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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대북방전쟁

스웨덴과 러시아의 운명을 바꾼 폴타바 전투 (2)

by uesgi2003 2011. 4. 18.


(매일경제 기사용으로 수정해서 다른 이야기와 용어나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


원래 폴타바 전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워낙 매력적인 영웅 두 사람을 소개하다 보니 너무 늘어져서 정작 전투는 성의 없이 건너뛰는 느낌입니다.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 폴타바 전투장면이 제대로 재현된 영화장면이 있으니까 그것을 보시면 더 이해가 쉬울 겁니다.

긴 이야기이고 생소한 지명과 인명이 난무하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어 발음, 러시아 발음, 어설픈 스웨덴 발음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데 불편하신 분은 바로 옆의 원어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운명을 바꾼 폴타바 전투 (2) 

 

표트르는 동토의 변방 러시아를 깨우는 개혁을 단행했고 발트해 확보를 위해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건설과 수도천도를 단행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발트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안방주인인 스웨덴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북유럽 최강국이었던 스웨덴을 공략하기 위해 덴마크와 폴란드를 후원하지만 철부지 사자새끼로만 알았던 카를 12세가 불세출의 전사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거꾸로 카를 12세와 정예군대가 러시아국경을 넘어 모스크바를 위협하는 지경까지 몰리게 됩니다.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다가서는 스웨덴군입니다. 스웨덴군은 카를의 성격대로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선제공격을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폴타바 전투에서는 앞열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표트르는 진흙장군이라는 천혜의 자연방어물과 함께 초토화 작전으로 스웨덴군의 발을 묶는데 성공했고, 카를 12세는 보급문제로 모스크바가 아닌 곡창지대 우크라이나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표트르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카를의 본대와 병참부대 사이의 틈을 파고듭니다. 병참부대의 판단착오로 원하지 않는 폴타바전투를 벌이게 된 스웨덴군은 카를 12세의 부상까지 겹치며 몰락하고 러시아는 발트해 진출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스웨덴 초유의 병력동원

 

표트르는 핀란드 지역과 폴란드에 군대를 보내 대리전쟁을 할 때만 해도 "! 이번에도 졌구나. 아직은 스웨덴의 적수가 안 되는구나. 좋은 경험이 되었어"라고 위안을 할 수 있었지만, 카를 12세가 직접 원정길에 오른 지금은 단 한번의 패전이 러시아의 운명을 가를 수 있었다. 

카를은 보병 18개 연대, 기병과 용기병 16개 연대로 구성된 총 3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그로드노-빌나-민스크의 삼각지형에서 러시아 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보급품을 담당한 레벤하웁트Lewenhaupt의 12,000명이 리가Riga에서 출발하여 남진 중이었으며, 리벡커Lybecker의 14,000명이 핀란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기 위해 남진했다.



카를과 표트르의 물고 물리는 추격전이 벌어지는 지도입니다. 큰 그림으로 한 번 눈여겨 봐두어야 이후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습니다.

 

카를은 표트르와 대회전을 벌여 빠른 승부를 내고 싶었지만, 연패를 했던 표트르는 정면대결을 피하며 초토화작전으로 최대한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품과 도강 장비를 가진 레벤하웁트가 제시간에 합류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만약 리벡커가 제2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1713년에 천도해서 1918년까지 러시아제국의 수도. 러시아 혁명 후에는 레닌그라드로 개명. 2차대전 당시 독일과 핀란드군에게 872일동안 포위되어 410만 명이 사상당했던 비극의 도시)를 공략한다면 표트르는 평화협상에 나서거나 결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벤하웁트가 계획대로 보급품을 가지고 합류한다면 47,000명으로 불어난 병력으로 모스크바까지 무인지경으로 내달릴 수 있었다.

 

상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에게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발트해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어부만 살던 습지대에 유럽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초빙해 건설했는데, 리벡커의 별동대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카를의 본대만큼이나 두려운 위협이었다. 리벡커가 이 도시를 함락시킨다면 표트르는 카를과의 결전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고, 리벡커가 함락은 못시켜도 포위만 제대로 한다면 표트르는 귀중한 병력을 떼내 구원할 수 밖에 없었다. 

카를에게는 또 다른 예비군이 있었다. 폴란드 국내상황이 안정되면 폴란드 주둔병력 8,000명까지 러시아 국경을 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70,000명까지 불어나 스웨덴 초유의 병력이 동원될 예정이었다. 그 동안에도 4배가 넘는 러시아군을 가볍게 이겼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이면 러시아 점령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전경. 건설당시 서유럽 국경선에 신도시를 짓고 천도를 했을 정도로 표트르의 유럽과 대양진출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는 말이 있다. 다잡은 사마소를 하늘이 살려주었듯이 카를의 전략은 시작부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리벡커가 상페테르부르크를 공략은 고사하고 포위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레벤하웁트는 무거운 몸(?)때문에 카를의 본대에 보급품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 주연급 조연의 등장은 좀 뒤로 미루기로 하자.


러시아 군은 대리전쟁을 치를 때에도 많은 병력을 투입했으니 본토에서는 총동원령을 내리는 것이 당연했다. 표트르는 월등히 많은 병력으로 스웨덴 진영을 활 모양으로 둘러쌌는데 26개 연대의 보병, 33개 연대의 용기병으로 구성된 총 57,500명의 병력으로 카를의 본대를 견제했고, 아프락신Apraxin 24,500명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하고 있었으며, 바우어Bauer 16,000명의 병력으로 남하하는 레벤하웁트를 요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밖에 예비 병력인 골리친Golitsyn 12,000명까지 합치면 러시아군의 규모는 무려 110,000명으로 62,000명의 스웨덴 군(폴란드 병력은 결국 불참)보다 2배가 더 많았다.

나르바에서는 4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서도 스웨덴군에게 참패를 당했었지만, 그 동안의 패전으로 많은 훈련을 쌓았고 부상만 당해도 전력손실로 이어지는 스웨덴군과는 달리 러시아군은 언제라도 새로운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표트르가 실제 지휘를 했지만 총사령관은 골리친이었습니다. 표트르는 전투에서 일선 장교계급을 가지곤 했는데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는 기만책이 아니라 행동파였기 때문에 일선 장교로 참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서유럽 방문 때에도 차르신분을 숨기고 일반인으로 다니는 것을 즐겼습니다. 만약 상대국에서 차르대접을 할 경우에는 몹시 화를 내며 모든 의전을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푸대접을 받으면 반드시 보복하는 등의 이중행동을 해서 접대국을 난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서유럽 순방에 나서면서 스웨덴 국경요새에서 홀대를 받았고 스웨덴과의 전쟁을 서두른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표트르도 어쩔 수 없는 차르였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표트르가 소년사관학교 식으로 친위연대를 직접 양성했었다고 설명한 내용 기억하시죠? 그 당시부터 고위 장교직은 외국인에게 맡겼는데 이번 전투에서도 외국인 장교가 대거 참전했습니다.)

 

홀로브친Holowcyn 전투

 

1708 6 6, 표트르가 불지른 평원에 초목이 자라나면서 카를은 3개월간 갇혀 지냈던 캠프를 헐고 바르샤바-스몰렌스크-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세레메텝Seremetev와 멘시콥Menshikov도 베레지나Berezina강을 이용해 스웨덴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카를의 전술이 워낙 충동적이고 변화가 심해서 도강이 예상되는 보리솝Borisov에만 8,000명의 병력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나머지 병력은 상황변화에 따라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카를에게 다시 한 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카를은 남쪽으로 9일간 크게 우회해서 베레지나강을 가볍게 도강했다. 배후를 위협당한 러시아군은 바로 후퇴하기 보다는 지연전을 펼치기로 하고 바비치 강변의 홀로브친을 중심으로 집결했고, 정면대결을 반기는 카를도 30일에 바비치 강변에 도달했다.

평소의 카를이었다면 도착하는 즉시 공격을 개시해 적을 공포에 몰아넣었겠지만 이번만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병력이 많은 러시아군이 강 제방을 따라 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서 방어진지를 단단히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러시아의 진지는 중앙의 습지대를 두고 북쪽에는 보병 12개 연대와 기병 10개 연대를, 남쪽에는 보병 9개 연대와 용기병 3개 연대를 배치시켰다. 그리고 좌우 양 측면으로 10,000명의 용기병과 코사크기병이 스웨덴군의 우회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 동안 카를의 우회공격에 측면을 돌파 당한 적이 많았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강을 따라 넓게 포진해 스웨덴군의 우회공격에 대비했다.

 

(용기병Dragoon은 말을 타고 싸우는 보병의 일종입니다. 병력보강이 급히 필요한 곳에 달려가 보병부대로 싸웠고 적진을 돌파하거나 패잔병을 추격할 경우에는 기병역할을 했습니다. 창기병, 경기병과 달리 양성이 쉽고 비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근대 전투에서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카를은 이번에는 러시아군이 기다리고 있는 측면돌파보다는 자살공격에 가까운 습지대를 통과하는 중앙공격을 선택했다. 카를은 소부대를 양 측면으로 이동시켜 러시아군을 제자리에 못박아두고 러시아군이 비워둔 중앙의 습지대로 바로 쳐들어갔다. 

러시아군은 습지대에서는 스웨덴의 핵심전력인 기병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카를은 거꾸로 중앙의 습지대를 통과해 러시아의 좌우익을 둘로 나눌 생각이었다. 어차피 병력이 20,000명 밖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의 중앙공격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스웨덴군의 핵심전력인 중기병Reiter입니다

보병대열 앞에서 권총을 일제사격해 대열을 흔들어 놓은 후에 뛰어들어 대열을 무너트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중세의 기사, 현대의 전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흉갑과 투구를 갖췄기 때문에 기병전에서도 대단한 위력이었습니다. 

 

7 3, 강에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자, 카를은 전 연대에 공격준비 명령을 내리고, 포대도 미리 골라둔 지점으로 조용히 이동시켰다. 날이 밝으면서 스웨덴군은 잠에서 깨어 나지 않은 러시아 군의 진지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은 후에 7,000명의 보병이 강으로 뛰어 들었다. 당연히 카를이 선두에 섰다.

 

물이 턱까지 차오르고 러시아군의 맹렬한 사격을 받아가며 스웨덴군은 유럽최고의 정예답게 한 발, 한 발씩 전진했다. 많은 피를 흘리기는 했지만, 계획대로 중앙의 습지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정작 스웨덴군을 힘들게 한 것은 놀랍게도 습지대가 아닌 러시아군이었다. 핀란드에서도, 폴란드에서도 스웨덴군이 진지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러시아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모습만 보여줬었는데, 이번만큼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대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30~40보 거리를 유지하며 조금씩 물러나며 대응사격을 했다.

카를은 러시아군의 예상 밖의 대응을 보고 병력을 정렬해서 맞사격하도록 명령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두 나라의 군대는 단 한번도 원거리 사격전을 벌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한 시간이나 서로에게 총을 쏘았다.

 

레프닌Repnin은 오전 7시경,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선봉부대의 지휘관이 바로 카를임을 알게 되자 스웨덴군의 공격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위기에 몰린 레프닌은 측면의 골롭친 용기병 1,200명에게 카를의 노출된 옆구리를 찔러줄 것을 요청했고, 카를은 예전의 경험으로 러시아 군이 곧 무너질 것으로 기대하고 전면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배후는 강에, 측면은 용기병에게 포위될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다. 

 

왕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안 스웨덴의 렌스콜드Rehnskold는 근위기병대 600명을 이끌고 급히 강을 건너 측면의 러시아기병과 충돌했다. 러시아 병은 모두 용기병으로 스웨덴의 정예 근위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러시아기병이 2번이나 공격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스웨덴 후위부대들이 강을 건너 카를의 선봉에 속속 합류하자 숲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대열을 유지하며 카를의 공격을 막아내던 레프닌의 보병도 측면의 기병이 무너지고, 새로운 적군이 보강되면서 결국 캠프와 대포를 적의 손에 넘겨주고 기병을 따라 숲으로 후퇴했다. 오전 8시에 레프닌의 진지를 장악한 스웨덴군은 이제 북쪽의 세레메텝을 상대할 차례였다. 

세레메텝은 포화소리를 듣고 레프닌을 응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습지대가 러시아군의 발목을 잡았다. 남쪽의 러시아군을 제압한 카를은 북쪽의 러시아군을 향했지만, 표트르가 세레메텝에게 전황이 불리해지면 무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여서 러시아군은 모질레프와 드니에프르강으로 서둘러 후퇴했다.


 

홀로브친(Holowcyn) 전투는 카를이 1년 전에 작센Saxony를 출발한 이후, 러시아군과 스웨덴군이 최초로 대결한 전투였다. 겉으로 보면 스웨덴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숫자도 많고 참호에 틀어박혀 기다리는 적을 공격해 캠프를 점령했으며, 카를은 전사왕이라는 칭호에 어울리게 전장 한복판에서 지휘를 했는데도 상처하나 입지 않았다. 이 전투로 드니에프르강까지 길이 열렸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 전과일 뿐이었고 뒤늦게 도착한 표트르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인 면이 훨씬 더 많은, 절반의 승리였다. 중요한 방어선을 다시 한 번 내줬다고 해도 러시아 전체 병력 중 겨우 30%만이 실제 전투에 참전했고, 카를이 이끄는 공격에 무려 4시간이나 버텨냈다.

물러나면서도 이전의 지리멸렬한 모습이 아니라 대열을 갖추고 저항을 했으며 스웨덴군이 추격하지 못하게 신속하게 후퇴했다.

 

러시아군은 977명 전사, 675명 부상으로 267명 전사, 1,000명 부상의 스웨덴군에 비해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스웨덴 군의 손실은 보충되지 않는 순손실이었고 러시아군은 시간만 지나면 보충되는 손실이었다

당시 의료기술이나 시설을 감안하면 총상이나 자상은 파상풍 등으로 불구가 되거나 죽기 때문에 적진에서의 1,000명 부상은 모두 전사나 마찬가지였다. 표트르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벌일 지연전에 휘말리게 되면 카를은 모스크바에 가기도 전에 병력이 전부 사라질 판이었다. 더군나 스웨덴군이 강을 건너자, 러시아군이 불을 놓아 초토화된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카를은 러시아군과 결전을 벌이고 싶었지만 표트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고 원정의 성패열쇠는 조연인 레벤하웁트의 보급부대와 리베커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별동대가 쥐게 되었다

 

레벤하웁트는 어디에

 

이쯤이면 보급품과 도강장비를 싣고 나타나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어야 할 레벤하웁트가 연락조차 안되었다. 결국 7 9일부터 8 5일까지 한달 동안, 35,000명의 병력은 드니에프르강의 제방에서 레벤하웁트를 기다리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1개월이라면 러시아군은 몇  명의 보병을 새로 조직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이 귀중한 시간 동안 레벤하웁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폴타바 전투의 승패를 가른 레벤하웁트입니다. 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는데,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도강장비를 수 백km나 행군하라는 명령자체가 무리였습니다. 폴타바 전투에서 보병지휘관으로 명예회복을 노리지만 결국 포로가 되고 맙니다.

 

지난 3월에 카를은 그에게 아주 간단명료한 명령을 내렸다. 12,500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본대가 3개월간, 스웨덴 전군이 6주간 버틸 수 있는 보급품을 모은 후에 리투아니아를 관통해 내려와 합류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들이 운반해온 보급품은 모스크바 공략에 사용될 물량이었고, 레벤하웁트의 병참부대는 그 동안 구멍이 생긴 전력을 보충하는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리가에서 모질레프까지의 640km가 넘는 거리는 6월 초에만 제대로 떠났다면 8월 초에는 본대와 충분히 합류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지만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이었다.

 

레벤하웁트는 리가에 도착하자마자 2,000대의 마차와 8,000마리의 말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여기서부터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6 3일 카를은 원정에 나서면서 그에게 베리지나 강을 향해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7월이 되어서야 7,500명의 보병과 5,00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보급품 후송부대가 리가를 출발할 수 있었다. 레벤하웁트 자신은 미진한 부분의 뒤처리를 위해 7 29일까지도 리가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카를이 모질레프를 향해 출발할 당시에도 병참부대는 무려 400km나 뒤처져있었다.

 

사실 레벤하웁트에게만 뭐라고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막대한 보급마차만으로도 속도를 낼 수 없는 판에 카를의 명령인지 아니면 독단적인 판단이었는지 모르는,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도강장비도 함께 운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군속도는 아예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부실한 러시아의 지방도로를 따라 대형 가교를 옮기고 있었는데 32명의 건장한 병사가 겨우 20걸음을 걷고는 교대를 해야 할 만큼 무거웠다고 한다. 이 부대는 하루에 겨우 8km를 가까스로 전진했다고 하니까 한 달에 겨우 228km만 갈 수 있었다. 도착하기로 했던 7, 아니 8월 그리고 9월이 되어서도 레벤하웁트의 달팽이 부대가 안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표트르에게는 레벤하웁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격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는 상트페레트부르크의 아프락신이 리벡커의 공격에 버텨줄 것으로 믿고, 레벤하웁트를 따라다니면서 유연한 작전을 펼치기로 했던 바우어의 16,000명을 남하시켰다.

반면 카를은 러시아에서 전투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여름 한 철을 강가에서 수영이나 하면서 보냈는데, 보급품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자신과 레벤하웁트 사이의 틈을 표트르가 노려서 공격한다면 러시아 원정계획을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었다. 카를은 계획했던 모스크바 진격을 연기하는 대신에 러시아 군이 레벤하웁트를 노리지 못하도록 남과 북으로 견제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카를의 수제자, 러시아


8 9, 카를은 결국 드니에프르 강을 건너 러시아군에게 싸움을 걸었다. 페리코프에서 대치하던 양군은 정찰병끼리 계속 소규모 충돌을 벌이던 차에, 카를이 원하지 않던 전투가 벌어졌다. 카를의 본대와 4.2km 정도 떨어져서 후위를 맡고 있던 루스Roos의 부대가 습지대 옆에 캠프를 세웠는데, 러시아군은 지난 홀로브친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습지대를 노렸던 작전을 그대로 사용했다. 2차 대전에서도 소련이 독일의 전격전을 그대로 베꼈듯이, 러시아는 상대의 뛰어난 전략전술을 흡수하는 특기가 있었다.

 

8 30일 오전에 짙은 안개의 엄호를 받은 골리친 왕자의 보병 9,000명과 용기병 4,000명이 습지대를 건너 루스의 캠프를 기습했다. 기습의 충격에서 벗어난 스웨덴군은 2시간 정도의 치열한 백병전을 펼쳐 위기에서 벗어났고 지원병력이 속속 도착하자 러시아군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습지대 너머로 후퇴했다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카를이 전 부대에 공격명령을 내렸을 때에는 이미 러시아군이 캠프를 비운 상태였고 주변 마을을 모두 불태워 스웨덴군이 어떤 보급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700명 전사, 2,000명 부상으로 스웨덴군의 300명 전사, 500명 부상에 비해 두 배나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러시아군이 처음으로 작전 주도권을 잡았고, 스웨덴군의 한 축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작전에 따라 후퇴했다는 사실은 러시아군도 전술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를은 이제 러시아가 참호에 들어 앉은 거위떼가 아니라 사냥감을 노리는 늑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표트르의 편지를 잠깐 훔쳐보면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군을 지휘한 이래로 우리 병사들에게서 이렇게 질서정연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카를도 아마 놀랐을 것이다. 신이시여!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야 주시길!"


카를은 시간이 지날수록 러시아에게 유리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모스크바를 향하는 지평선 너머에서 타오르는 연기(초토화작전으로 지른 불)는 스웨덴군이 어디로 향해야 할 지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도대체 레벤하웁트는 어디까지 온 것일까? 이제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았다. 드니에프르 강으로 물러나 레벤하웁트를 기다리거나 남부의 세베리아로 남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물러나본 적이 없는 카를에게 있어서 러시아 놈들 때문에 후퇴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기에 표트르가 손대지 않은 남부로 내려가 보급품을 조달하고 레벤하웁트와 합류해 다시 모스크바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9 15, 카를은 자신과 스웨덴의 운명을 결정지은 남하의 길을 선택했다.


카를의 등에 꽂힌 비수 - 레스나야 Lesnaya 전투

 

카를이 캠프를 허문 9 15, 레벤하웁트는 드니에프르강 서편 48km까지 전진했다. 그러니까 카를과의 거리는 여전히 144km나 떨어져 있었고, 표트르는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본대를 세레메텝에게 맡겨 카를의 뒤를 바짝 뒤쫓도록 하는 한편, 자신은 근위부대 최정예 20개 연대로 구성된 별동군 11,625명을 직접 지휘해 레벤하웁트를 요격하기로 했다. 표트르는 적의 병력을 8,000명 정도로 오판했는데, 만일을 위해 바우어의 용기병 3,000명도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레벤하웁트의 병력은 12,500명이었고 겨우 2,000명 더 많은 병력으로 스웨덴군을 공격할 셈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의 전투결과를 본다면, 이 정도의 병력으로 스웨덴군을 요격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었지만, 시간과 함께 행운의 여신도 표트르의 편이었다.

 

18일에 드디어 드니에프르강에 도달한 레벤하웁트는 왕의 전령에게서 강을 건너 남하하라 명령을 다시 받게 된다. 3일 간의 악전고투 끝에 도강에 성공한 그의 뒤에는 사냥감을 노리는 늑대 무리인 코사크기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제 러시아와 스웨덴의 운명을 건 경주가 시작되었다.

초조해진 레벤하웁트는 밤에도 행군을 하며 이제 강 하나만 건너면 본대와 합류할 수 있는 지점까지 갔을 때, 드디어 붉은 코트의 러시아 정규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7, 러시아 선봉기병대가 후위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전투가 곧 벌어질 것을 예감한 레벤하웁트는 후위부대를 희생시키면서 도강할 시간을 벌 것인지, 아니면 마차를 세우고 일전을 벌일 것인지 고민했다.

 

그는 보병 사령관 출신답게 일전을 치르고 강행돌파하기로 했다. 병사들을 전투대형으로 정렬시키고 러시아군의 공격을 기다렸지만 오후 늦게 까지도 러시아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귀중한 하루를 낭비한 그는 다시 마차를 이끌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무의미하게 버린 24시간이면 카를의 본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정권까지 갈 수 있었는데도 어처구니없게 러시아군의 지연작전에 말려들었다

(러시아군은 예상과 달리 스웨덴군의 규모가 훨씬 큰 것을 보고 놀라서 전투를 망설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표트르에게는 신의 도움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행운이 계속됩니다.)

 

카를의 본대와 합류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던 표트르는 28일 오후 1, 근위병과 용기병을 투입해 레벤하웁트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멘시콥의 부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비슷한 수의 전력이 맞붙은 전투라 어느 한 곳이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다가 저녁 무렵에 갑자기 불어온 폭우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러시아군의 막강한 전투력(사실은 차르 친위부대의 필사적인 공격)과 차르(표트르)의 모습을 본 레벤하웁트는 자신이 러시아 주력을 상대하고 있다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더 이상 마차를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급품을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살려서 카를과 합류하기 위해 마차에 전부 불을 지르게 했는데, 그만 스웨덴군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레스나야 전투진행도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3개월 동안 고생하면서 끌고 온 마차와 도강장비에 불이 붙자, 레벤하웁트 군대의 규율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혼란을 틈타 값나가는 물건과 술을 약탈하는 병사가 있는가 하면, 마차에서 풀려난 말을 타고 먼저 달아나려고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무질서하게 달아나다가 강변에서 코사크에게 죽은 탈영병이 500명이 넘었다. 아침이 되자 레벤하웁트는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직접 확인했다.

4,500명의 기병 중 3,030명만이, 8000명의 보병 중 겨우 3,451명만이 남아 있었다. 무려 3,000명이 달아나다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물론 필사적인 공격을 했던 러시아군도 1,111명이 전사하고 2,856명이 부상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스웨덴군의 보급품을 모두 불태우는 대전과를 올렸다.


레벤하웁트가 단호한 태도로 계속 전투를 벌였다면 표트르라는 보석을 왕에게 선물로 바칠 수도 있었겠지만, 성급한 판단으로 인해 카를의 등에 비수를 꽂게 된 것이다. 레벤하웁트는 만신창이가 된 병사를 이끌고, 카를이 그렇게 기다리던 보급품은 하나도 없이 카를의 본대에 합류해 원래의 임무인 보병 사령관을 맡게 된다.



스웨덴군을 공격하는 표트르의 용기병과 보병입니다. 

 

어려움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해 러시아군의 귀중한 전력을 유인해주기로 했던 리베커가 29일에 제대로 도착했지만, 수비 병력과 방어력을 과대포장한 아프락신의 허위정보에 속아 도시를 완전히 한 바퀴 돌기만 하고 포위망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아무런 성과도 없이 3,000명의 병사와 8,000마리의 말까지 잃고 말았으니 이제 카를에게는 어느 곳에서도 지원부대를 기대할 수 없는 파산선고가 내려졌다.

 

표트르의 역공

 

카를에게는 잔인한 불운이 계속 닥쳐왔는데 1708년 겨울은 다른 해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이 당시에는 월동장비가 부실했기 때문에 겨울에는 어떤 작전도 펼치지 않고 숙영지로 들어가 곰처럼 겨울잠을 자며 겨울을 나는 것이 정석이었다. 

카를은 천만다행으로 표트르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마제파Mazeppa라는 코사크 족장을 포섭하는데 성공해 겨울캠프와 식량을 조달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표트르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이쪽, 저쪽 진지를 공격해 겨울숙영지에 있는 스웨덴 병력을 전방으로 끌어냈고 카를의 귀중한 전력을 계속 누수시켰다.

 

표트르의 교란에 화가 난 카를은 아직 때가 아닌 1월에 숙영지를 떠나 베프릭을 3,000명의 병력으로 공격했다. 이 마을은 표트르의 외국인 군사고문이 보병 2개 중대, 코사크 400명과 2문의 대포만으로 수비하던 곳으로, 방벽에 물을 부어 얼음벽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대포가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보병이 성벽을 기어오를 수도 없었다. 대부분 사냥꾼 출신이었던 코사크 수비병은 사냥용 총으로 정확하게 장교나 사다리를 운반하는 병사들의 가슴을 명중시켰고 스웨덴군은 1,000명을 잃으면서도 작은 마을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탄약이 모두 떨어진 수비대가 '명예로운 항복'을 선택해 무기와 부대깃발을 지참하고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당당하게 스웨덴 군의 사이를 지나 본대로 복귀했다.

 

카를은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별다른 소득이 없자, 무리하게 폴타바를 포위했고 표트르도 이제는 승부를 낼 때라고 생각하고 이 도시를 결전의 장으로 삼으면서 양군의 최후의 일전이 벌어졌다.

 

사면초가, 폴타바 전투

 

6 27, 폴타바를 중심으로 포진한 양측의 진영을 그림을 참조해서 살펴보자. 먼저 표트르는 25,500명의 병력과 73문의 대포를 요새화된 캠프에 집결시켰고, 야코베트스키숲에는 스웨덴군의 기습을 막기 위한 1,000명의 보병과 1,000명의 코사크기병을 숨겨두었다. 그리고 전투 초반 우세한 스웨덴군의 기세를 둔화시키기 위해 진격로에 50m 간격으로 10개의 보루를 구축해두고 여기에 4,000명의 수비대와 16문의 대포를 배치시켰다. 표트르의 예상대로 이 보루는 스웨덴군의 진격을 어지럽히는 동시에 보병과 기병의 공조를 깨뜨리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물론, 수비대는 모두 전멸당했지만.


 

스웨덴군은 폴타바 북부에 8,200명의 보병을 배치하고 7,800명의 기병은 그 옆의 평원에 포진시켰다. 보급품은 2,000명의 기병대와 마제파 코사크부대가 호위하고, 폴타바는 1,100명의 병력으로 계속 포위했다. 1,800명의 기병은 적의 배후공격을 대비하고, 폴란드 비정규군 1,000명은 야코베트스키 숲에서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카를은 전장을 살펴보던 중 저격을 당해 상처를 입고 쓰러졌고 24명의 근위병이 들것으로 호위하며 날랐는데, 하늘이 내린 전사왕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스웨덴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무엇보다 카를이 전장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작전변경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병력이 크게 모자라는데도 언제나 그랬듯이 카를은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간단했는데, 이른 새벽에 보병들이 보루를 순식간에 점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무시하고 진격해서 캠프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러시아군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렌스콜드의 기병이 퇴로를 막아 러시아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차르를 잡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몇 가지 위험한 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먼저 러시아군이 과연 스웨덴의 기대대로 방어전만 펼칠 것인가, 그리고 보루의 교란공격을 무릅쓰고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러시아 용기병이 전과 같이 보병의 측면을 공격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물러날 것인가 하는 뚜껑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아마 많은 분이 카를을 응원할 텐데 안타깝게도)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기습효과는 사라져버렸다. 자정부터 대열을 갖추고 기다린 보병과 달리 기병대의 합류가 늦어져서 공격에 나섰을 때에는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위험요소 하나의 심지에 불이 붙은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부대 앞으로!"라는 구령과 함께 보병들이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원래는 보병이 네 줄로 나란히 진격하면서 두 줄이 사격을 흡수하고 다른 두 줄은 대열을 유지한 채로 빠르게 러시아군 캠프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각 대열의 장교들에게 이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서 자신의 임무가 앞으로의 맹목적인 돌격인지 아니면 보루를 점령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병사가 많았다.


(스웨덴군의 기병 사령관과 보병 사령관은 서로를 혐오하며 반목했기 때문에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협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에는 카를에게 절대 복종하느라 문제가 없었지만 카를이 부상으로 물러나면서 심각한 불협화음이 발생했습니다.)


 

러시아군의 최전위 보루는 순식간에 점령되고 수비대는 전부 전사했다. 스웨덴군은 최전위 보루를 넘어서면서부터 대열이 조금씩 엉키기 시작하더니 세 번째 보루부터는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해 보루공격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 보루를 빠져나올 때쯤에는 거의 모든 대열이 엉켜 연대가 서로 뒤섞이는 매우 혼란스러운 대열이 되었다.

상황은 스웨덴군에게 더욱 안 좋게 돌아갔다. 마지막 보루 뒤에는 멘시콥의 용기병 9,000명이 레벤하웁트의 보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웨덴 기병이 여기에 맞서면서 보루 근처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서 카를이 기대했던 기습도, 신속한 공격도 모두 사라지고 병사와 부대단위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일반적인 전투양상이 되었다.


 

오전 4 30, 멘시콥의 기병은 표트르의 명령에 따라 캠프로 후퇴하고, 그 뒤를 스웨덴군이 마구잡이로 추격했다. 카를이 부상을 당하지 않고 직접 전투에 참가해 지휘했다면 이런 혼란은 미리 막았겠지만 카를은 들것에 실려 후방에 있었고, 양쪽의 포격으로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보고와 대응책이 모두 한 박자씩 늦어졌다.

 

스웨덴 군의 혼란

 

레벤하웁트는 보루를 통과해 러시아군 캠프 부근에 도착했지만 멘시콥을 추격한 기병대와 보루를 공격하느라 뒤처진 보병을 기다리며 멈춰 서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보루 공격을 담당한 루스는 레벤하웁트의 기대와는 달리 보루공격에 실패해서 1,000명의 병력을 잃고 뒤로 후퇴한 상태에서 레벤하웁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6, 레벤하웁트와 루스가 서로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러시아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또 다른 승리의 요인인 공격 주도권을 러시아 군에게 넘겨주기 시작했다. 5개 대대가 보루를 탈환하면서 루스를 공격했고 루스는 보루와 러시아군의 협공에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1,100명 이상을 더 잃은 루스는 폴타바 포위군과 합류해 전멸을 모면해보려고 했지만 폴타바 수비대가 보낸 4개 대대의 요격을 받고 항복을 했다. 스웨덴군은 표트르의 본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전력의 30%를 잃어버렸다.



아직 역전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북쪽에서 기병대와 합류한 레벤하웁트가 러시아군의 캠프 북쪽을 파고 든다면 나르바에서와 같이 러시아군을 좁은 공간 안에 가둬놓고 마음대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표트르도 나르바의 교훈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22,000명의 병사를 재촉해 30분 만에 캠프 앞에 정렬시켰고 대포는 캠프의 높은 장소에 배치시켜 우군의 머리 너머로 포탄을 날릴 수 있게 조준해두었다. 보병의 양 측면은 바우어와 멘시콥의 용기병을 배치시켜, 전통적인 기병협공을 준비해두었다.


 

이제는 거꾸로 스웨덴군이 측면을 절단 당할 위기에 몰렸다. 스웨덴군이 급하게 방향을 돌렸지만 위치가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등 뒤에 숲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표트르의 부대가 전진할 경우에는 진형을 변경하지도 못하고 당할 판국이었다. 결국 남아있는 대안은 선제공격을 하는 것뿐이었다. 양쪽의 거리는 800m로 스웨덴군은 10분 동안 돌격을 해야 했고 이 귀중한 시간 동안 러시아의 포대는 마음껏 스웨덴군의 대열을 일방적으로 유린했다. 포탄은 오렌지와 군청색 군복 물결 사이에 작렬했고 특히 우박으로 비유되는 산탄포가 스웨덴군의 머리 위에서 터질 때마다 수십 명이 고꾸라졌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포격으로 대열이 무너져 내린 스웨덴군이 30~40m 거리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군의 소총 수 천 정이 일차, 이차, 삼차 연거푸 앞 열의 스웨덴군을 베어 넘기듯 쓰러뜨렸다. 이미 응집력을 잃은 스웨덴군이지만 훈련된 전투기계답게 거리를 좁히자 침착하게 조준사격한 후에 착검돌격을 하면서 러시아군 일진을 무너뜨렸다. 그것으로 스웨덴군의 마지막 기세가 사라졌다. 표트르가 준비시킨 좌우측의 기병이 측면을 협공하고 나선 오전 11시부터는 더 이상 전투라고 부를 것이 없었다. 


카를은 포화의 연기로 자랑스런 스웨덴군의 최후를 목격하지 못했다. 노심초사하고 있던 카를에게 보병들이 달아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포연이 걷히자 유럽최강의 부하들이 시체로 변해 들판 가득히 쓰러져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스웨덴의 영광은 이 전투 한 번으로 과거의 것이 되었다.

이날 카를은 자신을 옮기던 근위병 24명 중 21명을 잃은 것 외에도, 9,700(6,900명 전사, 2,800명 포로)을 잃었다. 그리고 부상자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러시아군의 맹렬한 추격을 받던 카를은 근위병만 이끌고 간신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피신을 했지만 20,000명의 패잔병은 표트르의 추격군에게 7 1일 모두 항복했다.



전투를 마무리짓고 있는 표트르대제입니다. 그의 군복은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카를에게 충성을 다했던 마제파 족장이, 카를에게 후퇴를 권유하고 있습니다. 

 

폴타바 전투 그 이후

 

카를은 레스나야 전투에서 스웨덴으로 발길을 돌리고 후일을 기약했어야 했다. 자존심 강한 전사왕이 열등한 러시아 민족을 상대로 쫓겨왔다는 치욕을 참을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상상할 수 있기에 역사가 재미있어진다.

 

카를은 1714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손님이자 포로신세로 연금되었고, 그 동안 스웨덴은 러시아와 덴마크의 공격에 거의 모든 해외영토를 상실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카를이 동원한 원정군이 스웨덴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전부였다.

카를은 오스만 제국을 부추겨 러시아를 침공하게 만들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적거리는 술탄의 우유부단함에 신세를 한탄하다가 스웨덴으로 돌아간다. 그는 폴타바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평화협상과 본국의 내치보다는 전쟁과 해외원정을 선택했다가 1718년 노르웨이 남부에서 전사했다.


(표트르는 이전에도 오스만 투르크군에게 승리를 거뒀었고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둬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발칸반도의 위대한 해방자를 꿈꾸며 개입했다가 오스만 투르크와 일전을 벌이게 되고 포로가 되기 직전까지 몰리게 됩니다.

카를이 있었다면 표트르는 오스만 투르크의 포로가 되어 다시 한 번 러시아의 역사는 요동을 쳤을텐데, 다시 한 번 안타깝게도 카를은 자신이 지휘관이 아닌 참관자 역인 것에 화를 내고 참전하지 않다가 뒤늦게 달려가 마지막 역전의 기회를 날립니다.

표트르는 오스만군 지휘관에게 막대한 뇌물과 자신이 힘들게 정복했던 오스만 투르크의 주요 요새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탈출합니다.)

 

표트르는 스웨덴 육군을 밀어내고 그렇게 염원하던 발트해까지 진출해서 발트해를 놓고 스웨덴 해군과도 패권을 다퉜다. 스웨덴 해군은 카를 12세가 전사한 직후, 1719 5 24일 에젤과 1720 7 27일 그렌감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2척의 전함과 4척의 프리킷함을 잃고 스톡홀름 조약을 맺어 하노버에게 브레멘과 베르덴을 매각하고, 프로이센에게는 포메라니아를 매각했다. 1721년 리스타드 조약에서 스웨덴은 핀란드를 돌려받는 대신에 발트해 연안을 러시아에게 넘겨줘 발트해의 주인은 러시아로 바뀌었다. 스웨덴에게는 다행히도 그 동안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러시아의 대해진출을 견제해준 덕분에 더 이상의 영토를 잃지 않았지만 과거의 영광은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었다.



그렌감 해전 후, 자신의 함대에게 봉화를 올리고 있는 표트르입니다. 제가 표트르를 극찬하는 이유는, 바다를 단 한 번도 못보고 성장한 그가 대해진출이 국력성장과 직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차르가 외유에 나서 일반 선원부터 포수 그리고 선장까지 단계별로 몸소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궁정생활을 버리고 스스로 몸을 던져 강대국에게, 새로운 세계에, 바다에 도전한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입니다. 


그럼 지루하게 글로만 설명한 폴타바 전투를 동영상으로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자막은 없지만 전투장면이어서 큰 불편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