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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그리스

영화 300의 배경 -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레 전설

by uesgi2003 2014. 3. 6.


이야기도 정리했고 배급사와의 이익배분도 합의봐서, 서울 아이맥스 3D로 보려고 했는데 역시 상당한 부담이군요. 4인 가족 68,000원에 군것질거리와 저녁외식을 합치면 12만원이 넘어갑니다... 말도 안되는 비용이죠. 

그래서 조조로 혼자 보려고 했더니, 무슨 조조를 아침 8시부터 하나요? 언제나 여유있는 대한극장이나 일반관에서 보려고 했지만 역시 아이맥스의 유혹은 떨칠 수 없습니다. 좀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빠지면 조조로 혼자 봐야겠습니다. 


이제는 영화관 나들이도 엄청난 부담이 되는군요. 가족이 함께 할 수 없게 만들다니... 괜히 로또 가게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이번 이야기는 순서가 바뀐 테르모필레Thermopylae 전투입니다. 페르시아-그리스 전사에서 마라톤 평원-테르모필레-살라미스-플라타이아 순서로 설명해야 하지만, 영화 300: 제국의 부활 개봉 직전이어서 살라미스 해전부터 정리했습니다. 이번에 테르모필레를 정리하고 다음에 플라타이아 전투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300의 배경 -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레 전설


그리스 북부의 협로에서, 수 천 명의 그리스 전사가 거대한 군대를 저지하려고 맞섰다. 


기원전 5세기 (정확하게는 480년),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에서 그리스를 상대했다. 이 전투는 서방세계의 문화의 향방을 결정지었고 그리스 헬레니즘의 출발을 알렸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운명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페르시아는 마기Magi(페르시아의 사제)가 지식의 원천이고, 황제는 귀족까지도 노예취급을 하는 구시대를 대표했다. 그리스는 반신반인의 군주체제를 버리고 정치, 미술, 문학과 종교를 발전시키며 초창기 민주주의 개념을 시도했다. 근본이 다른 두 나라는, 테르모필레에서 정치와 사상대신에 왕의 군대와 전사집단으로 맞대결을 펼쳤다. 


테르모필레로 이어지는 긴 여정은 지금의 이란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고대의 유물만이 당시의 영광을 설명하고 있지만, 기원전 5세기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은 젊고 공격적이며 매우 위험한 국가였다. 페르시아의 확장은 기원전 6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는데, 첫 번째 샤Shah(대왕)인 키루스Cyrus가 메디아Media(북부이란의 고대민족)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지도참조. 클릭하면 커짐).   



키루스는 기원전 545년까지 페르시아 영토를 소 아시아 Asia Minor 해안까지 확장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페르시아의 전제군주는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소 아시아의 그리스인 도시는 별다른 고통을 겪지 않았다. 화가 난 군주의 변덕에 따라 목이 잘리고 불고문을 당하는 소문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샤의 아내가 사신을 피하기 위해 14명의 아이를 산채로 묻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폭군이 심어 놓은 스파이의 눈과 귀를 피할 방법도 없다고 했다. 샤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페르시아 귀족이 아들의 고기를 먹어야 했고 그런 지경이 되어서도 "왕의 뜻을 따릅니다"라는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 아시아 전역에 페르시아의 전제군주 문화를 강요했고 결국 기원전 499년에 그리스 도시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521년에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Darius는 6개의 귀족가문의 도움을 받아 사제들을 죽여 왕권을 확힙했고 페르시아에서는 마고포니아Magophonia(마기를 죽인 날)로 기념했다. 복수심에 가득 찬 다리우스는 마기의 목을 창끝에 꽂고 거리를 다니게 만들었다. 



이란 서부 암벽에 새겨진  다리우스와 9명의 마기 조각입니다. 다리우스 뒤에는 6명의 귀족 중 2명이 있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아테네라는 멀리있는 도시가 소 아시아의 미천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후원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분노했다. 그는 공중에 화살을 쏘며 "신이시여, 아테네 놈들을 처벌할 수 있게 해주소서"라고 기원했다. 심지어 노예 한 명에게 식사 때마다 "주인님. 아테네를 잊으시면 안됩니다"라고 여러차례 말하게 시켰다. 

그러나 다리우스의 첫 번째 그리스 원정은 490년에 마라톤에서 작은 규모의 아테네군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끝났다. 그리고 그리스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선왕이 이루지 못한 그리스 원정에 대해 큰 부담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리스 원정을 할만큼 가치가 있을 지에 대해 오랜 시간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꿈속에 유령이 나타나 그리스를 침공하라는 말을 건냈고, 사제는 세계정복의 계시라고 해석했다. 


크세르크세스는 4년 동안 제국 곳곳에서 병사를 소집하고 물자를 모았다. 페르시아, 메디아, 히루카니아Hyrcania뿐만 아니라 앗시리아Assyria, 스키피아 심지어 북아프리카에서도 병력이 몰려들었다(헤로도투스는 당시의 과장된 기록습관대로 170만 명의 병력을 기록했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최대 30만 명을 넘지 않는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심지어 4만 명 정도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기원전 5세기의 인구를 감안하면 150만 명은 있을 수 없는 숫자입니다.) 



당시 페르시아 원정군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의 정예병 임모탈, 불사부대의 모습입니다. 



헤로도투스는 해군을 빼고도 170만 명의 병력이 모였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해군과 유럽의 동맹국의 병력까지 합치면 260만 명이되었는데, 노예, 선원과 상인 등도 합치면 300만 명이 넘는 숫자였다. 

헤로도투스의 숫자는 과장이 심한데, 우리는 얼마나 과장되었는 지를 알 수 없다. 그저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엄청났으며 겉모습만으로도 질릴 정도라는 것은 분명하다. 헤로도투스는 군대가 멈추고 갈증을 풀 때마다 강바닥이 드러났다고 기록했다.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의 이동로입니다. 


원정군에서도 순수 페르시아 군대가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다. 페르시아 부대 뒤에는 여자와 노예를 가득 태운 수레가 따랐다. 특히 한 부대가 특권을 누렸는데 임모탈Immortal(불사부대)로 부대원이 죽거나 다치면 바로 교체시켜서 1만 명을 항상 유지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사열하며 인간의 짧은 생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병사를 가차없이 반토막내서 죽이던 폭군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원정군의 행군은 질서정연했다. 선두에는 절반의 병력이 섰고, 중간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왕이 있었고 페르시아 최고의 기병 1,000명, 창병 1,000명(창을 거꾸로 들고 행군), 10마리의 좋은 말, 8마리가 끄는 신성한 마차 한 대가 그 뒤를 따랐다. 다시 그 뒤에는 창을 제대로 든 1,000명의 귀족 창병, 1,000명의 기병, 호화로운 장식을 한 창을 든 10,000명의 보병, 그리고 다시 10,000명의 기병이 뒤의 병력 절반과의 거리를 유지시켰다. 



1685년에 그린 자료인데 제 설명과는 맞지 않습니다. 프랑스어라 그냥 참고 자료로만 올립니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에서 큰 전투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정군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저 성문 앞에 가서 항복을 권유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왕이 그랬듯이, 그는 미리 전령을 보내 항복의 상징인 땅과 물을 요구했다. 많은 그리스 도시는 전령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멸망을 피했다. 그들은 땅과 바다를 페르시아 제왕에게 바쳤다. 



영화 300이 배경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과장이거나 허구이지만, 사신이 땅과 물을 요구하고 스파르타가 그 대답을 들려주는 장면은 명장면입니다. 그렇지만 다리우스 때에 보냈다고 하는군요. 


두 도시에게만 전령을 보내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선왕 때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전령을 보냈다가 받은 모욕을 잘 알고 있었다. 아테네는 전령을 구덩이 처박았고, 스파르타에서는 우물 속으로 처박혔다. 

크세르크세스는 10년 전에 마라톤에서 선왕의 과업을 좌절시킨 아테네를 잘 알고 있었고, 행군을 하면서 또 하나의 강력한 도시국가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는 스파르타 망명객에게 그리스에서 누가 자신에게 대적할 수 있겠느냐며 물었고 스파르타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는. 스파르타는 법을 무서워하는데, 전투에서 절대로 등을 보이면 안된다는 법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법을 따라서 그들은 늘 굳건히 맞섰고 죽어간다고 말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단독으로는 페르시아에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연합전략을 협의하기 위해 연맹회의를 소집했다. 유일하게 성벽이 없던 스파르타(성벽보다는 시민의 용기에 의존)는 코린트Corinth의 지협에 성벽을 건설하고 그리스 남부만 방어할 것으로 제안했다. 

그렇지만 코린트 북쪽의 도시들은 크세르크세스가 북쪽에서 내려올 것을 예상하고 방어선을 더 앞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고 연맹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렇게 테르모필레가 전장으로 선택되었다.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로. 코린트 지협, 살라미스, 테르모필레의 위치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481년 당시의 그리스 전략가들에게는, 테르모필레가 페르시아 육군을 저지하거나 최소한 발목을 잡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보였다. 그 동안 연합함대는 페르시아 해군을 유인해서 결전을 치를 생각이었다. 테르모필레는 페르시아군이 지날 수 밖에 없는 좁은 협로였다. 좁은 공간에서는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을 1:1로 상대할 수 밖에 없는데다가 그들이 보유한 우수한 합성궁 궁병이나 기병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두 군대는 좁은 협로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크세르크세스에게는 자연도 사람도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폭풍이 불어와서 헬레스폰트에 설치했던 다리를 쓸고 가버렸을 때에도 엔지니어를 처벌하고 바다에 태형을 선고하고 채찍질했었다. 

700척의 배를 묶어 부교로 만들었는데, 그 당시의 기술력을 감안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단순히 배를 연결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통로의 양쪽에 벽을 만들어 말 등이 물을 보고 놀라지 않게 신중한 조치를 취했다. 페르시아군은 그렇게 그리스 영토를 넘어섰다. 


테르모필레로 쉬지않고 달려가는 그리스 병력은 수십 만 대군에 비해 말도 안되는 숫자였다. 스파르타인 300명, 미케니아인 80명, 테게아인 500명, 테스피아인 700명... 이런 식으로 전부 4,900명에 불과했다(최대 10,000명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혀 걸지 않았다. 아테네 시민은 도시를 소개하려는 투표를 벌인 후에 병사는 전함에 오르고, 여성과 아이는 펠레폰네소스의 안전지대로 대피시켰다. 신전과 관련된 인원만이 남아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을 지켰다. 


이 순간 가장 막중한 책임을 느낀 사람은 레오니다스Leonidas였다. 테르모필레에 모인 연합군은 각각의 지휘관이 있었지만 총사령관은 레오니다스 왕이 맡았다. 그는 스파르타의 공동 왕 중 한 명(전제군주와는 거리가 먼)으로 헤라클레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직접 300명의 전사를 골랐다. 모두 자식이 있는 중년으로 죽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레오니다스와 전사들은 명령을 수행하도록 훈련을 받아왔고 신탁에 따르면 왕이 죽지 않으면 도시가 파괴된다고 했다. 레오니다스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테르모필레로 향하는 동안 스파르타 전사를 선두에 세워서 나머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다행히 협로는 비어있는 상태였는데 폭이 겨우 10~15m에 불과했다. 그곳에는 온천 웅덩이, 헤라클레스 제단, 벽과 대문의 폐허가 남아 있어서 바로 수리를 시작했다. 



마시모 파타렐리Massimo Taparelli의 테르모필레 전투입니다. 


페르시아 정찰병이 그리스 진영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스파르타 병사 중 일부는 나체로 훈련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죽기 직전에 머리를 가지런히 빗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정찰병도 왕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군도 다가오는 적의 숫자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페르시아군은 전투를 시작하면서 화살을 쏘아대는데 워낙 숫자가 많아서 하늘이 어두워질 것이라는 말을 듣자, "페르시아군이 태양을 가린다면, 우리는 그늘에서 싸울 수 있겠네"라고 대답했다. 


스파르타 병력은 오히려 사기를 올렸지만, 나머지 병력은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보고 공포에 질렸다. 전투회의에서 각 지휘관은 후퇴를 주장했고 레오니다스가 그런 주장을 묵살했다. 스파르타인은 이 자리에 남을 것이며, 다른 그리스인도 남아야 하며, 응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설득했다.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약간 떨어진 도시에 4일 동안 머물면서 겁에 질린 그리스인 무리가 달아나기를 기다렸다. 5일째 되던 날인 기원전 480년 8월 17일, 왕은 인내심을 잃었다. 헬레스폰트의 폭풍이 그랬던 것처럼, 감히 그리스인 따위가 자신에게 저항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그는 메디아와 키시아Cissia 병력을 보내 그리스인을 모두 산채로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메디아와 키시아 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고, 크세르크세스는 정예 불사부대를 투입했다. 당연한 낙승을 자만하며 전진하던 불사부대도 그리스 방어선을 조금도 뚫지 못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군이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비좁은 통로는 페르시아군의 숫적 우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페르시아군 특유의 대형을 갖출 수 없었다. 페르시아 소년은 보통 승마, 진실, 활 3가지만 배운다는 말이 있다. 테르모필레에서는 기마병이 투입될 여지가 없었고 화살을 쏠 위치도 잡지 못했다. 그리스군은 수리한 벽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백병전으로 끌어내는 수 밖에 없었다. 


페르시아군은 이런 종류의 근접적에 약했다. 그들은 큰 방패를 땅에 세우고 그 뒤에서 무수한 화살로 적을 쓰러트리는 전술이었기 때문에 갑옷은 거의 입지 않았고 짧은 칼이나 창이 근접전 무기의 전부였다. 



페르시아군 지휘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테르모필레 전투 당시의 페르시아군 무장입니다.  



불사부대라고 거창한 이름이 붙은 페르시아의 정예병도 그림과 같이 가벼운 갑옷도 없이 활과 창 정도의 무장만 했습니다. 근접전이 벌어질 경우에는 그리스군의 중장갑밀집대형을 이길 방법이 없죠. 


그리스군은 전투를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갑옷과 무장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전까지의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반신반인의 왕을 위해 노예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고향과 가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오히려 큰 피해를 입은 페르시아군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지휘관은 뒤에서 채찍질과 칼질로 그들을 몰아세우기 바빴다. 


첫 번째 전투에서 스파르타인이 전투를 이끌었다. 백전노장의 스파르타 전사는 심지어 벽 뒤에서 뛰어나가 페르시아군을 공격한 후에 달아나는 척하면서 적을 끌어들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충격을 받고 3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전투 2일째도 전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 사기가 오른 그리스 부대가 용감하게 맞섰고 페르시아군은 조금도 뚫지 못했다. 그리스군의 피해는 워낙 가벼웠기 때문에 테르모필레에서 얼마던지 페르시아군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도 약점이 있었다. 산맥 사이에 난 좁은 길을 통하면 그리스군 뒤로 돌아 포위할 수 있었고 그리스군도 도착한 날부터 알고 있었다. 

레오니다스는 포키스Phocis 병력을 따로 떼어서 그곳에 배치했고 그렇지 않아도 적은 수의 수비군은 더욱 줄어들었다. 포키아 부대는 페르시아군이 그 길로 밀려들 경우에 어떤 방어시설도 없이 지켜내야 했다. 그저 페르시아군에게 들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결국 에피알테스Ephialtes라는 그리스인이 보상을 바라고 그 길을 누설했다. 귀중한 정보를 받은 왕은 밤사이에 병력을 투입했고 어둠과 나무때문에 포키스 수비병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상에 올라간 페르시아군은 포키스 수비병에게 화살을 퍼부었고 기습을 당한 수비병은 허둥지둥 화살을 피해 반대편 산 정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를 관통하는 협로가 목표였다. 포키스 병력을 추격하지 않고 산길을 따라내려갔고, 초병은 레오니다스에게 페르시아군이 배후로 돌았다는 보고를 했다.

이제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지휘관을 소집한 그는 병력을 반으로 나누었다. 이곳에서 모두가 전멸당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병력은 고향으로 돌아가 나중에 있을 결전을 대비하기로 했고 레오니다스, 스파르타 병력 그리고 테스피아 병력이 남았다. 테스피아인도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그들은 스파르타 전사 옆에서 죽는 명예를 선택했다.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와 내통할 여지가 있는 테베병사 400명은 떠나지 못하게 했다. 



영화 300에서 추한 이미지로 나왔던 에피알테스입니다. 그는 배반대가로 보상을 받기로 했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참패한 왕이 그럴 여유가 없었고 결국에는 그리스 북부 지방으로 숨었습니다. 스파르타가 그의 목에 상금을 걸었고 약 10년 후에 우연한 일로 살해를 당합니다. 스파르타는 동기와 상관없이 상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그의 이름이 배반자와 동의어로 사용되며 원래 그의 이름은 악몽을 뜻한다고 합니다. 


후대는 레오니다스의 결정에 대해 많은 이견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에 그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만약 전체 병력이 후퇴한다면 페르시아 기병에게 금방 따라잡혀 학살을 당할 판이었다. 레오니다스는 신탁때문이 아니라 후퇴하는 아군에게 탈출해 복수해줄 시간을 벌어주려고 했다.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 가장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리스의 찬란한 과학, 미술, 시, 연극과 철학은 스파르타와 상관이 없었다. 스파르타는 개인의 자유대신에 공동의 안녕을 우선했고 노인들이 유아의 생과 사를 결정했다. 소년이 7살이 되면 군사훈련을 받았고 성인남성은 막사에서 아내와 떨어져살았다. 현대의 공산주의식으로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토지를 소유했고 과도한 치장이나 표현은 금지했다. 


8월 19일, 남은 그리스 전사는 페르시아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기로 했다. 그들은 더 이상 벽 뒤에 숨지 않고 개활지로 나와 최후를 향해 걸어갔다. 레오니다스는 테베 병력은 어차피 페르시아군에게 투항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전투를 재촉하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했다. 지휘관의 채찍질을 받은 페르시아군은 마구잡이로 달려들었고 심지어 바다로 밀려 떨어지거나 밟혀죽는 병사도 많았다. 


그리스군은 창대가 부러질 때까지 찔러댔고, 다시 칼을 뽑았다. 레오니다스는 결국 신탁의 예언대로 되었다. 그리스군은 4번이나 그의 시체를 차지하려는 페르시아군을 몰아냈다가 5번째 공격에서 시체를 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후에서 페르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기진맥진한 그리스군은 벽 뒤로 돌아 숨을 고른 후에 밀집대형을 짰다. 이번에는 칼이 부러졌고 벽을 넘어오는 페르시아군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마침내 더 이상 부상자나 전사자를 챙겨줄 병사가 남지 않았다. 


테르모필레 전투를 이렇게 끝났다.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스파르타인은 모두 죽었고, 기꺼이 옆을 지킨 700명의 테스피아인도 죽었다. 페르시아군의 피해는 20,000명으로 알려졌는데, 크세르크세스는 군대의 사기를 위해 대부분의 전사자를 몰래 매장해서 그 피해를 숨겼다. 그리고 행군로에는 겨우 1,000구의 시체만 남겨두었다. 

스파르타는 왕의 장례를 크게 치루는 전통이 있지만 레오니다스는 장례식을 거치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머리를 잘라 말뚝에 꽂아두라고 명령했다. 



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의 목을 자르는 장면인데 이건 제대로 표현했군요.


그리고 나머지 그리스군 시체도 매장했다.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였기 때문이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사실 실패였다. 북부 그리스 도시에서는 병력을 제대로 보내지도 않았고 그리스의 중요한 기둥인 아테네가 점령당했다. 그렇지만 그리스 전사의 용기덕분에 페르시아군은 7일 동안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도시가 연합군에 참여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후에 테르모필레에 "여기를 지나는 이방인이여 스파르타에게 말해주시오. 여기에서 명령에 따라 우리가 누워있다고"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테르모필레 전투 그리고 그리스인의 용기는 전세계인에게 불가능에 저항하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조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