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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전차병 이야기 (8부) - 폴란드침공

by uesgi2003 2023. 7. 3.

 

 

폴란드는 전쟁준비를 착실하게 했고 죽기 살기로 싸웠는데도, 국내 엉터리 자료들 때문에 창기병 이야기만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 독일과 소련을 양쪽에서 맞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미국도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슬로바키아도 3개 사단으로 침공했습니다. 

 

폴란드가 창기병 수준이었다면 독일전차 230대, 독일항공기 250대(손상까지 포함하면 전체공군의 무려 20% 이상)를 잃을 이유가 없었겠죠. 마치 폴란드를 아주 쉽게 점령한 것처럼 여기는데... 독일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1939년 여름, 구데리안은 대규모 가을 기동을 준비하던 중, 계획을 변경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의 제16군단은 폴란드침공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독일 제1기갑사단은 비커스 6톤 전차를 개량한 체코 스코다Skoda 35(t) 전차 130여 대를 지원받았다. 연합국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에게 그대로 넘긴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 전차는 독일전차전력의 주축인 1호와 2호보다 성능이 뛰어났다. 독일 무전기가 장착되었고 1호와 2호전차를 대체한 후에, 7월까지 훈련을 받았다. 제3경전차사단 67전차대대도 체코제 전차를 지급받았다. 중대지휘관 중 한 명은 발트해 연안의 푸틀로스 사격장에서 실사격을 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1/2호 전차는 험지를 매우 잘 달렸지만 장갑이 너무 얇었고 무전기는 원시적이었다 ... 해치를 받으면 전차장과 포수들의 시야는 나빴다.' 


독일전차부대는 여전히 신병들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재정비하고 재편성하고 있었다. 구데리안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형 3호와 4호 중 87대만 받은 상태였다. 독일군수산업은 독일공군과 해군에게도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차생산이 부진했다. 
가장 먼저 창설된 전차 부대 중 하나인 제5기갑연대의 경우 겨우 3호전차 3대, 4호전차 9대를 받았고 1호 63대와 2호 77대가 주력이었다. 독일군 전체로는 1호가 1,026대, 2호가 1,151대, 체코 전차 164대였다. 
구데리안은 훗날 '1932년의 그 누구도 언젠가 이 작은 훈련용 1호가 실전에 투입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라고 슬프게 회고했다. 전설적인 전차에이스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는 이 전차를 '쓰레기 중의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전차병들은 '크루프의 스포츠카'라고 불렀는데, 개전 초기에 어쩔 수 없이 대거 투입했고 영국군도 사정은 비슷했다. 

 

전설적인 전차에이스가 등장하기 시작하는군요. 오토 카리우스는 전차 150대 이상을 격파했는데 천수를 누린 극히 드문 인물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체코제 38t를 탔습니다. Tiger in the mud라는 책이 국내에 번역출간되었습니다. 


1939년 8월 31일 밤부터 9월 1일 새벽까지 독일-폴란드 국경의 공기는 무더위만큼이나 무거웠다. 독일군은 포메라니아, 슐레지아를 거쳐 최근 점령한 체코 땅까지 이어지는 1,000km를 가로질러 집결지로 이동했다. 계획대로라면 바르샤바 동쪽에서 폴란드군을 협공할 수 있었다. 
가랑비에 젖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전차 차체와 손전등에 헬맷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는 8월 23일 실탄이 지급되어 26일 작전이 예상되었지만, 작전개시가 취소되었었다. 북부 집결지 중 한 곳에 있는 제3정찰대대 소속의 프라이헤른 폰 에세벡 대위가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새벽 4시 30분이었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두 밤잠을 설친 상태였다. 
열정적인 애국심은 사라지고 이튿날에 생길 일에 대한 긴장감만 있었다. 4호전차 포수였던 롤프 헤르텐슈타인 부사관은 꽃전쟁 출정식과 이번 출정의 차이점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정말 흥분하지도 않았고 전쟁이 일어나길 원하지도 않았다.’ 

8월 25일의 오경보로 인해 이미 국경에 근접해 있던 제3경전차사단은 60km 후방으로 철수해야 했는데 육군 남부사령부는 기쁜 마음으로 작전취소를 받아들였다. 8월 31일, 간결한 새 명령에 따라 9월 1일 0445시에 침공이 재개되었다. 
전쟁을 선포하는 총통의 포고문이 낭독되고 예상경로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거듭된 명령변경으로 긴장이 극에 달했고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갑사단 6개, 기병에서 전환한 경전차사단 4개, 자동차화보병사단 4개가 독일 2개 군의 중심이 되었다. 
27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여단이 그 뒤를 따랐다. 폴란드군 보병사단 30개, 기병사단 11개, 기동여단 2개가 상대였다. 폴란드군은 예정된 기계화여단 4개중 1개만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기갑대대 9개는 전차 13대의 중대단위로 보병사단이나 기병여단을 지원했다. 37mm 주포를 장착한 TP 경전차 130여 대와 20mm 주포를 장착한 TK 계열 경전차 440여 대를 보유했다. 폴란드는 야심 찬 현대화 프로그램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고 1936 년 프랑스가 전차를 제공하고 비용을 지불하기로 합의했지만 37mm 주포를 장착한 르노 FT 탱크는 53 대만 인도되었다. 기병여단의 정찰대대는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물러서지 않았지만 독일군에 대해 알지 못했다. 독일군 전차 3,200여 대가 폴란드 전차 600여 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8일 전, 히틀러가 러시아와 막판에 침략금지조약을 체결하는 외교쿠데타를 일으켜 서방에 충격을 주었고 전쟁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독일은 러시아의 대응을 걱정할 필요없이 폴란드를 공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장군은 러시아군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받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그는 일기에 '우리가 첫 번째 성공을 거두면 러시아가 움직일 것'이라고 썼다.

 

폴란드 최초의 전투기에이스 바츠와프 랍코브스키Wacław Łapkowski 입니다. 그는 구형전투기 PZL P.11로 하인켈 HE111 폭격기를 격추시켰습니다. 

 


0445시에 짙은 안개가 국경의 독일군 전진진지에 스며들었다. 북쪽에서는 루프트플로트Luftflotte
(항공함대) 1의 항공기 중 30%만이 시동을 걸 수 있었고, 남쪽에서 공격하는 루프트플로트 4의 80%만이 폴란드 전선을 따라 비행하고 있었다. 불길한 시작이었지만 전차부대가 안개 속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 명령체계입니다. 가운데가 육군, 오른쪽이 해군입니다. 


4호전차 소대를 지휘하던 루돌프 베어중위는 ‘좌우에서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더 뒤쪽에서는 소형 전투차량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회상했다. 장교와 전차병들은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다. 전차들이 무전만으로 대규모로 이동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차원인 공군이 그들의 머리 위를 휩쓸고 있었는데, 전차부대와 공군이 이렇게 대규모로 합동작전을 펼친 적도 없었다.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바이에른 북동부의 그라펜뵈어 훈련장에서 슈투카 폭격기와 폭격기 부대의 육군 전술지원을 시험하기 위한 대규모 훈련이 계획되었다가 축소되었다. 
해가 떠오르자 안개가 걷히고 9월 초의 뜨겁고 찬란한 햇살로 새로운 전투 지역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정찰하던 폰 에세벡은 전차병들에게 '0445시부터 실탄을 사용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실전이다'라고 말했다. 

 


1939년 9월 3일 일요일 오전 11시 15분,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로 영국 전역의 안방에 모여 있던 수백만 명에게 '다우닝가 10번지 내각 회의실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라고 발표했다. 11시까지 폴란드에서 독일군이 철수할 준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면 참전한다는 발표였다. 
수상은 평화제의가 무산되자 실망감을 표시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를 돕기로 결의했다'고 선언했다. 체임벌린은 '나는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 
훈련캠프에 있던 어느 누구도 폴란드를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허버트 웹스터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처럼 1939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두려움보다는 흥분이었다’라고 말했다. 9월 3일에 전쟁이 선포되었고 병사들은 곧바로 전장에 투입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폴란드에서 실전을 경험 한 독일전차병과 새로 편성된 영국전차병 대원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9월 3일이 되자 서방의 두 강대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협력했지만 독일 제4군단과 제3군단이 폴란드 회랑을 가로질러 단치히를 봉쇄하고 있었고, 제3군단은 동프로이센에서 남하하고 있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제8군단과 제10군단은 바르샤바와 버그강을 중심으로 거대한 협공을 노리는 기동을 시작했고, 제14군단은 크라코프로 이동했다. 공군의 활약으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지상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전차병은 일과를 마치면 모두들 모퉁이의 술집으로 가서 술잔을 기울였지만 폴란드의 독일군 전차병들을 달랐다. 이들은 불의 세례를 경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구 질주하다가 둔탁한 포격 소리 위로 간헐적으로 들리는 총성과 기관총 사격소리가 섞여 들리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차장들은 주변 지형을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기억한 후에 포탑과 해치 안으로 머리를 숙이고 해치를 닫았다. '포탑의 좁은 틈새로 밖을 내다보니 내 소대의 전차들이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전장이 텅빈 것처럼 보였지만 적전차가 분명 그곳에 있었다. 언덕 뒤, 수풀이 우거진 농경지에. 선두 전차는 적이 포격을 가하기 전까지 적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갑자기 전차 전체에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대전차포였다. 다행히도 캐터필러만 손상되어 하차해서 수리할 수 있었다.’
나치친위대 쿠르트 마이어Kurt Meyer대위는 섬뜩한 적막을 찢고 폴란드 대전차포가 장갑차 2대를 연달아 맞추는 것을 보았다. 대전차포가 전차나 장갑차를 파괴하면 주변의 기관총이 탈출하는 승무원을 처리했다. 아무도 탈출하지 못했다. '포탄이 장갑차 내부를 관통할 때마다 치명상을 입은 전우들의 비명소리가 더욱 커졌다. 몇몇은 기어 나오려고 시도했지만 기관총 사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차 안의 신음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첫 번째 차량의 갈라진 틈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독일군 최연소 사단장이었던 쿠르트 마이어입니다. 다른 인물이 최연소 기록을 깼지만 그건 종전 직전의 대혼란시기여서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온갖 격전을 치르고 나치주의자에 연합군 학살범죄까지 저질렀는데도 천수를 누린 정말로 극히 드문 인물입니다. 


작전 개시일, 므와바Mlawa 북쪽 요새를 공격하던 보병을 지원하던 제3군 제7기갑연대는 철길로 만든 바리케이드에 걸렸다. 이 장애물은 항공정찰에서 발견되지 않았었는데, 발이 묶인 여러 대의 장갑차가 포병과 대전차포에게 파괴되었고 빈틈을 찾아 기동하던 차량이 계속 파괴되었다.

 

독일군은 므와바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공군덕분에 폴란드군을 밀어낼 수 있었습니다. 

훈련과 달리 전쟁에서는 실수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켐프Kempf기갑사단은 제3군 사령부에 '공격은 재앙이었다'라고 보고했다. '끔찍한 전차손실이 있었고, 그 수를 알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의 공격은 절망적입니다.' 
제7기갑연대는 므와바에서 164대의 전차 중 72대를 잃고 철수해야 했고, 보병공격은 바리케이드에 막혔다. 다른 곳에서는 공군이 폴란드군의 이동을 가로막은 덕분에 전차부대가 꾸준히 기세를 올렸다. 밀폐되고 어두운 조명과 함께 시야가 제한된 작은 포탑에서 지휘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전투의 강도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전차로 공격하거나 방어하려면 반응속도뿐만 아니라 승우원이 한 몸이 되어야 했다. 실전에서만 테스트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제4기갑연대의 사수 롤프 헤르텐슈타인은 대전차포를 상대하던 때를 회상했다. ‘이제 누가 먼저 상대방을 공격하느냐의 문제였다. 섬광과 포성만이 유일한 신호였다. 렘부르크로 향하는 길에 포탄 한 발이 내 전차와 불과 몇 미터 떨어진 3호 전차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안개와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전차장이 발포명령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2시 방향으로 포신을 놓고 있었는데 왼쪽으로 조금 돌렸을 때 또 다른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보였다. 또 한 발의 포탄이 지나갔고 바로 응사했더니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전진했고 길가에서 폴란드제 37밀리 대전차포 1문과 죽은 병사들이 보였다. ‘폴란드포수가 막 포탄을 장전하고 있었는데, 그 포탄이 우리의 마지막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전차 안의 대화는 고함소리와 무전이 난무했다. 4호전차 소대를 이끌고 전진하던 루돌프 베어는 전방의 폴란드보병을 발견했다. ‘더없이 좋은 목표물이었다. 나는 왼쪽에 앉아 있는 포수에게 사격 방향과 사거리를 외치고, 오른쪽에 있는 장전수에게 어떤 종류의 포탄을 장전할지 소리쳤다. 운전병에게는 인터폰으로 명령했다.’
'좌측 10시 방향, 나무 한 그루, 적 보병 - 파괴하라!' 운전병과 함께 왼쪽 전방에 앉은 무전병이 무전교신을 담당했고 차체 기관총으로 적과 교전했다. 베어는 고폭탄으로 밀집된 보병무리를 공격하면서 포수를 옆에서 지휘했다. 고폭탄의 효과가 대단했다. 보병들이 달아나자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이때쯤이면 포탑은 소리와 연기, 긴장감이 뒤섞였다. 장전수는 포수의 사격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고 온통 땀범벅이었다. 연기가 가랑이 사이로 쏟아져 땀에 젖은 얼굴을 검게 물들였다.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엔진 소음, 총과 기관총의 굉음, 열기, 매연,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전장의 흥분. 전차병만이 경험하는 익숙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전차장과 포수입니다. 4호전차면 그래도 독일군 중전차인데 정말 좁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들어가봤으니까요. 음하하하! 판터, 킹타이거 다 들어가봤는데 타이거는 영국에 있어서 기회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