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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우크라이나 역사 - 코사크 수장국 (1부)

by uesgi2003 2022. 5. 28.

이제 현대 우크라이나와 직결된 역사배경이 나옵니다. 

코사크는 카자크 기타 등등으로 부르는데 저는 코사크로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번 연재는 우크라이나 역사 그리고 우크라이나 학자의 자료를 정리하기 때문에 훨씬 굵직한 러시아 역사와 사건은 아주 가볍게 넘어갑니다.

러시아쪽에서도 코사크족이 정착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 때문에 코사크 = 우크라이나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크라이나어를 모르기 때문에 발음에 혼선을 있을 수 있습니다. 

 

 

1385년, 리투아니아의 대공 조갈리아Jogalia는 폴란드여왕과 조약을 맺고 폴란드왕위에 오르는 대신에 가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였다. 1387년, 연합군은 헝가리군을 몰아내고 갈리키아를 폴란드에 합병했다.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이 탄생했고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합병했지만 벨라루스는 리투아니아대공국의 영토로 남아 현대의 우크라이나국경선이 그어졌다. 
리투아니아대공국의 루스 지도층은 영향력을 크게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1413년, 폴란드왕 조갈리아가 리투아니아대공인 조카와 조약을 맺고 폴란드귀족에게 무조건적인 토지소유를 인정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가문 100개가 군사지원을 대가로 땅을 받았는데 리투아니아에서는 가톨릭가문만 그 혜택을 받았고 동방정교가문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고위공직에서도 밀려났다. 

 


1430년, 리투아니아대공이 죽자 심각한 내전이 벌어졌고 경쟁자들은 지역의 보야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임대공은 종교문제를 해결한 후에 천천히 보야르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1470년, 폴란드왕이자 리투아니아대공인 카지미에시 4세는 키이우공국 자체를 없앴고 10년 후에 키이우귀족은 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다. 모든 관련자가 처형되거나 망명했기 때문에 키이우 루스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리고 루스 법, 언어와 문화도 점차 폴란드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16세기 유럽은 왕권과 중앙정부집중, 정치와 사회관습의 법제화가 대세였고 귀족민주주의체제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도 동쪽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시켰다. 모스크바대공국Grand Duchy of Muscovy이 신흥세력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1476년, 모스크바공국 이반Ivan 3세는 차르Tsar를 자칭하며 킵차크칸국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루스영토 회복을 내세우며 노브고로드, 티베르와 프슈코프Pskov를 탈환하고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지역까지 노렸다. 모스크바 차르국Tsardom of Muscovy과 리투아니아대공국은 키이우 루스영지를 두고 오랜 충돌을 벌였다. 
모스크바가 공세에 나서 16세기 초에 스몰렌스크와 체르니히브의 점유권을 인정하면서 모스크바가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일부를 차지했다. 

 

1500년대 모스크바공국의 기병입니다. 

1558년, 이반뇌제Ivan the Terrible가 현재의 라트비아Latvia와 에스토니아Estonia 일부인 리보니아Livonia를 공격해 리보니아전쟁(1558~1583)이 벌어졌고 스웨덴, 덴마크,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참전했다. 

 

말년에는 미친 노인으로 변해 며느리를 때려 유산시키고, 항의하는 아들도 때려 죽입니다. 

 


1563년, 모스크바군이 대공국 국경선을 넘어 폴라츠크를 점령하고 현재의 벨라루스 도시들을 공격했다. 1568년 12월, 폴란드왕과 리투아니아대공을 겸하던 지그문트 아우구스트Sigismund Augustus는 루블린Lublin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의회를 각각 소집하고 연합의 단결을 노렸지만 리투아니아 대표단은 폴란드귀족의 요구에 반발해 무산되었다. 
폴란드의회는 대공국 영토를 하나씩 폴란드왕국에 합병했다. 모스크바의 공격과 폴란드의 협박을 동시에 막을 수 없었던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루블린으로 돌아와 폴란드 대표단의 요구에 합의했다. 그렇지만 1569년, 우크라이나-벨라루스-폴란드를 구분하던 민족경계선인 포돌라키아 자치주Podlachia palatinate가 폴란드에게 넘어갔다. 볼히니아, 키이우와 포돌리아도 그 뒤를 따랐다. 


리투아니아귀족은 어쩔 방법이 없었다. 이제 폴란드-리투아니아연합은 한 의회에서 귀족이 한 명의 왕만을 선출하기로 했다. 폴란드귀족은 리투아니아대공국에서 공직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실제로는 폴란드왕국의 확장이었다. 

(중략, 폴란드-리투아니아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리투아니아대공국의 지도층이 몰락하고 모스크바차르국과 분쟁을 벌이는 동안, 우크라이나 루스 지도층은 자유로운 남동쪽 평원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하며 타타르족을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대거 이주합니다.)

14세기 중반, 킵차크칸국이 크림, 카잔Kazan, 아스트라칸Astrakhan칸국으로 분열했고 다시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1449년, 크림칸국은 하지 데블레트 기라이Haji Devlet Giray가 크림칸국을 세웠고 18세기까지 이어졌지만 1478년에 오스만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리스를 점령한 후에 이스탄불로 바꾸고 크림반도의 남쪽 해안까지 진출했다. 기라이는 크림평원과 우크라이나 남부를 통치하며 노가이칸국Noghay Horde과 함께 16세기 가장 강력한 유목민족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이 지역의 안전과 교역, 특히 노예에 큰 관심이 있었다. 이슬람율법은 이교도만 노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노예수요가 많았다. 노가이와 크림타타르는 노예를 찾아 지중해평원을 넘어 심지어 모스크바차르국 남부까지 약탈했다. 
노예교역은 상당한 이득을 남겼고 흉년에는 대대적인 노예사냥을 벌였다. 

 


타타르족은 드네스트르 동쪽 -> 포돌리아 서부 -> 갈리키아, 부Buh강 남부 -> 포돌리아 서부와 볼히니아 -> 갈리키아로 통하는 경로로 약탈에 나섰다. 두 번째 경로는 하르키우Kharkiv부근의 슬로보다 우크라이나Sloboda Ukraine와 모스크바차르국 남부로도 이어졌다. 
16세기 중반에 크림칸국을 방문한 리투아니아학자는 ‘셀 수 없이 많은 포로가 배에 실렸다’고 기록했다. 16~17세기, 크림반도 노예시장에 끌려온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인은 150만~300만명으로 추산된다. 나이가 어릴수록 가격이 높았다. 
대부분 오스만함선의 노꾼이나 노동자로 인생을 마쳤고 여성은 가정부로 일했다. 일부 재능있는 사람은 오스만행정부에 고용되었지만 대부분 내시였다. 여성 일부는 술탄의 하렘이나 고관의 첩이 되었다. 
록소라나Roxolana라는 우크라이나 여성은 가장 강력한 오스만술탄인 장엄왕 술레이만Suleiman the Magnificent의 아내가 되었고 아들은 셀림Selim 2세로 권좌에 올랐다. 록살라는 우크라이나와 터키의 수많은 드라마와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타타르족의 약탈은 우크라이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노예를 탈출해 자유를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왔다. 그리고 타타르족에 맞서 싸우고 심지어 오스만제국을 공격해 노예를 구출한 영웅이야기도 있었다. 바로 코사크족Cossack이었다. 
코사크족에 대한 정의는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최초의 코사크는 유목민이었고 경비, 자유민, 약탈자라는 투르크어가 기원이다. 초기 코사크는 통제에서 벗어나 평원에서 작은 무리를 지어 살았다. 수렵을 하다가 무방비로 지나는 교역상인을 약탈했다. 
1492년, 콜럼버스Columbus가 산 살바도르San Salvador에 상륙하고 이사베야Isabella여왕이 스페인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던 해에 코사크는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크림칸국은 리투아니아 알렉산드르Alexander대공에게 항의를 했다. 드네프르 하류에서 리투아니아무리가 타타르선박을 약탈했다는 항의였다. 
대공은 리투아니아 국민이 그런 식의 강도짓을 했다고 믿지 않았다. 국경관리에게 코사크족을 조사해 관련자를 처형하고 약탈물을 칸의 대리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코사크족의 약탈은 수백년 후에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 명령은 효과가 없었다. 이듬해 크림칸은 체르카시Cherkasy 코사크가 모스크바차르국 대사를 공격했다고 비난했다. 1499년, 코사크는 드네프르강에 있는 타타르족의 오차키우Ochakiv 요새 부근을 약탈했다. 
칸은 코사크족이 드네프르에서 흑해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오차키우 부근의 강물을 쇠사슬로 봉쇄하려고 했다. 리투아니아 국경관리는 코사크의 약탈을 막는 동시에 타타르족의 국경침입에 코사크를 동원했다. 
1553년, 대공은 비슈네베츠키Vyshnevetsky공을 보내 코사크족의 원정을 막는 작은 요새를 지었는데, 칸은 영토침입으로 간주하고 요새를 공격했다. 비슈네베츠키공은 타타르족과 오스만에 대항한 첫 번째 코사크 수장Hetman이 되었다. 

가부장적 권위, 노예, 세금, 노역, 처벌, 빚 등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키이우 남쪽에 몰려들었고 비옥한 땅과 사냥감에 이끌린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코사크족은 세력을 넓혔고 오스만제국에서 모스크바나 폴란드로 귀중품을 옮기는 상인을 약탈해, 보잘 것 없는 오두막은 값비싼 실크, 보석, 털가죽과 향신료로 가득 찼다고 한다. 폴란드보다 실크가 더 쌌고 후추가 소금보다 더 쌀 정도였다. 
16세기 말에는 농부까지 코사크족에게 가담했고 코사크의 정치, 인종, 종교정체성이 사라졌다. 우크라이나 국경부근에 땅을 얻은 귀족이나 지주는 농부를 이주시키고 면세기간을 주었는데 그 기간이 만료되자 많은 농부가 중과세를 피해 더 위험한 평원지대로 이동했다. 

 


1559년, 콘스티안틴 오스프로즈키Kostiantyn Ostrozky가 키이우자치구를 맡고 방대한 드네르트 우크라이나지역의 총독이 되었다. 그는 코사크족을 비정규군으로 편입해 통제하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스크바차르국과의 리보이나전쟁으로 병력이 필요했고 1570년대에는 코사크부대가 많이 편성되었는데 한 부대가 500명이 되기도 했다. 
코사크족을 정규군으로 편입하면서 새로운 코사크시대가 열렸다. 처음으로 등록코사크Registered Cossack(그림 참조)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병역등록된 코사크는 세금과 지역관리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폴란드는 제한된 숫자만 편입해 급여를 지급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제외된 코사크는 문제거리였다. 

 


1590년, 연방의회는 코사크 10,000명을 모병해 우크라이나국경을 방어하고 제외된 코사크가 타타르족을 공격하지 않게 보호하려고 했지만 1591년, 첫 번째 코사크봉기가 터졌다. 크림칸국, 몰다비아Moldavia, 흑해연안을 약탈하던 코사크는 칼끝을 내부로 돌렸다.
당시 코사크의 대부라고 불리던 볼히니아 야누즈Janusz부자는 막강한 권력으로 닥치는 대로 재산을 늘리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다. 코사크족장의 땅까지 빼앗자, 그는 왕에게 호소하는 대신에 코사크족을 모아 아들의 성을 공격했다. 
야누즈와 볼히니아의 다른 귀족이 병력을 모아 코사크반란군을 진압했는데, 코사크의 대부가 코사크군을 모아 코사크를 진압한 황당한 상황이었다. 
드네프르강 너머의 섬에는 시치Sich(사진 참조)라는 나무요새를 짓고 사는 농부출신의 자포로자 Zaporozhian 코사크가 있었고, 야누즈 코사크군을 지휘한 세베린 날리바이코Severyn Nalyvaiko은 전투가 끝난 후에 그 지역 코사크를 통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590년대 초반 흉년이 이어졌고 수많은 농부가 터전을 버리고 코사크에 가담했다. 그리고 더 이상 명령을 따를 수 없었던 날리바이코가 훨씬 큰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지역군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어서 중앙군을 불러들였고 1596년, 폴란드군이 드네프리 강변의 코사크진지를 포위했다. 
코사크군은 날리바이코를 넘기고 사면을 받았다. 

 


16세기 말이 되자, 코사크족은 연방과 오스만제국을 벗어나 중앙과 서유럽 강대국의 관심사가 되었다. 1593년, 신성로마제국황제 루돌프Rudolf 2세의 사절이 자포로자 코사크를 방문해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 지원을 요청했다. 
3년 후, 교황의 사절이 비슷한 요청을 했다. 코사크에 대한 소식은 파리와 런던까지 퍼졌고 모스크바에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모스크바는 이반뇌제 후에 동란시대Time of Troubles라고 부르는 심각한 내분 중이었다.  
나중에 로마노프Romanov왕조가 들어서면서 위기가 끝났는데 그 이전까지 많은 후보자가 경쟁하며 외세를 불러들였다. 

코사크족은 가짜 드리트리False Dmitrii 1세와 2세를 지지했다. 그리고 1610년에는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족장을 따라 10,000명이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3년 후에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가 차르가 되었는데도 코사크는 계속 개입했다.

 


1618년, 20,000명이 폴란드군에 합류해 모스크바를 포위했고 폴란드에게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냈다. 그렇지만 코사크족은 폴란드왕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연합은 모스크바차르국과 전쟁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지원을 원했지만 코사크가 계속 오스만국경을 넘어 약탈을 벌였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1606년, 코사크족은 드네프르강을 내려가 흑해 서쪽해안의 오스만요새 바르나Varna를 기습했다. 1614년, 남서쪽해안의 트라브존Trabzon을 약탈했고 이듬해에는 황금곶Golden Horn의 이스탄불항에 들어가 외곽을 약탈했다. 
750년 전, 이곳에 왔던 바이킹은 콘스탄티노플리스와의 교역도 원했지만 코사크족은 오직 약탈만 했다. 그동안 당했던 노예신세를 단단히 되갚았다. 1616년, 크림해안의 노예거래거점인 카파Kaffa를 공격하고 포로를 모두 풀어주었다. 

 


술탄뿐만 아니라 외국대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기독교국가는 이제 오스만을 상대할 강력한 동맹으로 생각했는데, 이스탄불에 있던 프랑스대사는 루이 13세에게 코사크를 상대하느라 오스만군이 고생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당시 16세인 오스만Osman 2세는 육지에서 폴란드군을, 바다에서 코사크족을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 1620년, 오스만군은 현재의 몰도바Moldova의 프루트Prut강으로 진격했다. 코사크족을 막지 않은 연방 응징이 명분이었지만 연방의 세력확장을 막으려는 목적이 더 컸다. 
1620년, 폴란드군 10,000명과 오스만군 20,000명이 현재의 몰도바와 루마니아국경의 투토라Tutora에서 격돌했다. 
20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연방군이 참패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10,000명의 연방군이 전멸하지만 이후 전투에서 제대로 보복합니다.

압도적인 병력에도 지지부지하자, 술탄은 지휘관을 비난하고 군개혁을 시도하다가 암살당합니다. 

연방은 이제 정규군이 없었고 공포에 질렸다. 오스만군이 폴란드로 진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듬해, 술탄이 120,000명을 직접 이끌고 연합국으로 향했다. 연방은 우크라이나 코사크 20,000명의 도움을 받아 40,000명으로 여기에 맞섰다. 
오스만군이 포위한 드네스트르 강변의 호틴Khotyn요새를 두고 한 달 동안 전투를 벌였지만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폴란드는 강력한 오스만이 국경을 넘지 못하게 막았고 불리한 조건없이 평화조약을 맺어서 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코사크족은 연방의 핵심전력이 되었다. 코사크족장 페트로 코나셰비치 사하이다치니Petro Konashevych-Sahaidachny의 동상이 키이우에 세워지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다. 코사크지휘관은 합당한 대우를 요구했다. 

 


1625년과 163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1632년, 의회에 참석해서 왕을 선출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다시 1637년과 38년 연거푸 반란을 시도했고 다시 중앙군의 공격을 받았다. 동방정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폴란드가 동방정교교회를 수용하면서 교회의 지지를 잃었다. 
코사크족은 전략을 바꿔 연방체제를 수용하는 대신에 자치권을 요구했다. 1638년, 코사크족은 자주권리와 특권이 있는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다. 폴란드는 대신에 인구유입을 제한하고 등록코사크를 기존의 절반인 6,000명까지 낮췄다. 코사크총사령관과 대령 6명도 모두 폴란드귀족 출신이었다. 
그리고 코사크족의 오스만제국 약탈을 막기 위해 코다크Kodak요새를 다시 직었는데 프랑스 엔지니어가 1639년에 첫 번째 우크라이나지도를 만들었다. 

 

술탄의 협박에 비웃는 답장을 쓰는 코사크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리아 레프닌의 그림으로, 크게 출력해서 집에 걸어두려고 했는데 아내의 강력한 반대로 그냥 포기했습니다. 

 

코사크의 역사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정리해두었는데 여기에서는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그냥 코사크의 약탈에 대해서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래 전에 정리해서 용어와 정의가 다를 수 있습니다. 

 

 

https://blog.daum.net/uesgi2003/77?category=10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