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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히틀러의 마지막 기회, 모스크바 전투 (1부) - 태풍작전 준비

by uesgi2003 2015. 12. 21.


원래 서재의 책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날따라 눈에 띄는 책을 읽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편이 남은 러시아판 사도세자는 수요일로 미루고 평소 궁금했던 태풍작전에 대해 먼저 정리해볼까 합니다. 


배경을 잠시 설명하면 1941년 6월 바르바로사작전 개시 후에 파죽지세로 소련군을 격파하며 모스크바를 손끝에 두게 됩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스스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죠.

 

먼저 히틀러는 국민의 안정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의 중심전력이라고 있는 전차생산량은 말할 것도 없고 탄약과 연료생산이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최전선에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타이푼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전차생산량은 개전 초에 비해 거의 그대로였을 정도입니다.   



소련의 1941년도 전차생산량입니다. 당시 최고의 전차인 T-34가 독일전체 생산량과 맞먹을 정도입니다.


전차생산량도 소련에 비해 크게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주력전차 T-34 KV 시리즈에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원래 3호 전차가 대전차 전투를 맡고 4호 전차는 대보병 지원을 맡았기 때문에 신형전차인 4호 전차가 고폭탄HE의 대구경 단포신 7.5 cm KwK 37을 장착했습니다.  



KV-1 전면장갑이 75mm이니까 철갑탄을 사용해도 100m 거리에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최신전차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후방에서 급하게 88mm 대공포나 10.5cm 자주포를 끌어와야 했습니다.

5 cm KwK 38 L/42포의 3 전차라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죠. 개량된 철갑탄을 사용해야 100m 승부가 가능했습니다.



3/4호 전차 모두 장포신으로 강화된 후에야 T-34와 맞대결을 해 볼만했지만 그때는 T-3485mm를 갖춰서 무게추는 다시 기울었습니다. 그건 1941년도 태풍작전과 상관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죠.


소련군은 반대로 76mm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전차 T-50도 45mm M1938을 무장해서 3/4호 전차와 해볼만 했습니다. 


독일군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철갑탄 보급이 미미했습니다만.



이왕 설명한 김에 아예 태풍작전 당시 양쪽의 주력전차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독일의 부대편성 원칙이 동부전선에서는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독일은 부대가 큰 피해를 입은 경우 전선으로 신병과 물자를 보내 충원하지 않고 본국으로 소환해 재편성한 후에 투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장에서 격전을 치룬 각 부대는 심각한 병력난에 시달렸고 연료와 탄약이 제 때에 보급되지 않아서 마무리 한 방을 매듭짓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반대로 소련은 워낙 다급했기 때문에 공장에서 막 출고된 전차를 바로 전선으로 투입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숫자만큼 전차를 채워 넣을 수 있었지만 T-34KV 시리즈가 제 가치를 발휘하기도 전에 무리한 작전으로 총알받이가 되버렸습니다. 


히틀러는 여유있는 마음으로 태풍작전을 시작합니다만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기회, 모스크바 전투 (1부)


태풍Typhoon 작전 준비, 9월 6일~30일 


히틀러는 키에프Kiev를 함락시킨 후에 북부군집단Heeresgruppe Nord과 중앙Mitte군집단이 수비태세로 전환했기 때문에 남은 기간 동안 크림반도와 돈바스Donbas(우크라이나 공업지대) 외에는 별다른 작전없이 휴지기를 가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직 소련군이 남아 있다고 해도 이 정도 승리라면 1942년에 소련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위험을 즐기는 성향이 아니었고 특히 이기고 있을 때에는 더욱 그랬다. 처음부터 히틀러는 모스크바를 상징적인 의미로만 생각했으며 군사적 가치는 크게 두지 않았다. 그는 전차부대를 적군의 포위섬멸에 투입했고 특정 목표물을 위해 투입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리고 키에프전투 훨씬 이전부터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목을 방어하는 서부전선군Western Front이 진짜 전력이라고 믿었다.



티모센코Timoshenko의 서부전선군은 8/9월에 중앙집단군에게 반격을 시도했지만 소모전 정도의 성과만 거뒀다. 히틀러는 서부전선군의 전력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좌우협공으로 충분히 궤멸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9월 6일, 서부전선군의 집요한 압박에 폰 보크von Bock가 옐냐Yelnya 돌출부를 내줬지만 히틀러는 총통명령Führer Directive 35호를 하달했다. 벨리키예 루키Velikiye Luki와 키에프에서 대승을 거뒀고 반격하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티모센코 집단군에게 결정적인 작전을 펼칠 기회가 왔으며 겨울이 오기 전에 궤멸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최고사령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갑전력으로 서부전선군과 브랸스크Bryansk전선군을 전멸시키는 태풍작전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폰 보크의 중앙집단군에게 마지막 방어선을 돌파하는 중심역할을 맡기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의 회프너 전차집단Panzergruppe (이후 전차군으로 개편) 4를 중앙집단군으로 보냈고 남부집단군의 폰 클라이스트von Kleist는 4개 사단을 보내야 했다. 

단기간에 기갑군의 재편성을 강행했다. 예를 들어 라인하르트Reinhardt의 병력은 일주일 만에 600km를 이동해 중앙집단군에 합류했다. 열악한 도로 위를 쉬지않고 달렸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수의 차량이 문제를 일으켰다. 1전차사단은 다행히도 비테브스크Vitebsk까지 열차로 이동해서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9월 말이 되자, 폰 보크는 구데리안Guderian의 전차집단 2, 호트Hoth의 3, 회프너의 4를 갖춰 전차사단 14개와 자동차화 보병사단 8개를 가졌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단 한 건의 포위섬멸 전투도 성공시키지 못했던 회프너가 주공을 맡아 2개의 신규 전차사단과 기존의 10전차사단을 지휘했다.

태풍작전은 모두 1,800대의 전차와 69개 사단을 동원한 최대의 공격작전이었다. 14개 돌격포대대 3호 돌격포StuG III 350대로 3개 보병군을 지원했다. 독일은 모스크바 방면으로 기갑군의 80%를 투입해 동부전선에서 처음으로 적군에 비해 우월한 기갑전력을 가졌다. 

중앙집단군은 소련 서부전선군에 비해 전차는 1.7배, 병력은 1.5배 많았다. 공군도 절반의 비행기를 항공함대Luftflotte 2에 모아 중앙집단군을 지원하게 했다. 

문제는 보급이었다. 폰 보크는 동부전선에서 최대의 전력을 집결시켰지만 연료와 탄약은 턱없이 모자랐다. 특히 독일 본토에서 제공되는 연료는 8/9월 수비작전에도 모자랄 정도였다. 소련군이 저절로 물러난다고 해도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까지 달려갈 연료가 없었다. 


이반 코넵Ivan Konev은 9월 12일에 서부전선군을 넘겨 받았고 티모센코는 우크라이나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코넵은 6개 군으로 모스크바를 방어해야 했고 세묜 부됸니Semyon Budyonny 원수는 서부전선군 바로 뒤에 배치된 예비전선군 6개 군을 맡았다. 모스크바 남쪽은 안드레이 예레멘코Andrei Yeremenko의 브랸스크전선군 4개 군이 방어했다.

모스크바의 전면은 전선을 따라 종과 횡으로 방어시설을 대거 구축했기 때문에 탄탄했다. 3개 전선군은 모두 83개 보병사단, 9개 기병사단, 16개 전차여단과 2개 독립전차대대의 전력을 갖췄다. 전차는 총 849대로 T-34는 128, KV-1은 47대였다.


그렇지만 숫자에 불과했다. 소련의 3개 전선군은 지휘계통이 분산되어 있었고 예비 기갑전력이 상당히 부족했다. 방어선도 두텁지 않았는데 뱌즈마Vyazma와 오렐Orel 같은 전략요충지에는 심지어 병력이 배치되지 않았다. 

그나마 전투경험이 있는 사단이 절반에 불과했고 신규 사단의 훈련이나 무장상태는 무척 심각했다. 히틀러가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병력을 돌리자, 스탈린은 모스크바가 목표물이 아니라고 착각했고 우크라이나 남부로 달려간 티모센코를 지원하려고 했다. 

구데리안의 전차집단 2는 키에프 포위전 이후에 넓게 포진했기 때문에 태풍작전 전력에서 제외되었다가 폰 보크가 소련 서부전선군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궤멸시키기 위해 모든 전차를 투입하고 싶어했다. 


9월 15일, 구데리안은 키에프전투가 끝나면 바로 북쪽 글루콥Glukhov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5km를 이동하면서 많은 차량이 이탈하고 탈진했지만 휴식은 겨우 2~3일만 주어졌다. 구데리안은 겨우 187대의 전차(3호 전차 94, 4호 전차 36대 포함)만 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149대의 전차(3호 전차 124, 4호 전차 25) 보충을 긴급하게 요청했지만 태풍작전이 시작된 후인 10월 1일에나 전선에 도착했다.

구데리안은 다른 두 전차집단에 비해 연료문제가 더 심각했다. 출발지점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550km인데 반해 200km분의 연료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