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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2차대전 영국전투

by uesgi2003 2023. 8. 22.

BBC 자료를 정리했기 때문에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국공군이 루프트바페를 몰아낼 수 있었던 이유

1940년 6월 말, 나치 독일과 추축군이 서유럽을 장악했다. 7월, 아돌프 히틀러는 절망적인 군사 상황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거부하고 있던 영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 후의 전투인 영국전투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한다.

윈스턴 처칠총리가 영국공군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묘사한 영국전투(1940년 7월 10일~10월 31일)는 역사상 최초로 공중에서 벌어진 주요 군사작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거둔 가장 중요한 승리 중 하나이며 독일의 영국침공을 막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역사학자 줄리안 험프리스가 이 중요한 공중전을 둘러싼 몇 가지 질문과 사실에 대해 설명한다. 

영국전투는 언제, 왜 발발했나?
아돌프 히틀러는 폭격, 해상봉쇄, 상륙으로 영국이 항복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렇지만 우선 제공권이 필요했다. 1940년 여름과 가을, 수천대의 독일공군이 영국상공에서 끈질긴 전투를 벌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후반부에 비하면 아주 작은 사건이었지만 이 전투의 결과에 따라 영국의 생존과 전쟁전체의 승패가 결정될 만큼 엄청난 의미였다.

영국 전투에서는 주요 날짜 5개를 설명하면
1940년 7월 10일: 영국전투의 공식적인 시작
독일군이 포위한 영국제도의 보급품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선박을 계속 공격한  카날캄프 또는 해협전투 단계부터 전투가 시작됩니다.

 

카날캄프(영국해협)전투는 1940년 7월, 독일공군이 영국수송선단과 공군에 대해 벌인 전투입니다. 

1940년 8월 13일: 이글 데이
카날캄프전투의 결과가 결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영국본토의 전투기부대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계획했다.

1940년 8월 18일: 가장 힘든 날
양측 모두 사상 최대의 손실을 입었다. 독일군 항공기 69대 대 영국공군 29대.

1940년 9월 7일: 블리츠 시작
전투기부대 파괴 실패에 실망하고, 영국군의 베를린 폭격에 격분한 괴링은 런던으로 목표를 전환했다.

 

런던대공습으로 부르는 블리츠작전은 독일공군의 결정적인 오판이었습니다. 덕분에 영국공군과 레이더기지는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습니다. 

1940년 9월 15일 영국전투 기념일
공군 부사령관 키스 파크는 개별 편대별로 소규모 공격을 계획하던 자신의 정책을 포기하고 모든 항공기를 출격시켜 수도를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영군전투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1939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몇 시간 만에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의 짧은 독일침공과 몇 차례의 해군작전, 소규모 폭격을 제외하고는 전쟁초기 몇 달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래서 이 시기는 '가짜 전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40년 봄, 모든 것이 바뀌었다.

4월에 독일군은 노르웨이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5월 10일에는 프랑스와 벨기에를 침공했다. 독일군은 프랑스-독일 국경을 따라 중무장된 마지노 방어선을 우회하고 기동력이 빠른 전격전전술로 아르덴 숲지대를 넘어 덩케르크에서 수십만 명의 프랑스와 영국군을 고립시켰다. 연합군의 해변철수 작전인 다이너모 작전으로 30만 명 이상이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프랑스는 패전했고 영국은 대부분의 장비를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협상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새로 영국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항복을 거부한 처칠은 과거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의 함대가 독일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함대를 공격하면서 전 세계, 특히 미국을 향해 영국의 강력한 전투의지를 보여주었다.

영국의 완고한 저항에 직면한 히틀러는 폭격, 해상봉쇄 또는 최후의 수단으로 침공하여 항복을 강요할 계획을 세웠지만 우선 영국상공을 장악해야 했고, 영국공군(RAF)을 무너뜨려야 했다. 

그래야만 영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을 만큼 대규모 폭격이 가능했고, 강력한 영국해군에 맞서 침략군이 영국해협을 건널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영국전투는 히틀러의 계획에 어떤 의미가 있었나?
1940년 7월, 히틀러는 영국을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고, 암호명은 '실뢰' 또는 '실리온
(바다사자)'이었다. 히틀러는 봉쇄와 폭격, 침공위협으로 영국의 전투의지를 꺾을 수 있기를 바랐다.

 

덩케르크에서 연합군을 그대로 돌려보냈을 때부터 바다사자작전은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히틀러가 계획한 영국 침공작전인 실리 작전은 무엇이었나? 왜 취소되었나?
실리온작전이 실제로 진행되었다면 엄청나게 위험한 작전이 되었을 것이다. 우선, 취약한 침략 바지선이 해협을 건너려면 잔잔한 날씨가 오래 지속되어야 했는데, 파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물에 잠길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무시무시한 영국해군이 숨어 있었다.

공중에서 승리해야만 침공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고, 영국해군이 폭격과 기뢰, U보트 공격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해도 상륙부대를 차단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리온 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영국공군의 영국전투 영웅들은 영국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렇지만 닉 휴이트는 1940년 봄 노르웨이전투에서 영국해군이 독일함대를 격파한 것이 히틀러의 대침공 계획을 무산시킨 결정적 계기였다고 주장한다.

"사실 영국전투에서 영국공군이 패했더라도 독일이 영국을 침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몇 주 전에 이미 영국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940년 7월에 영국공군과 루프트바페는 얼마나 강력했을까?
독일공군, 즉 루프트바페는 노르망디에서 스칸디나비아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원호 형태로 배치된 3개의 루프트플로텐('공군 함대')으로 구성되었다. 영국전투 당시 독일공군은 약 2,80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며, 이 중 3분의 2가 폭격기였다. 루프트바페는 덩케르크 전투 이전에 이미 폴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공군 및 영국공군 파견대를 격파한 바 있다. 승무원들은 경험이 풍부하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사령관은 RAF를 격파하는 데 며칠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독일 주력전투기 bf109는 보조연료통이 없어서 영국상공에서 아주 짧은 시간만 폭격기를 엄호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당연히 독일폭격기의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1936년, RAF는 훈련, 해안, 폭격기, 전투기사령부, 4개의 사령부로 조직되었다. 전투기사령부는 지리적으로 4개의 '그룹'으로 조직되었다. 남동부에 위치한 11그룹이 전투의 최전선을 담당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될 당시 약 650대의 항공기와 1,300명의 조종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투기사령부는 프랑스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휴 다우딩 사령관은 영국상공 전투를 위해 모든 비행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더 많은 비행대를 보내달라는 처칠의 요청을 거부해 논란을 일으켰다.

전투기 사령부의 총사령관이었던 다우딩은 영국영공 방어를 현대화하고 현대식 전투기 설계를 장려했으며 레이더 개발을 지원했다.

루프트바페의 계획은 무엇이었나?
양측의 목표는 비교적 간단했다. 독일군은 영국의 주요 군사, 산업, 민간 목표물을 폭격해서 영국의 전투능력과 의지를 무너트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영국공군이 이러한 공격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수적으로 우세한 루프트바페가 영국상공에서 우위를 점할 때까지 전투기 전력이 소모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영국공군은 먼저 적 전투기의 방호막을 뚫어야 폭격기를 공격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독일군은 전술적 우위를 점했습니다.

영국 공군은 항상 근접대형 비행을 선호했다. 3면 V자 대형은 인상적이지만 전투에서 민첩하지 못했다. 반면 독일군은 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 한 대가 선두에 서고 다른 한 대가 후방을 지키는 윙맨 역할을 하는 한 쌍의 비행기로 V자 대형을 대체했다. 두 대의 비행기가 함께 움직였고, 영국군이 자체 전술을 조정하기 전까지는 독일군이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영국공군이 얼마나 많은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손실된 비행기를 얼마나 빨리 대체할 수 있는지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리고 영국공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격추한 비행기 수를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8월에 독일군은 RAF 비행장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전투기사령부는 심각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9월 초에 영국도시로 공격 대상을 바꾸면서 결정적인 오판을 했다. 전투기사령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틀렸다. 9월 15일의 공습에서 수많은 항공기가 큰 손실을 입자 루프트바페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영국전투를 둘러싼 일반적인 오해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무능했고, 그의 불행한 결정으로 공군이 불필요하게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크리스터 버그스트룀이 이 오류와 다른 다섯 가지 영국 전투 신화에 대해 설명한다.

영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흔한 오해와 달리 국제적인 집단이었다.
실제로 영국전투에 참전한 약 3,000명의 조종사 중 공립학교 교육을 받은 조종사는 200명 미만이었고 나머지는 은행원, 상점점원, 공장노동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전투기조종사로 활약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젊다는 것이었다. 30세가 넘은 '노장'도 있었지만, RAF 전투기조종사의 평균 나이는 20세에 불과했고, 18세의 젊은 조종사도 많았다. 당시에는 21세 이상만 투표할 수 있었눈데 많은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영국 전투기조종사의 약 20%는 해외 출신이었다.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인이 영국전투에 참여했으며, 아일랜드와 미국 같은 중립국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의 자원병도 함께 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벨기에,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나치 점령국의 조종사들도 전투에 참전하여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들 중 다수는 경험이 많은 전투기 조종사들로, 자국민을 억압하는 국가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에 동기를 부여받은 경우가 많았다. 폴란드 제303 비행대는 6주 동안만 작전을 수행했지만 다른 어떤 부대보다 많은 독일 전투기를 격추했다.

영국전투는 과대평가된 것일까?
역사학자 숀 랭은 이 공중패권 다툼이 배녹번, 보스워스, 스페인함대 패배와 함께 역사상 가장 과대평가된 9대 전투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영국공군 조종사들은 일반적으로 독일공군 조종사들보다 숙련도가 낮았다.
당시 모든 독일군 조종사는 최소 6개월의 기본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영국군 조종사는 한 달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독일조종사들은 폭격기 또는 전투기 전문학교에서 최대 80시간의 훈련을 받았으며, 전투에 투입되기 전에 시뮬레이션 출격과 모의 전투에 참여했다. 영국공군 조종사들은 작전 부대에 배치되기 전에 약 20시간의 실제 비행을 할 수 있었는데, 영국은 인력이 부족했다. 

양측 조종사들은 훈련에서 배운 비행과 실전 비행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비행을 해도 똑바로 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영국공군이 공중전에서 승리한 방법
전투기에는 보통 10초 정도 연속 사격할 수 있는 탄약만 있었기 때문에 적에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이상적으로는 적의 눈에 띄지 않게) 1~2초 동안 짧게 발사한 후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최선의 전술이었다.

공중전은 종종 몇 초 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술적인 비행 능력만큼이나 강한 신경, 빠른 반응, 좋은 시력이 중요했다.

지상의 '다수'는 공중의 '소수'만큼이나 중요했다.
제임스 홀랜드는 "전투기에 탑승한 조종사들은 세계 최초로 완전히 조율된 방공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였다"라고 말한다.

"현대식 레이더, 관측대, 라디오 등의 정보를 매우 효율적으로 수집, 필터링, 전파하는 지상통제와 결합되어 8월 14일과 같은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요격하고 반복적으로 괴롭힐 수 있었다."

여성도 영국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항공기를 제작하는 공장에서 일했고, 전국 각지에 비행기를 배달하는 항공수송보조(ATA)의 조종사 8명 중 1명은 여성이었다. 이들 중 한 명인 에이미 존슨은 1941년 자신이 조종하던 비행기가 템즈강 하구에 추락하면서 사망했다.

여성보조공군(WAAF) 대원들은 운전사, 사무원, 전화 교환원, 요리사, 질서 유지 요원 등으로 RAF와 함께 일했다. 일부는 레이더 기지에서 근무했고, 다른 일부는 여러 전투기사령부 작전실에서 아군과 적군 항공기 위치를 매핑하고 전투기 출격을 지휘하는 플로터로 일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이 근무한 장소 중 상당수는 독일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다. 전쟁 중 750명 이상의 여성 전투기조종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육군보조영토서비스(ATS)에 소속된 여성들은 레이더 운영자로 일했으며 대공포와 탐조등 부대요원으로 합류했다. 미래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세의 공주 시절에 입대해 운전병과 정비사로 훈련받았고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5만 명 이상의 여성이 ATS에서 복무했다.

스핏파이어만이 RAF의 유일한 전투기는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날렵하고 날씬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떠올리는데, 실제로 당시 하늘에 떠 있는 실루엣만 봐도 전투기사령부가 영국상공에서 적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희망을 품었다.

 



그렇지만 스핏파이어는 영국 공군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기가 아니었다. 영국 최고의 전투기는 호커 허리케인이었다. 견고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강인한 호커 허리케인은 1937년 RAF에 최초로 도입된 단좌형 전투기였다. 영국전투에서 허리케인은 다른 모든 연합군 전투기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적기를 격추했다.

 



블리츠와 겹치는 영국전투
블리츠는 1940년 9월 7일 런던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공습을 시작으로 영국도시에 대한 지속적인 폭격에 붙여진 이름이다. 블리츠는 8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독일군이 러시아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한 1941년 5월에야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런던은 57일 연속으로 폭격을 받아 10월 말까지 25만 명 이상의 런던 시민이 노숙자로 전락하는 등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