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롬으로 보면 폰트가 상당히 작아집니다. 아직 다음 에디터가 멀티 브라우저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크롬에서 작성할 때에는 오류가 상당히 많이 발생하는군요.)
블로그를 찾는 가장 많은 주제가 2차대전입니다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의 좋은 블로그가 많아서 되도록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의외로 몽골제국이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징기스 칸의 이슬람 침공의 계기가 된 호라즘 왕국 원정 이야기를 정리해봤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올리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역사에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고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은 경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호라즘 원정만 해도 몽골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조상의 업적이겠지만, 그 원정로에 있었던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대학살과 파괴였을 뿐입니다.
영웅들의 전설적인 원정에는 장단점이 모두 있었기에 역사학자들의 칭송이 있지만, 몽골의 원정은 대학살과 파괴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당시에 얼마나 대단했던 전투민족이었는지 감탄하는 동시에 선진문화를 흡수발전시키지 못하고 파괴만 시켰던 야만민족이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전범국가 일본의 잘못된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여 국내에서도 2차대전 SS (무장친위대) 부대의 군장을 그대로 흉내내며 좋아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들은 국가와 민족이 아닌(독일 국방군) 히틀러와 나찌의 근위부대로 온갖 학살과 만행을 저지른 전범들일 뿐입니다. 아무리 멋진 전투를 벌이고 전설을 남겼다 할지라도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모른 척해서는 안됩니다.
대학살의 호라즘 원정
샤 알라 알딘 모하메드(Shah Ala al-din)는 사절을 죽이면 외교관습을 어기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징기스 칸(Genghis Khan) 사절을 죽이는 것이 자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Kim Stubbs (Military History 2006년 5월 기사) 1218년, 확장일로에 있던 징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드디어 이슬람 세계(호라즘, Khwarezm)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다. 호라즘왕국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투르메니스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중앙 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사마르칸트(Samarkand), 부하라(Bukhara) 등의 중요한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었다. 무슬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부족과 종족 간의 불화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외국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동원해 토착민들을 힘으로 다스렸다. 호라즘의 샤(왕, Shah)인 알라 알딘 모하메드는 페르시아 역사가가 "여가수에 둘러 싸여 포도주를 폭음하는 것이 전부인" 난폭하고 불안정한 난봉꾼이었다. 그의 무능하고 오만하고 잔인한 통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몽골제국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외교정책 때문에, 자신의 왕국뿐만 아니라 이슬람 세계 전체가 대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징기스 칸은 실크 로드를 오가는 무슬림 상인들에게서 충분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그는 호라즘의 정치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흔들리고 있는 왕국의 사정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유목민족인 몽골은 도시 거주하는 이웃국가와의 교역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두 제국 간에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무역관계를 맺자고 제안을 했다. 몽골은 대부분의 옷과 곡식을 이웃국가에게서 수입하고 있었다. 그림 설명: 몽골의 원정도입니다. 하루에도 수 백 킬로미터를 주파하는 기동력과 맹목적인 정복이 목적이었기에 세계역사상 전무후무한 방대한 지역을 정복합니다. 만약, 칸의 죽음으로 군대를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비엔나를 목전에 둔 몽골 군은 서유럽도 모두 파괴시켰을 것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 당시 몽골은 여진족(Jurchen)을 정복하는 도중이었다. 만주 출신의 유목민족인 여진족은 100년 전에 중국 북동부를 차지하고 진 왕조를 열었었다. 모하메드는 진에 보낸 사신을 통해 몽골이 진을 침공해 1215년에 청두를 점령한 후에 벌인 학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신의 보고에 따르면, 청두는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지방이 호수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청두의 젊은 여성 60,000명은 침략자에게 수모를 당하느니 죽음 택해 성벽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보고가 상당히 과장됐지만 모하메드는 진실을 가릴 이성이 없었다. 징기스 칸의 속셈을 의심한 그는 평화로운 교역제안을 거부했다. 징기스 칸은 다시 샤에게 사신을 보내 전쟁이 아니라 교역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기록에 따르면 모하메드를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메시지는 무슬림 상인을 통해 전달했다. 상인을 통해 외교적인 메시지를 보낸 것은 이슬람 왕국과의 교역을 자연스럽게 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징기스 칸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아직 진나라를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국의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다른 왕국과 우호적인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림 설명: 이슬람에서 그린 징기스 칸의 초상화. 당시에는 고증과 상관없이 그린 그림이 많아서 고고학의 가치가 거의 없는 그림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이나 몽골 군이 서유럽의 기사무장을 한 그림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징기스 칸이 이슬람 복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218년, 상인들이 호라즘 국경도시인 오트라르(Otrar)에 도착하자, 모하메드의 친척인 영주는 그들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했다. 모하메트의 지시나 동의가 없이는 감히 이런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을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징기스 칸은 한 명의 무슬림과 두 명의 몽골인으로 구성된 사절을 모하메드의 궁전으로 보내 "이번 일은 묵과할 수 없으니 영주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몽골 사절은 수염이 깎여 되돌아오는 모욕을 당했지만 사형당한 무슬림 사절보다는 운이 좋았다. 모하메드는 더 나아가 감옥에 갇힌 상인들도 처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려 상황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의 요청뿐만 아니라 사절이 모두 모욕을 당했다는 것을 안 징기스 칸은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징키스칸은, 청두를 잃고 중국 남부로 쫓겨갔지만 아직 세력이 남아있는 여진족을 견제한 군대만 남겨두고 호라즘을 공격하기 위해 서쪽 원정을 시작한다. 그의 군대가 얼마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90,000~200,000명의 규모였을 것이다. 모하메드는 400,000명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어서 숫자로는 훨씬 대규모였지만, 워낙 무능력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지휘하지도 못했고 부하의 반란을 염려해 지휘를 어느 한 명에게 집중시키지도 못했다. 그리고 중국에 보냈던 사절은 몽골 군이 야전에서는 강하지만 잘 방어된 도시에는 무력하다는 정보를 전해줬다. (우에스기 왈: 역사에서 일단 원정이 시작되면 수십 만이라는 기록이 너무나도 쉽게 나옵니다. 지금도 동원하기 어려운 숫자인데, 당시의 수십 만이라는 숫자는 총동원령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에서도 백만 대군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심할 점은, 선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일부러 과장을 하는 점이 많습니다. 최소한 그 숫자에서 50%는 감해야 되겠죠. 그리고 또 다시 50% 이상은 비전투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몇 만 명이 하루에 먹어치우는 식량을 조달해야 하고, 기병의 말과 수레의 소가 먹을 목초를 조달해야 하고, 전투 시에 공성진지 공사를 벌여야 하는 비전투원이 병사 한 명 당 한 명씩은 따라붙어야 했을 것입니다. 서유럽의 경우에는 군대규모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상인과 창녀의 숫자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규군이 아니라 임시로 모집한 군대인 경우가 많아서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전투력은 엉망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농부를 징집해 조악한 무기를 쥐어주고 전투에 나서기 때문에 지휘관의 개인부대나 전문용병을 제외하고는 머리숫자만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몽골의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과장은 거의 없는 전투병력이었습니다. 식량은 모두 현지에서 약탈해 조달했고 공사용 인부도 현지 인력을 징집해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90,000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고 하면, 다른 국가의 300,000명 이상의 병력에 해당되며 이들은 타고난 전사였습니다. 병사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휘관의 뜻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짜고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진형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에 전투력에서는 또 다시 300,000명 이상의 전투력이었을 것입니다. 왜 모든 국가가 그렇게 쉽게 몽골 군 앞에 무너졌고, 수 백년 동안 구축된 요새가 무너지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참고로 몽골 군의 전략/전술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자세하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신 후에 참조하신다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이 정보에 자극을 받은 모하메드는 군대를 분산시켜 주요 도시를 수비하게 했는데, 몽골 군에게는 더 없이 좋은 상황을 만들어주고 만다. 호라즘으로 쳐들어간 몽골 군은 수십 년 전에 젊은 테무진이 일으켰던 군대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징기스 칸의 전사들이었다. 유목기병 특유의 속도와 유연성은 그대로 간직한 채로, 공성전 기술까지 중국원정에서 배웠다. 그들은 더 이상 스텝의 야만족이 아니라 가장 첨단의 정교한 군대였던 것이다. 텐트 정도만 나르던 마차에는, 파성추(Battering Ram), 공성용 탑, 투석기(Trebuchet), 공성화살과 같은 전문장비가 실렸다. 기병의 기동성과 공성기술을 결합한 최초의 부대가 이제 곧 모하메드 앞에 나타나게 된다. 몽골 군의 관심이 집중된 첫 번째 도시는 당연히 오트라르였다. 전쟁을 촉발시킨 영주가 아직도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몽골 군은 1219년 가을에 오트라르에 이르렀고 칸이 직접 지휘를 하며 영주는 반드시 사로 잡으라는 엄명을 내린다. 5달의 포위 끝에, 고위 지휘관 중 한 사람이 작은 문을 통해 달아나려고 했다. 그는 바로 사로잡혀 처형당했지만, 그 문을 통해 몽골 군이 도심으로 진입하게 된다. 오트라르는 순식간에 점령되었고 영주는 수 백명의 병사를 데리고 성채 안으로 후퇴한다. 그림 설명: 호라즘의 요새에 진입하는 칸과 병사들. 재미있게도 1590년대에 인도 모굴제국에서 13세기의 페르시아 기록을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성채에서 몇 개월 버틴 수비군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몽골 군을 향해 자살공격을 펼친다. 결국 거의 모든 병사를 잃은 영주와 근위병은 최상층까지 몰려갔고 화살마저 떨어져서 벽돌과 타일을 던지면 저항을 했다. 필사적인 저항을 했지만, 칸의 명령대로 영주가 사로잡힌다. 일설에 따르면 칸은 영주의 눈과 귀에 녹인 은을 부어 처형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시민은 노예로 모두 끌려갔고 도시는 지금까지도 도시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칸은 오트라르를 포위하는 동안, 장남 주치(Jochi)를 아랄 해 남쪽의 우르게쥐(Urgench) 방면으로 전진시켰다. 그리고 바나카트(Banakat)를 점령하기 위해 5,000명의 부대를 보냈다. 오트라르를 정리하도록 두 아들 차가타이(Chaghatai)와 오고데이(Ogodei)를 남겨두고, 칸은 막내아들 톨루이(Tolui)와 함께 세 번째 군대를 이끌고 상업중심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로 진군한다. 징기스 칸은 전쟁의 한 수단으로 공포감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저항했던 도시의 주민을 모두 죽여 다음 도시에게 순순히 성문을 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잔인한 학살전략은 더 이상의 피를 불필요하게 흘리지 않아도 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사마르칸트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자르누크(Zarnuk)에 몽골 군이 모습을 나타내자, 이미 대학살 소식을 전해들은 주민들이 성문을 열었고, 몽골 군은 성채만 부수고 젊은이들을 징집한 다음에 바로 도시를 떠났다. 칸은 서진을 계속 해, 1220년 2월에 부하라 외곽에 도착한다. 300,000명의 시민이 살고 있는 부하라는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슬람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 바그다드와 맞먹는 도시였다. 45,000권의 도서관,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가지고 있어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회합장소, 제국의 정수"로 일컬어졌을 정도다. 칸은 도착 즉시 포위망을 펼쳤다. 3일 후, 도시 수비군이 몽골의 포위망을 뚫어보려고 했지만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아무-다리아(Amu-Darya) 강까지 도망쳤을 뿐, 20,000명이 전멸하고 말았다. 수비군의 버림을 받은 시민들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수 백 명의 병사가 가족을 데리고 외곽의 성채에 숨어서 저항을 계속하자, 칸은 투석기 등을 동원해 성채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 많은 시민을 불러 모아 성벽 앞으로 내몰았다. 수비군은 어쩔 수 없이 친구이자 이웃에게 불붙은 나프타를 쏟아 부어 해자는 이슬람 주민의 시체로 가득채워졌다. 수비군은 압도적인 적에게 필사의 저항을 계속 했지만 결국 12일 후에 성채가 무너졌고 간신히 살아남은 몇 명의 병사들은 모두 처형 당했다. 그림 설명: 호라즘의 한 도시에서 항복을 요구하고 있는 징기스 칸. 이 그림 역시 인도 모굴제국의 그림입니다. 부하라 시민들을 기다리는 것은 이전에 저항도시가 당했던 그대로의 잔인함이었다. 모든 주민을 집합시켰는데 집에 계속 숨어있던 주민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생존자들은 3개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장인은 몽골로 송환되어 몽골인을 위해 일했다. 청년은 후속 전투에 투입될 돌격부대로 징집되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몽골 군의 노예로 배분되었다. 칸은 병사들에게 도시를 약탈하고 효용가치가 없는 주민들을 처리하게 했다. 부하라의 모든 것이 약탈당했으며 젊은 여성은 성폭행을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화재까지 발생해 대부분 목재로 만들어진 모스크와 궁전이 모두 불타, 한 때 "이슬람의 돔"이라고 불렸던 도시는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징기스 칸이 부자를 모아서 부하라의 모스크에서 "내가 신이 보낸 엄벌이다. 너희가 저지른 죄 때문에 신이 나를 보낸 것이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1220년 3월, 칸은 모하메드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향해 진군한다. 세계에서 가장 쾌활한 천국으로 알려진 사마르칸트는 부하라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요새화되어 있었고 몽골 군이 침입해왔다는 소식과 함께 수비를 대폭 강화시켰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100,000명의 수비군을 모았다고 한다. 이렇게 강력한 수비때문에, 칸은 부하라를 먼저 공략했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도시가 함락되면 사마르칸트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것이고 다른 도시에게서 응원을 받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림 설명: 사마르칸트를 공격하고 있는 몽골 군. 페르시아가 그린 그림입니다. 사마르칸트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자라프샨(Zarafshan) 강에 위치하고 있었다. 몽골 군은 양쪽 강변을 따라 접근한 뒤에 도시를 포위했다. 아들 오고데이와 차가타이도 오르타르를 정복하고 아버지에게 합류했다. 칸은 부하라에서 데려온 포로들에게 깃발을 들게 해서 실제보다 훨씬 많은 병사가 있는 것처럼 꾸몄다. 포로들은 공격할 때마다 최전열에 세워 수비군의 원거리 무기를 흡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포위 3일째에, 사마르칸트의 수비군이 반격에 나서자, 몽골 군은 자신의 최대 장점인 위장후퇴 작전을 펼쳐 성에서 끌어냈다. 적의 대열이 늘어지자 바로 공격에 나선 몽골 군은 단 한 번의 교전으로 약 50,000명을 죽였다. 모하메드는 기병을 동원해 사마르칸트를 두 번이나 구원하려고 시도했지만 몽골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겨우 5일 만에, 사마르칸트를 항복하고 만다. 성채에서 저항을 계속한 2,000명을 제외한 나머지 수비군은 살아남기 위해 몽골 군에 합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칸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는 듯이 보였지만, 도시를 완전히 장악한 후에 약 30,000명의 수비군 모두를 처형한다. 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곧 배반할 장수들의 명단을 조작해 모하메드의 손에 들어가게 한다. 거의 붕괴직전에 있던 모하메드에게 있어 측근의 배반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서쪽으로 도망을 쳤고, 칸은 제베(Jabe)와 수보타이(Subedei)를 보내 모하메드를 끝까지 쫓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림 설명: 징기스 칸의 호라즘 원정도입니다. 사마르칸트를 점령한 칸은 부하라에서 북쪽으로 750km 떨어진 우르게쥐(Urgench)로 눈길을 돌린다. 이 도시는 중요한 교역 중심로 많은 캐러반들이 들리는 곳이다. 복잡하게 얽힌 수로가 농업용수를 공급했고 제방이 연이어 있어서 홍수를 막아주었다. 모하메드의 어머니인, 테르켄 카툰(Terken Khatun)이 많은 군사와 함께 이 도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칸은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칸은 테르켄에게 전쟁을 도발한 것은 아들이기 때문에 항복해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칸의 사절이 도착하자 마자, 그녀는 아들이 도망을 쳤고 저항해도 지원군이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가족을 데리고 마잔다란(Mazandaran)으로 몸을 피했지만, 이 요새도 곧바로 점령당해 모든 가족이 징기스 칸에게 보내졌다. 남자들은 모두 처형당했고 여자들은 지휘관들이 나누어 가졌다. 테르켄은 몽골로 송환되어 포로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칸이 우르게쥐를 점령하는 동안, 칸의 두 장수는 모하메드를 계속 추격했지만 필사적으로 도망을 친 모하메드는 추격을 뿌리치고 1220년 12월에 카스피 해안까지 도망을 쳤다. 지역 영주의 조언에 따라, 그는 소수의 근위병과 아들을 데리고 아스트라바드(Astrabad) 만의 작은 섬에 몸을 숨기지만 곧 숨을 거두고 만다.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있고 방대한 제국을 너무 쉽게 잃어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거의 모든 왕족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우르게쥐를 장악한 쿠마르 테진(Khumar Tegin)이라는 모하메드의 장수가 술탄을 자칭하고 나선다. 칸은 아들 오고데이와 차가타이를 보내 남동쪽에서 우르게쥐를 공격하게 하는 동시에 시르-다리아(Syr-Darya) 강을 따라 원정하고 있었던 다른 아들 주치에게는 북동쪽으로 공격하게 시킨다. 우르게쥐는 호라즘 원정 중에서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도시였다. 성벽이 잘 구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이 습지대였고, 몽골 군이 투석기로 쏠 큰 돌을 찾기 힘들었다. 몽골 군은 임기응변으로 뽕나무를 토막내 성벽에 쏘아댔다. 포로를 동원해 해자를 메우고 성벽에 모래주머니를 쌓게 해서 공격 며칠 만에 성벽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시민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계속 저항을 했고 몽골 군은 시가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정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림 설명: 앵거스 맥브라이드라는 현대화가가 그린 징기스 칸-호라즘의 정복자입니다. 클릭하면 멋진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르게쥐를 가지기로 되어 있던 주치는 최대한 도시를 건드리지 않고 가지고 싶어서 소극적인 전투를 벌였고 그나마 항복을 권유하느라 여러 번 멈추기까지 했다. 이런 행동에 화가 난 차가타이는 큰 불만을 품게 되어 둘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둘 사이의 다툼이 칸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오고데이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해서 더 이상 전투가 지연되지 않게 했다. 우르게쥐는 1221년 4월에 함락된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장인은 몽골로 그리고 젊은 여성과 아이는 노예로 배분되었다. 나머지 시민은 저항했다는 이유로 모두 학살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50,000명의 몽골 병사가 각각 24명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 계산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면, 학살당한 시민은 무려 1,200,000명에 이른다. 우연인지 아니면 고의적이었는지, 아뮤-다리아 강을 막고 있던 제방도 무너져 내려, 도시 대부분이 물에 잠겼고 학살을 피해 운좋게 숨어있던 주민들은 모두 익사하고 만다. 칸은 우르게쥐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막내아들 톨루이(Tolui)를 강 건너로 보내 서쪽의 쿠라산(Khurasan) 지역을 정복하게 한다. 톨루이의 군대는 7,000명 밖에 안되었다가 전쟁이 몽골에 기우는 것을 본 호라즘 탈영병의 가세로 그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그림 설명: 몽골의 파괴에도 살아남은 우르게쥐의 유적입니다. 거대 도시들이었음에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켰던지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적은 극히 일부입니다. 톨루이는 1221년 2월에 메르브(Merv) 도시에 도달한다. "여왕 도시"라고 알려진 메르브는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던 동부 무슬림 세계의 문화 중심지였다. 10개의 도서관에 150,000권의 책이 있었고 천문학자 오마르 카이얌이 천문학 도표(Astronomical Table)을 만들었던 천체관측탑도 가지고 있었다. 메르브는 "쿠라산 지역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평화를 노래하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위인이 빗방울만큼이나 많이 태어났고 땅에 내려온 천국"이라고 기록되었다. 메르브에는 약 12,000명의 수비병이 있었고 원래 주민은 70,000명 정도였지만 주변에서 몽골 군을 피해 몰려들면서 인구가 700,000명까지 늘어났다. 톨루이는 6일 동안 도시 주변을 돌면서 약점을 찾다가 7일째 되는 날에 샤흐리스탄 성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비군도 맞서서 반격에 나섰지만 피해만 입었다. 몽골 군은 성벽을 돌파하지 못하고 몇 겹의 포위망을 펼치며 도시를 압박했다. 바로 다음 날, 메르브의 영주였던 무지르-알-물르크(Mujir-al-Mulk)는 더 이상 방어하기 힘들다고 생각해 시민을 해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면 항복하겠다고 제안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을 공격하고 있는 사람은 징기스 칸의 아들 중에서 가장 난폭하고 악독한 톨루이였다. 톨루이는 하루빨리 공략을 마무리짓기 위해 그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성문이 열리는 순간에 말을 바꿨다. 모든 주민을 성 밖의 들판으로 몰아낸 후에 400명의 장인과 어린 아이들만 노예로 삼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죽였다. 기록에 따르면 한 명의 몽골 병사가 3~400명의 주민을 죽였으며 "밤이 될 때 쯤에는 시체가 쌓여 산을 메우고 평야가 피로 흘러넘쳤다." 13일 동안 계속된 학살에서 1,300,000명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메르브를 떠난 톨루이는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 니샤푸르(Nishapur) 도시에 도착한다. 톨루이의 사촌이 1220년 11월에 이곳을 공격하다가 숨졌기 때문에 톨루이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니샤푸르가 단 3일만에 함락되자, 그는 단 한 명의 주민도 남기지 말고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심지어 개와 고양이도 살아남지 못했다. 도시는 농사를 다시는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마지막 공격대상이었던 헤아르트(Heart)는 현명하게 저항을 하지 않고 항복했고, 톨루이는 3개월 만에 광활한 쿠라산 지역을 정복한 후에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모하메드의 아들인 잘랄 아딘(Jala-ad-Din)은 아버지의 패잔병을 긁어모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후퇴한다. 1221년 봄, 그는 파르완(Parwan) 근처에서 몽골 추격군과 맞서 호라즘 전쟁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패배를 안긴다. 패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칸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남진해서 인더스 강변에서 잘랄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잘랄은 용감하게 맞섰지만 압도적인 전력차이로 패배하고 인더스 강을 건너 달아나지만, 그가 더 이상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칸은 그를 추격하지 않았다. 잘랄이 사라지면서 이제 호라즘 왕국에서 몽골 군에 맞설 군대는 완전히 사라졌고 한 때 중앙 아시아 최대의 제국이었던 호라즘은 몽골 제국에 흡수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림 설명: 징기스 칸의 자손이 나중에 부활시킨 사마르칸트의 모습입니다. 몽골의 2년 간에 걸친 원정기록은 분명히 과장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조사로 볼 때에 호라즘 제국의 전체인구는 3,000,000명 정도로 추산되기 때문에 우르게쥐와 메르브 함락 후에 죽었다는 2,500,000명은 있을 수 없는 숫자다. 예를 들어, 기록에서는 잔해만 겨우 남아있었다는 부하라는 40년 만에 번영하는 대도시로 부활했다. 어쨌든, 몽골 제국의 서진이 이슬람 제국에 대재앙을 안겨주었고 호라즘 제국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단 한 번의 채찍질로 번영을 자랑했던 세계가 폐허가 되었고, 죽은 사람의 피부와 뼈 가루가 날리는 사막이 되었다. 왕국을 호령하던 사람들은 미천한 신분이 되어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라는 고고학 조사에서도 사실로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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