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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우크라이나 역사 - 우크라이나 독립

by uesgi2003 2022. 7. 10.

지금 우크라이나전쟁의 도화선이 된 크림반도와 돈바스지역은 1954년 후루시초프가 우크라이나로 넘겨줄 때 그리고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때에 이미 심각한 분쟁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반대하고 소련에 남도록 설득했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당황스러울 정도의 태도변화입니다.

 

 

1943년 11월 6일,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장군(사진 왼쪽)이 키이우에 들어섰다. 그는 1941년에 키이우를 떠난 후부터 탈환을 간절히 꿈꿨다. 1942년 봄, 독일군이 모스크바진격을 중단하자,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반격을 주도했다. 
1942년 5월 12일, 소련군이 하르키우를 넘어 우크라이나 왼쪽강변의 평원지역까지 탈환했는데도 독일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고 그제서야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소련군은 포위망에 갇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에게 작전중단을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8일간의 전투에서 소련군은 28만명을 잃었다. 스탈린은 20만명의 포로가 사실인지를 묻고는 그에게 책임을 돌렸는데, 다행히도 다른 정치국위원의 증언으로 목숨을 건졌다. 

 

 

2차대전 최고의 명장 만슈타인이 소련군을 일부러 끌어들이고 협공하는 전략으로 소련군 전차 1,800대 이상을 격파했습니다. 

 

https://youtu.be/UHaSQU-4wss

벨라루스가 배경인 영화 컴앤씨를 보시면 당시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그는 우크라이나 게릴라전을 주도했고 키이우탈환 후에는 우크라이나소련사회주의공화국을 복구하고 새로운 영토를 합병했다. 서부 우크라이나를 수복하자 독일군에 협력하는 우크라이나저항군Ukrainian Insurgent Army과의 동족상잔이 벌어졌고 소련 게릴라부대는 폴란드인에게 대대적으로 보복하기 시작했다. 
갈리키아와 볼히니아에서 폴란드인에게 죽은 우크라이나인은 15,000~30,000명인 반면에 죽은 폴란드인은 60,000~90,000명으로 훨씬 많았다. 우크라이나저항군이 니콜라이 바투틴Nikolai Vatutin을 매복해 죽였다(사진 참조).
우크라이나인은 2차대전 내내 양쪽으로 갈려 싸웠는데 절대다수가 소련군으로 참전했다. 모스크바는 700만명의 우크라이나인을 징집했고 총 병력의 15~20%를 차지했다. 1941년 전쟁초기에 가족으로 돌아갔던 병사들은 다시 소련군에 징집되었다. 

 


1944년 7월 27일, 소련군이 리비우Lviv를 탈환했고 후르시쵸프는 폴란드망명정부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 서둘러 도시로 들어갔다. 이미 2일 전에, 스탈린은 소련이 만든 폴란드국가해방위원회Polis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를 협박해 리비우를 차지했고 폴란드망명정부는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1944년 9월, 폴란드정부와 소련우크라이나정부가 새 국경선에 합의하고 국민을 서로 이주시켰다. 폴란드인을 서쪽으로 보내고 우크라이나인을 동쪽으로 옮겨 아예 민족경계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1945년 여름, 미국과 영국의 동의를 받아 독일의 동쪽 영토를 폴란드에게 주고 그 지역의 독일인 750만명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반대로 폴란드인을 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미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저항군 사이에 전투와 인종청소가 벌어졌기 때문에 많은 폴란드인이 기꺼이 이주하기를 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78만명의 폴란드인이 송환되거나 추방되었다.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에서도 비슷한 숫자가 폴란드에 새로 합병된 옛 독일영토로 이주했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우크라이나는 UN에 가입하며 국가로 인정받았다. 우크라이나는 종전과 함께 영토가 15% 늘어나서 수혜국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피해국 중 하나였다. 전국민의 15%인 700만명이 죽었고 700개 도시와 28,000개 마을이 폐허가 되어 1000만명은 집을 잃었다. 그리고 농공업장비 80%와 국부 40%를 상실했다. 
모스크바는 이전과 같이 중공업부터 재건에 착수했다. 우크라이나는 냉전을 지탱할 무기, 식량과 병사의 생산기지가 되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농업생산량이 전쟁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스탈린은 미래의 서기장 브레즈네프Brezhnev를 자포리지아Zaporishia공업지대로 보내 전력과 철강생산을 재건했다. 놀라운 속도로 재건되어 1947년 3월 첫번째 전기가 생산되었고 9월에는 강철이 쏟아져 나왔다. 브레즈네프는 성과를 인정받아 승진했다.

 

브레즈네프는 18년동안 소련의 독재자였습니다.  

국민은 여전히 폐허속에서 굶주리고 고통받았다. 1946~47년에 다시 기록적인 기아로 1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브레즈네프는 이런 참상에 대해 입을 다물었지만 흐루시초프는 참상뿐만 아니라 무능한 지도층에 대해서도 기록에 남겼다. 
스탈린은 최악의 가뭄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의 곡식 수백만 톤을 동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흐루시초프는 농부에게도 도시노동자처럼 식량배급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라는 모함까지 받았다. 
그는 스탈린의 안중에서 멀어졌고 1930년대 대기아를 몰고 왔던 라자르 카가노비치Lazar Kaganovich가 돌아왔고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을 탄압했다. 
모스크바의 사상전쟁은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서부 우크라이나, 갈리키아와 볼히니아는 소련에 통합되지 않고 군사점령 상황이 이어졌다. 1959년 가을, 독일로 피신했던 반소련지도자가 암살당했다. 

스탈린은 1949년 12월에 흐루시초프를 불러들여 모스크바 당조직을 맡겼다. 스탈린은 70세 생일에 흐루시초프와 마오저뚱Mao Zedong을 양옆에 앉혔다.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죽으면서 소련역사상 가장 끔찍한 시대가 끝났다. 
스탈린이 죽자, 흐루시초프는 다른 정적 3명을 숙청했고 1958년에야 당서기장에 올랐다. 소련최대의 당원이 있는 우크라이나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인사들을 중용하며 보상했다. 갑자기 모스크바 내에서 우크라이나의 목소리가 커졌고 러시아 다음의 국가가 되었다.

 


1953년 가을,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를 방문했을 때에, 타타르족을 추방하고 새로 이주시킨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 고통받는 것을 보고 바로 키이우로 가서 우크라이나와의 합병을 논의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제기반과 농업기술로 크림반도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1954년 2월,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1,200만명의 인구 중, 러시아인이 71% 그리고 우크라이나인이 22%였다. 그리고 북크림운하North Crimean Canal를 완공하면서 6,000km의 농지가 개발되었다. 
흐루시초프의 개혁정책은 원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집단농장의 품종과 재배방법을 지시했는데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더 많은 휴식시간을 주었고 생산량감소로 이어졌다. 
1958~1962년, 개인소유의 가축이 2200만 마리에서 1000만 마리로 급감했고 도시의 물가는 급상승했다. 도시근로자는 1950년대를, 농부는 1960년대를 최고의 시기로 꼽았다. 

 

우크라이나 영토는 거의 전부, 러시아의 확장과 함께 확대되었습니다.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측근은 경제난 처벌이 두려워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를 축출했다. 새 지도부는 1930년대의 중앙집중식 경제로 회귀하고 농산물에 높은 가격을 매겨 경제난을 돌파할 자금줄로 이용했다. 

 

(중략)

1982년 11월 15일, 우크라이나국민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붉은광장에서는 모스크바시민 수만명이 모여,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18년간 소련을 이끈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의 명복을 빌었다. 
브레즈네프는 안정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체시기였고 우크라이나에서는 1966~1985년 20년동안 경제성장률이 8.4%에서 3.5%로 줄었다. 농업생산성은 3.2%에서 0.5%성장으로 급락했다. 심지어 이 숫자는 공식발표였을 뿐이고 실제성장률은 훨씬 나빴다. 
소련은 기름과 가스수출에 의존했고, 시베리아와 중앙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스관을 연결하기 바빴다. 우크라이나도 가스를 생산했지만 완전히 바닥나서 가스수입국이 되었다. 

 


브레즈네프가 우크라이나출신인 볼로디미르 슈체르비츠키Volodymyr Shcherbytsky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KGB 유리 안드로포프Yurii Andropov가 반격에 나섰고 슈체르비츠키는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숨을 죽였다. 
그는 안드로포프와 후계자보다 오래 살아남았지만 이미 우크라이나 정치인의 전성시대가 끝난 상태였다.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권력을 잡았다. 어머니가 우크라이나인이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이 섞여 살았던 북 코카서스에서 우크라이나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그렇지만 브레즈네프의 우크라이나잔재는 심각한 위협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개혁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브레즈네프가 송충이 눈썹으로 인상적이었다면 고르바초프는 대머리 반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85회 생일에서 푸틴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의 개혁과 개방은 소련해체의 계기가 됩니다. 

지난 30년 동안 계속되던 우크라이나 인재영입대신에 러시아로 방향을 돌렸는데, 그 중에는 미래의 숙적인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사진 참조)이 있었다. 1986년 12월, 고르바초프는 연방국 출신이 그 나라 서기장이 된다는, 스탈린 사후부터 지켜온 불문률을 깨고 카자흐스탄에 러시아출신을 임명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처음으로 민족주의 시위가 벌어졌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도 균열이 생겼다. 우크라이나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주도했지만 러시아 기술과 관리인력이 투입되었다. 
체르노빌 4번째 반응로가 폭발했는데, 우크라이나는 사후처리에 아무런 힘이 없었고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국민에게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다. 5월 1일, 바람이 바뀌면서 방사능구름이 수도로 몰려들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제노동절International Workers’ Day행진을 취소하자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고르바초프는 위협으로 몰아세웠다. 방사능수치가 올라가는데도, 키이우시민은 체르노빌사고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대외포장에 동원되었다. 겨우 행진시간을 4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였다. 체르노빌발전소는 히로시마 원폭의 500배에 해당하는 방사능을 뿜어냈고 300만명 이상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크라이나국민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며 재난을 수습해야 하는지 불만을 터트리며 모스크바를 비난했다. 10년 전에는 원자력을 환영했던 우크라이나 작가동맹 Ukrainian Writers’ Union도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체르노빌참사는 소련차원이 아니라 공산당에 대해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고 1960년대 세대가 중심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 공산당기관과 민주주의운동이 동시에 모스크바에 대항하는 기이한 상황이 일어났다. 

(중략)

1990년 10월 2일 오전, 수십명의 학생이 키이우 10월혁명광장October Revolution Square(독립광장)에 모여 들었고 단식투쟁에 돌입하면서 수상의 사임과 우크라이나의 연방탈퇴를 요구했다. 정부는 경찰을 동원했지만 키이우시의회는 시위를 허용했고 150명으로 늘어났다. 
정부가 5만명을 동원해 관제시위를 벌이자 모든 대학이 동맹파업에 동참했고 의회로 몰려들었다. 1990년 10월의 시위는 나중에 1차 마이단Maidan(광장이라는 뜻. 사진 참조)이 되었고 2004년, 2013년과 2014년에 2, 3차 마이단으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초에 무력을 사용하고도 리투라이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막지 못했고 연방존립에 대한 총투표를 실시했다. 러시아의 옐친 등과 협상을 벌여 더 느슨한 형태의 연방에 합의했지만 우크라이나가 거부했다. 
미국의 부시대통령은 발트 3국의 독립은 인정하되 우크라이나 등은 연방에 남기를 바랐다. 연방해체 후에 내전 그리고 핵전쟁을 우려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회에서 자멸적인 민족주의를 포기하라고 연설했고 공산당이 환호성을 올렸다. 

 


1991년 8월 19일, 강경파가 쿠데타를 시도했다. 고르바초프가 크림반도에서 휴가를 보낼 때에 쿠데타 주동자들이 나타나 계엄령을 요구했다. 그는 알아서 하라며 서명을 거부했고 KGB, 국방부와 내무부장관이 소련전체의 비상상태를 선포했다.
우크라이나정부는 비상조치를 거부했고, 러시아대통령 옐친은 지지자를 거리로 불러내 군인을 몰아냈다(사진 참조). 72시간도 안되어서 쿠데타가 실패했고 고르바초프는 완전히 밀려났다. 옐친은 권력을 장악하고 러시아의 연방주도를 시도했다.
이제 우크라이나가 행동에 나섰다. 의회는 독립찬성 346표, 기권 5표, 반대 2표로 독립을 선포했다. 1991년 12월 1일, 독립과 첫번째 대통령 국민투표가 진행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지지가 70%를 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옐친은 그렇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회가 독립을 가결하자 러시아가 국경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준비했고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옐친은 부통령을 보내 위협했지만 말뿐인 위협은 통하지 않았다. 투표자 중 90% 이상이 독립을 지지했다. 러시아인이 66%인 크림반도에서도 50% 중반의 지지가 나왔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다른 공화국의 독립으로 이어졌고 옐친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와 함께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을 만들면서 소련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후의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자료가 있기 때문에 더 정리하지 않고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