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1부)

by uesgi2003 2012. 10. 19.

 

대한극장 무료 관람표가 있어서 영화 '조조'를 조조로 봤습니다.

 

1. 로우리스도 그렇다고 하더니만, 조조도 액션이 아닌 드라마입니다.

2. 적벽대전은 너무 많은 등장인물때문에 헷갈렸는데, 조조는 너무 간소합니다.

3. 드라마인데... 스토리도 엉망, 연출도 엉망입니다.

4. 주윤발의 조조 캐릭터는 평면입니다. 카리스마라고 우기는데 느껴지질 않습니다.

5. 그래서 상당히 지루합니다.

 

소품 스케일은 크지만 액션 스케일은 상당히 작습니다. 대규모 전쟁신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는 것이 좋습니다.

조조는 의외로 착하고 충성스러운, 간웅이 아닌 영웅이었습니다. 캐릭터 설정이 이상하다 보니, 처음에는 과묵하던 조조가 뒤로 갈수록 말이 많아지고 친절해집니다.

주윤발은 카리스마를 강조하느라 눈을 가늘게 뜨는데... 오히려 전위나 허저같이 보입니다.

하후돈에 대해 기대하시는 분이 있었던데, 조조와 조비 외에는 병풍입니다. 안대를 해서 하후돈인지 알았습니다.

 

중국 시대극(액션) 중에는 영웅 그리고 진용(초반)이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진용의 초반 30분 진시황시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애닳습니다.


서극 감독의 진용은 상당히 오래 전 영화인데, 혹시 구해서 보실 수 있는 분은 진시황시대가 끝나는 장면에서 미련없이 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뭔가 아쉬워도 평생의 명작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 이후 시대가 바뀌면서부터는 서극 감독의 장난기와 흥행욕심이 겹쳐서 실망을 하게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The Career Press라는 미국 출판사가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세계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지휘관 50명을 추려냈는데, 그들에 대해 아주 간단한 소개를 할까 합니다.

 

원래는 상당히 재미있는 주제라 책으로 출간해볼까 했는데,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의 깊이가 너무 얕아서 포기하고 여기에 그 명단만 인용하고 제가 따로 간단한 설명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인용할 이미지도 없어서 인터넷에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당히 논란이 많을 명단이기 때문에 다음의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1. 연대별 순서이지, 인물별 순위가 아닙니다.

2. 역사에 미친 영향에 가중치가 있습니다. 군사력이나 승패에 상관이 없습니다.

3. 미국 독자를 위해 정리한 명단이어서, 동양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합니다. 저자를 비롯한 그들에게 있어서 동양은 바로 중국과 일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그들에게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들이 모르는 중요 인물에 대해서는 언급조차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설명은 IE에서 보셔야 포맷이 깨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8. Qin Shih Huang
9. Julius Caesar
10. Attila the Hun
11. Muhammad
12. Charlemagne
13. Otto the Great
14. Toghril Beg
15. William the Conqueror
16. Saladin
17. Genghis Khan
18. Enrico Dandolo
19. Joan of Arc
20. Mehmed II
21. Franciso de Almeida
22. Hernán Cortés
23. Francisco Pizarro
24. Ivan IV
25. Yi Sun-sin
26. Tokugawa Ieyasu
27. Maurice of Nassau
28. 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Peter the Great
30. Robert Clive
31. George Washington
32. Benedict Arnold
33. Napoleon I
34. Horatio Nelson
35. Carl von Clausewitz
36. Simón Bolívar
37. José de San Martín
38. Sam Houston
39. Winfield Scott
40. Helmuth von Moltke
41. Ulysses S. Grant
42. Alfred Thayer Mahan
43. Togo Heihachiro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 - 시대불명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왕국을 건설한 전설에 가까운 왕으로,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통치기간이 기원전 2334년에서 2279년으로 알려져있지만 기원전 3800년으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서 시대의 오차가 상당히 큰 편이다.


미혼모 어머니가 사르곤을 강으로 흘려보냈고 악키(Akki)라는 정원사가 그를 키웠다고 한다. 정원사였던 사르곤은 지역 권력자의 꿈에 등장해 되었고 이를 두려워한 왕이 암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거꾸로 사르곤이 왕위에 오른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전설의 기본적인 흐름이다. 

 

 궁병을 기반으로 세력을 넓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최초로 통일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왕국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선조에게 멸망당했다. 


옆의 사진은 사르곤의 얼굴 부조로 알려져 있지만 손자 나람-신(Naram-sin)일 수도 있다. 


 

 

 





 

2. 해양족 (Sea Peoples) - 기원전 12세기~11세기

저자의 기준에 대해 갸우뚱하게 되는 가장 대표적인 항목으로, 역사의 흐름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해양족을 뽑았다면 아틸라대신에 훈족을, 징기스칸 대신에 몽골인... 으로 지역과 인종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저자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하자. 


해양족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킬레스, 메가멤논의 후손으로 에게해 주변에서 바다로 진출해 약탈을 했던 섬과 도시국가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해양족이 세력을 키웠을 때에는 이집트까지 진출해 정복을 시도했었다. 







해양족은 대부분의 약탈민족이 그렇듯이 자신들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대신에 이집트의 기록에 남겨져서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옆의 그림은 이집트 상형문자로 기록된 해양족이다. 




이집트 연안까지 진출해 당시 최강대국 중 하나를 정복할 기세였지만 이집트 람세스 3세가 궁수들을 동원해 근접무기 중심의 해양족을 상대로 나일 강 입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집트 정복에 실패한 해양족은 현재의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영토를 휩쓸며 지역 왕조를 해체시켰다. 

 

 

 

 

 

 

 

3.키루스 대왕(또는 사이러스 Cyrus the Great) - 기원전 576~529년

페르시아인의 지도자로서, 나누어져있던 2개의 이란왕국을 통합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세웠다. 그의 치세 동안 페르시아는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당시의 제국들인 메디아, 바빌로니아, 리디아 제국을 정복했고 이집트는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정복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그는 다민족국가인 페르시아 대제국의 융화를 위해 종교적 관용정책과 포용정책을 표방했으며 피정복민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정부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는데 이것이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등에게까지 전해져서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키루스 대왕은 세계최초의 인권을 정리한 것으로 유명한데, 영국 박물관(사진 참조)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을 보면 기원전 6세기에 이 정도의 인권을 생각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제국내 국가들의 전통, 관습, 종교를 존중하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관리나

신하도 무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어떤 누구도 보상없이 남의 물건이나 재산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짐이 살아있는 동안, 무임금의 강제노동을 금지시킬 것이다. 어느 누구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종교나 직업을 선택해도 좋다. 연좌제(친인척의 죄를 함께 처벌받는 것)는 없을 것이다. 노예를 금지할 것이며 모든 신하는 짐의 영토 안에서 노예로 남자와 여자를 거래하지 못할 것이다. 노예거래는 영원히 폐지되어야 한다...'

 

키루스 대왕의 영토로, 기원전에는 주로 이집트와 중동에서 역사가 기록되고 대제국의 흥망이 많았는데 그것은 4대 문명이 일어난 곳 중 두 곳이기 때문이다. 4대 문명은 메

 

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이집트 문명으로, 그 당시 유럽 등 다른 대륙의 문명은 원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4. 손자(Sun Tzu) - 기원전 544~496년

춘추전국시대의 전략가로 원래 이름은 손무이지만 손자라는 경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기원전 517년,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고, 손무는 일족을 따라서, 강남 지방 오나라(吳)로 피하여 오나라의 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알게 되었다. 손무는 그 후, 오나라의 수도 근처의 산간에서 칩거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집필했다.

그 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 왕 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합려가 손무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말하며 "선생(손무)의 병법 13편을 모두 읽었지만, 궁녀들을 조금이라도 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하자, 손무는 이것을 승낙했다. 궁녀 180명을 내 주며 훈련시키도록 하자 손무는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세워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고 장난처럼 여겼다. 그러자 손무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궁녀 둘을 처형하도록 하였고, 합려가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손무는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가는 궁녀를 뽑아 대장으로 삼고 훈련을 시키자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합려는 기분이 상했고, 손무는 그런 합려를 낮게 평가했으나 이후 합려가 손무를 중용하여 상장군을 삼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손무는 오나라의 군대를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초나라와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키울 때까지 무리한 군사 행동을 자제하였다. 손무의 전략에 따라 오군은 연전연승하여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후 진나라의 개입으로 오나라는 철군하였으나 그 후로도 오나라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패자의 위세를 떨쳤다. 

기원전 496년, 손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합려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손무와 오자서는 합려의 후계자 부차를 보좌하여 국력을 키운 뒤 월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부차가 패자가 될 무렵, 손무는 은퇴하여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손자의 병법은 2,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서양 지휘관의 필독서가 되었는데, 특히 서양의 전략/전술은 화력집중을 통한 승리를 강조하는 반면에, 손자는 전쟁은 가장 나쁜 해결방법이고 그 이전에 승리를 다지는 전략을 강조하고 있다. 손자 병법은 다음과 같은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시계편(始計篇), 2. 작전편(作戰篇), 3. 모공편(謀攻篇), 4. 군형편(軍形篇), 5. 병세편(兵勢篇), 6. 허실편(虛實篇), 7. 군쟁편(軍爭篇), 8. 구변편(九變篇), 9. 행군편(行軍篇), 10. 지형편(地形篇), 11. 구지편(九地篇), 12. 화공편(火攻篇), 13. 용간편(用間篇)

 

(우에스기 왈: 제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책 두 권이 있었는데, 코틀러교수의 마케팅원론과 손자병법입니다. 마케팅원론을 읽은 후에 마케팅이 제 천직이 되었고, 손자병법을 읽은 후에 이렇게 블로그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

손자병법은 중학교 2학년 때에, 물론 해설판으로, 읽었으니까 요즘 아이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편이었죠. 나이가 젊은 분들은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고전을 읽는 것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에 죄와벌과 같은 고전을 밤새워 읽곤 했습니다. 복사기가 없을 때라 손자병법 해설판 수 백 페이지를 베껴뒀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손자병법은 게릴라 전략전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알렉산드로스 대왕(또는 알렉산더, Alexander the Great) - 기원전 356~323년

 

부왕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32살의 나이로 죽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치세와 제국은 단명하였으나, 그의 정복에 따른 문화적 영향은 수백 년간 이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로, 뛰어난 전술 능력, 정복 활동, 그리스 문화의 동방 확산으로도 두드러진다.

 

신화 속의 영웅 아킬레스를 존경한 그는 신이 되고 싶어 정복의 원정에 나섰다. 당시 대제국이었던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소아시아를 침공해 10년 동안 연거푸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쳤으며, 시리아, 이집트, 메소포타이마, 페르시아, 박트리아를 정복하고 "세상의 끝과 거대한 외해"까지 가고 싶었던 자신의 열망을 좇아 인도를 침공했으나 결국은 전쟁에 지친 자신의 군대가 항명에 가까운 반발을 하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빌론에서 죽은 후에 제국은 분할되어 단명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의 가치는 대단했다. 역사상 최초로 동서양 문화가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리스 문화가 동양에 유입되어 헬레니즘 문화가 만들어졌다. 헬레니즘 문화는 로마제국의 기본 학문이 되었고 15세기 중반까지 비잔티움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아버지 필리포스가 만들고 알렉산드로스가 꽃피운 중장갑 보병의 밀집대형 팔랑스는 기병(중장갑과 궁기병)의 기동우회전술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고 다른 국가들의 기본 전술이 되었습니다.

 

(우에스기 왈: 제가 알렉산드로스 원정에 대해 한 번 정리했던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군요. 제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자료로만 읽고 착각한 것인지... 워낙 유명한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어도 이미 자료가 많기 때문이죠.)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 기원전 340~293년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은 인도 전체를 뒤흔들어 놓아 인도에 통일국가가 생길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당시 인도는 수 많은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장 큰 왕조 중 하나가 난다(Nanda)왕조였고 찬드라굽타 마우랴는 난다 왕조(옆의 그림 참조)의 장군이었다.

기원전 역사답게 그의 성장배경에는 다양한 신화가 존재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알렉산드로스와 연결된다. 난다 병사였던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의 군벌을 정복하는 것을 보고 인도를 통일하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난다 왕조에게 모욕을 받은 브라만(인도 성직자 계급) 카우틸랴(Kautilya)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마우랴는 반란을 일으켜 기우너전 322년에 반란을 일으켜 마우랴 왕조를 세웠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에 죽으면서 4명의 장군이 제국을 나누어 통치했고 바빌론을 맡았던 셀레우쿠스(Seleucus)가 알렉산드로스의 인도원정로를 따라 동진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던 마우랴와 충돌하게 되었다. 코끼리를 대거 동원한 마우랴는 셀레우쿠스의 부대를 궤멸시키고 카시미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합병했다(옆의 그림 참조).

 

 

마우랴는 세력을 계속 넓혔고 그의 자손이 인도를 거의 통일했다(옆의 그림 참조). 찬드라굽타 왕조는 140년간 지속되었고 왕조 국가였으면서도 상당히 민주적이어서 도시는 관료를 직접 선출할 자치권을 가졌다. 수명이 얼마 안남은 것을 안 마우랴는 왕위를 버리고 수도승이 되어 동굴에 들어가 굶어죽었다.

 

 

 

 

현대전의 전차와 비교되는 코끼리는 인도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점차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카르타고까지 확산되었다.

인도코끼리는 아프리카코끼리에 비해 성질이 순한 편이어서 전투에 사용될 수 있었다.

 

 

 

 

 

 

7. 한니발(Hannibal) - 기원전 247~183년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가장 유명한 기원전 명장 중의 하나로 그가 로마대군을 전멸시킨 칸나에(Cannae) 전투는 포위섬멸전의 교과서가 되었다.

만약 그가 본국 카르타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면 로마의 역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두 형제 하스드루발과 마고가 함께 로마 정벌에 참여했다.

 

 

 

 

당시 강대국 중 하나였던 카르타고가 지중해와 시실리 패권을 두고 벌인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전하자, 아버지 바르카는 근거지를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으로 이주해 광산을 개발하고 군사력을 키워 로마에 대한 보복전을 준비했다.

 

 

 


 

 

2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진 기원전 218년, 28세였던 한니발은 10만여 명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진입했다. 겨우 보병 2만, 기병 6천 밖에 안남았지,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도로를 따라 진군할 것으로 대비해 마르세이유에 집결해있던 로마군을 완전히 따돌렸고, 험한 지역을 진군하며 진격로에 있던 부족들과 동맹을 맺어 배후와 보급선을 탄탄히 다져두어 장기간의 원정에 대비했다.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나폴레옹도 한니발의 진격로를 따라 알프스를 넘은 것이 유명하다.

 

 

 

한니발의 군대에 대패를 거듭한 로마군은 결전을 피하지만,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8만 7천명의 대군을 조직한 뒤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에로 향한다. 한니발의 군대는 5만 명이었고 그나마 갈리아와 같은 야만족 용병이 대부분이었지만,  중앙에 일부러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측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술로 겨우 6,000명을 잃으면서 7만명의 로마군을 죽이고 1만을 포로로 잡아 로마를 해체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같은 도시는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로마군을 쫓아내고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의 전부를 잃었으며 또한 시칠리아에마저 적을 두게 된다.


한니발과의 결전을 피하고 대신에 본거지인 스페인과 카르타고부터 무너뜨리려는 새로운 전략에 따라, 한니발의 모든 것을 모방한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스페인에서 카르타고 식민지를 모두 무너뜨리고 한니발의 동생도 죽였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로 원정에 나서자, 본국의 구원요청을 받은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르타고에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던 로마는 카르타고의 성벽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했고 소금을 뿌려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우에스기 왈: 미국 남북전쟁은 앞으로 3개월 정도의 장기 연재가 예상되어서 잠시 인물에 대한 외도를 해봤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저작권 문제도 있고 위키와 같은 인터넷 자료가 더 잘 되어 있어서 이리 저리 자료를 찾고 정리하다 보니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습니다.

다음 에디터가 수정할 때마다 황당한 오류-문단나누기와 폰트 등-를 일으키는 것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있습니다.

1부는 한니발까지만 정리하고 다음 2부는 좀 더 많은 분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