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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십자군의 나일강 원정 - 5차 십자군 원정

by uesgi2003 2013. 10. 9.


지금 책을 번역하는 것이 있어서 오래간 만에 전사를 정리합니다. 그러고 보니 왕좌의 게임 원서는 계속 넘어가는군요. 언제 다 읽을 수 있을런지... 오늘 이야기는 5차 십자군 원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군 원정에 대해 궁금한 분은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를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십자군의 나일강 원정


강물은 며칠째 불어나고 있었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요새를 공격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륙양동 공격이 필요했고 이제야 공성무기가 준비되었다. 2척의 배를 밧줄과 목재로 묶어서 연결했고 돛대를 이용해 성벽 위까지 닿을 수 있는 큰 탑을 만들었다. 작은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물에 뛰어 들어 공성탑을 이집트 요새로 끌어갔다. 요새의 공격은 작은 배의 돛을 크게 펼쳐서 막아냈다. 이제 5차 십자군의 운명이 걸린 다미에타 Damietta 공성전이 절정에 달했다. 



(5차 원정도입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Innocent 3세가 1217년에 제5차 십자군원정을 주장할 때만 해도, 십자군 운동은 도덕, 회계, 전략 등 모든 면에서 실패작이었다. 12세기 초의 원정은 이슬람 세계의 분열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이슬람도 위기를 느끼고 연합하고 있었다. 무슬림(이슬람교도)이 1187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에 벌어진 모든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성지의 유럽영토는 지중해 해안의 몇 개 요새에서 간신힌 명목만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요새가 동쪽으로 원정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안전한 바닷길이었다. 1200년 이전의 해상 교역로와 인접해안선은 비잔틴 제국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1204년이 되자, 비잔틴 제국은 내부분열로 더 이상 바다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무슬림 해양전력도 해적 정도였고 그나마도 이집트에 몰려 있었다. 그 덕분에 해안선에 남겨진 유럽요새는 큰 위협을 받지 않았고 자파와 티레같은 도시는 베네치아와 만토바의 상인 그리고 기사단의 병력덕분에 오랜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인노첸시오 3세(그림 참조)는 1202년에 제4차 십자군원정을 주도했지만 베니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베니스는 십자군을 이용해서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던 헝가리에게서 자라Zara를 탈환했고 비잔틴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베네치아 함대는 십자군과 함께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봉쇄하고 알렉시우스 Alexius 4세를 옹립했다. 약속된 보상금을 받지 못한 십자군은 비잔틴 황실을 다시 전복시면서 수도를 약탈했고 베네치아는 비잔틴 소유의 해상교역료를 모두 장악하면서 원하는 바를 이뤘다. 


4차 원정군은 실제로 성지에 상륙한 숫자는 극소수였지만 중동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무슬림은 1204년부터 더 이상 비잔틴군을 두려워하지 않아고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도 더 이상 육로로 이동하지 않고 바다로만 이동했다. 


다시 십자군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교황은 지난 4차에서 겪었던 참담한 실패를 피할 생각이었다. 5차 십자군은 교황의 입김이 가장 많이 작용한 원정군이었고 인노첸시오 3세는 중세 교황 중에서 정치적인 교황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는 세속적인 유럽군주들에게 영적인 권력을 휘두르면서 성지를 회복할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바티칸은 병력을 징집하는 동시에 해군이 있는 도시와 영지에게 돈을 지불하거나 면죄부를 발행하면서 해군지원을 받아냈다. 5차 십자군에는 헝가리 안드레Andrew 2세, 독일과  프리즐란드(독일 북부 섬) 항구가 참여했고 자체적으로 함대를 마련했다. 일부 이탈리아 도시는 최근에 이집트와 교역이 급증했기 때문에 함선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 당시 이집트에 상주하고 있던 유럽상인은 거의 모두가 이탈리아 도시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성전이라고 해도 전쟁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바티칸은 왕, 귀족과 평민의 지원을 모두 기록했다. 분쟁 중인 곳은 대표를 보내 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만들었다. 인노첸시오는 교권을 강화시켜서 통일된 그리스도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지난 그는 제노바와 피사 사이의 정치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던 1216년 7월 16일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사망했다. 뒤를 이은 호노리오 Honorious 3세도 십자군 운동에 헌신했지만, 인노첸시아의 죽음으로 어렵게 연결시킨 정치분쟁은 다시 일어났고 십자군 사이에서도 바라는 바가 서로 달랐다. 


성지로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고 다양한 해군이 조율없이 알아서 움직였다. 1217년 시실리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배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았고 프랑스 기사들은 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네치아가 다시 헝가리의 안드레 2세에게 접근해서 아크레까지 수송해주겠다고 권유했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과 병사는 8월 중순까지 떠나지 않았고 안드레의 출발도 배가 없어서 2주나 지연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사이프러스의 휴 왕의 군대와 콜롱Cologne 지역의 함대가 도착했다. 


십자군 본대가 1218년 5월에 아크레에 도착하기 전까지, 다른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 장드 브리엔 John of Brienne(그림 참조)의 지휘 하에 시리아의 아이유브Ayyubid 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장의 원래 계획은 주력이 해상에서 이집트를 공격하는 동안에 별동대로 시리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병력이나 함선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집트 원정은 뒤로 미룰 수 밖에 없었고 시리아 원정은 교란작전이 아닌 양동작전이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병력과 보급이 부족했고 지역의 흉년까지 겹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십자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규율과 지휘권 분열이었다. 명목상으로 장이 지휘관이었지만 진심으로 따르는 부대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자신의 지휘관을 따랐다. 헝가리군은 안드레를, 사이프러스군은 휴를, 기사단은 단장의 명령에 복종했다. 원정은 갈릴리 지방을 방황하며 유물을 찾는 수준이 되었고, 무슬림 전략요충지인 타보르 산에 대한 계속적인 공격도 실효가 없었다. 

안드레 왕은 12181년 1월의 약탈에서 아크레로 돌아온 후에 자신의 맹세는 충분히 지켰으니까 헝가리로 돌아가겠다며 소 아시아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출발했다. 


3월이 되자, 콜롱에서는 큰 배가, 브레멘에서는 작은 배가 십자군을 싣고 아크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프랑스 십자군도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은 전략회의를 소집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군사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기 힘들기 때문에 3차 십자군에서 리차드 1세가 했던 것처럼 이집트를 노리기로 했다.


이집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한 목표였다.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군사력은 강했고 이들을 상대로 원정에 나섰다가는 해안의 보급기지와 단절될 위험이 컸다. 그렇지만 나일계곡에서 무슬림을 쫓아낸다면 가장 부유한 지방을 빼앗는 동시에 해군기지도 빼앗을 수 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아크레와 수에즈에서 예루살렘을 협공할 수 있다. 

십자군은 이집트의 내정이 불안하고 외부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리라 믿었다. 아이유비 술탄 알-아딜 사이프 앗딘의 아들 알 카밀 태수가 통치하던 이집트는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상업 중심지이기 때문에 공략목표가 된 반면에 십자군의 내분이 생겼다. 1215년 당시에 이집트에는 약 3,000명의 유럽상인이 있었고, 특히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알 카밀과 상당한 교역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성지탈환이라는 십자군 본래의 목표보다 부유한 다미에타에 전력을 기울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헝가리군을 잃었지만 더 많은 병력이 도착하자, 장드 브리엔은 아크레에서 병력을 태우고 출발했다. 북풍을 받은 첫 번째 배가 3일 후에 나일 하구의 다미에타 앞에 도착했다. 왕을 포함한 본대는 역풍을 받아 3일 후에 도착했다. 그 동안 임시지휘관으로 시몬 자르부르켄 백작을 선출하고 무력상륙을 해서 강의 서쪽에 진영을 차리기로 했다. 몇 명의 무슬림이 항구의 기사에게 다가왔지만 한 명이 죽자 나머지는 도망쳤다. 


십자군 진영은 다미에타 요새도시에서 3km 정도 하류에 있는 나일 삼각주의 다미에타 지류에 마련되었다. 방벽을 세우고 참호를 팠다. 상류의 다미에타 고시는 강과 동쪽의 멘잘레Menzaleh 호수 사이의 좁은 땅에 있었으며 3면이 성벽과 28개 탑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방어력이 대단했지만 십자군이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다미에타를 노린 이유가 있었다. 

십자군이 노리는 공격로에 있었고 불리할 경우에 후퇴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시설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보다 작지만 카이로와 바다가 더 가까웠다. 


다미에타를 공략하려면 수륙양동 작전이 필요했다. 가장 강력한 방어시설은 성벽 반대편의 섬에 있는 탑으로, 여기부터 배로 연결된 다리(부교)나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어서 나일강 교통을 막았다. 십자군 함선이 도시를 공략하려면 먼저 이 탑부터 점령해야 했다. 

탑 서쪽의 수심은 너무 얕아서 십자군 함선이 댈 수 없었고 동쪽은 쇠사슬과 다리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다. 어쨌든 레오폴트 공작과 병원기사단이 2척의 배를 타고 접근했고 돛 위에 작은 성채를 만든 다른 한 척도 공격에 가담했다. 사다리를 탑 벽에 걸치고 트라부쳇은 탑에 돌을 쏘았다. 십자군의 공격은 실패했다. 

"병원기사단의 사다리와 돛의 성채는 부숴져서 무너졌고 전사들은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독일 배가 탑과 도시 사이에 닻을 내리고 다리 위를 오가는 이집트 병사들을 쏘아 쓰러트렸다. 도시 수비군이 몰려 나와 창과 그리스 불로 배를 공격했고 결국에는 불이 붙어서 전소될 것처럼 보였지만 배에 탄 병사들이 용감하게 화염을 진압했다."


십자군은 좀 더 차분한 공격을 하기로 했다. 트라부쳇으로 며칠 동안 돌을 날려보았지만 효과가 없었고, 강의 수심때문에 배를 댈 수도 없었고, 도시가 바로 옆에 있어서 아사시킬 수도 없었고 물결이 거세 지하갱도도 불가능했다. 

두 척의 배를 목재와 밧줄로 연결한 후에 4개의 돛을 세우고 그 위에 높은 요새를 올렸다. 마침 나일강이 불어난 틈을 이용해서 인력으로 북쪽 벽에 댄 후에 밧줄과 닻을 내려 고정시켰다. 사다리를 탑 벽에 내렸지만 무슬림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도시의 탑 위에도 6개가 넘는 투석기를 올려 놓고 십자군을 향해 돌과 그리스 불을 쏘아댔다. 도시에서 날아오는, 벼락과 같은 그리스 불은 십자군을 공포에 몰아 넣었지만 식초, 모래와 자갈을 이용해서 불을 껐다.


무슬림 수비군이 불붙은 기름을 부으며 사다리에 불을 붙였고 레오폴트 공의 깃발을 빼앗으며 승리의 환호성을 올렸다. 잠시 주춤했던 십자군은 병력을 2배로 늘리며 다시 사다리를 댔다. 이집트 수비군은 최선을 다해 방어했지만 결국 다음 날 아침에는 외벽의 방어선이 뚫렸고 무슬림은 모두 도시로 도망치거나 물로 뛰어들었다. 

탑을 손에 넣은 십자군은 쇠사슬을 끊어서 함선이 다미에타를 봉쇄했다. 만약 이 때에 바로 공격을 개시했다면 도시는 바로 함락되었을 것이다. 탑을 잃은데다가 술탄 알 아딜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시의 사기는 졌다. 무슬림은 필사적인 반격에 나섰지만 1,000명의 피해만 입었을 뿐이다. 


십자군도 절호의 기회를 그대로 흘려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공성전에 지친 병력들이 계속 유럽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장드 브리엔은 증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교황은 새 병력과 함대를 모은 후에 펠라기우스 추기경과 함께 발진시켰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증원군이 출발하면서 바닷길은 오가는 배로 붐볐다. 유럽으로 귀환하는 병사들은 이 시기를 놓치면 다음 봄까지 이집트에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모두 한꺼번에 출발했다. 

9월에 교황의 병력이 도착했지만 이집트 함대는 무기력하게 상류에 머물면서 십자군의 증원과 보급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펠라기우스의 도착으로 공성전은 새 국면에 들어섰다. 펠라기우스는 교황을 대리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왕에 우선하기 때문에 새 원정군은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알렸다. 기존에도 장의 명령을 제대로 따른 것도 아니었지만 적전분열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대규모 수상요새를 띄우면서 무슬림 수비진지에 공격을 가했다. 수비군은 그리스 불과 창을 던지며 저항했고 공격을 받은 한 전함이 침몰하면서 거기에 탔던 십자군과 무슬림이 모두 익사하는 일도 벌어졌다. 


Le Miroir Historial에 실린 다미에타 공성전 모습입니다. 물론 고증과 상관없는 그림입니다. 갑옷도 그렇지만 칼과 창은 많이 황당하죠?

오른쪽이 추기경 일행인 것 같군요. 


많은 희생을 냈지만 십자군의 공격을 계속 막아낸 무슬림은 사기가 올라, 부교를 다시 설치해서 십자군의 수륙양동 작전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독일 십자군의 용감한 공격으로 무산되었다.

무슬림은 아예 강물 속에 배를 침몰시켜 십자군의 진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했고 펠라기우스는 전진하라고 재촉했다. 

1219년 2월, 드디어 십자군이 무슬림의 강변 진지를 공격하려고 하자, 태수 알 카밀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내륙으로 후퇴했고 진지를 그대로 십자군에게 내주었다. 3면에서 포위당한 다미에타 수비군은 계속 압박을 받았지만 알 카밀의 증원군을 받아 계속 저항했다. 


무슬림의 맹렬한 저항은, 다시 십자군 지도력에 균열을 일으켰다. 장은 공성전을 계속 주장한 반면에 펠라기우스 추기경은 무슬림의 재 진지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심지어 5월 중순이 되자 이집트군이 공세에 나서 기사단 진지의 방책을 넘어서는 일도 있었다. 


8월 말에 무슬림의 강변 진지를 점령했지만 도망치는 무슬림을 추격할 여력이 없었던 십자군은 계속 공세를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후퇴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이집트군이 글게 연장된 십자군을 공격했고 사이프러스의 기사 100명이 후퇴하면서 펠라기우스나 예루살렘 대주교도 퇴각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위의 그림과 달리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한 Historia Major의 한 장면입니다. 1218년에 만들어졌으니까 그 당시 무장이나 전투를 제대로 표현했을 겁니다. 


"태양의 열기는 뜨거웠고 보병은 타들어갔다. 험한 길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물이 없어서 포도주로 타는 목을 적셨다." 

장, 프랑스와 영국 귀족의 분전덕분에 참패를 모면하고 대열을 유지할 수 있었다. 


9월이 되자 알 카밀이 휴전을 제안해왔다. 펠라기우스도 마지못해 휴전을 받아들였고 양측은 방어선을 정비하고 병력을 모았다. 많은 십자군이 고향으로 떠났고 다시 새 병력이 합류했다. 10월에는 알 카밀이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기독교도가 이집트에서 철수하는 대신에, 예루살렘, 중앙 팔레스타인과 갈리리를 넘겨주고 성 십자가 True Cross도 반환하겠다고 했다. 술탄의 군대는 울트레주르뎅 Oultrejourdain (요르단 너머라는 프랑스 고어, 요르단강 동쪽 지역)의 성만 유지하고 공물도 바치겠다고 했다. 

십자군은 원정에 나선 목적을 거의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지탈환뿐만 아니라 동쪽 지중해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황당하게도 펠라기우스는 이교도와 협상할 수 없다며 성령으로 탈환할 것을 주장했다. 장은 필사적으로 설득했지만 펠라기우스의 권력이 더 강했다. 이탈리아군은 추기경의 고집을 지지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나 내륙보다 다미에타의 상권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십자군 사이에서도 다미에타를 점령한 후에 한 재산 챙겨서 고향으로 가려는 사욕이 더 강했다.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심지어 기독교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플도 약탈했으니까요)


평화협상을 거부한 십자군은 11월 5일, 도시 성벽의 일부에 병력이 배치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십자군은 큰 수고없이 그 곳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나중에야 밝혀진 일이지만, 음식과 자금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80,000명의 시민 중에 3,000명만 도시에 남아 있었다. 도시를 탈출했거나 전염병이 번지면서 모두 죽었던 것이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점령한 후에, 숨죽였던 반목과 불화가 터졌다. 약탈물을 둘러싸고 십자군끼리 전투가 붙었고 펠라기우스도 이탈리아 동맹군을 붙잡아두느라 약탈물을 나눠주어야 했다. 


장은 추기경의 모습에 질려서 원정대를 이탈했다. 다른 많은 십자군도 고향으로 향했다. 펠라기우스와 나머지 군대는 18개월 동안 다미에타를 지키면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원정에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의 지도력은 십자군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함선의 도착과 출발까지 통제하면서 병사들의 불만이 커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이집트군의 평화협상을 거절했다. 


시리아의 외곽기지가 공격을 당하자 이집트의 십자군은 카이로 진격과 십자군 영지로의 후퇴를 두고 다시 한 번 고민하다가 카이로 진격을 결정하고 1221년 5월에 출발했다.

이집트군은 결전을 피하면서 계속 괴롭혔고 십자군은 함정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만수라Mansourah로 알려진 요새 앞에서 발목이 잡혔고 이집트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술탄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수로를 따라 십자군의 배후로 돌아 배후를 끊었다. 그리고 나일강을 범람시켜서 십자군의 진격로도 끊었다. 강을 내준 십자군은 전장도 잃었고 원정과 십자군 운동도 끝이 났다. 


고립된 십자군은 평화협상을 간청했다. 7월 24일, 술탄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일단 중지했고, 놀랍게도 술탄은 당시 상황으로는 매우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다미에타를 술찬에게 반환하고 십자군은 이집트를 떠난다는 조건이 전부였다. 바바리아 공작과 다른 주요 인물이 인질로 남았지만 대부분의 십자군은 무사히 빠져나와 아크레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3년 간의 원정에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유럽으로 향했다. 



십자군은 활과 칼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물과 굶주림에 굴복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5차 원정은 결국 정치와 군사 지도력의 분열로 실패했다. 전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추기경이 전권을 휘둘렀기 때문에 실패가 분명한 원정이었다. 더구나 십자군의 탐욕과 광적인 신앙심으로 성지회복은 영원히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 당시에 사용했던 유럽의 투구입니다. 연도는 정확한 것이 아니라 추산입니다. 

1-German 1100
2 - French 1120
3,4,5,6 - German years 1195-1200.
7 - German 1214
8 - English 1214
9 - German 1217
10 - French 1230
11 - German 1250
12.12 a - German 1260
13 - English 1220
14 - French 1270
15.16 - The British end of 13 century
17, 18 - The French end of 13 century











1 - Italian
2 - German
3 - French
4 - French 1310
5 - German 1318
6 - French 1340 Mr
7 - German
8, 9, 10 - French 1370
11 - English
12 - Flanders
13 - French 1380
14 - Bishop's Hat
15 - French 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