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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눈으로 본 스탈린그라드전투 - 바르바로사 실패 (2)

by uesgi2003 2024. 3. 17.


이제 히틀러는 수상실 의자에 기대어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엉터리였고 독일군 자체 정보가 믿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았고, 그에게 도전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발터 폰 브라우히취는 재정이 궁핍한 상태였고, 빌헬름 카이텔과 알프레드 요들은 예스맨이었다. 육군최고사령부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만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적군의 놀라운 재건 능력을 기억하며 겔렌의 보고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지난 여름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낙관론에 침묵을 지켰다. 
히틀러의 낙관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치 독일의 석유 부족이었다. 1917년, 광기 어린 프랑스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전쟁에서 석유는 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편지를 보냈고, 25년 후 아돌프 히틀러도 이 견해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문제는 제3제국은 오스트리아 유정 몇 곳에서만 공급이 가능했고, 영국해군때문에 세계 석유시장과 단절되어 있었다. 1936년 8월부터 이 문제를 예견한 히틀러는 나치독일 경제 4개년 계획의 책임자였던 괴링에게 1940년 이전에 시작될 전쟁에 대비해 제국이 석유문제에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괴링의 전략에 따르면 국내 생산량을 연간 약 100만 톤까지 늘리고, 나머지는 과학과 수입을 통해 충당하기로 헸다. 독일이 개발한 석탄에서 석유를 추출하는 합성석유 제조공정으로, 1940년까지 베를린에 270만 톤의 석유를 공급했지만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증가하여 1942년에는 400만 톤이라는 놀라운 수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연간 전시소비량이 약 750만 톤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충분하지 않았고 수입으로 채워야 했다. 
일부는 헝가리의 소규모 석유매장지에서, 1939년 나치-러시아 불가침 조약과 함께 체결된 경제협정으로 러시아에서 약 60만 톤을 들여왔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루마니아왕국이었다. 남부도시가 중심인 루마니아유전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였으며 1930년대 초에는 연간 약 50만 톤을 독일에 공급하고 있었다. 이 수치는 1941년까지 세 배로 증가했으며, 러시아가 이 중요한 자원을 폭격하자 히틀러가 편집증을 부릴 정도였다. 
실제로 1941년 7월 13일, 연합군의 플로이에슈티Ploiești 정유공장에 대한 폭격으로 약 17개의 저장 탱크가 불탔고, 화재를 진압하는 데 24시간이 넘게 걸렸다. 9,000톤이 넘는 귀중한 석유가 사라졌다.

 



베를린은 이 지역에 전투기를 대거 배치해 석유시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배치된 공군조종사들은 4개월 동안 이 지역 상공에서 러시아 폭격기 143대를 격추시키고 정유산업을 보호했다. 더 이상 러시아에서 석유를 들여올 수 없었지만, 독일군은 새로 정복한 유럽제국의 비축량을 약탈해 대체했다. 스칸디나비아와 서유럽 전역에서 독일군은 석유저장고와 저장시설을 조사해 대부분을 몰수했고, 이미 취약한 경제를 마비시켰다. 
프랑스는 전략 비축유를 빼앗기고 전쟁 전 소비량의 8%에 불과한 석유로 생계를 유지했다. 나치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으로부터 총 60만 톤의 석유를 약탈했지만 일회성에 불과했다. 1941년 3월, 베를린의 전쟁경제를 이끌던 군경제학자였던 게오르크 토마스는 전쟁 때문에 7개월 후에는 제국의 전략석유비축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비축량은 매우 적었고 6개월 소비량에 못 미치는 300만 톤에 불과했다.

 



루마니아의 시추능력이 더 큰 문제였다. 장비와 투자부족으로 루마니아의 총 생산량은 1937년 870만 톤에서 1941년 560만 톤으로 감소했다. 루마니아의 군사독재자 이온 안토네슈쿠Ion Antonescu(사진참조)에게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루마니아는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제공했고 더 이상 제공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종전 후에 사형되었습니다. 


제국에 수출하느라 루마니아 자체 사용량을 평시 수준의 20%로 줄여야 했고, 루마니아산업 부문이 무력화될 지경이었기 때문에 안토네슈쿠의 답변이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독일도 마찬가지로 민간 차량의 대부분을 군용으로 사용했는데 석유제품 부족으로 무기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외무장관 갈레아조 치아노백작이 1941년 여름 일기에 쓴 것처럼 다른 추축국도 고통을 받았다. '석유 부족이라는 단 하나의 어두운 지점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겨우 10만 톤밖에 없다...' 추축국의 석유부족과 달리 영국은 1942년에 미국으로부터 1,000만 톤의 석유를 수입했고, 중동의 이란과 이라크유전에서 추가로 많은 양을 수입했기 때문에 영국전역의 불이 꺼질 위험은 전혀 없었다.

히틀러를 고민에 빠트린 석유문제에 대한 해답은 코카서스Caucasus였다. 코카서스의 소련공화국에는 석유가 넘쳐났다. 그로즈니Grozny유전과 마이콥Maykop유전(현대 체첸Chechnya, 아디게아Adygea)은 모두 연간 약 200만 톤을 생산했고, 멀리 떨어진 소련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aku(사진 참조)에서는 1942년에 2,400만 톤이라는 경이로운 생산량을 기록했다.
유조선으로 아스트라한Astrakhan에 운송한 후, 바지선으로 볼가강을 따라 러시아 중심부까지 공급했다. 1940년 7월 31일, 히틀러는 코카서스유전을 점령하자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 남하하고 롬멜의 아프리카 군이 북상하는 협공작전이었다. 병사들은 중동이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오르그 토마스는 더욱 솔직하게 괴링과 카이텔에게 말했다. '이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러시아 석유가 없으면 독일전쟁기계는 점점 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1941년 초, 군사정보기관은 반공주의자인 그루지야 이민자 등의 100명 병력으로 코카서스유전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가 루마니아에 그대로 방치했다. 코카서스유전의 중요성이 다시 떠오르자 크게 보강해서 미네랄롤 여단 카우카서스Mineralöl Brigade Kaukasus(석유여단 코카서스)를 편성했다. 
히틀러는 활기를 되찾고 남부집단군이 코카서스로 남하하는 모습을 그렸다. 소련 석유공급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모스크바는 가용한 모든 사단을 이 지역에 파견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군은 전년도에 그랬던 것처럼 연이은 포위섬멸전으로 러시아군을 포위하고 파괴하면 되었다. 
남부집단군이 유전을 점령하고 러시아군이 연료부족에 시달리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손쉽게 함락되고 소련과 볼셰비즘 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히틀러는 3월에 할더에게 적절한 계획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942년 4월 5일에 총통 지령 41호를 발표하며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계획에 따라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를 향해 움직이지 않고 여름과 가을 내내 전적으로 방어태세를 유지하기로 했다. 북쪽의 북부집단군은 러시아군의 대규모 볼코프Volkov공세를 거의 좌절시켰고, 레닌그라드를 점령해서 핀란드군과 연결되더라도 동쪽으로 더 이상 진격하지 않기로 했다. 

 



남부집단군은 1942년 최대작전인 폴 블라우Fall Blau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원래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구체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실제로 전체지침에서 스탈린그라드는 두 번만 언급되고 그 다음에는 일반적인 용어로만 언급되었다.
'...돈Don강을 따라 밀고 내려오는 진형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연결될 수 있으며, [병력은]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기갑부대와 연결되어야 한다'. 
폴 블라우작전의 목표가 스탈린그라드 점령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적은 병력과 물자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겨울동안 향후 작전을 위한 예비병력 대부분을 소모했다 ... 우리의 목표는 러시아의 모든 방어 잠재력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부수적인 목표였다... 우리에게 스탈린그라드는 지도상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바르바로사가 직면했던 많은 문제가 폴 블라우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우선 거리 문제가 있었다. 독일군의 주요 병참기지인 하르코프(현재 하르키우Kharkiv에서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까지는 약 1,600km로, 바르바로사 당시 독일군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거리였다. 
그 광활한 거리에는 햇볕에 그을린 거대한 대초원과 크고 작은 수많은 강, 그리고 보로네시와 로스토프나도누와 같은 소련의 대도시가 있었다. 그 너머에는 일 년 내내 눈에 덮인 코카서스산맥의 들쭉날쭉한 봉우리가 있고, 내륙은 좁은 고갯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고 험난한 지형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려면 다양한 기술과 장비를 갖춘 대규모 병력이 필요했다. 
두번째로 지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북쪽 측면의 취약성은 독일군이 진격할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구데리안의 제2 기갑군은 8월의 키예프 작전에서도 간신히 측면노출의 위기를 모면했다.

문제를 잘 알고 있던 할더는 전쟁에서 가장 복잡한 계획 중 하나를 고안했는데, 이 공격은 네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째, 독일군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마주한 소련군의 대부분을 격파하고 볼가강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일단 볼가강에 도달하면 독일군은 대군을 형성하여 강력한 전선을 구축하고 대부분의 기갑부대는 남진해서 코카서스 유전을 점령하기로 헸다. 
이처럼 놀랍도록 복잡한 작전을 수행하려면 유능한 지휘관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Walther von Reichenau를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다가 그가 심장마비로 죽자 페도어 폰 보크에게 맡겼다. 유능하지만 똑똑하지는 않다는 평가를 받는 보크는 인기가 없었고 부하들과 거리가 멀었고 동료와도 불화가 심했다.
구데리안과는 사이가 무척 안 좋았고 리브와 룬트슈테트는 그에 대해 좋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특히 리브는 그를 규율주의자라고 평가했다. 1941년 모스크바공격에 실패한 그는 이번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보크는 다시 한 번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군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지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