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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대북방전쟁

러시아판 사도세자 표르트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 (3부)

by uesgi2003 2015. 12. 10.


표트르가 러시아제국 건설의 큰 청사진과 기초공사를 남겨주었기 때문에 알렉세이는 아버지의 개혁을 물려받았다면 이후의 예카테리나 여제와 함께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역사를 바꿀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일 특히 사람의 마음은 생각대로 되질 않죠. 알렉세이가 차르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잘못일 뿐이지 그의 인성이나 희망은 잘못이 아닙니다. 아마 둘째 아들 표트르 2세가 몇 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그의 희망대로 교외에서 정부 아프로시냐와 여생을 즐기며 보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를 읽기 전에 당연히 앞의 1부와 2부부터 확인해야 흥미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즐길 수 있습니다.


러시아판 사도세자 표르트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 (3부) 



1716 11 10일 저녁, 빈 황궁의 쇤보른Schonborn백작이 잠을 청할 때에 하인이 들어와 러시아 황태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알렸다. 황태자는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황상태의 알렉세이는 차르가 제국계승권을 박탈하고 수도원에 보냈다가 죽이려 한다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목숨을 건지러 왔다고 말했다.

쇤보른은 확인 후에 황제를 한 밤 중에 깨울 수 없지만 이튿날 오전에 알리겠다고 안심시켰다. 황제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숙소로 돌아가 숨어 지내라고 설명했다. 알렉세이는 다시 한 번 눈물을 쏟으며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떠났다.

알렉세이의 도망으로 카를 6Charles VI 의 처지가 난감해졌다. 부자의 일에 간섭하는 일은 위험했다. 러시아에 반란이나 내전이라면 승자가 결정될 때까지 섣불리 편을 들 수 없었기 때문에 알렉세이의 도망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 황태자가 아버지와 화해하거나 다른 일이 벌어질 때까지 익명으로 지낼 수 있게 했다.



카를 6세 직후의 신성로마제국 영토입니다. 알렉세이가 도망친 이탈리아 중남부도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 계승권은 끊임없는 견제대상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국왕을 펠리페 5세에게 양보하고 황제에 올랐습니다. 카를 7세의 4년 재위 후에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아래 그림참조)가 그 뒤를 잇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위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민족, 언어, 문화, 지역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제국으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능력이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전설적인 지휘관 사부아공 외젠Eugène, Prince of Savoy이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덕분에 카를 6세는 비교적 수월한 통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테레지아 여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테레지아는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곪은 제국을 개혁하는데 주력했고 그래서 실제로는 황제인 남편 프란츠가 있었고 그녀는 황후에 불과했지만 여제의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테레지아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리 앙트와네트가 딸입니다. 



이틀 후, 알렉세이와 일행은 레히Lech강 티롤계곡의 에렌베르크Ehrenberg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극비로 붙여졌다. 사령관조차 신분을 몰랐기 때문에 폴란드나 헝가리 귀족으로 알았다. 수비대는 성밖을 나서지 못했고 휴가나 교대도 금지되었다. 성을 오가는 모든 편지는 빈의 황궁으로 전달되었다. 성 근처에 접근하는 사람은 즉시 체포했다.

알렉세이는 높은 산맥, 알프스의 폭설과 두터운 성벽 안에서 마음을 놓았다. 그는 익명으로 숨어지내면서도 자신이 아프거나 죽음에 이르면 동방정교 신부가 필요하다고 쇤보른에게 고집을 피웠다. 5개월 동안 쇤보른과 빈의 황궁에만 연락했다.

 

차르의 가족이 모두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의외로 황태자의 실종소문이 늦게 퍼졌다. 표트르는 암스테르담, 예카테리나는 메클렌부르크에 있었던 데다가 그 당시 여행은 일정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알렉세이는 원래 상페테르푸르크를 출발해 발트해 겨울길을 따라 내려와 메클렌부르크의 겨울 숙영지에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도로와 기후에 따라 몇 주씩 지연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카테리나는 멘시콥에게 알렉세이에 대해 묻는 편지를 두 번 보냈다. 키킨이 보낸 하인은 독일북부에서 황태자의 흔적을 놓쳤고 사라진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 때에는 알렉세이가 이미 에렌베르크에 몸을 숨긴 후였다.

 

황태자가 단치히 Danzig(그단스크)부터 종적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황태자가 몹시 울면서 여행경비로 1,000 두카트를 가져갔는데 단치히에서 다시 2,000을 더 가져가고는 가구를 비밀리에 팔고 경비를 지불하라고 했답니다.

그 후에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답니다. 차르의 사람들이 단치히 근처에서 황태자를 붙잡아서 외진 수도원에 데려갔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의 생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헝가리로 갔다는 사람도 있고 빈으로 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카트는 지금의 달러와 같이 유럽전역에서 유통된 금은화로 베니스 두카트의 가치가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신성로마제국 외교관은 표트르를 혐오했기 때문에러시아는 반란의 공기가 팽배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는 표트르를 죽이고 예카테리나는 감금한 후, 에우도키아를 석방하고 알렉세이를 즉위시키는 음모에 대해서도 알렸다. 귀족이름과 불만내용을 상세하게 나열하며자식을 선원이나 조선공으로 내주고 외국어 때문에 외국에 나가 막대한 돈을 쓰고 있고 중과세로 몰락했습니다. 농노는 요새와 항구건설에 차출되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증오와 혐오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알렉세이는 이 편지를 정부인 예프로시냐Afrosina에게 주어 간직하게 했고 나중에 모스크바에 전달되어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표트르는 파리를 방문하기 전에 암스테르담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아들이 사라졌다는 놀라운 소문을 들었고 분노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이 자신의 개혁을 뒤집으려는 불만세력을 지원하고 조장하고 있다고 했다. 황태자를 찾는 일이 급했다.

12, 메클렌부르크 러시아군 사령관 바이데Weide장군에게 독일북부를 샅샅이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외교관 베셀롭스키Veselobsky에게는 오스트리아 수색을 명령하면서 카를 6세에게 황태자가 발견되면 강제송환시켜 달라는 편지를 전달했다.

쇤보른이나 황제 모두 구체적인 증거를 내놓지 않았다. 차르는 루먄촙Rumyantsov 근위대대령을 다시 파견해 무력으로 알렉세이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1717 3월 말이 되자, 베셀롭스키와 루먄촙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뇌물을 받은 황궁 관리가 티롤을 흘렸다. 루먄촙은 성에 최대한 가까이 기어갔다가 되돌아오기를 수 차례 한 끝에 황태자가 분명한 그림자를 확인했다. 베셀롭스키는 빈으로 돌아가 차르의 편지를 황제에게 전달했다.

카를 6세는 어지러운 문제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 지를 망설이다가 황태자에게 밀사를 곧바로 보내 차르의 편지를 보여주고 아버지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당부했다. 알렉세이는 울부짖으며 방마다 뛰어다녔고 러시아어로 크게 떠들다가 절대로 귀국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밀사는 은신처가 이미 발각되었고 차르의 요구를 가볍게 거절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다른 은신처로 옮기겠다는 황제의 뜻을 전했다. 황제가 유트레히트Utrecht 조약에 따라 4년 전에 즉위했던 나폴리Naples를 추천했다.

  

알렉세이는 예프로시냐와 시종과 함께 플로랑스Florence를 거쳐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했다.

수상한 자가 트렌토Trento까지 따라붙었지만 아무 일 없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님일행이 취하지 않게 막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5월 초에 나폴리에 도착했고 저녁식사 후에 산엘모St. Elmo성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따뜻한 햇볕 아래 자리잡았고 러시아의 성직자와 의회에 안부와 도망한 이유를 알리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프로시냐의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남자시종으로 감추기 힘들어졌고 마침내 황태자의 여인으로 드러났습니다.”

 

밀사가 보고했던 수상한 사람들은 루먄촙 일행이었고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나폴리까지 뒤를 바짝 쫓았다.

표트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황태자 도망친 9개월 동안 차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수치스럽게 외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제 합스부르크 황제가 알렉세이에 대해 거짓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폴리에 새 은신처를 마련해 준 것을 보니 황태자를 순순히 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표트르는 다시 한 번 황제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번에는 배신자 아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외교관인 표트르 톨스토이Peter Tolstoy를 최후통첩 밀사로 선택했다. 72세인 그는 남매의 권력투쟁에서 소피아공주를 지지했는데도 살아남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러시아 대사로 여러 차례나 탑에 감금되면서 12년을 버텨냈다.

이제 차르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던 그는 마지막 임무를 받았다. 빈으로 가서 황제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이유를 받아와야 했다. 카를 6세에게 배반자를 도운 탓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했다. 알렉세이를 만날 수 있다면 용서할 테니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렇지만 표트르의 실제 명령은 가슴 속에 간직해야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황태자를 귀국시켜야 했다.



당시 러시아 외교의 대들보였던 톨스토이입니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조상입니다. 

 

톨스토이는 빈에 도착하자마자 차르의 편지를 전달했는데 알렉세이의 은신처를 알고 있으며 아버지이자 절대군주로서 아들을 송환할 완전한 권리를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카를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듣기만 하다가 빠른 답변을 약속했다. 톨스토이는 마침 딸을 만나려고 빈에 온 알렉세이의 장모에게도 황태자의 귀국을 종용해달라고 간청했다. 차르가 계승권을 박탈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협력을 약속했다.

 

8 19, 궁정회의가 열렸지만 알렉세이를 즉시 송환할 수도 없었다. 차르의 관용약속이 거짓이라면 합스부르크는 알렉세이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했다. 그렇지만 러시아군이 대규모로 폴란드와 독일북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표트르의 성격을 미루어보면 슐레지아Silesia와 보헤미아Bohemia로 진군할 수도 있었다.

황제는 알렉세이가 감금된 것이 아니며 이동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부자지간의 사이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고 적대세력에게서 보호해 왔다고 답신했다. 나폴리총독에게는 알렉세이를 암살이나 납치당하지 않게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1717 9 26, 알렉세이는 나폴리총독의 초대를 받았다. 방에는 놀랍게도 톨스토이와 루먄촙이 총독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버지의 편지를 전달하고 황태자의 생각을 알기만 하면 된다고 설득했다. 여전히 공포에 질린 황태자는 편지를 읽었다.

 

아들에게

네 불손과 모욕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말로도 안 듣고 교정도 통하지 않더니 결국 네 행복을 바라는 나를 속이고 맹세까지 저버리고 외국의 보호를 받으며 도망을 치는 최악의 불손을 보여주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신하 중 어떤 이도 이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조국에게는 얼마나 큰 수치인지를 알고 있느냐!

네가 해야 할 일을 마지막으로 알리는 편지를 보낸다. 톨스토이와 루먄촙이 네게 편지를 전하고 내 뜻임을 알릴 것이다. 너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신께 맹세할 테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게 복종하고 돌아온다면 예전보다 더 사랑할 것이다. 거절한다면 아버지로서 그리고 신이 주신 권한으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저주를 내릴 것이다. 군주로서 너에게 배반자의 낙인을 찍고 처벌할 방법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신께서도 나를 도와 정의를 직접 증명하실 것이다.

표트르

 

알렉세이는 편지를 다 읽고는 차르가 계승권을 박탈하고 수도원에 감금시켰기 때문에 황제의 보호를 청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용서를 약속했기 때문에 반성하고 다시 생각할 테니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이틀 후, 그는 여전히 아버지가 두려우며 황제의 보호를 받고 싶다고 대답했다. 톨스토이의 얼굴이 달라졌다. 소리를 질러대며 방을 오가더니 차르가 합스부르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황태자를 반역자로 체포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알렉세이는 공포에 질려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총독의 손을 잡고는 옆방으로 끌고가 황제의 보호를 간청했다. 총독은 황제에게서 면담을 중재하고 만약의 폭력사태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황태자가 자진해서 귀국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톨스토이 편을 들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그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배운 음모를 꾸몄다. 총독측근을 160 두카트로 매수해 황제가 분노한 아버지 편을 들으려 한다는 소문을 꾸며 알렉세이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알렉세이를 만났을 때에 차르에게서 새 편지를 받았는데 무력으로 그를 체포할 생각이며 군대를 슐레지아로 이동시킨다고 거짓말했다. 차르가 직접 이탈리아로 올 생각이라고 몰아붙였다.

톨스토이의 음모는 알렉세이의 약점인 예프로시냐를 파고 들었다. 총독에게 그녀가 부자사이를 갈라놓는 원흉이라고 말하고는 알렉세이의 귀국을 막고 있다고 거짓말했다. 총독은 톨스토이의 종용에 따라 예프로시냐를 성에서 내보냈다. 톨스토이는 반대로 예프로시냐를 선물과 약속으로 매수하며 황태자의 귀국에 힘을 보태게 했다. 그녀는 톨스토이가 시키는 대로 황태자의 마지막 시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알렉세이는 교황국으로 달아나 교황의 보호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누가 봐도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톨스토이가 도착하자 알렉세이는 바로 항복했다.

두 가지 조건하에 아버지께 돌아갈 것이오. 시골집에서 조용히 살 것이며 예프로시냐를 내게서 떼어내지 마시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황태자를 송환하라는 차르의 명령을 기억하는 톨스토이는 바로 조건을 받아들이며 아프로시냐와의 결혼도 돕겠다고 약속했다.

알렉세이는 차르의 용서를 바라고 톨스토이가 동의한 두 조건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네가 말하는 용서는 이미 약속했었고 톨스토이와 루먄촙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약속했다. 다시 용서를 보장하마. 네가 제시한 예프로시냐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귀국하면 허락할 생각이다.”

표트르는 교외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알렉세이의 바람을 승낙했다.

다른 중죄를 용서했는데 사소한 문제를 왜 허락하지 않겠느냐!”

 

알렉세이가 귀국에 동의하고 빈의 황제에게 알리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황태자는 상 엘모를 떠나 천천히 여행을 즐겼다. 바리에 들려 성 니콜라스Nicholas 묘지도 들렀다. 로마로 이동해 교황의 환대를 받았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그는 베니스에 예프로시냐를 남겨두며 겨울에 알프스를 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했다.

러시아 밀사 일행은 귀국길에 황궁을 피하기로 했다. 알렉세이가 빈에 들러서 감사인사를 했다가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일행을 둘로 나누어 하룻밤 만에 빈을 통과하게 준비시켰다.

 

황제는 알렉세이 일행이 이미 모라비아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소식을 들었고 몹시 화를 냈다. 그는 나폴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깊이 후회했고 알렉세이가 정말로 자진해서 귀국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면 발에 박힌 커다란 가시가 사라지지만 납치된 것이라면 제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급히 회의를 소집해서 모라비아총독 콜로레도Colloredo백작에게 일단 러시아 일행을 붙잡아두고 황태자가 원해서 여행을 하는 것인지를 확인하라고 명령했다.

톨스토이의 거친 항의에도 불구하고 총독은 알렉세이를 만나 의사를 확인했다. 알렉세이는 마땅한 예복이 없어서 황제를 방문하지 않았다며 의기소침한 대답만 했다. 이로써 황제를 총독을 통해 짐을 벗어 던졌고 떠나도 좋다고 허락했다.

톨스토이는 몇 시간 만에 새 말을 구해 여행을 계속 했고 1718 1 21, 러시아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리가에 도착했다. 알렉세이는 리가에서 모스크바 부근의 티베르로 옮겨졌고 아버지의 호출을 기다렸다.


오늘의 러시아가 있게 한 대북방전쟁Great Northern War 전반전과 후반전입니다. 전반전은 군사강국 스웨덴이 러시아까지 원정했고 후반전은 러시아가 반격에 나서 발트해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예프로시냐는 베니스에 남았다가 천천히 이동하며 봄을 기다렸다. 알렉세이는 여행길에 그녀에게 계속 편지를 쓰며 사랑과 염려를 전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편지를 보면 위기의식이나 열정이 없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녀가 몇 줄 휘갈기면 비서가 내용을 보태 편지를 마무리 지었는데 캐비어나 훈제연어를 보내달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러시아에서는 황태자의 귀국이 혼란을 일으켰다. 여전히 황태자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명령을 기다리는 반역자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황태자의 도착으로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그를 편들었던 사람은 혁명을 기대하며 기뻐했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일의 결과를 지켜보며 다들 숨죽이고 있다. 그의 귀환을 반기지 않는데 어머니와 같은 운명이라고 믿고 있다.”

황태자가 아버지보다 오래 살아남아 즉위하기를 기대했던 사람은 표트르의 유다, 톨스토이가 황태자를 갖다 바쳤다며 분노하고 혐오했다.

표트르의 측근은 “예프로시냐와의 결혼을 허락했다고 황태자라는 바보가 귀국한 소식을 들으셨소? 결혼식 대신에 장례식이 치러질 것이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