600km 정도를 행군했지만 총은 단 한 발도 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병사들이 원정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고참 중에는 요새 경비의 지루함이나 엄격한 훈련보다 행군길의 자유를 더 반기는 사람이 많았다. 

전투는 병사를 흥분시키고 영광을 만끽하게 하고 존재의 의미를 주었다. 고된 원정 끝에 벌어지는 전투에서 병사, 부대와 군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였다. 병사는 반드시 확신을 가져야 했다. 자신, 전우, 장교와 지휘관을 믿어야 했다. 패배를 생각하며 대열에 선 병사는 이미 패배한 상태였다.
1812년, 한 영국장교는 살라망카Salamanca전투 전의 군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번처럼 군대가 전투를 기다린 경우가 없었다. 잘 훈련되고 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자신과 지휘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사기도 최고조였다. 지난 4일 동안의 퇴각에 몹시 화가 났다. 병력이 비슷한데도 적을 두고 퇴각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1812년 7월 12일, 웰링턴의 영국-포르투갈연합군은 단 40분만에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마드리드를 해방시킵니다. 

미국독립과 나폴레옹전쟁은 신중한 기동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회전을 벌이는 시대였다. 1790~1820년 30년 동안, 유럽에 713번 이상의 전투가 있었지만 파견대, 선봉과 후위부대의 산발적인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의외로 프랑스병사는 전투를 경험할 기회가 적었고 바레스도 아우스터리츠 이후에나 실제 전투를 경험했다. 
전투가 벌어져도 피해가 적었다. 아우스터리츠에서 프랑스군은 65,000명 중 (포로포함) 8,800명이 사상당했지만 전사자는 1,305명에 불과했다. 부상악화로 사망한 경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참전한 50명 중 49명이 살아남았고 7명 중 6명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부대에 따라 피해의 정도가 달랐다. 근위보병대는 단 한 명의 장교가 부상당했지만, 반담Vandamme사단의 24대Leger는 126명이 전사하고 364명이 부상을 입었다. 
1812년, 살라망카에서, 영국과 포르투갈군은 10%인 3,129명이 피해를 입었지만 전사자는 388명으로 79명 중 1명의 비율이었다. 

 

(총 병력과 사상자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편차가 심합니다. 로리 뮤어는 비교적 보수적으로, 그리고 부상악화로 인한 사망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패전한 군대는 부상병을 그대로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승리한 군대도 열악한 의료수준때문에 부상악화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아우스터리츠와 살라망카는 낙승이어서 피해가 적었을 뿐이고 다른 전투는 훨씬 피해가 컸다. 알부에라Albuera전투에서는 베레스포드Beresford군의 영국과 포르투갈보병 10명 중 4명 이상이 사상당했는데 참전한 12명 중 1명이 전사한 셈이다. 
워털루에서 패전한 프랑스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제국근위대 장교 40%가 피해를 입었는데 참전한 장교 중 7%가 전사했다. 더론d‘Erlon군단은 장교 788명 중 395명이 피해를 입었고 9명 중 1명이 전사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심각한 피해는 거의 없었고 전체기간 중 영국군이 입은 평균피해를 보면 전사율은 3.3%로 30명 중 1명 정도가 전사했다. 

이런 피해는 전투에 참전한 병사만 계산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적을 상대로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선호했는데, 1805년 당시, 대육군Grande Armee에 21만명, 이탈리아에 7만명, 볼로뉴에 3만명, 각지의 요새에 수천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정 중에는 바바리아군 2만 5천명과 다른 독일동맹군의 상당한 병력이 합류했다. 그는 약 40만명 중에서 6만 5천명만 아우스터리츠에 동원했다. 제국근위대 1만 2천명 중 7천명만 참전했고 나머지는 후방경비를 맡았다. 다른 병력도 다른 전투에 참전했지만 그래도 전체 병력 중 절반을 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군대도 다양한 연합군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폴란드는 핵심전력 중 하나였습니다.  

러시아원정에 40만명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6개국 이상의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병적에 올랐더라도 전투에 적합하지 않거나 병에 걸렸거나 주요 거점을 수비하거나 본대의 측면을 엄호하거나 보급로를 유지해야 했다. 이런 병력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용병력을 모조리 긁어모아 적에게 달려든다고 좋은 전략이 아니었고 나폴레옹은 이런 면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웰링턴도 병력누수의 문제가 있었고, 1812년 7월 당시 반도Peninsula에 6만명 이상이 있었는데도 살라망카에는 3만명만 동원했다. 영국군은 전세계에 25만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전세계에 분산배치된 병력은 물론이고, 반도에 배치된 병력 중에도 코로 직접 화연을 맡은 병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전역을 반도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실제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시대에 병사들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적이 아니라 질병과 영양실조였다. 캐리비안 제도에서 열병에 걸려 앓아 누운 영국수비대뿐만 아니라 유럽전역에 투입된 병사들이 그랬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을 보면 네만Nieman강을 건넌 12명 중 2명만 살아 돌아왔는데 1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악화로 죽고, 2명이 포로가 되고, 나머지 5명은 가혹한 원정에 쓰러졌다. 
러시아원정이 상대적으로 독특한 상황이었지만 다른 작전에서도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1806년 10월~1808년 10월 기간, 프랑스군병원은 42만명이 넘는 환자를 수용했고 가장 치열했던 1807년에는 환자 중 25%만이 부상이었고 나머지는 질병이었다. 열병이 가장 많았다. 
반도의 영국군도 시기에 상관없이 20~30% 이상이 환자였고, 1811년 1월~1814년 5월 기간 전사한 영국병사의 70% 정도가 질병과 건강악화가 원인이었다. 1793~1815년 기간에 죽은 24만명의 병력 중 2만7천명 정도만이 전장이나 부상악화로 죽었다. 

원정의 결정적인 순간은 전투였지만 모든 전투가 그렇지는 않았다. 아일라우Eylau와 아스페른 에슬링Aspern-Essling전투는 무승부였고 전술적 승리를 거뒀는데도 탈라베라Talavera와 부사코Busaco전투처럼 승자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대회전을 치루지 않고도 울름에서 항복했고 웰링턴은 강력한 방어요새를 구축하고 초토화작전을 벌여 마세나Massena의 포르투갈침공을 막아냈는데, 프랑스군은 질병과 영양실조로 1만 5천명을 잃고 퇴각했다. 

반면에 대부분 마지막 결정전에서 전쟁이 결정되었다. 마렝고Marengo, 아우스터리츠,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adt, 프리틀란트Friedland, 바그람Wagram, 라이프치히Leipzig, 워털루전투는 전략적 균형을 무너트렸고 외교협상장으로 상대를 끌어냈다. 물론 평화협상 후에 다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1800년 마렝고전투 후,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북부를 비웠지만 호엔린덴Hohenlinden에서 모로Moreau에게 패한 후에야 평화조약을 맺었다. 1809년 에크미흘Eckmiihl전투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주도권을 가져갔다가 아스페른-에슬링전투에서 전략적 교착상태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바그람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오스트리아황제는 평화협상에 나서 나폴레옹의 가혹한 요구조건을 수용했다. 이런 패턴은 다른 전쟁에서도 반복되었다. 마렝고, 울름, 예나-아우어슈테트전투에서 한쪽이 기세를 올렸지만 그렇다고 상대방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평화협상에 응했다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참패를 당할 때까지 계속 전투를 벌였다. 
마지막 결정타에 따라 평화협상의 조건이 달라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오래 지속했다. 1812년 보로디노전투 후, 알렉산드르Alexander는 태도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군의 진격으로 차르의 권위가 무너졌지만 패전보다 내정불안이 더 위험했고,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스페인에서는 패전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스페인국민은 프랑스군의 존재와 만행을 참지 못했고 끊임없이 항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