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대/기타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2) - 샤일로 전투 (2부)

by uesgi2003 2012. 10. 13.

 

미국 남북전쟁 이야기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이 미국에서 상영되고 있어서 한국 개봉 전에 배경설명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자 시사회에서 혹평 일색이라는 소문이 들려와서 '이거 예상이 빗나갔는걸'... 하면서 실망했는데 다행히 호평도 상당한 모양입니다. 영화가 대박이어야 제 이야기도 도움이 될텐데요...

이번 기회에 저도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남북전쟁에 대해 한 번 정리해보고 영화 '링컨'도 대박이 터져서 제 이야기가 배경설명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옵티머스 G의 대란의 해프닝 이어폰에 대한 리뷰가 나오기 시작하는군요.

18,000원의 가격으로 200,000원 이어폰에 못지 않은 성능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란이 일어났고 음악을 끼고 사는 저도 3개나 주문했습니다. 집에서 번역할 때에는 주로 GRADO RS-2 헤드폰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이어폰은 사실 필요가 없는데... 마케팅 출신이다 보니 궁금한 것은 참지를 못하고 직접 확인해봐야 합니다. 

분명히 높아진 기대치때문에 실망하겠지만 그래도 18,000원 가격대의 이어폰으로는 상당한 만듦새와 성능은 할 것으로 보이고, 딸아이들과 조카 선물로 충분한 가치를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리고 지난 1부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하다가는 주요 전투 5개 정도 후에는 책 한권 분량이 나올 것 같아서 2부 부터는 과감하게 쳐내려고 했는데 제가 좋아서 하는 작업이라 슬그머니 다시 원상복귀되고 말았습니다. 과감하게 포기하지 않으면 샤일로만 4부이상 연재되겠군요.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2) - 샤일로 전투 (2부)

밀 스프링스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남군의 우익은 완전히 노출되었지만 다행히도 켄터키 동부의 지형이 워낙 험악해서 북군의 토마스 장군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봄이 되면 북군의 주력이 총공격할 것이 분명한데, 설상가상으로 컴버랜드와 테네시 강 입구 방어를 위해 만들었던 헨리와 도넬슨 요새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헨리 요새는 자리를 잡을 때부터 어이없게도 저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테네시 강의 수위가 높아질 때마다 물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 요새 사령관 로이드 틸그만(Tilghman)은 헨리 요새로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맞은 편 고지에 요새를 다시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

헨리 요새에서 20km 떨어진 도넬슨 요새의 위치는 훨씬 좋았지만 존스톤 장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강되지 않았다. 

존스톤 장군은 틸그만 중장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북군 정찰대는 헨리 요새의 약점을 보고했고 공격적인 그랜트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림 설명: 샤일로 전투의 전황입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잘 봐두시기 바랍니다.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되며 대부분의 그림을 클릭하면 커집니다.

 

북군은 처음에 3척의 증기선에 두꺼운 목재를 둘러친 전함을 만들었지만 정찰용으로는 쓸만해도 요새의 중포를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강철판으로 둘러싼 새로운 전함을 만들었다. 마치 거북이를 닮은 추한 모습이었지만 낮은 배바닥과 13문의 중포로 강에서의 전투에 적합했다.

남군에 비해 월등한 생산력을 가진 북군은 7척의 강철전함을 제작했고 서부 강 항구 이름을 따서 카이로, 루이스빌, 피츠버그, 마운드 시티,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즈, 캐론델릿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 척의 구형 배에 엑세스와 벤톤에도 강철 판을 입혔다.

 

그림 설명: 이번 이야기의 그림자료들은 삐까닥한데, 모처럼 제가 가진 자료를 스캔했습니다. 워낙 두꺼운 책이어서 스캔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U.S.S. 벤튼(Benton)으로 북군이 강에서 사용한 전함 중에 가장 크고 강력한 함선이었으며 16문의 대포를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강철전함의 위용을 확인한 그랜트는 홀렉 장군에게 공격 허가를 요청했지만 오만한 홀렉은 공격계획을 연기시켰다. 그러나 전과를 바라던 링컨과 다른 정치인의 압력을 받은 홀렉은 마지못해 공격을 허가했다.

1862년 2월 2일, 그랜트는 강철 전함을 선두에 세우고 수송선에 17,000명의 병력을 싣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헨리 요새는 북군이 남부에 상륙해 남군과 벌인 샤일로 전투를 여는 전초전이었다.

 

그랜트는 헨리 요새의 수비대가 항복한다면 도넬슨 요새의 남군 5,000명도 바로 항복할 것으로 기대했다.

비로 불어난 강물 때문에 제 시간을 맞출 수 없게 되자 요새 수비대가 증강될 것을 염려한, 그랜트는 함대 사령관 앤드류 푸트(Foote)에게 3척의 목재전함과 4척의 강철전함만 가지고 2월 5일 헨리 요새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림 설명: 큰 그림으로 보세요. 헨리 요새의 6인치 대포가 자폭해서 하사 한 명이 죽고 나머지 포병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의 대포는 이처럼 자폭하는 경우가 많아서 포병은 상당히 위험한 병과였습니다.

 

그랜트의 염려와 달리 헨리 요새의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였다. 높아진 수위때문에 여러 개 포대가 물에 잠겼고 틸그만은 요새를 버리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수비대 2,500명 중에서 겨우 150명만 도넬슨 요새로 먼저 보냈는데 하필이면 포수를 먼저 보냈던 것이다.

 

헨리 요새를 포격하고 있는 북군의 전함들입니다. 보통은 육상포대가 훨씬 위력적인데, 북군의 전함전력이 워낙 압도적인데다가 남군의 판단착오로 포병을 미리 뺀 상태라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북군 전함이 남쪽 방벽 300m 지점까지 붙어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남군도 푸트의 기함 신시내티를 파손시키고 에섹스의 증기 보일러를 부숴 전열에서 빠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일방적인 전투였다. 70분 간의 포격전 끝에 헨리 요새의 17문 중에 4문만 사용할 수 있었고 틸그만은 북군 함대에 항복 깃발을 내걸었다.

그랜트는 단 한 명의 보병도 잃지 않고 헨리 요새를 함락시키자 워싱턴에 '헨리 요새 장악'이라는 전신을 보냈다.

그랜트는 2월 8일에 도넬슨 요새도 공격하고 싶었지만 집중호우로 되었고 2월 12일 북군 2개 사단이 도넬슨 요새의 배후를 끊었다.

 

북군이 다가오자, 존스톤은 도넬슨 요새에서 결전을 치를 것인지 아니면 헨리 요새처럼 포기할 것인지 격론을 벌였다. 결국 절충을 택해 존 플로이드(Floyd)에게 12,000명의 병사를 줘서 도넬슨 요새를 보강하기로 했다. 도넬슨 수비대가 북군의 발목을 잡아준다면 콜럼버스, 보울링 그린에 배치된 남군을 데려올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도넬스 요새를 실제로 스케치한 그림입니다.

 

작전이 지연되면서 남군의 병력이 더 많아졌지만, 그랜트는 2월 13일에 헨리 요새와 같은 행운을 기대하며 보병사단을 남군의 참호로 전진시키면서 전함이 지원사격을 할

때까지 전투를 벌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령을 무시한 지휘관들은 제각기 공격에 나섰다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도넬슨 요새로 북군이 돌격하고 있습니다.

 

2월 14일, 그랜트는 5,000명의 병력을 보충받아 3개 사단으로 편성했고 해군제독 푸트(Foote)가 6척의 전함을 동원해 도넬슨 요새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도넬슨 요새도 지지않고 대응포격으로 전함에 큰 피해를 입혔고 부상당한 푸트는 후퇴했다. 

전함의 공격을 막아낸 요새 지휘관 플로이드는 농성전이 길어지면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북군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140km 떨어진 내쉬빌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우에스기 왈: 수비대 규모가 17,000명 이상인데도 탈출한다는 것이 이상할텐데, 앞은 강이고 뒤는 북군에게 포위된 상황에서는 숫자가 더 많은 것이 치명적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설명했듯이 남군은 이리 저리 긁어모은 지원병 수준에 무장도 북군에 비해 심각하게 뒤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군수품 지원도 없기 때문에 식량과 탄약도 곧 바닥나겠죠.

그래서 오래 전부터 패잔병이나 피난민이 작은 성으로 도망가는 것을 일부로 길을 터주며 막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당시 군수품 재고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존스톤이 12,000명을 더 들여보낸 것이 판단착오였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당시 남군이 주로 사용하던 구식 수발총 D.Nippes 1840 모델입니다. 수발총은 부싯돌이 철제화약접시를 때려 격발하는 방식입니다. 이 소총의 진품은 약 300만원 정도에 경매되고 있군요.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처음에는 기대대로 진행되었다. 오전 6시, 남군은 고함을 지르며 북군의 참호에 뛰어들었고 기습에 놀란 북군은 첫 번째 포위망을 내줬다. 그러나 오전 8시, 새로 편성된 3개 사단의 일부가 응원을 왔고 그랜트도 직접 현장에 뛰어들었다.

양쪽의 총격전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랜트는 남군이 참호를 비우고 공격에 나섰다고 판단다고 좌익의 스미스 장군에게 남군의 참호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미스는 앞장서서 참호로 돌격했고, 그 동안 남군에게 밀렸던 우익도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해군의 전함도 다시 포격을 시작했다.

남군의 돌격대를 지휘했던 필로우(Pilow)는 북군 포위망을 성공적으로 돌파하기 직전에 정지시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북군의 반격에 밀린 남군은 다시 요새 안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포로가 되기 싫었던 플로이드와 필로우가 몇 명의 지휘관과 함께 증기선을 타고 남쪽으로 탈출하면서 도넬슨 요새의 항복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랜트의 무조건 즉시 항복 요구를 들은 기병대 대령 네탄 포레스트는 7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탈출했지만 나머지 15,000명과 65문의 대포는 북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미국 남북전쟁 최초의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우에스기 왈: 플로이드와 필로우의 탈출은 많은 비난을 받았던 반면에 부하들과 남아서 포로가 되었던 버크너-Buckner 장군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주지사 출신이었던 플로이드는 버지니아 여단만 데리고 탈출해, 데이비스 대통령이 지휘관직을 박탈합니다.)


헨리와 도넬슨 요새가 무너지자 남군의 수비선에 큰 구멍이 생겼다.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던지 존스톤은 "완전히 졌다"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컴버랜드와 테네시 강을 장악한 북군은 이제 멤피스(Memphis)와 내쉬빌을 연결하는 철로를 끊으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넓게 분산되어 있던 남군이 고립되기 때문에, 존슨은 서둘러 이들을 후퇴시켜야만 했다. 보울링 그린(Bowling Green)을 포기하면 중요한 켄터키 주 경계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군수산업의 중심지인 내쉬빌도 포기해야 하는데, 다가올 결전을 위해서는 그 수 밖에 없었다. 


존스톤은 14,000명의 병사를 직접 이끌고 보울링 그린에서 내쉬빌로 후퇴했고 북군의 50,000명이 그 뒤를 추격했다. 추운 날씨에 비가 겹치면서 30%에 가까운 병사가 앓아누웠고, 그렇지 않아도 3배가 넘는 북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수 없었던 존스톤은 2월 18일에 내쉬빌에서 머프리스보로(Murfreesboro)를 향해 후퇴했다. 북군을 두려워한 수 백 명의 시민이 남군 행렬에 끼어들면서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내쉬빌은 2월 25일에 함락되었고, 같은 날 북서쪽으로 220km 떨어진 켄터키 콜럼버스의 폴크 장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북군이 미시시피 강을 건너지 못하게 막아왔었는데, 폴크가 후퇴하면서 북군의 포프(Pope)가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미주리와 미시시피의 남군 요새를 점령했다. 

존스톤에게 언론의 비난이 쏟아졌고 이제는 부하들까지도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이비스 대통령은 존스톤을 계속 지지했고 남군의 후퇴는 계속되었다. 2월 28일, 머프리스보로를 버렸고 3월 15일에는 알라바마로 후퇴했는데 이제 켄터키뿐만 아니라 테네시 중부는 북군의 영토가 되었다. 


상황이 이 정도로 악화되자, 섬터 요새와 매너서스(Manassas)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영웅으로 떠오른 피에르 뷰리가드(Pierre Beauregard) 장군이 서부전선으로 급하게 호출되었다.  

존스톤은 뷰리가드에게 남부 전선의 곳곳에서 병력을 차출해서 테네시 주경계 바로 남쪽의 미시시피 코린쓰(Corinth)에서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멀리서 급하게 달려오고 있는 폴크도 합류할 예정이었다. 

심각한 기관지염을 앓고 있던 뷰리가드였지만 최선을 다해 병력을 모았다. 뉴 올리온즈에서 5,000명, 모바일에서 10,000명을 모아왔고 3월 24일, 폴크가 합류하면서 40,000명의 병력이 집결했다. 코린스는 어떻게든 방어하기로 마음먹은 존스톤은 북군의 배치를 탐색하는 한 편 반격준비에 몰두했다. 

 

헨리와 도넬슨 요새에서 예상하지 못한 대승을 거둔 그랜트는 상관인 홀렉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발목이 잡혀있었다. 부하의 갑작스런 성공을 시기한 것도 있고 그가 다시 폭음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서 홀렉은 그랜트를 3월 4일 해임하고 스미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홀렉은 스미스에게 테네시 강 동쪽 강변의 사반나(Savannah)까지 전진한 후에 셔먼 장군이 켄터키 파두카(Paducah)에서 데려오는 병력과 연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홀렉은 남군의 통신과 운송체계를 교란시키되 전면전은 당분간 피할 생각이었고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으면 후퇴해도 좋네"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미스는 3월 11일에 사반나에 도착했지만 말에서 떨어진 상처가 감염되어 5주 후에 죽었고 홀렉은 어쩔 수 없이 그랜트를 다시 불러들였다.

이제 40,000명의 북군은 피츠버그 랜딩(Pittsburg Landing)의 서쪽과 남쪽 시골, 샤일로 교회 근처에 넓게 분산되어 캠프를 차렸는데 남군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휴식을 마음껏 즐겼다. 심지어 방책을 세우거나 참호를 파지도 않았는데, 셔먼이 나중에 인정했듯이 그런 준비는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서 일부러 안했다고 한다.

그랜트는 사기가 꺽인 남군을 공격하려고 애를 썼지만 홀렉은 여전히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3월 16일에 170km 떨어진 내쉬빌에서 뷰엘(Buell)의 부대가 출발했기 때문에, 그 부대를 기다렸다가 2배가 넘는 병력으로 전투를 벌이면 승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랜트의 북군의 이동로입니다.

 

그러나 뷰엘은 특유의 조심성을 가지고 전진한데다가 악천후가 겹쳤고 후퇴하던 남군이 북군이 이용할만한 것은 모조리 파괴해서 뷰엘은 3월 25일이 되어서야 내쉬빌을 떠났다. 부서진 다리를 놓을 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덕(Duck) 강은 4월 2일에나 건너 사반나로 전진할 수 있었다. 뷰엘의 전초부대가 4월 5일에 사반나에 도착했지만 테네시 강을 건너 피츠버그 랜딩까지 갈 어떤 배도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결국 3일이나 더 지체된 후에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북군의 병력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존스톤은 뷰엘의 부대가 그랜트와 합류하기 전에 선공을 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남군 후속부대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코린쓰에 있는 병력만 가지고도 샤일로 교회와 피츠버그 랜딩의 북군과 해볼한만 전력이었다. 존스톤은 4월 2일 뷰리가드의 계획을 받아들여 병력을 4개 군단으로 나누어 브래그(Bragg), 폴크(Polk), 하디(Hardee), 브렉킨릿지(Breckinridge)에게 맡기고 코린쓰와 샤일로 교회 중간의 몬터레이(Monterey)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4월 5일 새벽에 공격을 감행할 예정이었지만 폭우가 내린데다가 대군이 넓게 산개해 이동한 탓에 혼란이 일어나서 4월 6일로 하루 연기되었다.  

4월 6일, 치욕적인 2개월 간의 후퇴를 마지막으로, 존스톤은 방심하고 있는 북군을 테네시 강으로 밀어넣고 서부전선의 방향을 완전히 반전시킬 준비가 되었다.  

 

샤일로 전투 2일 전, 북군 병사가 그린 샤일로 교회입니다. 대도시가 아닌 시골 평원이나 숲에서 벌어진 전투가 많기 때문에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이런 작은 통나무 집 하나가 전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