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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 칸의 오른팔, 수보타이
1241년 유럽을 휩쓴 수보타이의 전술, 2차대전 러시아군에게 이어지다.
1221년, 징기스칸의 가장 유능한 장수 수보타이가 이끄는 약 2만명의 몽골기병이 서쪽을 건드려보기 시작한다. 그들은 코카서스 산맥을 통과해 2번에 걸친 큰 전투에서 그루지아군을 섬멸하고, 1223년에 크리미아에 이르러 칼카(Kalka) 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이긴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는 4만 명의 군사, 6명의 공과 70명의 귀족이 죽는다. 몽골에서 러시아까지 7,000km 이상, 역사상 가장 광활한 지역에서 작전을 펼친 수보타이는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훨씬 많은 수의 적과 대결했다. 몽골 군이 매우 효율적이기는 했어도 전면적인 정복전을 펼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었다. 1236년 드디어 서쪽을 향할 때에도 몽골 군의 수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수였다.
그림설명: 1241년 사조 강 전투에서 죽은 5만~7만 명의 헝가리 병사들을 기리는 모히(Mohi) 부근 언덕의 십자가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원정을 이끈 사람은 수보타이 바가투르(Subotai Bagatur 1175-1248, 일명 Subotai the Valiant)로 전술적인 면에서는 한니발(Hannibal)과 스키피오(Scipio)에, 전략적인 면에서는 알렉산더와 시저에 견줄 수 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이다. 그는 작전 범위나 강도 면에서 그 이전의 어떤 전쟁영웅보다 훨씬 크게 강력했다. 그의 지휘에 따라, 몽골 군은 가장 먼 거리를 가장 빠르게 누볐고, 수보타이가 없었다면 몽골은 고려, 중국,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말 앞에 헝가리가 무너지면서 몽골에서 서유럽에 이르는 모든 길이 무저항 상태로 열렸다. 최근에야 수보타이가 전략과 전술에서 얼마나 뛰어난 천재였는지 조금씩 알려지고 있지만, 그와 몽골 군의 전략전술은 속도전, 기동전, 기습전, 포위전, 침투전, 초토화전과 같은 현대 군사학의 토대가 되었다.
1236년 몽골이 국경을 넘기 전 러시아는 내전과 외침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매우 낙후된 봉건국가였다. 각각의 영주를 매우 신속하게 공격해서 이들이 연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러시아 정복의 관건이었다. 수보타이는 먼저 북부 러시아 귀족들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군대를 북서로 향하고, 모스크바 남동부에 있는 리아잔(Ryazan) 지역을 기습한다. 별 저항도 못하고 무너진 이 도시는 단어 그대로 도살장으로 변하고 만다. 몽골 군은 콜롬나(Kolomna)와 수즈달(Suzdal)에서도 대학살을 자행한 후에 모스크바로 이동한다.
모스크바를 불태운 몽골 군은 꽁꽁 얼어붙은 개울과 강을 건너 170km를 이동해 블라디미르(Vladimir)로 이동한다. 1238년 2월 7일, 이 도시 역시 잿더미로 변한다. 태공(Gran Prince) 유리2세 (Yuri)가 시타 강에 군대를 집결시켜 몽골 군을 기다리지만 폭설로 인해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처지가 된다. 몽골 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2월 말 정찰대를 보냈을 때에는 몽골 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 거꾸로 200,000명의 대군에게 자신들이 포위된 상태였다. 3월 4일, 러시아군의 피가 하얀 눈을 물들였고 태공의 목이 베어진다.
그림 설명: 러시아 원정 중의 몽골 경기병 1223년. 그림을 클릭하면 무지하게 커집니다.
(우에스기 왈: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겨울에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눈과 추위로 보급도 여의치 않고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치열한 전투 중에도 겨울이 다가오면 서로 숙영지로 돌아가 겨울을 나곤 했다. 반면에 기병중심의 몽골 군은 겨울에 주로 원정을 하는데, 땅과 강이 얼어붙어 작전범위가 넓어질 뿐만 아니라 작전지역을 약탈해서 보급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4월까지 러시아의 북부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한다. 겨우 2개월 만에 12개의 요새도시를 무너뜨린 몽골기병은 러시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노프고로드(Novgorod)에 며칠 거리까지 접근한다. 그러나 봄 홍수와 진흙탕(러시아의 진흙장군은 동장군만큼이나 유명하다)을 염려한 수보타이는 퇴각을 명령하고, 돈 강 유역의 스텝초원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에 유럽원정을 준비한다.
1240년 말에 몽골 군의 러시아 원정이 다시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남부지역을 노린다. 11월이 되자 몽골 군은 그리스정교의 중심인 키에프(Kiev) 외곽에 모습을 나타낸다. 키에프는 성벽으로 둘러쌓인 요새도시였지만 몽골 군의 맹렬한 공성무기와 중기병 공격 앞에 함락되고 만다. 몽골 군의 학살과 약탈이 얼마나 심했던지, 6년이 지난 후에도 몇 백 채의 통나무집만 서있을 뿐이었고 “수많은 두개골과 뼈들이 거리 곳곳에 그대로 있었다”고 여행자들이 기록할 정도였다. 몽골 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원정을 계속해 3주 만에 러시아 반대편 국경에 도달한다. 더 이상 약탈할 곳이 없었던 수보타이는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린다.
1240년 12월 수보타이는 유럽원정의 첫 번째 목표로 헝가리의 쌍둥이 수도인 다뉴브 강의 부다(Buda)와 페스트(Pest)를 택한다. 수보타이는 몽골에서 중부유럽에 이르는 진로에서 가장 큰 적인 헝가리왕 벨라4세(Bela)부터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군대를 4개 대열로 나누어 각자 눈 덮인 카파치안(Carpathian) 산맥을 넘게 한다. 바투 칸(Batu Khan)은 갈리시아(Galicia)를 통해, 쿠육(Kuyuk)은 몰다비아와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를 관통해, 수보타이 자신은 메헤디아(Mehedia)를 통해 가장 남쪽으로 이동한다.
북쪽 방향에서의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대비해 오게다이 칸(Ogedai Khan, 징기스 칸의 셋째 아들)의 손자 카이두(Kaidu)에게 30,000명의 병력을 줘서 폴란드, 보헤미아, 실레시아(Silesia)를 공격하게 한다. 1241년 3월, 카이두의 군대는 폴란드왕 볼레슬라프5세(Boleslav)의 군대를 와해시키고 크라코우(Cracow)로 입성하지만 이미 모든 시민이 피난을 갔기 때문에 불태워버린다. 카이두는 오데르 강(Oder)을 건너 한 부대는 브레슬라우(Breslau)로, 다른 한 부대는 리투아니아(Lithuania)를 관통해 서쪽으로 진군하게 한다. 그들의 진격로에 있는 동프러시아와 발트해안 도시들은 예외 없이 모두 불타고 약탈당한다. 카이두의 군대는 브레슬라우의 성벽을 우회해 실레시아로 바로 진격해 들어간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저항다운 저항을 만나게 된다.
실레시아의 헨리2세(Henry the Pious) 공작은 리그니츠(Liegnitz)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보헤미아의 벤케슬라스(Wenceslas)왕은 약 5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헨리와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한다. 두 군대를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카이두는 리그니츠로 재빨리 이동해서 헨리의 군대부터 공격하기 시작한다. 헨리는 지원군의 위치도 모르는 상태에서 도시 안에 꼼짝없이 포위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1241년 4월 9일(정확한 날짜는 아님), 두 군대가 평야에서 야전을 벌이게 된다.
헨리는 자신의 군대를 4개의 전투부대로 나누는데, 몽골 군과는 정반대로 각 부대를 효과적으로 조직하지도 못했고 지휘관을 능력보다는 출신과 서열에 따라 배치시켰다. 첫 번째 전투부대는 헨리가 직접 선택한 폴란드와 실레시아 기사 그리고 약간의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유명한 튜톤 기사(그림 참조)가 두 번째 전투부대였고 포포 폰 오스테르나(Poppo von Osterna)의 지휘를 맡았다. 이 기사단은 가슴에는 검은 십자가를 그려 넣고 얼굴을 완전히 덮는 투구를 쓴 유럽 최정예군이었다. 세 번째 부대는 지위가 낮은 귀족에서 선발된 폴란드 기사들이었고, 네 번째 부대는 실레시아에서 금을 파던 광부들로 이루어진 보병부대였다. 평야 맞은 편에서 유럽 혼성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카이두 칸의 몽골기병들이었다.
군대의 배치나 이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어서 전투의 큰그림만 재구성이 가능하다. 전투가 벌어지자 헨리의 기병 부대 하나가 항상 그랬듯이 몽골 군의 중앙을 공격해 1대1 마상전투를 벌이지만 몽골 경기병들이 그들을 둘러싸며 귀신 같은 화살세례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유럽기병들은 다른 부대들이 도우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포위망을 뚫고 퇴각한다. 그 때 헨리가 자신 휘하에 있는 전체 기병에게 몽골 군 중앙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잠시 맞서 싸우던 몽골 군이 등을 돌려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하자, 카이두의 중앙이 무너진 것이라고 착각한 헨리와 전투부대는 대열을 무너뜨리고 추격에 나서 몽골 군의 장기인 유인함정에 빠지고 만다. 강력한 밀집 대형을 한 적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기병과 보병을 따로 떼어놓기 위한 몽골 군이 가장 좋아하는 전술이 바로 유인함정이다.
무분별하게 뒤를 쫓던 헨리의 기병부대의 측면에서 갑자기 나타난 몽골 경기병들이 활을 쏘아 기사들을 말에서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함정에 빠진 헨리의 부대 뒤에는 불을 질러 전장터를 검은 연기로 덮어, 뒤에 남아 있는 부대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혼란에 빠진 기사들 앞에 몽골 중기병들이 나타나 근접거리에서 기사들을 상대하고, 경기병들은 연기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접근하는 보병부대를 그 자리에 묶어둔다. 몽골 중기병들은 기사의 말을 쏘아 쓰러뜨린 후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중장갑의 기사들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튜톤 기사단이 맹렬히 저항했지만 모두 전멸한다.
그림 설명: 튜톤 기사단을 공격하는 몽골 중기병. 몽골기병을 활만 든 경기병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중기병은 그림과 같이 중장갑을 입은 유럽기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림을 클릭하면 무지하게 커집니다.
계속된 대학살 속에 거의 모든 귀족, 기사, 일반 병사들이 죽는다. 목이 사라진 헨리의 나체를 그의 아내가 찾아냈는데, 헨리의 발가락이 6개였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적을 죽인 몽골 군은 오른쪽 귀를 잘라 전리품으로 챙겼고 수레에는 무려 9개의 귀 자루가 실렸을 정도다. 튜톤 기사단의 최고 수도승은 프랑스의 루이9세에게 이제 몽골과 프랑스 사이에는 어떤 병력도 남아있지 않다는 편지를 쓴다.
그림설명: 전사한 유럽병사들의 귀를 자르고 있는 몽골 군. 17세기 목판화.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유럽은 리그니츠 전투가 마지막 재앙이기를 바랬겠지만 수보타이에게는 그저 계획된 원정의 첫 발이었을 뿐이다. 그의 본대는 이미 카파치안을 통과해 헝가리 국경을 바로 넘었다. 카이두는 리그니츠 전투 후에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수보타이의 네 부대와 합류한다. 수보타이의 남쪽 부대는 부다와 페스트 외곽을 습격해서 벨라 왕이 몽골 군 주력에 신경쓰지 못하게 했다. 미끼는 문 벨라는 소규모 부대를 내보내 습격을 막게 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전멸당한다.
벨라는 전선에서 340km 떨어진 부다에서 전쟁회의를 열어 몽골 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협의한다. 한창 회의가 진행되는 중에, 몽골의 전초병들이 이미 다뉴브 강변에 도착해 페스트를 정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벨라가 부대배치에 대해 지혜를 짜내는 동안에 다른 몽골부대가 페스트에서 불과 몇 km 밖에 안 떨어진 집결지에 모이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온다. 벨라는 다뉴브 강의 높은 수위와 강력한 성벽 덕분에 다른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는, 수보타이가 왜 도강할 다리를 놓거나 포위진지를 마련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4월 초가 되자, 벨라는 거의 100,000명의 병력을 모았고 몽골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동쪽으로 진군한다.
벨라의 군대가 움직이자, 몽골 군은 바로 후퇴를 하는데 벨라의 군대가 추격할 수 있는 속도로 후퇴를 한다. 거의 9일 동안 이런 느슨한 추격전이 이어진다. 10일째 되는 날, 수보타이는 사조(Sajo) 강의 돌다리를 건너 진영을 차린 후에 다리에는 극소수의 병력만 배치해 벨라를 유혹한다. 수보타이가 노린 것은 벨라가 경솔하게 강을 건너오면 반격을 가해 다뉴브 강으로 밀어넣으려는 것이었지만 벨라는 그 미끼를 물지 않고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다. 벨라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다리에 있는 몽골 수비병을 몰아내고 동쪽 강변에 소수의 수비병을 배치시켜 몽골 군의 반격에 대비한다. 벨라의 주력부대는 서쪽 강변에 남아 밤을 지새운다. 반대편 강변에는 수보타이가 고른 전장터에서 몽골 군이 집결한다. 이제 헝가리 원정의 결정적인 전투의 준비작업이 모두 갖춰진 것이다.
사조 강 전투 기록에 따르면, 벨라의 군대는 100,0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주로 기사로 구성되었지만 몽골과 마찬가지로 궁기병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리그니츠와 몽골 군이 저지른 외곽의 엄청난 피해 소식이 전해지면서 군대의 사기는 말도 못하게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헝가리 왕은 기사들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 벨라가 가장 신임하는 지휘관인 후골린(Hugolin)과 마티아스(Mattias)가 대주교일 정도로 너무 교회 편만 들었기 때문이다. 벨라의 군대배치도 몽골 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허술했다. 사조 강을 건널 곳이 몇 군데 더 있었는데도 벨라는 돌다리에만 수비병을 배치했을 뿐이다. 그의 진영은 밀집한 상태로 강에 너무 가까워서 매우 좁은 작전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본 바투는 부하 장수들에게 “저들은 마치 막다른 곳에 몰린 소떼 같군. 몸도 못 돌릴 정도로 말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벨라가 저지른 마지막 치명적인 실수는 경기병이나 궁기병을 사용해 정찰을 하지 않아 측면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바투는 현대의 제압포격과 같은 형식으로 7대의 공성무기를 사용해 헝가리 전초부대를 두들겨서 모든 헝가리군이 정면이 주요 공격지점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포격에 얼이 빠진 수비병들은 기병의 공격에 쉽게 무너졌고, 공성무기의 엄호포격과 함께 기병들이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기습공격에서 정신을 차린 헝가리군은 대열을 갖춰 다리를 건너오는 기병들을 몰아낸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풀리던 전투가 사실은 몽골 군의 교란작전이었다는 것을 헝가리 군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봄이 되면 헝가리의 강 수위가 높아져서 요즘에도 도강하기가 힘들어지지만, 경험많은 수보타이는 미리 도강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두었다. 돌다리에서 몇 km 하류에 습지대가 강과 이어진 곳이 있는데, 이곳은 대군이 도강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는데도, 수보타이는 이미 밤새 30,000명이 넘는 병력을 이동시켜두었다. 헝가리의 본대가 정면에만 시선을 빼앗겨 다리로 몰려드는 것을 기다린 이 부대는 방향을 바꿔 헝가리군의 측면을 공격한다.
그림 설명: 사조 강 전투 진행도 1241년.
측면이 그대로 노출된 헝가리군은 단 한 번의 공격에 밀려난다. 다행히도 대열을 갖춰 진영으로 퇴각하지만, 몽골 군은 공성무기를 전진배치시키고 꽤 긴 시간 동안, 돌, 화살과 불붙은 나프타로 헝가리군 진영에 포격을 가한다. 바투는 돌다리 쪽 정면에서도 부대를 전진시켜 헝가리군 진영을 완전히 포위하면서도 교활하게 한쪽 방향만은 틈을 남겨둔다. 좁은 진영 안에서 꼼짝없이 갇힐 위기의 헝가리군은 그 틈새를 활로라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소수의 기병이 틈을 벌려 퇴각하더니 뒤이어 전체가 그 좁은 틈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몽골 군은 일부러 만들어준 틈이니 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비진영이 무너지면서 더 많은 헝가리군이 틈으로 몰려들고 심지어는 무기를 버리고 맨 몸으로 나서는 지경이 된다.
(우에스기 왈: 강력한 적을 만났을 때에 몽골 군이 잘 사용하는 전략중 하나다. 자세한 내용은 징기스 칸의 전략과 전술 기사를 참조하도록 하자. 누구나 이런 유인전술을 생각해낼 수 있지만, 기획과 실행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완벽한 실행을 위해서는 각 부대의 유기적인 협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틈을 너무 일찍 열어도 안되고, 틈을 너무 작거나 크게 열어도 안되며 너무 많이 달아나게 해도 안된다. 수십 년동안 스텝초원에서 이런 전술을 익힌 몽골 기병만이 가능한 전술이다.)
기사들이 마구잡이로 틈을 헤치고 나오자, 말을 새로 갈아탄 몽골 군이 양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헝가리군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운 좋게 마을까지 도망친 병사도 마을과 함께 불타 사라졌다. 2일 동안 계속된 역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끝나자, 죽은 병사와 말들이 강변의 조약돌처럼 깔려있었다. 몽골 군은 약 50,000~70,000명의 헝가리군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고 프레드릭2세 황제는 이 전투에서 “헝가리의 모든 군대가 전멸했다”라고 편지에 썼다.
전투에서 이긴 수보타이는 드니에페르(Dnieper)에서 오데르 강까지, 발트 해에서 다뉴브 강에 이르는 동유럽의 모든 땅을 정복하게 된다. 4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자신보다 5배나 많은 적을 학살했다. 무저항상태가 된 헝가리는 전 국토가 철저하게 약탈되며 이 때에 전국민의 절반이 죽은 것으로 분석된다. 다뉴브 강이 얼자, 수보타이는 강을 건너 서유럽 원정에 나선다. 전초부대는 줄리앙(Julian)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까지 도달하고, 정찰대는 다뉴브 계곡 통과해 비엔나 성벽 아래에 모습을 나타낸다. 유럽의 모든 군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야만인들이 자신이 있는 곳은 비껴 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수보타이가 비엔나 공격계획을 세우는 동안 오게다이 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몽골법에 따르면 모든 왕족은 수도로 돌아와 새 칸을 선출해야 한다. 수보타이의 군대에는 세 명의 왕족이 있었기 때문에, 급히 막사를 걷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먼 여정을 떠난다. 풍요로운 서유럽의 재화보다 제국내부의 분열이 더 걱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정길에서 운 좋게 피해를 입지 않았던 달마티아(Dalmatia), 세르비아와 북부 불가리아가 운 나쁘게 귀국경로로 선택되어 철저하게 파괴되지만, 유럽의 악몽은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다뉴브 강을 건넌 몽골 군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간 몽골 군은 러시아에 바투 칸의 왕국을 세우고 거의 300년을 통치한다.
그림 설명: 몽골 칸의 가계도. 러시아를 통치했던 왼쪽의 금장 칸국(Golden Horde)의 이야기가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러시아와 유럽 원정에서 돌아온 수보타이의 나이는 벌써 68세였고 5년 후에 세상을 떠난다. 평생 무자비한 학살만 거듭한 그였지만, 군사학에서는 전술과 전략 면에서 엄청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러시아 중장 미하일 이바닌(Mikhail Ivanin, 1801-1874)이 몽골의 전술에 대해 깊은 분석을 한 최초의 전사가로, 그는 우즈베키스탄과의 중앙 아시아 전투에서 징기스 칸의 투르키스탄 원정을 모방한 전략을 적용했다. 1846년, 그는 The Art of War of the Mongols and the Central Asian People을 출간했고 이 책은 국립사관학교의 교과서로 채택되어 2차세계대전까지 많은 사관학교에서 사용된다.
1924년, 미하일 프룬제(Mikhail Frunze)는 침투전(Deep battle) 개념을 선보인다. 이 개념은 적 진영, 합류점, 통신, 보급창에 대해 장거리 작전을 펼쳐 적이 병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공세보다는 수세에 몰리게 만들어 전방위 주도권을 잡는 전략이다. 프룬제의 동료인 미하일 투카체프스키(Tukhachevsky)는 몽골의 전략을 소비에트연방의 작전과 장비에 철저하게 적용시켰다. 투카체프스키는 속도전, 기동전, 광범위한 선제공격전으로 소련군을 현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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