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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대북방전쟁

러시아판 사도세자 표르트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 (4부)

by uesgi2003 2016. 1. 12.



아무래도 러시아역사는 다른 역사에 비해 관심이 적죠. 그래서 러시아판 사도세자에 대해 좀 미루고 있었는데 기억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바로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처음 보시는 분은 뒤로 넘어가서 1~3부를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국내에서는 표트르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의 갈등을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한 자료는 없었을 겁니다.

표트르대제가 아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불필요하게 일을 키우는 것이 이해가 안되실 텐데오래전에 표트르대제와 러시아역사에 대해 설명했듯이, 그는 어릴 때에 구세력의 반란으로 친인척이 학살당하는 참상을 직접 겪었고 목숨을 위협받으며 크레믈린궁이 아닌 외곽에서 살아야했습니다.


 

어릴 때의 트로마가 영원히 자리잡은 데다가 그가 추진한 급진개혁은 보수세력과 큰 마찰을 빚었습니다. 실제로 스트렐치라는 전통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보수세력의 리더들이 단지 숨죽이며 (과음과 질병으로 언제가 될 지 모르는) 표트르의 급사만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스트렐치Streltsy의 두 번째 반란을 처벌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아들 알렉세이 주변에 반란세력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의 사후에 개혁정책을 모두 무산시킬 불만세력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고 알렉세이의 일탈을 계기로 발본색원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미 스트렐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배후세력을 냉정하게 처벌했기 때문에 이번 일은 과도한 염려였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렉세이까지 죽이며 자신의 사후를 다져 놓았기 때문에 역사에서 흔한 과거회귀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불과 10년 만에 과거회귀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만




러시아판 사도세자 표르트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 (4부) 


171823일 오전 9, 크레믈린 알현실에 지도층이 모여들었다. 정부관료, 고위성직자와 귀족이 모여 계승권 박탈과 새 황태자 선포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지켜보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프레오브라젠스키(차르 근위부대) 3개 대대가 장전한 소총을 들고 궁전을 경비했다.

표트르가 먼저 도착해서 왕좌에 앉았다. 알렉세이가 톨스토이와 함께 들어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칼이 없다는 것은 죄수를 의미했다. 알렉세이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하며 용서를 빌었다. 표트르는 고백문이 낭독되는 동안 아들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너그러운 군주이자 아버님. 아들이자 충복의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쳐 황제의 보호와 지지를 호소한 죄를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너그러운 용서와 관용을 간청합니다

아들로 불릴 가치도 없는 미천하고 무능력한 시종, 알렉세이가 고합니다."



표트르대제가 외곽에서 살 당시에 전쟁놀이로 만들었던 프레오브라젠스키연대(사진은 재현장면)입니다. 세묘놉스키연대와 함께 병정놀이에서 러시아의 최정예연대로 성장했습니다.

표트르대제와 함께 성장했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던 근위연대였습니다.

  

차르는 아들을 공식적으로 비난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거듭해서 무시하고 아내를 저버리고 예프로시냐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군대를 탈영하고 외국으로 불명예스럽게 도망친 죄를 나열했다. 표트르는 황태자가 목숨만 건지고 계승권을 포기하려 한다고 크게 발표했다. 표트르는 과거 행동에 대한 모든 사실과 관련자가 밝혀져야 자비와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알렉세이는 표트르를 따라 근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시종 알렉산드르 키킨Alexander Kikin과 이반 아파나시엡 Ivan Afanasiev만이 도망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맹세했다. 두 사람이 다시 알현실로 돌아오자 부대법관 샤피롭이 황태자의 죄목을 인쇄한 명세서를 읽으며 용서와 함께 계승권을 박탈당했으며 예카테리나의 아들, 2살 먹은 표트르 페르토비치가 계승권을 받는다고 선포했다.

알렉세이는 복음서와 십자가에 입맞추고 차르의 사망 시에도 이복동생에게 충성할 것이며 계승시도를 벌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같은 맹세를 했다. 그날 밤, 선언문을 인쇄하고 향후 3일 동안 모스크바의 모든 시민을 성당으로 불러 새로운 충성맹세를 받았다. 상테페르부르크의 멘시콥과 의회에도 전령을 보내 수비대, 귀족, 시민과 농민 모두의 충성맹세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모스크바와 상페테르부르크의 공식 충성맹세로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알렉세이는 왕권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고 새 후계자를 결정했다. 이제 별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더 큰 일이 벌어졌다. 비극의 1막을 끝냈을 뿐이었다.

톨스토이가 상엘모 성에서 전달했던 표트르의 약속과 달랐다. 귀국만 하면 무조건 용서한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관련자 모두를 고발하고 음모에 대해 조금도 숨기지 말라는 조건이 붙었다.

 

표트르는 불만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싶었고 자신이 사후에 누가 알렉세이와 협력할 것인지도 미리 알고 싶었다. 황태자가 내부의 도움 없이 달아날 수도 없었고 반드시 흉악한 계략이 숨어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부자지간의 일로 마무리 지을 수 없었고 통치에 대한 도전으로 확대되었다. 다른 아들에게 계승권을 넘겼다고 해도 알렉세이는 여전히 문젯거리였다. 2살의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충성맹세를 했던 사람이 자신의 죽음 후에 맹세를 뒤집고 알렉세이에게 몰려갈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가 자신의 주변에 머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표트르의 생각과 달리 후계자 표트르도 얼마 살지 못해서 아내가 예카테리나 1세로 즉위합니다. 예카테리나 역시도 2년 밖에 살지 못해서 알렉세이의 아들이 표트르 2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표트르 2세는 아버지의 죽음에 크게 반발해 표트르대제의 모든 개혁을 취소시키려 했지만 그도 3년 만에 죽어 개혁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런 고민에 휩싸인 표트르는 불화의 근원부터 뿌리뽑기로 했다. 프레오브라젠스코예에서 첫 번째 심문이 열렸다. 표트르는 직접 7개의 질문을 써서 톨스토이를 통해 전달하면서 단 하나라도 소홀히 답하면 용서는 없다고 경고했다. 알렉세이는 4년의 세월에 대해 장황하게 나열했다. 키킨과 아파나시엡만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말했던 많은 사람들을 언급했다. 마리아 알렉세예브나Maria Alexeevna공주, 첫 번째 부인 예브도키아의 오빠 아브라함 로푸킨, 표트르 아프락신, 세묜 나리슈킨, 바실리 돌고루키, 유리 트루베츠코이, 비아젬스키, 이그나티엡의 이름이 있었다.



프레오브라젠스코예의 위치입니다. 모스크바를 떠나 이곳에 심문장을 만들었을 정도로 표트르대제에게는 각별한 곳이었습니다.  

 

알렉세이는 정부 예프로시냐를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편지를 상자에 보관만 했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도망치기로 했을 때에도 그녀를 속여서 데려갔습니다. 리가로 간다고 말했다가 더 데리고 갔고 대 오스만 동맹을 위해 빈으로 가야 하며 눈치채지 못하게 비밀리에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와 하인은 그렇게만 믿었습니다.”

 

표트르는 상페테르부르크의 멘시콥에게 급히 전령을 보냈다. 성문이 닫혔고 누구도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시장으로 가는 농부는 작은 짐썰매까지도 보여주어야 했다. 명단에 오른 사람의 자살에 대비해 약국은 비소나 독극물을 팔지 않았다.

검거가 시작되었다. 한 밤 중에 근위대 50명이 키킨의 집을 조용히 둘러쌌고 장교가 잠자리에 있던 그를 잠옷 차림 그대로 사슬에 채워 끌고 갔다. 키킨은 탈출할 수도 있었다. 위험을 느낀 그는 표트르의 시종을 매수해서 차르의 결정을 미리 알리게 했다. 표트르가 멘시콥에게 편지를 쓰자 차르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어깨너머로 그 내용을 읽었다. 시종은 즉시 전령을 보내 상페테르부르크의 키킨에게 알렸지만 근위대가 한 발 더 빨랐다.



알렉산드르 다닐로비치 멘시콥Alexander Danilovich Menshikov공입니다. 차르의 절친한 외국인친구 모임에서 표트르대제와 친해졌고 뛰어난 능력으로 오른팔역할을 하며 국정을 장악했습니다.

예카테리나대신 통치하면서 사실상의 차르라고 불렸고 표트르 2세를 옹립한 후에 딸과 결혼시켜 절대권력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다른 귀족가문의 반발과 표트르 2세의 거부로 시베리아 추방형을 받고 일가족이 모두 죽었습니다.


가문배경이 없다보니 절대권력에서 죽음까지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인 모양입니다.

  

멘시콥은 바실리 돌고루키공을 체포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그는 중장으로 덴마크 최고훈장Knight of the Danish Order of the Elephant을 받았고 러시아 국가재정 전용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차르와 함께 18개월 동안 코펜하겐, 암스테르담과 파리를 여행하다가 이제 막 돌아왔을 정도로 신임 받는 인물이었다

멘시콥은 병사로 저택을 포위한 후에 명령을 전달했다. 돌고루키는 칼을 내놓으면서 양심과 머리는 하나뿐이구려라고 말했다. 그는 표트르와 바울 요새로 끌려갔다.

같은 날 밤, 멘시콥은 표트르 아프락신, 아브라함 로푸킨, 미하일 사마린 등을 체포했다. 그리고 알렉시아의 하인 모두와 다룬 9명도 사슬에 묶어 모스크바로 이송할 준비를 했다.



바실리 루키치 돌고루콥()Vasily Lukich Dolgorukov입니다. 표트드대제 당시의 조악했던 외교를 맡아 많은 활약을 하고 큰 신임을 얻었습니다.

가문이 러시아 명문대가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후에 멘시콥을 누르고 표트르 2세부터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표트르 2세가 단명하자 안나Anna황후를 옹립하면서 귀족위원회와 협의하지 않고는 명령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 정도였습니다.

표트르대제를 밀어내고 권력을 찬탈했던 누나 소피아부터 여걸이 줄줄이 등장했는데 안나황후도 꼭두각시 신세에서 대반전을 일으켜 돌고루키를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2월 내내 체포는 그치지 않고 확대되었다. 모스크바와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가 일어났다. 러시아 종교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로촙주교 도시테우스Dositheus는 예브도키아를 위해 공공연하게 기도하고 표트르의 죽음을 예언했다는 죄로 체포되었다. 예브도키아와 마리아도 체포해서 모스크바로 이송했다.

표트르는 예브도키아를 특히 의심했다. 그녀는 알렉세이와 계속 연락했고 아들이 황제가 되면 가장 유리한 사람이었다. 계승권을 박탈하던 날, 표트르는 예브도키아가 19년 동안 살고 있던 수즈달 수녀원으로 근위대 대위 그레고리 피사렙을 보냈는데 예브도키아는 이미 수녀복을 벗고 황실예복을 입고 지내고 있었다. 그는 수녀원 제단에서 마치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표트르와 예브도키아의 이름이 적힌 기도서를 찾아냈다. 그리고 예브도키아의 불륜도 밝혀냈다.

 

이제 44세가 된 예브도키아는 전남편의 예상되는 반응을 떠올리며 공포에 떨었다. 모스크바로 이송되는 동안 표트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한없이 너그러운 폐하로 시작되었다.

 

정확한 해를 기억할 수 없이 오래 전에 수즈달 수녀원으로 가서 헬렌이라는 이름과 함께 세속을 버렸습니다. 수녀가 된 후, 반 년 동안 수녀복을 입다가 수녀가 될 뜻이 없었기에 수녀복을 벗고 평민으로 수녀원에서 조용히 지냈습니다.

이제 전하의 관용을 바랄 뿐입니다. 발밑에 엎드려 죄를 고하고 무의미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요서를 빕니다. 여생을 수녀로 지내며 전하를 위해 신께 기도할 것입니다.

미천한 노예이자 전부인 에오도키아.

 

표트르는 수즈달의 모든 것을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불륜상대였던 글레봅과 수녀원 승려와 수녀 몇 명도 함께 체포했다. 모스크바가 예브도키아의 수녀원 생활을 20년 가까이 몰랐을 리 없고 불륜도 명예를 더럽힌 정도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배후 음모가 수즈달 수녀원까지 연결되었다고 믿으면서 분노를 걷잡을 수 없었다.

 

상페테르부르크, 수즈달과 다른 지역에서 죄수가 줄을 잇자 모스크바 시민은 크레믈린 성문에 몰려들어 살벌한 풍경을 지켜보며 최근 소문을 나누었다. 유명한 성직자, 표트르 궁정측근, 장군과 행정부 관료, 러시아의 최고위 귀족이 소환되었고 하인이 앞장선 마차가 매일 드나들면서 진귀한 장관을 이루었다.

 

도시테우스 주교가 유죄판결을 받자 예복을 벗기고 고문심문으로 넘겨졌다. 그는 예복이 벗겨지는 동안 자신을 심판한 다른 주교들에게 소리질렀다.


이 사건에서 나만 유죄요? 당신들 모두 자신을 들여다 보시오. 무얼 감추고 있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시오. 어떤 이름이 나올까요?”


도시테우스는 고문을 당하면서 알렉세이와 예브도키아를 동정한 것이 전부라며 저항이나 모반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끌어 내지도 못했다.

표트르는 20년 전의 스트렐치 모반에서와 같이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더욱 고문강도를 높였다.

 

표트르는 2~3명의 하인만 데리고 궁전에서 달려 나와 심문에 직접 지켜보았다. 전통예복을 갖춰 입고 왕좌에 앉아 심판을 내리던 모스크바공국 차르의 관습을 지키지 않고, 서유럽 복장으로 검사역할을 했다. 대 크레믈린 강당Great Kremlin Hall에 서서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며 정부가 겪었던 위기와 국가반역죄의 공포를 주장했다. 도시테우스의 혐의를 직접 제시했기 때문에 로촙 주교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3월 말, 모스크바 심문도 끝을 보여서 관료회의가 임시 대법원에서 판결문을 전달했다. 키킨, 글레봅, 도시테우스에게는 고통스러운 지연처형을 선고했고 다른 사람에게는 즉시처형을 선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심한 공개태형을 받은 후에 추방당했고 수즈달의 수녀 등의 여성도 공개태형을 받고 백해White Sea 수녀원으로 이송되었다.

예브도키아는 신체처벌은 받지 않고 라도가Ladoga 호수의 외진 수녀원에서 10년 동안 엄격한 감시 속에 살다가 손자 표트르 2세가 즉위한 후에 궁정으로 돌아와 안나여제 시대인 1731년까지 살았다. 표트르의 이복누나 마리아는 불만을 조장했다는 죄로 3년 동안 실리셀부르크에 감금되었다가 1721년에 석방되어 상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2년 후에 죽었다.

 

훨씬 더 많은 피고인이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사마린은 석방되었고 시베리아공 유리 트루베츠코이Yury Trubetskoy는 아르한겔스크로 추방되었다. 황태자에게 3,000루블을 준 표트르 아프락신은, 차르에게 가는 여비로 준 것이며 도망계획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방면되었다.

황태자를 공공연하게 동정했던 바실리 돌고루키공은 친척의 간청으로 처형을 모면했다. 특히 형 야콥은 돌고루키 가문이 오랜 동안 차르에게 충성해온 사실을 거론하며 차르에게 애원했지만 장군계급을 박탈하고 덴마크 최고훈장은 코펜하겐으로 반환한 후에 카잔으로 추방했다. 그는 긴 수염과 초라한 검정색 외투차림으로 상페테르부르크를 떠나면서 예카테리나에게 작별인사 기회를 얻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행동을 장황하게 변명하며 옷가지만 가지고 떠난다고 불평했다. 마음이 약했던 예카테리나는 200두카트를 선물로 주었다.

 

잔인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326, 크레믈린 성벽 아래의 붉은광장Red Square에서 처형되었고 20~30만 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로촙 주교를 포함한 4명은 망치로 뼈마디를 부러뜨리고 바퀴에 매달아 고통스럽게 죽였다.

예브도키아의 불륜상대 글레봅은 매듭채찍질을 당한 후에 달군 쇠막대와 석탄으로 지졌다. 못이 박힌 판자에 살이 뚫린 채로 3일을 보냈지만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결국 말뚝형에 처해져 뾰족한 나무막대를 직장으로 관통시켜 고통스럽게 죽였다. 표트르는 그에게 다가가 고백하면 즉시 처형하겠다고 말했지만 글레봅은 얼굴을 침을 뱉었고 차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당시의 고문/처형에 대해서는 미리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863

 

황태자에게 합스부르크로 도망치라고 조언했던 키킨은 생명을 되살린 후에 다시 처형하는 식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처형 2일 째에 표트르가 다가서자 그는 용서를 빌며 수도승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표트르는 거절하는 대신에 즉시 머리를 베는 관용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