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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미국의 배신으로 물거품이 된 필리핀 독립전쟁

by uesgi2003 2013. 7. 23.


제가 호러(고어물 포함) 영화라면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팬이어서 앵커베이 등에서 DVD로 리마스터링된 무삭제본을 즐겨 구입하곤 했었죠. 이제는 나이를 먹으니까 고어는 질색이고 스토리가 있는 공포물을 좋아하게 됩니다. 스토리가 있더라도 최근에 리부트된 이블데드와 같은 강도가 센 것보다는 무서운 이야기2의 탈출편과 같은 재치가 넘치는 이야기를 좋아하게 됩니다. 최근에 본 공포영화 중에는 캐빈 인 더 우즈가 가장 좋더군요. 


이번 이야기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심지어 당사자 자신들도 잊고 있는 필리핀 독립전쟁 이야기입니다. 원 자료가 미국자료라 아무래도 필리핀보다는 미국 시각인데 일부러라도 필리핀쪽으로 틀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이 아닙니다. 강대국의 역사로, 그들의 시각으로 본다고 해서 우리가 강대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5,000년 역사 내내 때리기보다는 맞은 것이 훨씬 많은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다른 약소국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당연하겠죠. 요즘은 인지부조화가 대유행이라 강남 그리고 미국과 가치관을 함께 가져가는 것으로 정신적 사치를 즐기는 분들이 많아서 사족을 달아봤습니다. 


필리핀 독립전쟁


한국전쟁은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있어서 미국의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1899~1902년에 벌어진 필리핀 독립전쟁은 뭐라고 불러야할까? 약 126,000명의 미국병사가 참전해 4,200명이 죽었던 이 전쟁을 기억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전쟁을 뭐라고 불러야 할 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필리핀 반란, 필-미 전쟁, 필리핀 혁명, 필리핀 전쟁으로 보통 부른다 (여기에서는 필리핀 독립전쟁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전쟁은 발발당시부터 논쟁거리였는데 미국이 승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도대체 왜 전쟁을 일으켰고 어떻게 이겼는 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에 불붙어 필리핀 영토를 노린 것일까? 아니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충돌일까?


필리핀 독립전쟁은 스페인-미국 전쟁이 끝나고 6개월 후인 1899년 2월 4일에 시작되었다. 1898년 8월 파리에서 열린 평화협상 중에 미국 윌리암 맥킨리 행정부는, 300년 이상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군도를 병합하기로 결정했다. 스페인은 12월 10일에 필리핀을 미국에게 양도하는 대신에 2천만 달러를 받는 파리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스페인은 쿠바를 포기했고 푸에르토 리코와 괌을 미국에게 내주었다 (미국은 필리핀으로 가는 원정길에 괌을 점령했다.)


필리핀의 독립운동은 1800년대 중반부터 불붙기 시작했지만 조약에서 필리핀의 독립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1890년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그 중에는 그라시아노 로페스 하에나, 마르세요 델 필라르와 호세 리살 등이 있었고 이들은 일루스트라도스(선각자)라고 불렸다. 스페인이 1892년 7월에 리살을 체포하자, 노동자 계급의 무장투쟁가 카티푸난(인민사회)을 만들었는데 필리핀을 독립시키려는 비밀동맹이었다. 


카티푸난 무장군인데, 스페인을 상대로 할 때가 아니라 미군을 상대로 할 때의 모습입니다. 


카티푸난은 스페인 식민정부에 저항하는 동시에 '도덕과 시민' 투쟁도 함께 벌였다. 도덕투쟁은 예절, 위생, 공중도덕을 교육하고 미신을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시민투쟁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노동자와 중산층이 주축이 된 30,000명 정도의 카티푸난 독립운동조직은 1896년 8월에 스페인 식민정부를 상대로 전국적인 무력투쟁을 일으켰다. 8월 26일에는 스페인 군사시설을 공격하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스페인이 리살을 반란죄로 12월 30일에 마닐라에서 처형했고 저항의 불길을 더욱 거세졌다. 1897년 3월, 루손 섬 출신의 28살의 에밀리오 아귀날도가 무장투쟁의 지휘를 맡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오하이오 주지사 윌리엄 맥킨리는 1896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필리핀 무장투쟁을 이끌게 되는 아귀날도의 사진입니다. 중국계 혼혈이어서 중국인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아귀날도의 리더십에 도전한 노동자 계층의 리더 보니파시오를 반역혐의로 처형하고 1897년 5월에 비악-나-바토(Biak-na-Bato) 혁멍공화국 건국을 주장했다. 공화국 구성은 1895년에 쿠바의 독립운동가가 스페인을 상대로 만든 공화국을 본 받은 것이었다. 

스페인과의 전투는 1897년 내내 계속되었고 마체테와 비슷한 볼로 칼을 휘두르는 백병전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스페인은 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12월 15일, 이미 쿠바에서의 전쟁으로 힘겨운 스페인은 독립운동가들을 석방하고 보상하며 아귀날도의 지휘부가 홍콩으로 무사히 망명할 수 있게 배려한다는 조건에 합의했다. 


아귀날도와 망명정부가 홍콩에 있는 동안, 미국의 아시아 파견함대와 조지 듀이 사령관이 마닐라만을 1898년 5월 1일에 급습해서 단 6시간의 전투만에 스페인 함대를 전멸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듀이는 10척의 스페인 함선을 침몰시켰고 미군은 한 명만 죽었다. 

브랜즈라는 역사학자는 "미군이 지구 반대편에서도 대승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듀이의 필리핀 전투는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미국에 그 소식이 전해지자 마치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라고 기록했다. 


17일 후에, 맥킨리는 스페인의 필리핀 지상군을 상대하도록 웨슬리 메리트 장군과 원정대를 파병했다. 미국정부는 스페인을 상대로 협력하자며 아귀날도에게 권유했고 그는 2일 후인 5월 19일에 마닐라에 입성했다. 

아귀날도는 도착 즉시 듀이를 만나 스페인이 물러가면 미국이 필리핀 독립을 보장할 것인지 물었다. 아귀날도는 나중에 "나를 데리고 온 함장 에드워드 우드는 내가 거듭 확인하자 미국은 크고 부유하기 때문에 식민지가 필요없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러면서 필리핀 독립을 위해 스페인군을 상대로 힘을 합치자고 했다"라고 말했다. 


홍콩 망명조직과 아귀날도의 사진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자신이 1899년에 낸 자료, 진정한 필리핀 혁명에서, 그는 듀이도 우드의 장담에 힘을 보탰으며 "미국은 필리핀 원주민을 보호하고 그들이 스페인의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아귀날도에 따르면, 듀이는 심지어 "미국은 영토, 수입과 자원이 충분하기 때문에 식민지가 필요없으며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듀이는 아귀날도가 "스페인을 상대로 민중이 봉기하고 단기간의 강력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지"를 거듭해서 물었다. 


나중에 듀이가 부인하게 되는 이 약속에 따라, 아귀날도는 1898년 6월 12일에 필리핀 독립과 혁명정부를 주장하며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언했다. 그는 "신의 뜻에 따라 독립이 눈앞에 다가왔다. 미국은 스페인의 쿠바 독재때문에 관계를 단절하고 우리 조국으로 보호막을 넓히고 있다. 미국함대가 스페인의 증원을 봉쇄할 것이다. 바다를 보면 미국 국기가 날리는 대함대를 볼 수 있다. 그들은 구원자들이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필리핀의 자치를 어느 정도는 인정할 것처럼 보였다. 미국인 중에 필리핀의 위치를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기록에 따르면 스페인을 상대로한 독립운동을 "막연하게나마 동정하는" 분위기는 있었다. 미국인은 최소한 말만이라도 미국독립 당시부터 반식민주의, 반독재주의 운동을 지지해왔다. 브랜즈는 "미국인들이 상당히 잘 알고 있던 쿠바혁명과 비교하면, 필리핀은 미국대중에게 있어서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라고 말했다. 


필리핀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기업, 군대와 의회 리더들의 압박을 받은 맥킨리는 가을 총선 캠페인에서 필리핀 합병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우리는 충분한 돈이 있으며 방대한 수입원이 있으며 이론의 여지가 없는 국가신용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군대 다음에 기업이 진출한다면 새로운 시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월터 르페버에 따르면 맥킨리는 "필리핀이 이미 미국의 이익과 깃발을 꽂아두었다. 깃발을 내려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셈이었다. 그리고 대중은 당연히 "아니!"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고 "필리핀을 해외기지로 보유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다시 대중은 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맥킨리는 "좋습니다. 여러분이 필리핀을 원하는군요"라고 말했다. 


맥킨리와 미국의 행태에 대한 그림입니다. 


1898년 5월 25일 첫 번째 미군병력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들은 6월 1일에 상륙했고 2주 후에 맥킨리 행정부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혼란의 내전이 벌어지거나 미군이 떠난 후에 일본이나 독일이 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미국기업의 이익과 지정학적 목적을 위해 필리핀을 합병하기로 했다. 1898년 8월에 프란시스 그린 장군은 "미국이 이 섬나라를 떠난다면 무정부 혼란과 내전이 벌어져 외세의 개입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필리핀만 노린 것이 아니었다. 1898년 6월 15일에 맥킨리가 필리핀 합병을 선언한 날에 하원은 하와이 합병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맥킨리는 7월 7일에 동의했다.

그 직후, 미국의 반제국주의 리그 (앤드류 카네기, 마크 트웨인, 윌리암 제임스, 새무엘 곰퍼스)는 필리핀 합병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카네기는 "영국과 인도처럼 미국과 필리핀도 그렇게 될 것이다. 격렬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미국에서는 필리핀 합병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지만, 그것을 모르는 아귀날도의 군대는 루손 섬에 상륙한 미군과 함께 스페인군을 공격해 밀어내고 있었다. 8월 13일, 스페인이 미국을 상대로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밝은 바로 다음 날, 미군은 "가상전투"를 벌인 후

에 마닐라에 진입했다. 이미 스페인군이 무기를 내려 놓았는데도 가상전투를 벌인 이유는 아귀날도의 독립군에게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스페인 총독 페르민 하우데네스 알바레스는 미군 제8 군단 파견군의 메트리트와 듀이와 미리 만나 스페인군의 명예를 살려주는 가상전투를 벌이기로 합의했었고 스페인군은 미군이 나타나자 마자 백기를 내걸었다. 


산 후안 요새의 스페인 수비대를 공격하는 미군입니다. 이 전투는 쿠바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메리트는 마닐라에 입성하자 마자 바로 미군정을 설치했고 자신을 총독으로 그리고 아더 맥아더(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스페인과 미국의 평화협상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늘어지자 아귀날도는 자신도 협상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질없는 요구를 계속 했다. 

그러던 중에 필리핀을 합병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귀날도는 "그 소식은 혁명군에게 마른 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12월 1일, 배반당한 아귀날도는 혁명군이 이제 미군과 싸워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선언했다. 


맥킨리는 12월 21일에 '우호적인 합병선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은 미국이 필리핀을 여유하며 이에 순응하는 필리핀인들에게 혜택을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맥킨리가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침략자나 정복자가 아니라 친구로서 원주민의 가정을 보호하고 고용, 인권과 종교자유를 보장한다. 적극적 또는 어쩔 수 없이 미국정부에 협조하는 사람들은 모두 지원과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엄중한 법을 적용하겠지만 가능한 한 중벌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필리핀 거주민의 신뢰, 존경과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전폭적으로 보장하면서 우호적인 합병을 한다."

"미국에게 합병된 후에 안정적인 정부가 가져다 줄 축복을 방해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는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아귀날도와 독립군(사진참조)은 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9년 1월 1일, 아귀날도는 필리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신분을 주장했고 미국은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 3일 후에 아귀날도는 맥킨리의 선언을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주장이라고 비난했고 미국과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1899년 2월 4일, 미군 순찰대가 3명의 필리핀 병사를 죽인 후에 아귀날도가 마닐라 외곽의 미군을 공격하면서 필리핀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ㅓ. 이후 전투에서 미군은 아귀날도 부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이들의 저항은 얼마 가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전쟁상 엘리후 루트는 1900년에 한 연설에서 필리핀 독립군의 저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월 4일, 루손 중심부에 사는 부족인 타갈로그스 병사들이 중국계 혼혈인 아귀날도를 따라 마닐라의 아군 수비대를 공격해왔습니다. 중과부적의 어려운 전투였지만 반란군을 사방으로 쫓아보냈습니다."


키플링과 같은 반전주의자는 필리핀 원주민의 저항을 동정했지만 필리핀을 방문한 알버트 베버리지 인디아나 상원의원은 "필리핀인은 자치권을 가질 능력이 안된다. 그 민족은 게으르고 우둔하다. 마치 자신이 가진 물소처럼 바보같은데 경제의 연속성도 없다. 그들은 공장에 놀러온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라는 의회연설을 했다. 

1899년 2월 15일자 뉴욕타임즈 사설은 필리핀 민족을 "정글에 사는 애기들"이라며 "아직 유아기를 지나지 않아 정신과 육체 모두 무능한 민족"이라고 했고 아귀날도를 "사악한 거짓말장이, 모든 것이 무능한 리더"라고 공격했다. 


연도별 독립전쟁 상황입니다. 큰 그림으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전쟁 초반은 미국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무장이나 구성이 빈약한 독립군은 미주둔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주둔 총독은 1898년 8월 29일에 메리트의 후임으로 엘웰 오티스가 취임했다. 오티스는 남북전쟁 당시에 포토맥군 대령으로 복무했고 1870년대의 인디언 토벌전에 참전했었다. 미군은 아귀날도를 추격했고 3월에는 센트럴 루손의 말로로스 수도를 점령했다. 10월이 되자 아귀날도의 군대는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필리핀 독립전쟁을 끝난 것처럼 보였다. 


산 속에 숨은 아귀날도는 1900년 봄부터 히트앤드런의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 때에는 맥아더가 다시 오티스의 후임으로 총독에 올라 말로로스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그러나 미군은 험난한 필리핀의 정글을 누비며 비정규전을 펼치기 적당하지 않았다(사진참조). 국경과 제국의 전쟁의 저자 데이비트 실비는 "미군은 처음에 뭘해야 할 지도 알지 못했다. 적은 보이지 않았고 미군은 몇 명만 죽거나 다치더라도 계속 공격을 받았다. 인수렉토스라고 불리는 공격측은 정글로 사라졌다. 시민들도 그들을 숨겨주었다"라고 기록했다. 


필리핀 전쟁은 1990년 대선정국의 뜨거운 이슈가 되었고 맥킨리-루즈벨트 파트너십이 무난한 낙승을 거뒀다. 맥킨리는 선거운동 중에 전쟁을 곧 끝낼 것이며 미군은 철수할 것이라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맥아더가 전쟁은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고 경고를 했고 결국에는 그의 판단이 옳았다. 전쟁은 그 후로도 2년 동안 계속 되었다. 


1901년 3월 23일, 맥킨리가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3주 후에, 미군은 루손 북부 정글을 급습해서 아귀날도를 체포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아귀날도는 즉시 미국에게 복종한다는 뜻을 밝혔고 독립군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게릴라전은 끝나지 않았다.

미군은 게릴라를 토벌하는 동시에, 맥킨리가 우호적인 병합을 하겠다고 밝혔듯이 학교, 병원, 자치정부 건물을 세우기 사작했다. 건설작업은 맥킨리가 1901년 9월 6일에 암살된 후에도 계속되었고 독립군은 1902년 4월에 항복했다. 


무기를 내리고 투항하는 독립군입니다. 


전쟁 마지막 6개월 동안 미군이 비무장 시민을 학살하고 수 천명의 용의자와 가족을 집단수용소에 몰아 넣었다는 제보가 나왔다. 양쪽 모두가 만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1901년 9월 중순에 사마르 섬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48명의 미군이 기습을 받아 전사하자 지휘관은 섬 전체를 황폐화시키겠다고 장담하면서 섬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10살이 넘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 


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기사입니다. 10년 먼저 태어났다고 죽어야 하는 이들에게 동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작 학살을 자행한 제이콥 스미스 장군은 군법에 회부되었지만 퇴역하는 처분만 받았습니다. 


1902년에 미국 역사상 처름으로 전쟁범죄 청문회가 미국 의회에서 열렸다. 청문회에서는 반제국주의와 친제국주의 의원이 서로에게 고함치는 혼란이 벌어졌고 만행을 저지른 당사자에게 군법을 적용할 것인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태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2년 7월 4일에 공식적으로 종전을 선언했다. 작전 중에 1,000명 이상의 미군이 죽었고 3,100명이 질병과 사고로 죽었으며 2,9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최소한 20,000명의 필리핀 병사가 죽었고 수 십 만 명의 시민도 죽었다. 공식적인 전쟁을 끝났지만 게릴라 항전은 1913년까지 계속되었다. 


거의 모든 역사학자가 미국의 첫 번째 제국주의 확장시도 그리고 잔인한 전쟁방식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콜럼비아 대학의 앨런 브링클린은 자신의 대학 교재에서 "미국의 필리핀 전쟁은 다른 민족을 복종시키려면 이상뿐만 아니라 힘과 야만성도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필리핀 전쟁을 "독립을 위해 싸우는 반란군과의 길고도 피비린내나는 전쟁"이라고 표현하면서 "필리핀인을 열등민족으로 보게 된 일부 미군병사들 사이에 야만적인 분위기가 강해졌다. 그리고 승인없이 마음대로 살인하는 경우까지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미군에게 고문당하고 있는 사람은 필리핀 관리입니다. 


필리핀 독립전쟁이 제국주의, 인종차별주의의 만행이었던 아니면 미국이라는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의 선의의 투자였던, 미국은 일본이 1941년 12월 8일에 공격해올 때까지 필리핀을 안전하게 통치했다. 치열한 전투끝에 미군과 필리핀군은 1942년 4월에 바탄 반도에서 항복했고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탈출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코레히도르가 항복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장담대로 1944년 10월 20일에 레이테 섬 해변에 다시 돌아왔다. 반격을 받은 일본군은 1945년 3월 3일에 마닐라을 비웠고 8월에 항복하면서 필리핀에서도 항복했다. (일본군이 마닐라를 포기하면서 저지른 대학살에 약 10만 명의 시민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6년 7월 4일, 미국은 필리핀이 바라던 독립을 승인했다. 


빈약한 무장으로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필리핀 독립군입니다. 


고문장치로 알았는데, 교수형 장치였더군요. 









필리핀 화폐 5페소의 주인공이 아귀날도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