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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전쟁 (4부) - 포병운용

by uesgi2003 2022. 3. 26.

요즘 뉴스도 끊고, 데스크탑 PC가 고장나서 게임도 끊으니 전사정리 속도가 붙는군요.

 

 

포병은 고전하는 보병을 근접지원하면서 용맹을 발휘했다. 살라망카전투에서, 웰링턴은 다인리Dyneley에게 포 2문을 산정상으로 끌고 올라가 전부 전멸할 때까지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명령을 받으면 전멸이나 수훈, 둘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염려했던 프랑스군의 공격은 없었고 연합군에 공세에 나서면서 포 4문이 더 합류했다. 이제 700m 거리의 산에 있는 프랑스군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응사하는 프랑스군 포대를 잠재웠다. 
포르투갈여단이 프랑스군 진지를 공격해 산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밀려났다. 프랑스군이 반격에 나서자 다인리는 300m 거리에서 산탄을 퍼부어 프랑스군을 막았다. 본대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전하고 완전히 퇴각했다. 
다인리포대는 492발을 발사했고 1문당 평군 82발이었다. 

 


아디Adye대위의 Bombardier and Pocket Gunner는 포대지휘관이 위치선정하는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포는 가능한 한 엄폐가 잘되는 곳에 배치해야 한다. 고지대가 좋은데 뒤로 물려 놓으면 적은 포신만 간신히 볼 수 있다. 강둑과 개울도랑도 엄폐하기 좋은 위치다. 
포대는 발사하는 순간까지 적에게 노출되면 안된다. 포대는 약간 뒤로 물려 놓거나 기병 등으로 가려두어야 한다. 
포병지휘관이 적절한 위치를 선정하려면 포격 예상효과를 제대로 예측하고, 지원할 부대를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다른 병과에게 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지 않아야 한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부대의 엄호범위를 벗어나 배치해서는 안된다. 
적위치를 십자포격할 수 있게 하고... 적의 위치를 최대한 포격할 수 있도록 정면이 아니라 적위치의 사각이나 옆으로 향하게 배치해야 한다.‘

 


사각이나 옆에서 날아간 포탄 1발이 수십 명을 쓰러트렸다는 기록이 많다. 측면이나 후방에서 날아오는 포탄은 적대열을 동요시키기 마련이다. 
‘후방포격이 미치는 사기효과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정예부대도 달아나게 만든다. 바우첸Bautzen에서 네Ney의 기가 막힌 기동도 클라이스트Kleist의 포대 몇 문에 가로 막혔다. 측면에서 대열에 포탄을 퍼부어 결국에는 네가 방향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적의 측면에 배치된 경포 몇 문이면 대단한 전과를 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적의 측면을 노리는 동안 자신도 적의 포격이나 보병에 측면을 노출시키게 된다. 측면 포격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포대를 일렬대신에 불규칙하게 배치하는데 그럴 경우 포격범위가 그만큼 줄어든다. 70~100m 너비로 배치된 포대를 60~90도 각도로 회전시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아디는 포병과 지원병과간의 협력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막강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포대는 자체방어가 어려웠고 기병과 경보병이 측면에서 들이 닥치면, 보병처럼 밀집대형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워털루전투에서 머서Mercer의 포대는 기병의 정면공격을 자체 화력만으로 무산시켰는데, 브룬스위크Brunswick 보병대의 방진이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외는 늘 존재했다. 프리틀란트전투에서는 포대가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까지 한 경우가 있었다. 1군단포병지휘관 세나르몽Senarmont장군은 군단장의 승인을 받고 군단포대 30문을 한곳에 급히 모았다. 네의 군단이 물러나자, 포대를 옮겨 400m 떨어진 러시아군 대열을 포격했다. 
러시아군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200m까지 접근해 배치했다. 나폴레옹은 너무 과감한 기동에 놀라 참모를 보내 그 이유를 물었다. 세나르몽은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전부 설명하겠소’라고 대답했다. 
다시 100m 거리까지 좁혀 들어갔다. 러시아군 기병이 공격에 나섰다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러시아군 좌익 전체가 무질서하게 무너졌다. 

 


전해지는 그의 명성은 다소 과장되었고, 그 거리가 너무 짧았다. 세나르몽의 30문은 총 2,516발, 1문당 84발을 쏘았는데 그 중에 산탄은 368발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렇게 좁혀 들었다면 철탄보다는 산탄을 훨씬 많이 사용했어야 한다. 
그리고 세나르몽의 포병은 겨우 장교 1명과 병사 10명만 죽었고, 장교 3명과 병사 42명이 부상당한 것을 보면 소총사거리까지 들어가서 기병공격까지 받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 보병이 포격을 묵묵히 견뎠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나폴레옹이 포병전체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전과를 과장했을 수 있고 대육군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거리가 실제로는 어땠는지 상관없이, 세나르몽은 적의 보병과 기병을 노렸다. 당시 적 포대에 대응포격을 하지 말라는 원칙을 그대로 따랐다. 아디는 절대로 적의 포대를 목표로 포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적 부대가 엄폐해 있고 포대가 노출되어 있는 경우와  아군이 상대의 포격에 훨씬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경우에만 대응포격을 하라고 권했다. 포대는 우선순위에서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귀한 자원의 낭비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실전에서는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로이터Reuter대위는 리늬Ligny전투에서 프랑스포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고 살라망카전투에서는 영국군은 포대는 반대편 산정상의 프랑스포대를 잠재웠다. 반대로 1812년 11월 17일 후에브라Huebra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워털루에서 머서의 포대는 우구몽너머 우익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프랑스 경포대의 포격에 상당한 방해를 받았다. 
‘9파운드 포로 적의 4파운드 포를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웰링턴공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일부러 느리게 포격을 했다. 첫 발을 발사하자마자 훨씬 강력한 포탄 6발 이상이 날아들어서 무척 놀랐다. 그런 포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거리와 포탄소리를 들으니 우리보다 대구경이었다. 
실수를 깨닫고 즉시 포격을 멈췄더니 상대도 더 이상 대응하지 않았고 이전처럼 4파운드 포탄만 이전처럼 날아왔다. 적의 대응포격으로 병사 하나가 팔이 부서져서 비명을 질러댔다. 내가 그 부상을 자초했다고 자책했다.‘ 

집중포화가 쏟아지면 피해가 적지 않았다. 비토리아전투에서, 스와베이Swabey는 무릎부상을 입었고 포대는 1명 전사, 13명 부상, 말 26마리 사상의 피해를 입었다. 상당히 낮은 확률이지만 대응포격이 탄약마차를 맞춘다면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포병의 직접적인 피해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실제 피해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다.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에 따르면
‘포격은 보병화력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있다. 6파운드 포 8문의 포대는 보병 1개 대대의 공간의 1/3 정도만 차지하며 대대의 1/8 병력만 있으면 되는데 반대로 화력은 2개 보병대대를 넘어선다... 20~30문의 포대라면 그 일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
다른 자료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제대로 배치된 포대는 시간당 60~120명의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제대로 운용한 포대는 포격당 1과 1/2명의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전에서는 이 정도 피해가 나오지 않았다. 2일간 벌어진 바그람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의 617문은 96,000발을 발사했고 오스트리아군 피해의 2배가 넘는 숫자였다. 포 1문이 1시간 동안 60명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37,020명이 사상당해야 했다. 이 숫자는 오스트리아군이 바그람에서 입은 총 피해와 맞먹는 숫자였다. 
보로디노전투에서는, 프랑스군 587문이 91,000발을 발사했고, 러시아군은 44,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웰링턴의 포대는 프랑스군에 비해 약한 편이었고 전장을 지배한 적이 없는데, 비토리아전투에서 90문이 6,800발을 발사했고 프랑스군은 6,000~8,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워털루에서는 영국군 78문이 10,400발을 발사했다. 
프랑스포병 불라르Boulart소령은 바그람전투 후에 전장을 돌아다녔다. 사상최초로 그렇게 막강한 포병을 집결시켜 엄청난 포탄을 쏘았는데도, 소비한 탄약만큼의 효과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대부분의 포격은 원거리이거나 엄폐한 부대를 조준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현대전사학자는 12파운드의 중포라도 최대유효사거리는 900m를 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러시아포병지휘관 쿠타이소프Kutaisov장군은 1,000보가 최대유효사거리이고 적이 600보 이내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비메리오Vimeiro전투에서, 란트만Landmann대령은 공병장교로 사거리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었는데 영국군포대가 1,8km 거리의 프랑스기병에게 포격하는 것을 보았다. 살라망카전투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양쪽 산정상에 있던 포대가 서로 치열한 포격을 주고 받았는데 심지어 1.6km 떨어진 포대에서도 포격했다. 
윌리암 뮬러William Muller는 포격효과를 계산하면서 1.5km 거리에서 포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웨버Webber대위는 영국군 9파운드 도보포대가 1.2km 거리의 프랑스기병을 포격해서 물러나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이정도 원거리 포격은 가시거리 때문에 큰 효과가 없었다. 시력이 좋은 경우에도 1.5km 거리가 한계였고 이 거리를 넘으면 병기의 빛반사로 위치정도만 알 수 있었다. 1.1km 거리면 기병과 보병을 구분할 수 있었고 900m 거리에서는 분대를 구분할 수 있었다. 
평상시 대포시험에서 12파운드 포가 900m 거리에서는 26% 명중률을 보였지만 1.1km 거리에서는 15%로 크게 떨어졌다. 실전에서는 포격을 급하게 서두르는데다 적도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명중률이 훨씬 더 떨어졌다. 
거리가 좁혀지면 적의 전진압박에도 불구하고 명중률이 높아졌다. 평상시 시험에서는 500m 거리에서 100% 명중률을 보였는데 실전에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적이 접근하면 철탄을 산탄으로 바꿨다. 시험포격에서는 최대 700m까지 산탄이 효과가 있었는데 실전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고 전체 중 15~30%에 불과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비탄약으로 남겨두었다는 뜻이 된다. 
살라망카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이 270m 거리까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산탄을 쏘았는데 6파운드 경포여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중포는 450m 거리에서 쏘았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실전기록이 너무 부족하다. 
시험포격에서 550m 거리의 목표물에 20~25발의 소총탄이 맞았고 350m 거리에서는 40발 이상이 맞았다. 현대전문가는 실전의 온갖 변수를 감안하면 6파운드 포 6문 포대가 180m거리에서 일제포격으로 150명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이 분석도 너무 긍정적이다. 워털루에서 영국군 60문이 각각 10발만 산탄을 쏘았다면 프랑스군 15,000명에게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워털루전투에서 프랑스군 전체피해의 절반이다. 
웰링턴은 157문을 가지고 있었고 상당수는 9파운드 포였고 무려 10,000발을 쏘았다. 프리틀란트에서 세나르몽이 쏜 368발이 그렇게 효과적이었다면 러시아군 9,200명에게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세나르몽은 무려 2,000발을 쏘았다. 

포병은 마지막 포격이 가장 치명적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로 포를 버리지 말라는 훈련을 받는다. 그렇지만 포병도 일반 병사이고 방벽 안에 고립되지 않고서는 백병전을 벌이지 않았다. 보병이나 기병처럼 밀집대형전투에 능숙하지 않고 장교와 떨어져 있었고 동료의 움직임에 쉽게 동요되었다. 
적이 접근하면 포를 후방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프랑스와 영국군 모두 포병이 아닌 병사들이 포를 옮겼고 악명이 높았다. 
1813년 말, 딕슨Dickson대령은 ‘이들의 훈련과 태도가 너무 심각해서 절망적이다. 많은 장고가 태만하고 임무에 무감각하다’고 기록했다. 상대적으로 러시아군 포대 견인병은 믿음직스러웠지만 위기상황에서 말을 타고 달아나지 않도록 잘 감시해야 했다. 

 


‘적이 정말로 포를 차지하기 전까지 절대로 달아나지 않게 하라고 장교들에게 지시했다. 적이 산탄사거리 코 앞까지 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포병은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포가 분노의 울음 터트리게 해라! 영거리에서 마지막 산탄을 발사해라! 그 다음에 점령되어도 포손실보다 적에게 입힌 피해가 훨씬 크다.’

 

 


웰링턴은 워털루전투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프랑스기병이 돌격해와서 우리 포대 몇m 거리에서 대열을 정비했다. 실제로 우리 포대를 일부 장악했다. 우리 포병은 끝까지 남아있지 않았다. 달아나더라도 보병방진 안으로 피신했다가 프랑스기병을 몰아내면 다시 돌아가야 했는데 전장에서 완전히 달아났다. 
기병을 몰아내고 포대를 다시 탈환했는데도 포병이 없었다. 처음부터 예비병력을 남겨두지 않았다면 포대가 무용지물이 될 뻔 했다.‘
웰링턴이 과장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워털루에서 최대전과를 올린 포대는 머서와 같은 기마포병이었고 운반병도 기마포병소속이었다. 

포병이 적의 공격에 맞서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도 그만큼 낮은 편이었다.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군 13개 포대는 장교를 포함해서 1,869명 중에 253명이 피해를 입었고 다른 병과의 30%에 비해 훨씬 낮은 13.5%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은 워털루전투에서 포병장교 287명 중에 29명만 사상당해 10%였지만 프랑스군 전체는 무려 25%가 피해를 입었다. 탈라베라에서는 6.7%, 22%였고 부사코에서는 0.9%, 2.4%였고 후엔테스 데 오뇨로에서는 2.8%, 4.8%였고 알부에라에서는 12%, 40%였다. 아우스터리츠에서는 7명만 사상당했다. 

물론 포병이 다른 병과보다 안전하기 때문에 이런 수치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지휘관이 포대를 제대로 배치하고 효과적으로 포격해서 적의 접근을 막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승자의 수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이 250m 거리까지 좁혀들면 포를 후방으로 옮겼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폴레옹전쟁 당시의 사상자 원인을 분석한 기록이 아예 없다. 그 전후에는 부족하나마 기록이 남아있다. 먼저 1762년 7년전쟁 중 파리병원입원을 보면 부상병 68.8%가 소화기, 13.4%가 야포, 14.7%가 칼, 2.4%가 총검이었다. 
이 기록을 보면 야포피해가 낮고 총검과 칼이 과도하게 높은데, 포격의 심각한 피해를 감안하면 전사자 중 절반은 포격이 원인이었지만 전체 사상자에서는 20% 정도가 포격이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남북전쟁에서는 그 정도가 더 늘어나서 94%가 소화기였고 포격은 5.5%에 불과했다. 포격의 치명적인 효과를 감안하면 전체 사상자중 포격은 12~15% 정도로 봐야 한다. 7년전쟁에서는 보병사격전술이 드물었지만 남북전쟁에서는 보병사격전술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그 차이가 더 벌어졌다. 
니폴레옹전쟁은 포격 피해가 20~25%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추측에 불과하고 그것도 전투마다 달라진다. 그리고 공격측인지 수비측인지에 따라 또 달라진다. 

포대는 직접적인 피해말고도 병사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사기를 꺾고 부대의 대열을 무너트렸다. 조지 헨넬George Hennell은 비토리아전투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장교들이 말하듯이 대포는 피해보다 소리가 더 크다. 우리를 노린 포탄이 실제로는 별 피해가 없었다. 신병은 몇 cm 차이로 비켜가는 총알소리보다 머리 위로 3m 지나가는 9파운드 포탄에 기절초풍한다.’
모든 병사들은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포격을 받는 것만큼 끔찍한 것이 없다. 차라리 격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동의한다. 
주변의 동료가 포탄에 맞아 죽거나 후방으로 옮겨지는 동안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그대로 있어야 했다. 

 


‘대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포격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모욕을 당하고도 화도 못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나절 동안 그렇게 지냈다.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우리는 완전히 포격에 노출되었는데, 주로 앞부대가 목표였다. 그런데 너무 높게 조준해서 우리까지 완전히 넘어가거나 우리에게 떨어졌다...
윌드만Wildman대위가 상황을 보고 대령에게 달려가 우측으로 조금만 옮기면 포격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케리슨Kerrison대령이 즉시 그 조언을 따랐다. 
위치를 새로 잡자마자 포탄이 날아와 옆의 동료 가슴을 관통했고 뒤에 있던 하사의 무릎을 맞춘 후에 그 뒤의 말다리까지 부러트렸다.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를 후방으로 옮길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피흘리며 죽었다. 부상당한 말도 머리를 쏘아 고통을 끝냈다. 윌드만이 우리를 그대로 두었다면 좋았을텐데.‘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포탄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날아들어도 머리를 숙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아일라우전투에서 르픽Lepic대령은 병사들에게 ‘머리 들어! 총탄이지 똥이 아니라고!’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비메이로전투에서 란트만대령은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9보병연대 우측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총탄이 사단 중앙에 있던 병사의 옷깃을 스쳤다. 그 병사는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움츠렸다. 한 두 발 앞에 있던 장교가 엄격한 목소리로 매우 꾸짖었다. 머리를 숙이다니? 누가 머리를 숙이는 거야? 다시 한 번만 더 머리를 숙이기만 하면 내가... 바로 그 순간에 포탄이 장교 머리 위를 지나갔다.
장교는 저절로 머리를 숙였다. 아무리 용감한 장교라도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몹시 화를 내며 차라리 머리가 날아갔다면 했을 것이다. 어쨌든 병사들의 노골적인 비웃음을 샀다.‘

이 일화가 보여주듯이, 많은 병사들이 허리를 숙이거나 고개를 움츠렸고 심지어 땅을 튀겨 날아오는 포탄을 피하기도 했다. 
정찰병은 대열을 갖추지 않았고 위험이 닥치면 엄폐해도 비난받지 않았기 때문에 포격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안전했다. 기병은 가장 큰 목표물이었고 보병의 머리 위를 넘어 날아온 포탄을 맞았지만 속도로 그 위험을 상쇄시켰고 기병이 접근하면 적포병은 포대를 거둬 후방으로 피신했다. 
보병의 횡렬이나 방진대형이 일렬보다 좋은 목표물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노출되는 각도가 적어서 일렬보다 어려운 목표물이었다. 반대로 일단 포탄이 제대로 지면에 떨어지면 횡렬 그것도 열이 깊을수록 큰 피해를 입혔다. 
횡렬이나 방진은 근처의 누가 총탄이나 포탄에 쓰러졌는 지를 알 수 있는 반면에 일렬은 거의 알지 못했다. 

포병은 매우 다양한 역할을 했다. 위기에 몰린 보병을 근접지원하고, 적의 마을과 요새를 포격하고, 예비병력으로 전환해서 구멍난 전선을 메우고, 귀찮은 적 포대를 잠재우고, 기병의 화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그렇지만 가장 큰 역할은 적전력을 계속 축내고 적의 사기와 대열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잔인하고 치명적인 포격으로 적을 약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