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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일본

일본 전국시대 배경설명(4)-갑옷과 전투진영 한 방에 정리하기

by uesgi2003 2011. 1. 27.

자꾸 오다 노부나가 정리하기는 뒤로 밀리고 있습니다. 내일 저녁까지는 꼭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사무라이가 전투를 앞두고 입는 갑옷과 다이묘들의 진영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영에 대한 설명은 솔 출판사의 오다 노부나가 부록내용을 인용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대부분이 그림이라 저는 상당히 편하군요.

 

먼저 그들이 입었던 갑옷에 대한 설명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다음은 상당히 복잡한 갑옷 착용순서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상당히 복잡하죠? 투구 메는 법도 꽤 복잡한데 그건 초마이너 자료라 올리지 않겠습니다.

 

수 백년 동안의 실전경험에서 나온 완전무장형 갑옷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서양과 같이 철 미늘이나 철편이 사용되지 않아 가벼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국시대 당시 굶주려 죽을 정도로 전쟁의 피해가 수 백년 동안 이어졌기 때문에 당시 일본인들의 체구는 매우 작았습니다. 우리나라 조상들의 체격도 큰 편은 아니었는데도 임진왜란이라던가 왜놈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작은 놈들이라고 얕잡아봤을 정도로 일본인들이 작았는데 아마도 150cm 이하(심지어 140cm)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물론 가또 기요마사 등과 같이 180cm에 가까운 거인(?)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작은 체구로 10kg이나 되는 갑옷을 입고 싸웠으니 대단합니다.

 

앞의 갑옷은 상당히 단촐한 편이고 이 그림과 같은 상당히 위압적인 갑옷들도 많은데, 최소한 13kg은 되는 갑옷을 입고 어떻게 싸웠을까요? 보통 부유한 사무라이들은 전시용 갑옷(그림)으로 행진이나 지휘를 하다가 전투 시에는 보다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경량형 갑옷으로 바꿔입었습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햇살무늬의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투구를 썼었는데, 유달리 체격이 왜소했던 그가 그걸 입고 싸웠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아마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보통 화려한 투구는 그냥 드레스 코드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제 전국시대의 주요 다이묘들이 사용했던 진영을 설명하기에 앞서 당시 사무라이들의 학식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유럽의 예절이 마치 오래된 전통인양 허세를 부리지만, 중세 프랑스 기사들의 식탁 예절이 식사 중에는 섹스를 하지 말라던가 제발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지 말고 포크를 사용하라던가, 하이힐이 사실은 거리에 굴러다니는 똥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던가 향수가 목욕을 안하는 여인들을 위한 냄새중화제였다는 해프닝처럼,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교육수준이 매우 낮았습니다. 라스트 사무라이 등의 전국시대 미화 영화에서 나오는 학식과 덕망있는 사무라이는 우리나라 강남권 1%(? ^^:)보다도 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최고 지식층은 승려들이었는데, 그마나 교육을 받은 승려들 중에도 경전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일반 선비들이 사서삼경을 달달달 외우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 수준차가 상당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면 내노라하는 승려와 다인(茶人)들이 줄을 지어 한 마디라도 들으려고 하고 한글자라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조선과 명나라와 지식교류를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유명한 모사꾼이나 전략가들은 승려이거나 출가한 사무라이들이 많습니다. 일반 사무라이들은 교육을 받지 못해 병서를 읽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두 나라의 상황이 역전되었는지 의아해하는 분이 많을 겁니다. 아주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면, 유교중심의 고정된 정치/문화/경제가 우리나라를 완전히 정체시킨 반면에 생존을 위해 실리만을 추구했던 일본은 항상 구습을 개혁해나간 덕분입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 도요또미 히데요시와 같이 일본을 전쟁의 악순환에서 구해낸 영웅들은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요즘에도 그런 농담들 많이 하죠? 간디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빨갱이였고, 빌 게이츠는 법관, 에디슨은 전파상 주인, 헬렌 켈러는 전업주부..... 였을 거라고요.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 임진왜란입니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았던 유럽이 십자군 원정을 기회로 아랍권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여 대약진을 했듯이,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잡아간 엄청난 인력을 통해 문화/경제가 크게 상승합니다. 반면에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고도 구정치세력이 그대로 자리잡고 거꾸로 의병장을 잡아죽이고 백성들을 버렸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자살설이 그래서 계속 나오는 이유입니다. (제 결론에 이견을 가지신 분이 많을텐데 너무 한정된 공간에 설명을 하려고 하니 좀 극단적인 결론이 나온 것이고, 나중에 천천히 자세한 비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제가 공부한 내용만으로 내린 결론이니 오류는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일본도 도꾸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250여년 동안 쇄국정치와 황당한 해프닝으로 정체를 합니다만 흑선(서양의 교역선과 군함)이 나타났을 때의 대응은 우리나라와 정반대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쇄국을 계속해나간 반면에 일본은 사까모또 료마와 같은 영웅이 또 태어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혁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소개하는 진영은 중국의 기본전술이지만 당시 일본의 교육수준으로 판단할 때 제대로 구사할 줄 알았던 무장은 손꼽을 정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300년 전 몽골이 주로 사용했던 후퇴유인과 같은 전술을 사용한 전투가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다른 나라와 달리 기병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기동력을 살린 유기적인 전술보다는 개별 부대 지휘관과 아시가루의 전투력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솔 출판사의 오다 노부나가의 부록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