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는 참담한 실패 그리고 무능력한 정부의 한계를 보여주는 전사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황당한 원정(군사작전) 일화를 이야기할 때에 가장 흔하게 나오는 작전이 임팔 작전일 것입니다.
임팔 작전은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 3월부터 무다구치 렌야의 독단에 의해 벌어졌던 우회기동 작전으로 온갖 황당한 착오와 실수를 연발한 끝에 무려 5만~6만 명의 일본군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습니다.
대부분이 전투가 아닌 아사와 병사로 죽어서 무능한 지휘관의 대표자리를 무다구치 렌야가 물려 받았는데, 그래도 이 작전은 연합군과 교전이라도 하고 나름 피해도 입힌 작전이었죠.
옆이 임팔 작전의 지도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연결되는 것 아시죠?
이보다 황당한 원정의 기록은 러시아가 가지고 있습니다. 찾아보면 더 황당하고 더 참혹한 작전이 많겠지만, 지금은 크림 한국 원정을 정리하고 있으니까 이것이 가장 황당하다고 우리끼리 눈감고 넘어가도록 하죠.
제가 얼마 전에 중세 러시아 여성의 잔혹한 역사에 대해 정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선 여기부터 보고 오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300
보고 오셨나요? 에이 안 봤잖아요! 귀찮아도 그 이야기부터 봐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연결되니까 보고 오세요.
차르의 딸인 황녀(차레프나)는 결혼도 못하고 영원히 음지인 테렘에 갇혀 살아야 했는데 금기를 깨고 섭정의 자리에서 러시아를 통치한 대단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피아(Sophia)였습니다.
그림을 보면 상당히 안(?)매력적인 외모인데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와 사이가 안 좋았던 프랑스 외교관이 의도적으로 악의적인 기록을 남겼고 그 영향때문에 후대에 그려진 그림은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 외교관이 최대한 자세히 왜곡(?)하느라 감히 섭정의 다리 속살까지 흉봤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작이 바로 탄로난 것이죠.
그래도 미인은 아니었다는 중론입니다. 그러니 '예뻤나요?'라고 묻지 마세요.
어쨌든, 어릴 때부터 황태자와 함께 고급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예정된 운명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은둔형의 러시아 여성과 달리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차르 알렉세이(Alexey)가 재혼을 하면서 막내 아들 표트르(Peter, 초강대국 러시아의 기틀을 만든 대제)가 태어나면서 그대로 운명의 방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복잡한 배경이 있었는데, 당연한 후계자였던 첫 아들 표도르(Fedor)는 내일 당장이 걱정될 정도로 병에 시달렸고 둘째 이반은 말 더듬이, 장님에 가까운 장애, 허약한 심신이었던 반면에 표트르는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누구나 표트르에게 차르 왕좌가 넘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소피아는 물론이고 소피아, 표도르와 이반의 외가로 권세를 누렸던 밀로슬라프스키 가문도 날개가 꺾이는 것이었습니다.
소피아 그리고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의 끝이 보이던 1676년 1월에 황당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동방정교의 관습대로 차가운 강물에 몸을 담갔던 알렉세이가 독감에 걸려 죽으면서 표도르에게 왕위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즉위식에서 조차 스스로 걷지 못했던 표도르는 아예 후계자를 정하지도 못하고 6년 만에 죽어서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뀌게 됩니다.
귀족과 동방정교 주교들은 후계자를 정하는 회의에서 표트르의 외가인 나리쉬킨 가문과 이반의 외가인 밀로슬라프스키 가문이 팽팽하게 맞서자 아예 모스크바 시민에게 묻기로 하고 현장투표를 실시합니다.
또 다시 차르를 잃고 싶지 않았던 시민들은 표트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10살이었던 표트르는 차르에 그러나 어머니인 나탈랴(Natalya)가 섭정을 시작합니다. 반전의 반전이 거듭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피아가 숨겨왔던 재능, 당시 러시아 여성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치력을 발휘하며 다시 러시아 역사 상 가장 극적인 대반전을 일으킵니다. 바로 스트렐치(Streltsy)를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스트렐치는 그림과 같이 거대한 도끼와 구식 화승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정규군으로 당시 허약했던 러시아의 수호군을 자처하며 모스크바에 약 50,000명 정도가 몰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귀족 지휘관의 악행(폭행과 횡령)에 대한 불만이 터질 지경이었는데 나탈랴 가문의 친 서유럽(카톨릭) 정책이 뇌관을 놓게 된 것입니다. 소피아는 관료와 지휘관에서 밀려난 친인척을 동원해 불길만 당겼습니다.
'서유럽(당시에는 종북빨갱이 취급^^) 추종세력이 이반 황태자를 암살했다'는 헛소문이 불길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실정과 비슷하죠? 말끝마다 종북빨갱이... 가스통 할배 동원하고 극우단체 동원하는...)
이성을 잃은 스트렐치는 크레믈린으로 몰려들어가며 귀족들을 죽이기 시작했는데... 총대주교가 나서 이반 황태자는 무사하다며 그 모습을 보여주면서 불길이 잡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총대주교가 자리를 뜬 것이 최악의 실수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악명높은 지휘관이 '돌아가라. 네 놈들은 추후 처벌을 받을 것이다'라며 간신히 진정시킨 스트렐치를 광기로 몰아넣습니다.
크레믈린 궁전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지고 차르 표트르의 외가 나리쉬킨 가문의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도끼로 난자되어 토막처리되었습니다.
3일 동안 대학살(그림 참조)을 끝낸 스트렐치 앞에 소피아가 나서 '종북빨갱이(?)' 세력으로 부터 나라를 지킨 그들의 공을 치하하며 연대 단위로 불러들여 한 명씩 술을 내리며 장악합니다. 그리고 스트렐치에게 이반을 공동 차르에 앉히라는 요구를 하게 만들었고 무력한 귀족 의회와 총대주교는 이반을 공동 차르에 앉히고 소피아에게 섭정을 맡기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두 차르 위의 섭정 자리에 오른 소피아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많은 공을 남깁니다만 운이 따르지 않아서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한심스러운 상황때문에 과를 더욱 많이 남기게 됩니다.
정권을 장악한 그녀는 서둘러 대외 관계를 정상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전통적인 적대국이었던 스웨덴과 폴란드와 분쟁을 끝내는 조약을 맺게 됩니다. 폴란드는 상당한 강대국으로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허수아비 차르를 앉힌 적도 있어서 러시아의 반감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공세를 막아내야 했던 폴란드는 키에프(Kiev, 홍콩처럼 폴란드에게 반환하기로 했던)를 러시아가 영원히 가지는 대신에 오스만 제국과 공동전선을 펼치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키에프를 가질 수 있다는 기쁨과 이 기회에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크림 한국(Khan of Cream)의 위협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소피아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군사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는데 크림 한국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죠?
강대했던 몽골 제국의 4한국 킵차크 한국, 오고타이 한국, 일 한국, 차가타이 한국 중에서 러시아를 통치했던 킵차크 한국이 다시 분열해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 남아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몽골의 후손입니다.
배후의 강대국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약탈이 주업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러시아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치 고려 시대에 악명을 떨쳤던 왜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크림 반도에 본거지를 둔 칸은 매년 봄에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러시아 남부를 약탈했고 1688년에는 키에프와 폴타바까지 위협하며 무려 60,000명의 인질을 잡아갔습니다.
러시아 남성은 노예로 팔았고 소년은 오스만 제국에 진상품으로 보냈고 여성은 자신들이 취하거나 역시 노예로 팔았습니다.
당시 지중해의 모든 항구에서는 갤리선의 노꾼은 러시아인이었을 정도였고 심지어 콘스탄티노플 노예시장에서는 '아직도 러시아에 남은 사람이 있어?'라는 농담을 할 정도였습니다.
소피아는 어차피 대제국인 오스만을 상대로는 전쟁을 못하니까 타타르족을 공격해 조약의무도 이행하고 걱정거리도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피아에게는 바라던 인물이었지만, 원정군에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던 바실리 골리친(Vasliy Golitsyn)이 지휘권을 강제로 맡게 됩니다.
바실리 골리친은 역사에 오명을 남긴 것과 달리 상당히 유능하고 정열적이고 진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군사적 재능이나 경험이 크게 부족했는데, 정적이 '원수 폴란드와 조약을 체결한 인물이 원정도 마무리 지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소피아는 연인관계였던 그가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랬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남기를 바랐던 골리친은 강제로 원정군을 떠 맡게 되었습니다.
겨울 내내 100,000명을 모은 골리친은 1687년 5월에 드디어 모스크바를 떠나 크림 반도를 향합니다. 그럼 한 번 원정로를 봐야 제대로 알 수 있겠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니까 큰 그림으로 보세요. 1차 목표인 페레코프까지 약 1,200km의 거리를 10만 명이 수 천마리의 말과 소를 몰고 가야 합니다. 더구나 타타르 기병의 기습공격이 두려웠던 골리친은 매우 신중하게 행군했으니 발걸음을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생각지도 못한 타타르족의 반격을 만나게 됩니다. 원정이라면 초고수였던 타타르족은 러시아군이 어떤 식량도 얻지 못하도록 우크라이나 평원에 불을 질렀고 러시아군은 검게 그을려 황폐해진 평원을 100km 정도 전진하다가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7월의 우크라이나 평원은 엄청난 열기를 내뿜었고 말과 소를 먹일 것이 없었기 때문이죠.
민망해진 골리친은 소피아에게 타타르 칸을 크림 반도 산맥 깊숙이 내쫓았다는 승전보를 보냈고 소피아는 연인의 자랑에 속아 영웅의 귀환식을 대대적으로 준비합니다.
왜 참담한 원정이었을까요? 우크라이나 평원을 왕복하면서, 단 한 명의 타타르족도 만나지 못한 채로 무려 45,000명이 죽거나 달아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말 내키지 않았던 골리친은 다시 원정길에 나서야만 했습니다.
동맹국인 폴란드 등은 골리친의 엉터리 승전보를 믿지 않았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러시아군의 위용에 멀리 달아났다는 타타르족이 거꾸로 1688년에 대대적인 약탈을 했기 때문입니다.
골리친도 나름 유능한 인재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많은 준비를 합니다. 아예 3월부터 행군에 나서고 선봉대를 보내 평원에 먼저 불을 질러 본대가 지날 때에는 풀이 자라게 했고 120,000명의 보병, 16,000명의 코사크 기병과 대포도 450문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있게 '타타르 칸을 흑해 건너 오스만 땅으로 쫒아버리고 오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타타르족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연거푸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습니다. 위기에 몰렸지만 골리친은 대포를 적절하게 사용해 물리쳤고 타타르족은 더 이상의 공격을 단념하고 크림 본거지로 후퇴했습니다.
러시아군 역사상 처음으로 크림 반도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크림 한국의 5km 길이의 엄청난 성벽과 성채에 좌절하고 맙니다. 깊은 해자 뒤의 성벽에는 이미 타타르 전사와 대포가 배치되었고 성채 안에는 칸의 본대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원정군은 전면공격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야포가 아닌 공성포를 가져왔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를 했습니다.
골리친은 칸에게 포위군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가벼운 조건을 내겁니다.
1.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약탈하지 말 것.
2. 더 이상 모스크바 공국에게 연공을 요구하지 말 것.
모스크바 공국은 타타르족을 달래느라 매년 막대한 돈을 지불했었습니다.
3. 끌고간 60,000명을 풀어줄 것.
그러나 군사력에 자신있었던 칸은
1. 싫어
2. 싫어
3. 어디있는 지 모름. 풀어줬더니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했음.
다시 말해 노예로 처분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어쩔 방법이 없어진 골리친은 또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소피아에게 대승을 거뒀다는 거짓 보고를 했고 소피아는 체면도 잊고 관례대로 크레믈린 궁에서 맞이하지 않고 모스크바 성밖까지 나가 연인을 맞이하고 말을 같이 타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모든 성당에서 특별감사 미사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연인과 장교들에게 엄청난 보상을 합니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까요?
스위스 장교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전사 20,000명, 포로 15,000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귀중한 대포 70문과 모든 탄약을 타타르족에게 넘겨주고 와야 했습니다.
결국 이런 실정때문에 소피아는 실각하게 되고 초강대국 러시아의 기틀을 마련하는 표트르 대제가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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