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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전쟁 (3부) - 포병편제

by uesgi2003 2022. 3. 21.

 

나폴레옹시대 군대의 3개 병과 중 포병이 가장 규모가 작았고 기병과 보병연대와 연계도 거의 없었다. 포병장교는 포병장교 집안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기술과 수학지식이 상당해야 했기 때문에 젊은 장교가 기피하는 병과였다. 그래도 프랑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하고 어린 포병장교가 결국에는 유럽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포수는 절대적인 자원이었지만 숫자가 일정하지 않았다. 반도전쟁에서 영국군은 포병전력 부족으로 고생했다. 살라망카에서 52,000명 병력 중 54문과 포병 1,186명이 전부로 병력 1,000명 당 1문이었다. 
프랑스군은 바그람과 워털루에서 1,000명당 3.3문으로, 전체병력의 11%, 12%가 포병으로 살라망카 연합군 포병비율보다 5배가 많았다. 
나폴레옹은 계속 포병을 강화시키고 상당한 성공을 거뒀지만 병력규모가 급증해서 원하는 수준을 맞출 수 없었다. 포병출신인 마르몽Marmont원수는 1,000명당 4문이 가장 이상적이며 원정이 계속되면 병력손실 때문에 저절로 비율이 올라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작 살라망카에서 마몽은 1,000명당 2문도 안되는 포병을 보유했다. 
포병의 비율보다는 전체적인 전략전술 안에서의 포병운용이 더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마르몽원수는 연합군에게 항복하며 나폴레옹전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프랑스 7월 혁명 후 이탈리아로 피신한 후에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공성전에서만 사용되는 중포는 너무 무거워서 전투 중이나 퇴각 시에 옮길 수 없었다. 공성포대는 후방 멀리 두었다가 적의 요새를 공격해야 할 때에 운반했다. 야포는 기마포병과 도보포병이 있었는데 기마포병은 경포위주로 포병전원이 말을 타서 기동력이 좋았다. 
원래는 기병이 보병방어진을 돌파할 수 없기 때문에 화력으로 지원하는 목적이었다. 점차 병과에 상관없이 전위와 후위에 배치했다가 전투시에는 기동예비부대로 사용했다. 기마포병은 자신을 기병대로 생각하며 흉갑기병이나 경기병과 비슷한 복장을 했고 도보포병을 느려터진 굼벵이 취급했다. 
포병의 절대다수는 도보포병이었다. 전장으로 묵묵히 포를 밀고 갔다가 향방에 따라 다시 밀고 나오는 고된 병과였다. 기록이 상당히 부족한데, 이런 기록을 남겼다. 
‘도보포병은 임무와 작업에 있어서 인내심이 많고 장비와 방열에 더 조심한다. 그리고 포격효과는 기마포병보다 더 확실하다.’

 


포병은 포대(분대, 중대, 여단)로 편제되고 보통 6~8문을 보유했고 포대당 1~2문의 곡사포를 배치했다. 곡사포는 단거리용으로 안에 화약을 채우고 지연신관을 연결한 포탄을 고각도로 발사해서 파편으로 사상시켰다. 
나머지는 대부분 전장식 장포신 대포로 눈에 보이는 목표물에 직격탄을 쏘았다. 테니스공보다 약간 큰 7~10cm 직경의 철탄을 주로 사용했다. 거의 직선으로 90m를 날아가 굳은 땅에 떨어지면 튕기거나 훑고 지나가기 때문에 무척 위험한 포탄이었다. 

 

워털루전투에서 프랑스기병이 가슴에 6파운드 철탄을 맞고 이런 유품을 남겼습니다.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직격탄이 땅에 튕겨서 보병대열을 뚫고 지나가는 끔찍한 장면이 나옵니다.  

대포는 포탄무게로 구분하는데 3~4파운드(1.5kg 내외)포는 도태되는 중이었고 6, 8, 9파운드(4kg)포가 주력이 되었다. 일반 야포로는 12파운드포가 가장 컸다. 탄이 무거울수록 정확도와 사거리가 늘어났고 살상력도 커졌다. 
원거리로 쏜 포탄은 맞는 사람에게만 피해를 주었지만, 근거리에서 쏜 포탄은 궤적 주변의 병사나 말에게도 피해를 주었다. 중포는 여러 명에게 피해를 주어서 경포보다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약 60년 전의 야포이지만 4, 8, 12 파운드 포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근거리에서는 얇은 금속용기 안에 소총탄을 가득채운 산탄Canister를 사용했다. 발사되면 확산되어 날아가며 적의 머리를 맞췄다. 좀 더 무겁고 먼거리에 사용하는 산탄을 포도Grape탄이라고 하는데 이 포탄은 해상전에서 사용했고 충전총탄도 더 굵었다. 

 

산탄과 포도탄입니다.

영국군은 2가지 비밀병기를 가지고 있었다. 콩그리브 로켓Congreve Rockets과 유산탄Shrapnel Shells이었다. 윌리엄 콩그리브가 발명한 로켓은 가볍고 장약이 내장되어 있어서 야포보다 운반하고 사용하기 편했고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서 적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너무 부정확하고 심지어 한바퀴 돈 다음에 아군에게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서 대량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유산탄은 그렇게 기발하지는 않지만 전장에서 훨씬 실용적이었다. 유산탄은 안에 화약과 소총탄이 섞여 있었다. 웰링턴은 유산탄의 위력을 보고 한심스럽다고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는 포탄 안의 기병총탄을 소총탄으로 바꾸라고 지시했고 위력이 크게 늘어서 원거리에서도 사용했다. 

 


워털루에서 Whinyates휘니아테스 기마포대 유산탄 236발과 구형포탄 309발을 발사했다. 영국은 전쟁내내 포탄의 비밀을 유지했다. 신형 포탄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어도 프랑스군보다 가볍고 적은 야포를 사용할 수 있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구형포탄을 7~80% 사용했는데 영국군은 뒤로 갈수록 유산탄 사용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나머지 포탄 중 10% 정도는 산탄으로 포병이 근거리접전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전장 좌측의 우구몽 농원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결정적인 패인이 됩니다. 

이곳을 미리 장악했거나 병력을 집중시켜 완전히 장악했다면 승패는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포대는 보통 장교 6명과 병사 100~150으로 구성되어 가장 작은 전술단위였다. 다른 병과와 달리 하급장교가 포대를 책임졌고 승진이 너무 느려서 포병대위는 일반보병 중령보다 나이가 많고 참전경험이 풍부했다. 
포병지휘관은 상당한 독립작전권을 가졌던 반면에 보병사단에 배치되어 사단장과 포병상관의 지휘를 동시에 받았기 때문에 두 지휘관의 명령이 상충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보병사단이나 군 지휘관은 포병을 잘 몰랐기 때문에, 포병지휘관은 보병지휘관의 간섭에 화를 내곤 했다. 
1813년 6월, 스와베이Swabey중위는 사령부 참모들 앞에서 프랑스군 후위에게 기마포대를 투입했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전투내내 참모들이 옆에 서 있었지만 내가 위치를 정했고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웰링턴경은 경사로로 가라는 전령을 보냈는데, 정말 그러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상태였고 그냥 내 결정을 따랐다.’

상급장교는 간섭하기 일쑤였고 포대를 위험지점, 심지어 포격을 쏟아지는 곳으로 보냈다. 로디Lodi에서 나폴레옹은 30문의 야포를 직접 지시하고 조준해서 실력을 발휘했고 작은 하사관le petit caporal(키가 작다는 뜻이 아니라 병사들이 사랑하는)라는 별명을 얻었다. 야포배치는 포병하사가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지휘관은 나폴레옹과 같은 전문지식이과 경험이 없었고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1812년 3월, 그래함Graham장군은 프랑스군이 사거리 밖으로 퇴각했는데도 포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영국군만이 아니었다. 프리드리히Frederick대왕은 오래 전에 다른 병과의 상급장교가 포수를 압박해 너무 이르게 포격을 하는 일이 많다고 인정했다. 

 


영국군은 반도전쟁에서 포병을 분산배치시켜서 예비포대가 거의 없었다. 반대로 프랑스군은 군단의 보병사단마다 1개 이상의 야포포대를, 기병여단에는 1개 기마포대를 배치했고 12파운드 포대의 예비포대를 남겨두었다. 군전체로는 근위대 중에서 포대만 따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다. 
보병사단에 배치된 야포포대는 계속 보병을 근접지원했지만 군단, 예비와 근위대 야포는 모두 집결시켜 적 대열에 대대적인 포격을 퍼붓기도 했다. 1809년부터, 포병의 비율이 늘었고 전투가 다 치열해졌기 때문에 이런 대포대Grand batteries가 대세가 되었다. 
러시아군은 포병집중을 특히 선호했다. 

포병의 환경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계속된 포격으로 귀가 먹었고 흑색화약의 연기에 목에 매였고 화염과 열기는 끔찍했다. 바그람전투에서 근위대 포수가 군복을 벗고 포격을 했을 정도였다. 
계속 탄약을 운반했고, 발사 후에 밀려난 포를 다시 밀어 올렸고, 말을 진정시켰고, 장비에 불이 붙었는지 확인했고, 적의 포탄을 피해야 했다. 포대에는 필요인원보다 많은 병사를 배치해서 부상자나 도망병을 바로 대체했다. 
야포는 약 10m 간격으로 배치했는데 대포대에서는 간격을 줄였지만 영화나 그림처럼 바로 붙지는 않았다. 포격속도도 분당 최대 2~3발을 넘지 않았다. 그 이상 발사하면 포가 너무 뜨거워져서 사용할 수 없고 포병이 탈진하고 포대주변의 짙은 연기로 조준할 수 없었다. 
시간당 20~30발을 계속 포격하다가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속도를 높였다. 나폴레옹은 포 1문당 150발이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일부는 그 이상을 넘기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밀집해 있지 않았습니다. 러시아포병입니다. 

 


대포대는 엄청난 화력으로 적의 대열을 두들겨서 반격할 의지 자체를 꺾어놓는다. 포대의 위치와 지형에 따라 최전선뿐만 아니라 지원과 예비부대까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아군의 포대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병사들은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나폴레옹의 기준으로는 한참 못 미치는 40문의 포대만으로도 1시간 동안 500m의 전선에 1,000발의 포탄을 퍼부을 수 있었고 위기 시에는 더 많은 포탄을 발사했다. 
웰링턴은 워털루에서 병력을 경사면 반대편에 숨겨서 최악의 포격을 모면했지만 대기하던 병사들이 받은 스트레스는 기록으로 많이 남아있다. 

대포대는 보통 원거리에서 공격을 지원했지만 근거리에서 보병, 아주 드물게는 기병을 지원했다. 보병은 근거리에서 지원하는 포격에 사기가 크게 올랐다. 
18세기에는 보병연대마다 경포 2문을 배치해서 근접지원을 했지만 운반과 보호하느라 오히려 보병대의 발목을 잡았다. 나폴레옹은 1802~1803년에 경포배치를 취소했다가 1809~1810년 프랑스보병의 전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연대경포를 배치하려고 했다. 1813년, 러시아원정 재앙이후에 군재건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무산되었다.

 

50년 후의 미국남북전쟁 게티스버그전투 영화인데 대포대 그리고 보병전열전이 제대로 표현되었습니다. 

중간에 약간의 지루한 부분이 있는데 그래도 화면과 소리키워서 즐겨보시길. 뒷 부분에서 엄청난 스케일이 제대로 터집니다. 

복잡한 배경이 있지만 이런 영화 다시는 못 만듭니다. 특히 미국에서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