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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1차 체첸전쟁

by uesgi2003 2022. 7. 31.

요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전쟁에 관심이 많죠. 

그동안 이런 저런 배경으로 많은 내전, 국지전과 총력전이 벌어졌었는데, 국제사회의 개입은 물론이고 언론과 우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에도 튀르키예(터키)가 시리아의 쿠르드 독립지도자를 드론으로 암살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체첸전쟁을 시작으로, 쿠르드 저항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정리할까 합니다. 세르비아의 인종청소에 대해서는 도저히 가슴아파서 못하겠군요.

 

1차 체첸전쟁은 론 수달터Ron Soodalter의 자료를 인용정리했습니다. 역사전문 저술가입니다. 

 

 

리뷰를 싫어해서 오타나 어색한 문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세계에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보였다. 그렇지만 체첸공화국Chechnya(지도에서 붉은 선 부분)이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독립전쟁처럼,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며 결연한 경우는 없다. 
1994-1996년, 러시아는 1차 체첸전쟁을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로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생존과 자결권을 위한 싸움이었다. 체첸공화국은 압도적인 병력, 무기와 제공권을 상대로 2년 동안 피비린내나는 게릴라전을 벌였고 이치케리아Ichkeria체첸공화국을 세웠다. 
공화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체첸공화국은 동과 서로 카스피Caspia해에서 흑해까지 1,100km 뻗어 있는 볼쇼이캅카스산맥Greater Caucasus의 북쪽에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국경역할은 한다. 남쪽으로는 조지아Georgia, 북쪽에는 러시아, 동과 서로는 다게스탄Dgestan과 인구시Ingushetia공화국이 있다. 
국민 대부분이 체첸인이고 나머지는 러시아, 인구시와 다른 민족이다. 체첸인은 이슬람, 러시아인은 동방정교다. 부족중심의 전통을 버리지 않고 있다. 

1994년, 러시아의 침공은 새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1722년, 표트르대제는 캅카스를 침공하면서 처음으로 러시아와 체첸이 전쟁을 벌였다. 60년 후, 체첸은 예카테리나여제에게 저항했다가 실패했다. 
1870년대, 수십년 동안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합병되었다가 소련해체 후에 독립을 시도했다. 체첸은 러시아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었다. 

 

가장 오른쪽이 전통의상의 체첸전사. 

 


소련이 체첸과 인구시를 체첸-인구시 자결소련사회주의공화국Checheno-Ingush Autonomous Soviet Socialist Republic으로 통합하고 8년 후인 1944년, 스탈린은 체첸과 인구시가 나치에 협력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실제로는 체첸과 인구시의 수만명이 적군Red Army에 합류해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두 나라의 원주민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2월 23일, 렌틸Lentil작전이 시작되었다. 50만명에 가까운 체첸인과 9만명의 인구시인이 수송열차를 타고 3,200km 동쪽으로 강제이주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기차는 눈에 시체를 버릴 때에만 정차했다. 
강제이주 13년 만에 30%가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추산하는데, 체첸공화국은 50%가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탈린이 죽고 5년 후인 1957년, 소련은 귀향을 허용했다. 
유럽의회는 뒤늦게 강제이주를 인종청소 행위라고 정의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연합Russian Federation이 설립되었지만 경제와 군사력 모두 훨씬 악화되었다. 신임대통령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은 러시아연방의 민족주의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애를 썼지만 우크라이나, 조지아, 벨라루스, 몰도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칸,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이나가 독립을 선포했다. 옐친은 나머지도 그 뒤를 따를까 걱정했다. 
체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9월 6일, 전소련공군장군 조하르 두다예프Dzhokhar Dudayev(사진 참조)와 민병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러시아에 충성하는 정부를 무너트렸다. 체첸공화국의 독립과 자유선거를 선포했다. 
두다예프가 대통령으로 압승을 거뒀고 전통식 투르크이름인 이치케이아 체첸공화국의 출발을 알렸다. 옐친은 국가위기상황을 선포하고 수도 그로즈니Grozny에 연대규모의 비정규군을 보냈다. 러시아군은 압도적인 체첸군에 밀려 그대로 돌아왔다. 

 


1992년 3월, 옐친은 20개 공화국에 연합조약Treaty of Federation을 제시했고 18개 공화국이 서명했다. 체첸은 독립국가를 천명하면서 조약을 거부했고 새 국기와 국가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91~1994년에 체첸내부에 분쟁이 생겨서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조폭이 세력을 확장했고 체첸인과 러시아인 사이에 그리고 두다예프진영과 반대진영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수만명의 이민족이 탈출했고 북부의 반대진영은 무장을 갖추고 연합했다. 두다예프는 자신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연거푸 일어나자 의회를 해산시키고 1인독재 체재를 갖췄다. 


반대진영은 임시협의회를 만들어서 정부를 새로 구성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싶었다. 옐친이 바라던 바였다. 1994년 8월, 반대진영이 두다예프에게 무력투쟁을 벌이자, 옐친은 반대진영에게 무기,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표식이 없는 러시아항공기를 동원해 그로즈니를 폭격했다. 
러시아의 지원에 기세가 오른 반대진영은 그로즈니를 2번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두다예프의 국가보위군은 수십명의 러시아병사, 민병대와 간첩을 생포하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세웠다.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개입하면서 11월 말에 최후통첩을 하며 모든 분쟁당사자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두다예프가 거절하자 러시아는 그로즈니와 다른 군사목표물을 맹폭격했다. 
12월 6일, 두다예프와 러시아국방장관 파벨 그라체프Pavel Grachev가 상호협상을 밝혔지만 5일 후에 4만명의 러시아군이 전차, 전투기, 헬리콥터 건십을 몰고 국경을 넘었다. 

 


옐친은 체첸에서 헌법질서를 확립하고 러시아의 지역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불법무장세력을 해산시킨다는 명문을 내세웠다. 파벨은 러시아공정연대 1개만으로도 아주 간단하게 두다예프를 제압할 수 있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격전으로 12월 20일 이전에 끝낼 수 있다고 했다. 
그라체프의 말은 완전히 빗나갔다. 러시아가 침공하자 완전히 분열했던 세력들이 힘을 합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이후 21개월 동안 소모전이 벌어져서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고 엄청난 민간인 피해를 발생했다. 


1994년 12월 11일, 옐친은 그로즈니를 3개 방향에서 공격했다. 러시아지상군 부사령관, 민족부문고문과 국방부 부장관 등이 사임하며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군이 곧바로 체첸의 보잘것없는 공군을 무력화시켰지만, 옐친의 희망찬 기대와 달리 두다예프는 항복하지 않았다. 러시아군 자체의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러시아보안전문가 마크 갈레오티Mark Galeotti는 전쟁기계가 녹슬고 레버가 부서졌고 연료가 다 떨어진 상태라고 표현했다. 
처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대부분 신병이었던 러시아군의 사기가 낮았다. 그렇지 않아도 부대정원에 비해 부족한 병력인데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심지어 무기를 일부러 부수는 일도 벌어졌다. 800명 이상의 병사와 장교가 참전을 거부했고 83명이 군사재판을 받았다. 
나머지는 모두 불명예제대했고 레프 로흘린Lev Rokhlin중장은 나중에 러시아연합영웅 칭호와 훈장을 거부했다. 

 


체첸전사 기동부대가 적의 전진을 방해하자, 러시아군은 무차별 융단폭격과 포격으로 민간인을 죽였다. 12월 29일,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외곽의 공항을 점령하고 새해전야의 공격을 시작했고, 체첸군은 벙커를 만들고 거점을 보강했다. 이후 일주일 동안 러시아군은 포격을 퍼부어 수천명의 민간인을 죽였는데 황당하게도 대부분 러시아계였다. 
이슬람역사학자 브라이언 글린 윌리암스Bryan Glyn Williams에 따르면 2차대전 드레스덴Dresden파괴 후에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의 포격이었다. 이 정도의 폭격과 포격은 2022년 우크라이나전쟁에서 재현되었다. 
수천명의 병력, 항공폭격과 포격이 그로즈니에 집중되었다. 러시아군 지휘관은 치열한 시가전을 예상하지 못했는데, 체첸은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도심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영국 언론인 아나톨 리벤Anatol Lieven은 러시아군이 중무장한 체체군을 만나면 그대로 물러나는 장면을 여러 번 직전 목격했다고 보도했다. 새해전야공격에서만 러시아군 1천명 이상이 죽었고 이후 2일 동안의 전투에서 수백명의 피해를 더 입었다. 

 


1995년 1월 18일,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폐허가 된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승리를 선언했다. 그렇지만 그로즈니의 다른 지역에서는 3월 초까지 전투가 이어졌다가 체첸군이 물러났다. 5주간의 전투에서 시민 3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고 그 중에 5천명은 아이들이었다. 
러시아국민은 전쟁에 대해 불만이 쌓였고 소련정치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창피스럽고 피비린내나는 도박이라고 표현했다. 독일수상 헬무트 콜Hlmut Kohl은 정말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체첸은 인질억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선택했다. 6월 14일, 바사예프Basayev와 200명의 중무장한 체첸 분리주의자가 트럭 14대를 타고 러시아로 들어와 부됸노브스크Budyonnovsk로 향했다. 공공건물 몇 채를 점령하고 인질 1,500명(어린이 150명)을 데리고 가장 큰 병원으로 이동했다. 저항하는 시민은 그대로 사살했다. 
바사예프는 체첸전쟁의 휴전과 평화협상을 요구했다. 러시아특수부대가 3일 동안 병원을 급습했지만 실패했고 인질피해가 늘어갔다. 

 


6월 18일, 바사예프는 러시아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Viktor Chernomyrdin과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협상하며 채첸내 포격과 전투작전 중지, 평화협상 대표단구성, 자신과 일행의 안전한 복귀를 보장하면 인질을 석방하겠다고 제안했다. 
총리가 수용했고 그는 국가영웅이 되어 귀국했다. 놀랍게도 러시아 민간인 130명 이상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는데도 휴전이 성사되었다. 이 인질사건으로 체첸저항군은 테러로 방향을 전환했고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러시아와 체첸은 테러전쟁을 벌였다. 이제 정규전 양상을 벗어났고 언제나 그랬듯이 민간인 피해가 가장 컸다. 저녁 뉴스에서 참혹한 사건이 연달아 보도되었다. 텔레비전은 체첸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눈길을 끌어 모았고 그 덕분에 결국에는 민간인에 대한 적대행위를 멈추게 만들 수 있었다. 
뉴스는 러시아 가정 안으로 체첸공화국의 참상을 실어 날랐고 옐친의 지지율은 급락하며 전쟁반대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전쟁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더 이상 승자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았다. 
체첸도시와 마을이 폐허로 변하고 무차별적인 시민학살 때문에 두다예프 반대진영도 태도를 바꾸며 대러시아 투쟁에 동참했다. 

옐친은 체첸에서 이대로 물러나면 연합의 다른 국가들도 독립에 나설 것으로 염려했다. 그는 공세를 이어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96년 3월 6일, 체첸저항군 2천명이 러시아가 장악한 그로즈니를 3일 동안 공격해서 탄약과 군수품을 노획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러시아군을 공격해 병력과 장비에 큰 피해를 입혔다. 
4월 21일, 러시아 유도탄이 두다예프를 죽였지만 체첸저항군은 임시대통령을 바로 선출하고 저항을 이어갔다. 5월 28일, 정치위기에 몰린 옐친은 휴전에 이어 승리를 주장했지만 체첸저항군은 전투를 멈추지 않았다. 
8월 6일, 옐친의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기 3일전에 체첸저항군 1,500명이 그로즈니는 기습했다. 8대 1의 병력차이에도 불구하고, 체첸저항군은 러시아군 1천명을 죽이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으며 수도를 탈환했다. 

8월 31일, 결국 양측이 만나 12월 31일까지 그로즈니에서 양쪽 모두 물러나고 러시아군이 체첸공화국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계속 협상을 벌이다가 1997년 5월 12일 크레믈린에서 옐친과 체첸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Aslan Mashadov가 체첸공화국 자결권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러시아전문가 갈레오티는 눈부신 게릴라전과 무자비한 테러주의로 러시아의 전쟁기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지휘관이 부족기반의 병력을 상당히 느슨한 형태로 자유롭게 지휘하며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1994년 12월~1996년 8월까지의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체첸저항군이 죽었는 지를 알 수 없다. 러시아는 15,000명을 죽였다고 주장하지만, 체첸전문가인 토니 우드Tonny Wood는 4천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러시아군은 2년 동안 4천명 미만의 병력을 잃었다고 밝혔는데 러시아군 자체도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이었다. 양측의 추산에 따르면, 5만~10민명이 전투와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는 25만명에 이른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종전 후, 체첸공화국은 다시 내분에 돌입했다. 범죄, 부패, 실업이 만연했고 지역군벌은 권력투쟁을 벌였고 정치인과 종교지도자가 분열해 대통령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1999년 가을, 바사예프와 알 하타브al-Khattab가 이끄는 체첸, 아랍, 투르크와 다게스탄Dagestan 이슬람민병대가 이슬람 분리독립주의자를 지원하기 위해 다게스탄공화국을 침범했다. 그리고 성전을 주장하며 이교도지역의 인종청소를 선포했다. 
비슷한 시기에 누군가가 러시아 3개 도시의 아파트에 폭약을 터트려 3백명이 죽고 1천명 이상을 부상당했다.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은 뚜렷한 증거없이 체첸극단주의자에게 책임을 돌렸다. 
체첸을 재침공할 구실과 푸틴이 대통령이 될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주장도 있다. 

1999년, 러시아는 다게스탄침공과 아파트 테러사건을 이유로, 체첸공화국을 다시 침공했고 이번에는 잘 훈련된 병사들과 우수한 무기로 이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다. 푸틴은 그로즈니를 무차별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유엔은 그로즈니를 지구상에서 가장 파괴된 도시로 표현할 정도로 폐허가 되었고 5천명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푸틴은 군대를 극찬하며 임무를 완수했다고 말했다. 
체첸출신의 람잔 카디로프Ramzan Kadyrov대통령(사진 참조)이 푸틴의 지시와 러시아 법에 따라 체첸공화국을 통치하고 있다. 그는 인권탄압으로 악명이 높고 수백명의 개인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022년 2월, 카디로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침공을 지원하기 위해 경호부대를 파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