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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전차병 이야기 (6부) - 스페인내전

by uesgi2003 2023. 6. 19.

한 영국 신병은 ‘완전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처음 몇 주 동안은 단 한순간도 평온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침 6시 30분에 기상해서 나무로 막사를 지은 기본캠프에서 대야를 두고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항상 경쟁해야 했고 찬물이었다. 아침식사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린 후 급하게 먹었다. 1930년대 초 R.W. 먼스는 ‘내 기억으로는 베이컨 한 조각에 달걀 프라이를 얹고 그 위에 빵 두 조각, 차 한 잔, 마가린 한 스푼을 얹은 것이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0730시부터 아침훈련을 시작했다. 운이 없는 병사들이 행정업무를 맡았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계획적이고 알찬 하루였다. 저녁에는 다음 날의 훈련과 교육을 준비하고, 장비와 군화, 소총을 세척하면서 보냈다. 매일 저녁 9시 30분에 모든 신병들이 침상 옆에 서서 점호를 받았고 10시 15분에 소등명령이 내려졌고, 다음 날 기상까지 신병들의 신음과 코골이 소리가 이어졌다. 
허버트 웹스터는 '멍청한 신병단계를 넘어서면 여가시간에 캠프를 떠나 보빙턴의 나머지 지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6개월의 훈련기간 중 후반부는 조금씩 더 여유로워졌다. 차나 장갑차를 몰고 캠프를 벗어나 일반인의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기본훈련 후 6주간의 운전 및 정비, 6주간의 사격, 6주간의 무선교육을 받았다. 실직했던 사람들의 삶은 더 나아졌다. 정기적인 수입과 식품, 지붕이 생겼다. 다른 무형의 혜택도 주어졌다. 1930년대 초 한 신병은 ‘나는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계단식 주택, 창고, 부두, 교통체증에 둘러싸여 있는 대신 이런 환경에 있는 것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보빙턴에는 세계 4대 전차박물관 중 하나가 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 전차박물관은 가봤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여행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서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독일은 영국보다 4년 앞서 징병제를 실시했다. 개전 전까지 영국전차병 모병이 수백 명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독일은 수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징병을 다섯 차례나 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의 훈련 프로그램은 합동작전이 중심이었다. 영국은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 실험부대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미래 전차전의 방향에 대해 의견이 분열되었다. 
반면에 독일은 목표에 완전히 합의했다. 1938년 전차 5연대의 훈련프로그램은 지금도 적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전차병역할을 개발하기 위해 16주간 훈련시켰다. 징집된 전차신병은 소대에서 개인훈련을 마친 후 가을에 중대훈련에 합류했다. 이듬해에는 부사관 후보생훈련으로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에는 계속 실전훈련을 받았다.
1938년 무렵에는 공군과 함께 현대식 합동작전 훈련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대대지휘관의 지시를 따르며 중대 나름대로 속도와 주도권을 가지고 훈련했다. 그래서 장교 개개인의 추진력과 전문성,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의지에 따라 편차가 심했다.
1930년대 후반 영국은 연이은 재정위기로 전차주도권을 잃었고, 전차개발과 훈련자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신병은 1930년대 초 비커스전차로 포격훈련을 받은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어린 신병들에게 움직이는 전차에서 3파운드 포탄을 발사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위험했다. 사각형의 개방공간에서 이동 중에 실사격을 했다. 사각형 안에서 방향을 바꾸던 한 신병은 약간 혼란스러워 엉뚱한 방향으로 포를 겨눴다. 포가 캠프를 향하고 있었는 최악은 포를 그대로 발사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이 모닝 티를 마시고 있을 때 포탄이 캠프 안으로 쿵쾅거리며 날아들었고 아비규환이 이어졌다. 이 불운한 신병은 곧바로 징계를 받았다. 영국군은 예산부족으로 많은 문제에 시달렸다.

 

문제의 비커스 B형입니다. 오른쪽은 잠시 후에 등장할 독일 1호전차인데 비커스가 아주 가볍게 격파할 수 있는 경무장전차입니다. 

1936년 9월 2일, 건장한 청년들이 민간인복장으로 골판지상자를 여러 개 들고 베를린에서 버스에 탑승하여 발트해 연안의 슈테틴으로 출발했다. 모두 여권과 350마르크를 소지했다. 기대에 부푼 관광객들처럼 여행에 대해 활기차게 수다를 떨었다. 그들은 증기선에 승선했고 희미한 조명이 켜진 화물칸 안에는 1호전차 41대가 줄지어 있었다. 20밀리 대전차포 20문과 차량, 작업장 장비도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배는 발트해로 나가 스페인의 카디스를 향했다. 이 배에는 요제프 리터 폰 토마의 전차 훈련중대라는 암호명의 전차병 180명도 있었는데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를 지원할 예정이었다. 해외파병이 결정된 병사들은 독일군을 떠나야 했다. 검은색 전차병제복을 카키색 가죽재킷으로 갈아입었는데 그 중에는 한스 한니발 폰 뫼르너중위가 있었다. 
그는 뛰어난 군인가문 출신이었지만 유대인혈통 때문에 독일군복을 벗어야 했다.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조국을 위해 봉사한다면 인종제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독일병사들은 귀중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폰 토마는 '스페인이 유럽의 올더숏Aldershot(영국의 군사훈련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교관들은 호세 푸할레스 카라스코 소령이 지휘하는 최초의 국민파Nationalist 전차대대인 인판타리아 아르겔 연대he Regimento de Infantaria Argel를 훈련시켰다.

 

세계역사를 뒤흔들었는데도 제가 다루지 않은, 스페인내전의 주동 프랑코총통입니다. 

38년간 스페인 독재자로 철권을 휘두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었고 그 가문은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평화적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지금의 스페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독일화물선이 도착한 지 열흘 후, 러시아의 첫번째 수송선 콤소몰이 세비야에 정박해 T-26 전차 15대를 하역했다. 소련은 731대의 전차와 1,000대의 항공기로 공화당 측을 지원했다. 독일 콘도르Condor군단은 항공기 600대와 200대의 전차를 배치했다. 이탈리아군은 75,000명의 병력 (독일군은 16,000명), 660대의 항공기와 150대의 전차로 국민파(파시스트)측에 개입했다. 
화력과 장갑에서 우수한 러시아의 T-26 및 T-28 전차는 독일과 이탈리아 라이벌에게 불쾌한 충격을 주었다. 10월 29일, 이탈리아의 2인 1조 안살도Ansaldo경전차는 T-26 전차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11대가 파괴된 반면에 러시아군 피해는 전무했다. 

 

안살도와 T-26전차입니다. T-26의 상대가 될 수 없죠.


1937년 1월, 스페인주둔 소련전차 여단장 디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은 대규모 전차공격으로 마드리드 방면의 국민파 진격을 무력화시켰다. 양측이 서로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가운데 이탈리아는 27mm 대전차포와 강력한 대전차 지뢰로 T-26을 격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일의 37mm 주포도 소련의 장갑을 뚫을 수 있었다. 
폰 토마는 1호전차의 장갑이 불충분하고 소련의 주력전차에 대항할 화력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그는 포획한 전차 한 대당 500페세타의 포상금을 제시했고 이렇게 탈취한 차량으로 4개 중대를 편성했는데, 모로코 민족주의 군인들이 꽤 많은 짐을 싣고 다녔다. 전차, 포병, 공군 간의 협력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차가 지원보병이나 다른 차량보다 앞서다가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격하려면 멈추면 거꾸로 공격을 당했고 기동 중 포격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화력이 크게 부족한 전차에 대전차포를 장착할 수 있다면 T-26을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았다. 스페인내전에서 양측 모두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스페인에서 군경력을 되살리고 싶었던 유대인장교 한스 뫼르너중위는 마드리드 서쪽 20km 부근에 묻혔다. 포탑 해치를 열고 지휘하던 중 국제여단 저격수의 총에 맞았다. 전차의 시야와 통신이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포탑 해치를 열고 전투를 벌였다. 그는 스페인내전에서 전사한 첫번째 독일장교였다.
1936년 말, 마드리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황당하게도 독일군전차부대가 국제여단에 자원한 독일자국민과 전투를 벌였다. 스페인 내전은 군사이론가들 사이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보수주의자의 고정관념 때문에 기술설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폰 토마는 ‘프랑코장군은 보병에게 탱크를 나눠 주기를 원했다. 구세대 장군들 사이에 흔한 생각이었다’고 설명했다. 전차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고정관념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반대로 러시아 파블로프장군은 정반대 결론을 내렸다. 스페인에서 보내온 보고에 따라 적군은 대규모 기갑부대를 해체하고 보병부대에 분산배치했다. 

1937년 4월 8일자 더 타임즈는 '스페인에서 본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전차는 전술적 연구의 산물이 아니라 값싼 대량생산에 불과하다'고 썼다. 기고자인 풀러는 경전차가 ‘험한 바다에서 작전하는 구축함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군사이론가와 설계자는 전차성능에 초점을 맞춘 반면에 언론은 전차의 인간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졌다. 
풀러는 소형전차의 밀폐된 내부가 이동식 관의 내부와 같다며 사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하원의원 해롤드 미첼은 국민파 전선 후방을 방문하던 중 고장 난 소련제 T-26을 발견했다. 그는 러시아전차가 좋은 포를 가지고 있지만 근거리에서 쉽게 파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래의 대전차전술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서 캐터필러 고무에 화염병을 던진 다음 폭탄을 던지면 된다. 캐터필러와 바퀴 고무가 불타면 전차가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내부의 열기 때문에 전차병이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

 

 

화염병공격은 2차대전 중반까지도 상당히 효과적인 대전차전술이었습니다. 

언론이 마드리드 폭격과 학살을 보도하면서 대규모 공습에 초점이 맞춰졌고 1차대전의 고통을 잊지 않은 영국은 평화주의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콘도르군단의 전차훈련 개입을 무시했다. 1937년 4월 20일자 신문은 '독일전차는 2인 승무원, 시속 50킬로미터, 기관총 두 자루, 거의 쓸모없는 장갑 등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고 보도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935년 프랑스의 생산라인은 다른 국가에 비해 뛰어난 장갑과 무장을 갖춘 전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1939년까지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전차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전차인 샤르Char B-1과 소뮤아Somua의 47mm 주포는 당시 최고의 화력이었고 60mm 장갑을 둘렀다. 이 전차들은 신뢰성 높은 엔진과 서스펜션으로 다른 전차보다 우수한 설계였다. 그렇지만 전투공간인 포탑에 한 명만 탑승할 수 있어 지휘관/사수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 설계자들은 기계와 싸워야 하는 병사들의 요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샤르와 소뮤아전차입니다. 소뮤아는 독일군이 노획해서 나중에 프랑스 방어전에 투입했지만 그 때에는 이미 폐급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렇게 독일전차를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도 전략미비와 지휘관의 판단착오로 제대로 활용도 못해보고 패배합니다. 


영국과 독일은 1930년대 중반에 이미, 포탑에서 3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간적 요소를 놓치지 않았다. 전차장은 표적을 찾고 전방위 위협을 식별해야 한다. 포수는 전차장의 지시에 따라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 확대경 조준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장전수는 포탑 주변에 보관된 탄약통에서 탄약을 꺼내 재장전하고 동축기관총을 담당한다. 
지휘관이 작은 1인용 포탑에서 혼자 작전을 수행하면, 특히 상대전차나 대전차포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완전히 불리했다. 독일참모총장은 전쟁이 끝날 때 얻은 교훈을 실제로 시험하여 측정했고 상대 전차포의 사거리가 더 길수록 '승무원의 손실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러시아전차포의 철갑탄은 조악한 강철때문에 관통력이 저하되었고, 최대 75%가 불발탄이었다고 한다. 
독일군은 첫 번째 전차손실이 생기고 불탄 전차내부가 공개되자 스페인복무에 대한 초기 열기가 식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전차설계에 인간적인 요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최종 보고서에는 '오늘날 러시아전차에는 헌신적인 전차병 외에도 사면된 범죄자나 징역형 대신에 전차탑승을 선택한 스페인인이 탑승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전차전은 이전에 없던 독특한 감정적 압박을 받았다. 구데리안과 참모들은 승무원의 편안함과 편의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3호전차에 5명을 배치해서 과로하거나 여러 임무를 동시에 맡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모든 병사가 앉을 수 있도록 실내배치를 개선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3호와 4호전차가 한팀으로 설계되었다. 주력전차인 3호에는 37mm 철갑탄포와 기관총 2문이 장착되었고, 3호전차를 보완하는 4호전차는 대인용 고포탄의 75mm 포를 장착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개발되어 생산하기 시작했다. 
토션바Torsion Bar 서스펜션으로 승차감이 크게 개선되었다. 토션바 서스펜션은 대량 생산이 아닌 수작업으로 생산되는 고급 기술이었기 때문에 단가가 높았다. 프랑스전차병은 1인 포탑에서 고립감을 느꼈지만 독일전차병은 나란히 배치되었다. 앞쪽에는 운전병과 무전병, 포탑에서는 포수와 장전수가 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으며 전차장은 머리와 어깨를 내밀고 사방을 관찰했다. 전투 중에는 엔진과 포격소음을 뚫고 서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으며, 필요한 경우 입모양을 읽으며 서로를 안심시킬 수도 있었다. 

 

3호전차가 주력전차이고 4호전차는 보병지원전차로 개발되었지만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전차에 시달린 후에는 3호전차 자리를 4호전차가 메우게 됩니다. 

러시아군의 T-34에 당한 충격때문에 바로 판터전차 개발에 착수하지만 대전말까지 4호전차가 주력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판터와 타이거는 대량생산하기에 너무 비싸고 독일 특유의 과도한 기술집약 결정체여서 생산해도 전장에서 유지보수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독일의 신형전차는 볼트 조인트나 리벳 대신 전기용접으로 장갑방어 성능이 뛰어났다. 장갑두께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두께로 제작되었고, 포탄의 관통력을 줄일 수 있는 표면경화강철이 부착되었다. 
독일군은 전차설계에서 여전히 경량급이었지만 장갑과 전투기술을 재설계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있었다. 그 사이 영국은 주도권을 잃었다. 1935년 프랑스는 최초의 기갑사단을 편성했고, 독일은 빠르게 3개 사단을 편성하며 그 뒤를 따랐다. 뉘른베르크 당대회에 모인 군중 앞에서 전차가 8열로 지나가며 위용을 뽐냈다. 바스티유의 날(Bastille Day. 프랑스 독립기념일) 퍼레이드가 열린 파리에서는 폭격기와 전투기 편대가 근접 대열을 이루며 지나갔다. 
'전차 200대가 기계적인 힘의 엄청난 소음으로 뒤를 이으면서 행사가 마무리되었다’고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가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