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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팬저 에이스 - 러시아 침공개시(1)

by uesgi2003 2023. 2. 12.

그동안 전사이야기가 너무 없어서 한동안 연재할 수 있는 자료를 정했습니다. 

 

 

 

개전초기 3호전차 일반전차병으로 시작해서 중전차 중대장으로 2차대전 지옥을 살아남은 리하르트 프라이허 폰 로젠의 회고록입니다. 

 

초반 내용이 괜찮아서 시작했지만 중간에 언제라도 중단될 수 있으니까 미리 양해부탁드립니다. 

전차학교 입학, 프랑스와 폴란드 전선은 건너뛰고 동부전선으로 곧바로 넘어가겠습니다. 

 

 

로젠은 2전차군 24전차군단(지도 가장 아래. 당시에는 24군 군단, 4전차사단의 일원으로 투입되었습니다. 

 

1941년 6월 11일, 1900시에 바르텔라거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이동하여 밤새도록 그곳에 짐을 싣고 새벽 0300시까지 이동했다. 기차는 새벽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고, 폴란드를 가로질러 1900시에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바르샤바의 건물과 집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2년간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다음날 아침 0300시에 우리는 독일-소련 국경에서 70km 떨어진 지들체Siedlce에 도착했다. 먼지가 많은 폴란드 고속도로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완전히 새로운 광경을 보았다. 모두 초가지붕만 있는 목조주택이었다. 벽돌건물은 전혀 없었고 우물도 아주 특이했습니다. 러시아의 예고편이었다. 특히 노란색 별표를 붙인 유대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숲은 하나의 거대한 군수창고로 변했습니다. 사단전체가 배치되었다. 

연대는 워힌Wohyn 지역에 배치되었고, 우리 1중대는 숲 한가운데에 숙소를 잡았다. 유일한 나쁜 점은 인근 로키트노 늪에서 번식하는 모기가 많다는 것이었다. 전차를 가까운 나무로 옮겨 공중 정찰에 완벽하게 위장하고 오일교환, 무기청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휘발유 트레일러를 사용하여 새 급유 시스템을 장착했다. 
2개의 200리터 배럴을 싣고 뒤에서 견인할 수 있는 이륜 트레일러가 하나씩 있었고, 그 안에는 이동 중에 급유할 수 있는 펌프가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전차 안에서 쉽게 분리시킬 수 있는데 별 효과가 없어서 나중에 폐기되었다. 

 


1941년 6월 16일, 실탄을 장전했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각 전차에 약 4,000발의 MG탄을 싣고 70발의 고폭탄과 60발의 철갑탄, 10발의 특수탄을 채웠다. 같은 날 콜레라 예방접종을 받았다. 
6월 18일 저녁이 되자 사단장이 우리를 소집해 며칠 내로 작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우리가 선봉 중대가 되어 늪지대가 있는 울창한 숲을 지나 국경 반대편 60km 지점에 있는 코브린 마을로 최대한 빨리 이동하라는 명령이었다. 

국경 소련군의 전력은 확실하지 않았다. 우리 주력 기갑부대는 저녁에는 소련 낙하산부대에 보초를 두 배로 늘렸다. 에버바흐대령이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나라로 간다.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다!’
6월 21일 아침, 우리는 모든 개인 소지품을 전차에 실었는데, 공간이 제한되어 있어 쉽지 않았다.모든 전차에는 포탑 뒤에 '배낭'이라고 불리는 금속용기가 있었는데, 모든 승무원이 작은 여행용 가방과 외투, 몇 가지 개인 물품을 넣을 수 있었다. 

 

4호와 3호 전차 모두 포탑 뒤에 수납공간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일부 모델러들은 여기에 철사줄로 물통을 연결해 고증을 재현했습니다. 


전차 뒤쪽에는 담요, 접지 시트 등을 넣을 수 있는 큰 나무 트렁크가 있었고 '브로셔'를 넣을 공간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브로셔 트렁크'라고도 불렀는데 거의 모든 전차에 이 트렁크가 있었다. '배낭'에 철사를 감아 야전 물통을 매달았다.
특별 배급을 받았는데, 쌀이나 야채 통조림 3통, 작은 빵 5자루, 쇼카콜라 3상자, 그리고 한 사람당 소형 난로 1개였다. 명령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정오가 되자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워힌을 지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로 향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당시 국경의 일부를 형성했던 부그Bug강에서 약 3km 떨어진 마을 북쪽의 숲이었다. 해질 무렵 어둠 속에서 운전하느라 고생했고 가끔씩 기술적인 문제로 잠시 멈췄다. 
그 동안 나는 포수석에서 잠을 잤다. 좌석이 부드럽지도 편안하지도 않았고 키가 너무 커서 똑바로 앉아서 잠을 잘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익숙해졌다. 전차는 지정된 장소로 모여 연료를 주입하고, 포신과 MG 총신에서 기름기를 완전히 빼고, 모든 차량에 위장했다.
1941년 6월 22일 작전이 시작된다. 나는 가볍게 졸았고, 긴장과 흥분으로 인해 0300시가 되자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정확히 0315시에 첫 포탄이 발사되었다. 우리 포병 포대는 러시아 진지를 향해 사방에서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다. 
우리 근처에는 10.5cm 포대가 있었는데 잠시 후 아침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사방이 불타고 있었다. 소련군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자 포격이 다소 잦아들었다가 다시 강해지더니 거의 완전히 멈췄다. 멀리서 기관총소리가 들렸다.

0400시가 되자 중대장이 '총통의 오늘 명령'을 낭독했다. 
이제 여러분에게도 중요한 시험의 시간이 도래했다. 볼셰비즘으로부터 유럽의 문화를 구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다. 
부그 강에 있던 보병과 전투공병이 큰 손실 없이 교두보를 구축했고, 임시다리를 세우는 작업 중이었다. 고속도로에 올라타자마자 먼지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안경이 없었다면 앞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기갑사단의 선봉중대였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우선권을 가졌다. 도중에 도로가 정체되어 몇 차례 정차했다. 

1500시간이 지날 무렵 부그강을 가로지르는 임시 다리에 도착했다. 이곳의 강폭은 약 150m였는데 다리를 지나는 병력의 무게때문에 다리가 손상되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1630시경에 마침내 다리를 건넜고 이제 우리는 러시아 땅에 도착했다. 코냑 한 잔을 마시고 계속 나아갔다. 곧 우리는 보병의 호위를 받는 첫 포로들을 보았다. 그들은 좋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진흙이 위장효과를 높여주었다. 러시아 쪽은 심한 습지여서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도강할 수 있는 스노클 등을 장착한 전차도 있었는데 독일의 편집증적인 오버엔지니어링이었습니다. 


제1중대는 이제 7.5cm 주포 1문과 MG 2문을 갖춘 4호 전차 3대를 증원받았다. 이제 가능한 한 적진 깊숙이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첫날 밤 해질 무렵 우리는 2100시에 출발하여 미지의 세계로 향했다. 울타리 뒤에서 처음으로 죽은 러시아인들을 보았다. 그 지역에 방어선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이상했다. 
어둠 속에서 전차장이 운전병에게 방향을 지시했다. 잠시 쉬는 동안 전차에서 내리면 고운 모래에 발목까지 빠지기도 했다. 우리는 좁은 숲길을 거의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우리는 전투없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롤반Brest-Litovsk Rollbahn에 도착했다. 독일의 아우토반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개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전력은 우리의 흔한 오해와 달리 연합군 모두에게 열세였습니다. 가장 많이 투입되었던 1, 2호 전차는 아예 제껴놓고, 주력이었던 3호 전차도 3.7cm 단포신 주포로 연합군 전차의 장갑에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급하게 투입된 4호전차도 처음에는 보병지원용 단포신 7.5cm 주포였기 때문에 대전차전에서 크게 불리했습니다. 

그래서 대공포인 88mm가 대전차전 구세주였는데 독일 6기간사단 전체가 주저 앉은 소련군 중전차 1대때문에 하루동안 꼼짝도 못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레닌그라드전투에서는 소련군 중전차 5대가 독일 8전차사단 전차 40대 이상을 격파하고 사단을 밀어낸 일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평범한 포장 고속도로였다. 우리는 이제 프리펫 습지로 알려진 거대한 늪지 사이에 도착했고, 도로 좌우로 벗어나면 늪에 가라 앉았다. 섬뜩할 정도로 고요했다. 길가에는 건설 기계들이 서 있었고, 러시아는 서쪽 국경으로 향하는 롤반을 개발하느라 바빴다. 
현지 주민들은 우리에게 무척 호의적이었고 버터와 계란을 전차에 가져다주었다. 마을 전체가 나와서 길 좌우로 서서 우리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고, 가장 외딴 마을에서도 서둘러 올라왔다. 0900시가 되자 멀리 코브린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고, 한 시간 반 만에 우리는 코브린의 첫 번째 집에 도착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일대는 독일군을 공산주의 해방자로 대환영했고 일부는 독일군에 병력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슬라브민족을 무척 혐오해서 약탈과 엄청난 착취로 일관했고 결국에는 대대적인 저항에 시달렸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우크라이나의 자치정부를 허용하고 동등한 협력관계를 이어갔다면 지금의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겁니다. 


그날 밤 중대는 60km를 전진했는데, 이는 초반의 심한 악천후와 중단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안타깝게도 제3전차사단이 우리보다 먼저 코브린에 도착해 이미 롤반을 따라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이 사단은 부그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 두 개를 미리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와는 달리 부교건설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제 3 전차사단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 우울해졌다. 

우리는 넓은 정원에 전차를 세우고 잘 위장했다. 휘발유가 곧 보급된다고 했다. 풍년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대형창고를 약탈하기 위해 2호 전차를 보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을 산책하러 나갔는데, 권총을 두고 왔다. 불쾌감에 마을 중심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길거리 가판대를 부수고 있었다. 나는 담배와 비누로 가득 찬 자루를 들고 와서 공평하게 나눠 가졌다.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약탈품을 가져왔다.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급유명령이 떨어졌다. 중대전체가 급유를 마치고 약탈품을 나눌 수 있는 장소를 근처에서 찾았다. 버터 한 상자와 커다란 네덜란드 치즈도 발견했는데, 빵이 없어서 버터를 바른 치즈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다시 마을을 가로질러 롤반으로 향했다. 앞에서 3전차사단이 작전 중이었고 러시아전차부대가 마을을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나는 헛간에서 짚을 가져와 훔친 침낭을 펴고 엔진 근처에서 따뜻하게 잤다. 세탁과 커피는 사치였고 잊어버려야 했다. 기름과 땀이 섞인 먼지로 우리는 돼지처럼 보였다. 군복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닌 지저분한 회색으로 변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불에 탄 러시아전차가 연이어 나타났고, 일부는 포탄 구멍이 컸으며, 일부는 공군에게 파괴되었다. 그날 아침에만 기갑사단 규모의 전차잔해를 보았다.  
그리고 온갖 구경의 총, 야전 주방 및 기타 군사 장비가 있었다. 롤반의 양쪽에는 거대한 습지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도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10시간까지 계속 달리다가 하루 종일 멈췄다. 
우리는 전차 뒷부분에 가죽 덮개를 씌워 소파처럼 깔고 앉아 더운 날씨에 야전 수통을 들고 러시아군의 잔해를 바라보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버터를 두껍게 바른 빵 한 조각으로 배를 채웠다. 일반 병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전장에 널린 소련 T-26 경전차입니다. 저래보여도 45mm 주포로 3호전차와 맞상대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