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빅스토리 등에 게재될 예정이어서 새로 수정을 했습니다. 다른 이야기와 내용이 중복되거나 발음이 다를 수 있습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운명을 바꾼 폴타바 전투 (1) - 배경설명
바이킹, 아바, 금발미녀, 복지후생의 천국으로만 알려진 스웨덴이 17~18세기에 북유럽은 물론 러시아까지 정벌했던 초강대국이었던 역사를 아는 분은 얼마 안 될 겁니다. 저도 Peter the Great라는 러시아 최고의 인물에 대한 영문소설을 읽기 전까지 그들의 역사를 몰랐었습니다.
제가 폴타바 전투에 대해 공부하게 된 계기는 유럽과 아시아 중간에 어중간하게 낀, 동토의 변방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변모하게 된 표트르Peter 대제의 소설을 읽으면서 전사왕 카를 12세Charles 또는 Karl XII(1682년 6월 17일 ~ 1718년11월 30일)를 알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군신으로도 불렸던 선왕(할아버지 카를 구스타프 10세, 아버지 카를 11세)가 모두 40 초반에 요절하면서 17세에 첫 전투에 나선 카를 12세는 전사왕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수비보다는 공격을, 안전한 후방보다는 전방을 택하면서 북유럽과 폴란드를 평정한 후에 러시아로 원정을 떠납니다.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를 맞이하게 된 러시아는 초토화작전으로 시간을 끌다가 표트르가 평생 공들여 육성한 유럽식 신식군대로 최후의 일전을 치른 전투가 바로 폴타바 전투입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두 인물, 두 국가에 대한 배경까지 설명하려면 일본 전국시대와 같이 초장편이 되기 때문에, 흥분을 가라 앉히고 여기에서는 폴타바 전투와 관련된 배경과 전투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다른 기회로 돌리기로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번역해서 출간하고 싶은 Peter the Great를 여러분에게 선보일 수 있기만을 바랍니다. 러시아 역사뿐만 아니라 17세기 말~18세기 초의 유럽전체의 인물과 사건을 알 수 있는 대단한 책입니다.
폴타바 위치부터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생소한 시대와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 지역까지 생소하면 이야기가 많이 재미없어집니다.
역사, 특히 전사는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항우와 유방, 조조와 유비,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과 같은 영웅과 영웅의 대결의 연속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기생유하생량(내가 있는데도, 하늘은 어찌하여 제갈량을 또 내셨는가!)를 외치면서 피를 토하고 죽은 주유와 같이 다른 시대, 다른 대륙에서 태어났더라면 자신의 웅지를 그대로 펼칠 수 있었을 인물이 좌절하는 모습은 가슴아프지만, 절대영웅 두 사람이 일생일대의 대결을 펼치는 신경전은 당사자의 피말리는 심정과 상관없이 가장 재미있는 분야다.
이번에 소개할 카를 12세와 표트르 1세의 대결도 선도형 리더와 관리형 리더의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카를 12세가 10년만 먼저 태어났더라면, 표트르가 그냥 평범한 전제군주였다면, 지금의 북유럽과 동유럽뿐만 아니라 유럽전체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폴타바 전투를 바로 설명하기 전에, 양국의 상황과 두 영웅의 성장과정부터 설명해야 여러분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표트르 1세 - 골육상쟁의 연속
1689년, 섭정을 하던 이모 소피아가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전까지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와 농업 중심의 동토왕국에 불과했다. 오랜 기간 동안 러시아군의 주축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다니는 구시대 병사(스트렐치)였다.
스트렐치에 대해서는 위키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스트렐치Streltsy는 '사격수'란 의미의 16세기부터18세기까지 존재했던 러시아의 친위대다. 기본 무장은 머스켓과 같은 화약무기이며 일반적으로 '사격 부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초창기 스트렐치 부대는 이반 뇌제가 1545년에서 1550년사이에 창설한 것으로 추정되며, 화승총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1552년 카잔전투에 처음으로 실전 투입되었다. 당시 스트렐치는 촌락민이나 상인들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전력면에서 효율성을 인정받아 핵심전력으로 장기간 활용되었다. 그러나 세습제로 특권을 인정받으면서 훈련부족과 전투 의욕상실 등으로 전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스트렐치 부대는 모스크바에 주둔하는 브이보르니예, 고로스키예 그리고 지방 부대로 나뉘었다. 모스크바에 주둔한 스트렐치는 크레믈린 왕궁 수비를 맡았고, 일반적인 호위 임무외에 원정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또 모스크바 내에서 경찰과 소방활동을 하기도 했다.
한편 지방의 스트렐치 부대는 요새를 세우고 국경 방비를 맡았으며 지방에서 별도로 관리했다. 적색, 청색, 또는 녹색의 코트와 노란색의 부츠로 이루어진 특유의 군복을 착용했으며 각자의 독특한 무기-화승총, 머스켓, 자루도끼, 창도끼, 칼, 창 등-를 장비했다. 창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창도끼는 머스켓을 발사하는 지지대로도 사용했기 때문에 가장 흔한 무장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왕조의 명령을 수행하는 군대로 왕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터키의 예니체리가 그랬듯이 초심에서 벗어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고 거꾸로 러시아의 개혁을 방해하는 수구세력이 된다.
외국출신이었던 어머니 나탈리아의 영향으로 궁전에는 언제나 외국 사절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표트르도 자연스럽게 외국인 가정교사에게서 새로운 세상을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 스트렐치와 같은 수구파의 눈에는 궁전이 외국인에게 점령당하고 정통성이 위협받는 것으로 비쳐줬다. 아버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Aleksey Mikhailovich가 죽으면서 표트르가 당연히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이복누나 소피아의 사주를 받은 스트렐치의 반란으로 모스크바에서 쫓겨나고 만다.
어머니와 함께 여름 궁전으로 쫓겨난 피터는 자신의 숙부가 바로 눈 앞에서 도끼에 맞아 죽는 모습을 봤고, 자신도 언제라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10살 때부터 간질병을 앓고 성격이 거칠어진다. 그에게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시기였겠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자신과 조국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스트렐치의 비호아래 왕좌에 올랐다면 수구파의 꼭두각시가 되었겠지만,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나 버림을 받았던 덕분에, 수구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최초의 신식군대가 바로 이 때 조직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동네 총싸움 놀이에서 시작했었지만...
누구나 어린시절 동네 전쟁놀이를 즐겼을텐데, 표트르는 황제(모든 권력은 섭정 이복누가가 장악)답게 그 수준이 엄청났다. 그는 자신과 함께 별궁에 쫓겨난 귀족의 자제와 신하들로 포텐시니예라는 놀이군대를 조직해 본격적인 전쟁놀이를 즐기게 된다.
소피아는 어린 황제가 정치보다는 병정놀이에 빠져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지원해주라고 방치를 한다. 아마도 군복이나, 기껏해야 칼 정도라고 생각했겠지만, 표트르의 놀이군대는 대포까지 갖추게 되고, 그 수도 600명에 이르면서 소년군사학교 수준을 넘어섰다.
소피아는 러시아군의 핵심인 스트렐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기회가 되면 나중에 소개할) 타타르족 원정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놀이 군대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고 만다.
소피아 알렉세예프나Sophia Alekseyevna가 권좌에서 쫓겨나 수녀원에 갇혔을 때의 모습입니다. 러시아의 개혁을 역행한 가장 큰 장애물이었지만 공주는 외부활동이 일체 금지되었던 당시에(이전에 소개되었던 중세 러시아 여성인권 잔혹사참조) 섭정으로 러시아 전국을 쥐고 흔들었을 정도의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등장 그리고 표트르의 개혁덕분에 러시아는 여성 차르Tsaritsa가 연거푸 등장했고 예카테리나 여제로 제2의 부흥기로 이어졌습니다.
표트르는 그림의 창문 밖에 모반을 일으킨 스트렐치의 시체를 걸어두어 소피아에게 맺힌 한을 풀었습니다.
17세기 말의 러시아
도대체 당시의 러시아 군이 어느 정도였기에 소년들로 구성된 놀이 부대가 최초의 현대식 군대이자 최정예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변방민족인 타타르Tatar(크림 한국)의 사냥터와 다름이 없었다. 노략질만 하던 왜구가 아예 작정하고 도시를 점령했던 것처럼, 1662년에는 푸티블을 점령하고 시민 2만 명을 전부 노예로 잡아갔을 정도였다. 17세기 말까지 러시아 노예는 오스만 투르크 노예시장의 주요 거래상품이었고 동부 지중해 항구마다 갤리선 사슬에 묶여있는 러시아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어서, 러시아 본국보다 외국에서 러시아 사람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농담이 돌았을 정도라고 한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갔지만, 러시아의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모두 너무나도 부실했다. 궁여지책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에게 선물을 빙자한 공물을 바쳐 타타르 인들을 통제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술탄은 막대한 재원 중 하나인 러시아 노예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러시아 전체로 볼 때에는 인구 몇만 명이 사라진다고 해서 존립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국민을 지킬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서유럽을 향해 진출하면서 이슬람 전선과 기독교 전선의 종교전쟁이 벌어졌고 폴란드와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본토견제를 맡게 된다. 그러나 자국의 국경도 못 지키는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타타르족을 토벌해서 그 동안의 복수도 하고 이슬람 진영의 한 축을 무너뜨렸다는 명분도 세우기로 한다. 전쟁에는 거의 재앙덩어리였던 소피아와 연인 골리친은,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스텝지역을 횡단해 수 천km나 떨어진 크림 산맥에 있는 타타르 수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편안한 궁전에서 썩어빠진 수구파들은 그런 고생을 할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군대를 모은 김에 손쉬운 폴란드나 공격하자는 황당한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러시아를 지배하다 우크라이나 남부로 밀려난 몽골족, 타타르. 오스만 투르크에 복종하며 자치권을 확보했습니다.
소피아는 무능한 연인 골리친이 이 기회에 큰 공을 세워 황제로 옹립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징집하고 특별세를 부과해서 군수물자까지 마련했지만 문제는 수구파 중 어느 누구도 전투를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재앙덩어리 골리친이 총사령관을 맡아 1687년 5월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렐과 폴타바를 향해 출발한다. 골리친은 타타르의 기병에 주의하면서 6월 13일에 드니에프르 강 하류까지 진출하지만 이상하게도 타타르의 본대는고사하고 정찰대조차 만나지를 못했다. 10만 명의 대군이 천천히 이동하는 것을 타타르가 모를리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광활한 평원에서 수 만 명의 타타르 기병을 마주칠 것으로 예상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 만 명의 야만족 기병보다 더 끔찍한 광경이 러시아 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모두 불타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초토화된 스텝의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초원에서는 기병대에게 먹일 목초는 물론이고 수송대의 주축인 소가 먹을 것도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타르의 대응에 당황한 골리친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후퇴시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미 후방의 초원에도 타타르 선봉대가 전부 불을 놓아, 전진하자니 굶어 죽을 판이고 후퇴하자니 불타 죽을 상황이었다. 그래도 후퇴하는 것이 안전했기에 불길을 뚫고 후퇴를 거듭한 러시아 군은 타타르와 마주치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려 4만5천 명을 잃고 만다.
원정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골리친은 타타르의 칸이 자신들을 보고 산맥 깊숙이 도망갔다고 허위보고를 했고 사랑에 눈이 먼 소피아는 한술 더 떠서 전국에 국경일을 선포한다.
그렇지 않아도 무능한 두 연인의 실정에 실망을 하던 러시아 국민들은 이 일로 인해 표트르라는 대안을 머리 속에서 기억해내기 시작한다. 한 번만 실수하면 인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못난 연인은 또 한 번 주제를 모르는 사랑놀이를 벌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무려 50%에 육박하는 손실이 이해가 안되실 텐데, 보통 장거리 원정을 떠나게 되면 병이 나거나 기동력부족으로 낙오되어 전력에서 제외되는 병력이 최소한 10% 이상은 됩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강제로 끌려온 농부들이 많으니
후퇴할 경우에는 탈영병이 줄을 잇게 되죠. 그래서 전투 한 번 없이 무려 50%에 이르는 손실을 보게 되는데, 전사와 같은 완전한 손실은 아니더라도
당장의 전투에 동원할 수 없는 손실이니까 손실은 손실이죠.)
소피아의 연속되는 실정
러시아는 사랑 놀이에 흐느적거리고 있었지만 동유럽의 상황은 절대위기 상태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군대를 몰아내기도 했지만 1688년에는 폴란드도 거의 붕괴직전이어서 러시아 혼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떠 맡아야 할 판국이었고 제 아무리 사랑놀이에 빠진 소피아라도 절대로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산맥 깊숙이 쫓겨 들어갔다는 타타르 인들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유린하며 폴타바와 키에프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겨울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가는 타타르 인들의 수레에는 무려 6만 명이 넘는 러시아 국민이 묶여 있었다.
궁지에 몰린 골리친은 두 번째 원정계획을 세웠고 1차원정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러시아 군은 얼음이 채 녹기도 전부터 서둘러 원정을 떠났다. 3월이 되자 골리친은 112,000 명의 군대와 450문의 대포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나섰다. 봄이 되면서 불어난 강물과 그 유명한 진흙대장군으로 힘겨운 강행군의 연속이었지만 사마라 강에서는 코사크 기병도 12,000명이 합류해 막강한 기병전력까지 갖췄다 (봄이 되면 진창이 되는 러시아 지방도로 때문에 2차대전 당시 독일군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군의 T-34 전차의 궤도는 매우 넓었고 진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목재를 하나씩 싣고 다녔습니다. 반면에 독일군의 초기 전차들은 모두 좁은 궤도여서 진흙에 빠지면 다른 전차가 구조해주기 전에는 기동불능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붙인 별명이 진흙대장군입니다.)
대장 불리바라는 영화로 친숙한 코사크 족. 코사크 족의 그림은 항상 유쾌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나폴레옹의
러시아침공과 2차대전 당시 후퇴하는 군대에게 코사크 기병대는 악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난 번의 실패의 교훈을 되살려 선봉대를 보내 스텝 초원에 미리 불을 질러서, 본대가 도착할 때 쯤이면 어느 정도 목초가 자라게 만들어두었다.
기병, 포병, 보병 3박자가 모두 갖춰진 러시아 대군을 맞은 타타르는 5월 중순 10,000명의 기병대를 보내 러시아군의 수송대를 노리지만 골리친은 대포를 재빨리 정렬시켜 물리쳤고, 5월 30일 드디어 타타르 수도에 도착하게 된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120,000명이 넘는 러시아 대군이 타타르 수도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대학살로 피의 복수를 했을 것으로 예상하겠지만, 그랬다면 표트르 대제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세 좋게 수도를 포위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도의 성벽은 굳건했고 타타르족도 충분한 병력과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군이 보유한 대포는 공성을 하기에는 역부족인 소구경대포가 대부분이었고 공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공병부대가 없었다는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오래 전의 영화 라스트 모히칸, 킹덤 오븐 헤븐, 트로이 등의 영화를 보신 분은 프랑스 군이 성벽에 근접할 때까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며 긴 교통로를 파가다가 공격을 하거나, 무슬림들이 며칠 밤낮 투석기로 두들기다가 부서진 성벽 틈으로 밀고 들어가거나, 트로이의 성벽은 아예 기어 올라가지도 못해 목마라는 편법을 짜낸 것을 기억할 것이다. 표트르도 아조프를 공격할 때에 공성전문 공병들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우게 된다.
어쨌든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잡은 골리친은 엉뚱하게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공격할지 말 것, 러시아에게 공물을 요구하지 말 것, 그 동안 잡아간 러시아의 국민을 돌려 보내라는 3가지 강화조건을 제시한다. 포위를 당했으면서도 느긋한 타타르 칸은 처음 두 조건은 단번에 거부했고 세 번째 조건도 잡아온 러시아 인들은 모두 노예로 팔았거나 달아났기 때문에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
골리친은 조건이 하나도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화를 맺을 수도 없었고, 공병과 공성무기 없이 공격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철군을 명령하게 된다. 다시 한 번 모스크바에는 타타르의 칸을 성안에 가두고 강화를 이끌어냈다는 허위보고가 전해졌고 소피아는 표트르에게 승전축하 개선행진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원정에 참여했던 외국인 참모의 보고서는 허황된 모스크바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20,000명이 죽고 15,000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더 어처구니 없었던 것은 서둘러 도망치듯 후퇴하느라 70문의 대포와 모든 전쟁물자를 타타르 인들에게 넘겨주고 왔다.
러시아 국민의 실망은 걷잡을 수 없는 정도가 되었고 급기야 개선행진에 참석한 표트르는 시민이 보는 앞에서 소피아에게 한 계단 내려가 설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소피아가 자신의 신하임을 인정하라는 것으로, 소피아가 명령에 따르지 않자 표트르는 화를 내며 자신의 별궁으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표트르의 즉위
이를 계기로 개혁파와 신식군대는 표트르를 중심으로, 수구파와 스트렐치는 소피아를 중심으로 모스크바에 몰려들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고, 시민과 귀족은 사태 추이를 숨죽여 지켜보던 중에 너무나도 사소한 한 건의 해프닝으로 사태는 완전히 반전되고 만다.
표트르가 사태해결을 위해 소피아에게 전령을 보냈는데 규율이 무너진 스트렐치가 그를 잡아 구타를 했고 이제 내전이 벌어진다고 염려한 소피아는 스트렐치를 모스크바 외곽에 대기시킨다. 이 모습을 본 정보원은 표트르에게 스트렐치가 조만간 공격해올 것이라는 과장된 보고를 하게 되고 위험을 느낀 표트르는 러시아 성지에 몸을 숨긴다.
소피아가 압도적인 전력을 갖췄지만 모스크바 시민은 표트르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대주교에게 중재를 요청하지만, 대주교까지도 표트르의 진영에 합류하고 만다. 대주교의 부름을 받은 지방영주들도 속속 표트르에게 신하의 충성을 맹세하고, 이에 힘을 얻은 표트르는 스트렐치에게 엄중한 황제(차르)의 명령을 내린다.
"차르의 명령이다. 모든 부대장은 10명의 부하를 이끌고 트로이츠키 성당으로 즉시 집결하라. 이 명령은 차르의 명령이다. 불복하는 자를 참수형에 처한다."라는 표트르의 친필서신이 스트렐치의 부대장에게 전달되면서 소피아 진영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스트렐치는 왕실을 보호한다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르의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위협한다는 것은 스트렐치의 존립근거자체를 흔드는 일이 되고 만다. 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금품공세를 퍼부었지만 매일 점호할 때마다 자리를 비운 부대장이 점차 늘게 된다. 결국 단 한 번의 전투도 발생하지 않고 표트르는 황제의 자리에 복귀하게 되고 러시아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수구파 의 가시숲 장애물을 걷어내고 동유럽 최강대국으로 향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북유럽의 맹주, 스웨덴
모스크바 공국을 정복했던 폴란드를 제외하고, 러시아 원정에 나선 첫 번째 유럽국가는 스웨덴이었다. 그 후로도 1812년 나폴레옹의 원정과 독일의 바바롯사 작전이 두 차례 더 있었지만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카를 12세의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찾지 않았다.
세 번에 걸친 러시아 원정은 최정예 부대로 전쟁을 시작해서 파죽지세로 러시아를 지도에서 없애버릴 기세로 진행되는 초기, 러시아의 방대한 영토와 무한한 인적자원에 고전하는 중기, 그리고 공격자의 전략전술을 그대로 흉내 내는 러시아의 반격이 시작되는 후기로 진행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카를, 나폴레옹와 히틀러 모두 러시아 민족을 열등민족으로 치부하고 얕잡아봤다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온갖 고통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노새와 같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겉모습과 완전히 다른 무서운 민족이었다.
1706년 말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의 스웨덴은 북유럽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17세기 초, 카를 10세와 11세는 핀란드, 카렐리아와 잉그리아를 합병시켰고, 1648년 30년 전쟁의 말기에 스웨덴은 발트해 남부 해안의 수 많은 앙클레이브(다른 국가 안에 외롭게 단절된 영토)를 지배하면서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스웨덴 왕조의 정치와 군사목표는 스페인, 프랑스, 영국과 같은 강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토나 인적자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육군과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스웨덴 국왕은 선두에서 지휘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스웨덴
군의 전통과 전략을 확립한 구스타프 아돌푸스 왕이 기병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카를 10세와 11세의 재임기간 중 제국은 계속 팽창했고 발트해는 스웨덴의 호수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스웨덴은
새로 합병한 지역의 통관세금으로 더욱 부유해졌으며,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총과 말을 수입해서 최고의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당시 유럽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스웨덴 기병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잡지에 기고했던 기사의 그림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의 급격한 팽창은 주변국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특히 전통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덴마크는 자신의 국경에 브레멘, 베르뎅과 같은 스웨덴 소유의 도시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에 크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작센의 아우구스투 2세는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면서 스웨덴에 빼앗긴 리보니아 수복의무도 부담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덴마크와 함께 반 스웨덴 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 2세는 작센영주에서 폴란드의 왕으로 추대될 정도로 권모술수가 뛰어난 인물이기도 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사람처럼 발정 난 수컷이 있을까 할 정도로 여자를 밝혔습니다. 스웨덴에 대항하기에도 진이 빠질 텐데, 일생 동안 무려 250명 이상의 후처를 남겼고 그 중에는 자신의 딸로 밝혀진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무한한 정력을 자랑했습니다. 스웨덴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의 틈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쫓겨 다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는 감탄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전사왕 카를의 탄생
1697년 카를 11세가 죽자 겨우 15세라는 어린 나이의 카를 12세가 즉위를 한다. 아무리 사자라고 해도 아직 새끼에 불과한 그가 왕위에 올랐으니,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와 같은 경쟁국들은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고, 3국 동맹을 맺은 후에 스웨덴에 선전포고를 한다. 1700년 4월에 덴마크는 홀스타인과 슐레스비크를 침공했고, 두 달 후에 폴란드는 리가를 포위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부동항을 확보하고 싶었던 표트르도 스웨덴의 리보니아를 침공하고 나르바를 포위했다. 3개국이 동원한 병력은 100,000명을 넘어섰는데, 스웨덴은 총동원령을 내려도 겨우 30,000명의 병력만 동원할 수 있는데다가 3개 방향으로 동시에 공격을 당하고 있어서 소년인 카를 12세의 운명은 거의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숫자가 크게 모자라기는 해도 스웨덴 군은 하나같이 모두 전투로 잔뼈가 굵은 정예군으로 농민들을 징집한 연합군과는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자의 새끼는 사자이듯이 북유럽의 호령한 선왕의 피가 그대로 어린 카를의 가슴 속에도 흐르고 있었다. 그는 연합군이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초강경책으로 대응에 나선다. 군대를 세 방향의 방어진지에 분산시키게 되면 지루한 전쟁이 이어질 것으로 판단한 카를은 전 병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킨 후에 가까운 적부터 하나씩 격파해나가기로 한다.
포위된 도시에서 힘들게 저항하고 있는 병사와 시민들이 좀 더 버텨줄 것으로 확신한 그는 덴마크의 수도로 역습을 가한다. 본국을 위협받은 덴마크 군은 결국 8월 18일에 평화협상을 간청하게 되고, 카를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9월에 전 병력을 다시 리보니아로 실어 나른다. 11월 20일에 나르바를 포위하고 있던 러시아 군의 진지로 바로 뛰어들어 러시아 공격군을 전멸시키고 표트르에게 생애 첫 번째의 패배를 안겨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래 지리멸렬했던 폴란드-작센 군도 자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불과 5개월 만에 카를은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스웨덴의 땅을 단 한치도 잃지 않는다. 대문호 볼테르는 그에게 전사왕이라는 칭호를 선물한다.
러시아 침공의 서막
너무 어린 나이에 대성공을 거둔 카를은 "내가 나서는데, 누가 감히"라는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자신과 스웨덴에 불행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다. 일본 전국시대의 효웅 다케다 신겐이 100%의 완벽한 승리는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며 80% 정도의 승리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수적으로도 우세하고 참호에 자리를 잡아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의 러시아 군이 스웨덴군의 돌격에 단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달아나는 것을 본 그는 러시아 민족은 언제나 공격하면 등돌리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나르바에서 참패를 겪은 표트르는 아직도 러시아 군의 전투력에 문제가 많다고 판단하고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주력부대를 투입하지 않는 신중함을 배우게 된다.
러시아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징벌할 수 있다고 판단한 카를은 리보니아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가까운 폴란드부터 유린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폴란드에서 다시 한 번 러시아 지원군을 격파하며 러시아에 대한 경멸감은 더욱 굳히게 된다. 어찌보면 표트르-카를을 유방-항우의 대결구도로도 볼 수 있는데, 카를은 항상 선두에서 돌격하며 연전연승을 거두는 동안 표트르는 폴타바 이전까지 연전연패를 당하다가 폴타바 전투에서 한 번에 역전을 시킨다.
카를은 고향을 떠나 폴란드 국경을 넘어선 다음, 6년 동안 리가(1701), 클리로브(1702), 쏜(1703), 렘베르그(1704)와 그로드노(1705)에서 폴란드-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며 아우구스투를 몰아내고 스타니슬라우스라는 꼭두각시 왕을 세운다. 자신을 위협했던 3개국 중 2개국을 완전히 굴복시킨 카를은 이제 마지막 남은 러시아로 눈을 돌린다.
서유럽 진출이 목표였던 표트르는 거듭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 원군을 보내고 핀란드 만에서 네바, 잉그리아를 함락시켰고 리보니아도 다시 공격했기 때문에, 카를은 근본원인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30,0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폴란드군의 이미지로 가장 유명한 윙 후사르Winged
Hussar.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예니체리와 전투 중인 모습입니다. 당시 유럽기병 중
최강이었지만 폴란드는 영주의 자치권이 강한 봉건영주국가를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적을 응원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비록 러시아 군이 연전연패를 당했지만 표트르의 각별한 후원덕분에 외국인 지휘관을 영입하고 신식무기를 보급받으면서 지금까지의 오합지졸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1700~1721년 사이에 벌어진 스웨덴-러시아의 전장입니다. 주인공, 카를과 표트르의 얼굴은 2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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