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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대북방전쟁

러시아판 사도세자 표르트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 (5부)

by uesgi2003 2016. 1. 16.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지만 함께 달아났던 정부 예프로시냐는 천수를 누렸습니다. 표트르대제가 불만세력의 제거에만 신경썼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알렉세이의 최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림자료는 거의 없습니다. 



러시아판 사도세자 표르트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 (5부)


9개월 후, 붉은광장에서는 잔혹한 처형의 2막이 다시 벌어졌다. 황태자와 친분이 있었던 슈체르바톱Shcherbatov공은 공개태형 후에 혀와 코가 잘렸다. 알렉세이의 폴란드 통역을 포함한 3명은 공개태형 당했다. 완전히 체념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러시아인과 달리, 폴란드인은 옷을 안 벗고 버티다가 처벌을 받았다.

예브도키아의 오빠 아브라함 로푸킨, 알렉세이의 고해신부 이그나티엡Abraham, 시종 아파나시엡과 식솔 2명은 목숨을 잃었다. 모두 뼈마디가 부러진 채로 바퀴에 매달렸다가 참수형으로 낮춰졌다. 신부가 가장 먼저 처형되었고 로푸킨이 그 뒤를 따랐는데 앞서 죽은 사람의 피가 흥건한 처형대에 목을 내밀어야 했다.

 

표트르는 잔혹한 처형을 집행하는 동안에도 불만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의심했고 반드시 찾아내 처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차르는 음모를 사전에 포착해서 일망타진한 것을 축하하는 외국사절의 축하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불은 초반에 확실하게 잡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소. 쇠와 돌로 막아버리면 저절로 꺼지기 마련이요.”

 

대대적인 재판과 잔인한 처형이 끝나면서 황태자 문제도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표트르는 17183월에 상페테르부르크로 떠나면서 알렉세이를 데려갔다. 함께 여행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부자의 갈등이 해소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표트르의 마음은 여전히 의심과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고 긴장은 계속되었다. 델라비는 파리에 보내는 편지에서 러시아의 혼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표트르의 죽음을 바라며 게으르고 무식하던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차르는 실제 음모를 찾아 내지도 못했고 황태자나 측근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근심거리였다. 아무리 조사하고 처형해도 표트르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베버의 기록을 보면 이런 고민을 잘 알 수 있다.

 

아직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황태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매우 외진 수도원에 감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차르에게서 멀어지면 군중이 몰려들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상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데려와서 감시할 것 같습니다. 그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저주한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안 섭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성직자, 귀족과 평민은 황태자를 신처럼 떠받듭니다.

 

베버의 추측이 정확했다. 알렉세이는 자유가 되었지만 예카테리나 궁전 옆의 집에 살아야 했고 표트르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다. 황태자는 겁에 질렸고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 스승, 고해신부, 친구와 측근이 체포당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다.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에 추방당하고 처형될 때에도 자신이 무사한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예프로시냐와의 결혼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알렉세이는 부활절 미사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예카테리나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에 무릎을 꿇고 예프로시냐와의 결혼에 힘써달라고 부탁했다.

 

예프로시냐는 415일에 상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지만 연인의 포옹 대신에 체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표트르와 바울 요새에 수감되었고 소지품에서 2장의 편지초안이 나왔다. 하나는 알렉세이가 나폴리에서 러시아 의회에 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동방정교 대주교에게 쓴 것이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내가 국외로 탈출해서 미지의 장소에 체류하고 있어서 무척 놀랐을 것으로 생각하오. 학대와 혼란이 계속되어서 조국을 버릴 수 밖에 없었소. 내 잘못이 없는데도 1716년 초에 수도원 감금을 시도했소. 여러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렇지만 신의 자비로 지난 가을에 사랑하는 조국과 여러분을 떠날 기회를 얻었소.

지금은 어떤 높은 분의 보호를 받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소. 구원하신 신께서 사랑하는 조국으로 다시 부르실 때까지 이대로 있을 것이오.

그 때가 되면 모른 척하지 말고 지금은 내 죽음을 퍼트리는 자의 말을 믿고 기억에서 지우지 마시오. 신께서 나를 보호하시며 후원자도 계속 지원해줄 것이오. 나는 살아있으며 여러분과 국민을 위해 늘 기도할 것이오.

 

대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도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감금했던 바로 그 사람의 지시라는 내용이 더 있었다.

 

비극의 3막이 시작되고 4주가 지난 5월 중순, 표트르는 두 연인을 따로 불러 심문하고 대조하기로 했다. 알렉세이를 페테르고프Peterhof로 보내고 2일 후에는 예프로시냐를 불렀다. 그는 몽 플라지르Mon Plaisir에서 두 사람을 차례로 심문했는데 예프로시냐가 배신하면서 알렉세이의 운명이 결정 났다.


그녀는 고문을 받지 않고도 알렉세이의 혐의를 인정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두 사람이 외국에 있는 동안의 일상생활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녀의 입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공포가 쏟아져 나왔다. 알렉세이는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거듭해서 호소했다고 했다.

메클렌부르크 부대와 모스크바 인근의 반란소문을 듣자 이제 신께서 어떻게 하실지 보게 되겠군이라며 즐겁게 말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아프다는 신문을 읽고는 기뻐했다. 그녀에게 왕위계승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차르가 되면 상페테르부르크와 새로 점령한 외국영토를 모두 포기하고 모스크바를 수도로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표트르의 신하를 해고하고 자신의 신하를 임명할 것이며 해군을 해체하고 전함이 썩어가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군대를 몇 개 연대로 축소하고 전쟁을 벌이지 않고 예전의 국경선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성당의 전통적인 권리를 회복시키고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프로시냐는 자신의 역할도 조작했다. 자신이 거듭해서 재촉했기 때문에 알렉세이가 귀국에 동의했으며 심지어 알렉세이가 칼로 위협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도망쳤다고 주장했다. 잠자리도 협박과 강압 때문에 함께 했다고 말했다.

예프로시냐의 증언은 표트르의 의심을 뒷받침했다. 그는 프랑스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의 편지 덕분에 반란음모 계획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되었고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정부가 자진해서 모든 증거를 털어놓았소.”

 

표트르는 알렉세이를 소환해서 연인의 실토를 알려주었다. 니콜라이 게Nikolai Ge가 그린 19세기 그림을 통해 그 장면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지금도 크레믈린에 남아 있는 부츠를 신은 차르는 검백색 타일마루 위에 놓인 탁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한쪽 눈썹이 올라가 있다. 그는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쓰라고 했다. 그 앞에 서 있는 알렉세이는 크고 마른 얼굴이었고 아버지처럼 검은 색 복장이었다. 그는 두렵고 화난 얼굴로 마루를 쳐다 봤으며 탁자 위에 손을 올려 의지했다. 결정의 순간이었다.


 

그는 점차 조여오는 압박을 피해보려고 애를 썼다. 황제에게 아버지에 대한 편지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보내지 않았으며 의회와 대주교에게도 편지를 썼지만 합스부르크 관료가 강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표트르는 예프로시냐를 불러 들였고 그녀는 연인 앞에서 혐의를 다시 인정했다. 마지막 의지를 잃은 알렉세이는 말을 더듬었다.


(표트르는 예프로시냐를 석방하고 아들의 재산 중 일부를 주었고, 그녀는 상페테르부르크에서 30년 동안 살았습니다. 심지어 근위대 장교와 결혼도 했습니다.)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인정했다. 아버지에 대해 악담했지만 술김에 그런 것이라고 변명했다. 왕위계승과 귀국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아버지의 자연사 후를 의미했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전하께서 간질을 앓았다고 하기에 죽음이 가까워진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나이든 사람이 간질에 걸리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기에 전하가 2년 이상 못사실 줄 알았습니다. 승하 후에 폴란드를 거쳐 우크라이나로 가서 추대를 받을 것으로 믿었고 모스크바에서는 마리아와 대주교가 저를 추대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평민이 저를 사랑한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가 소환하지 않는다면 살아 계신 동안에는 절대로 귀국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표트르는 그 답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메클렌부르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을 때에 기뻐했다는 증언을 기억했다.

메클렌부르크 주둔군이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면 너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반란에 동조했을 것이다

알렉세이는 더듬거렸지만 솔직하게 대답했고 오히려 큰 역풍을 맞았다.

반란소식이 사실이었고 저를 원했다면 그들에게 합류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전음모도 꾸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저를 부르지 않는다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요청이 있다면 갔겠죠.

전하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저를 원하지 않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전하가 무사하신데도 저를 원했다면 합류했을 겁니다. 그들의 힘이 막강하니까요."

 

며칠 후, 더 충격적인 증거가 밝혀졌다. 표트르는 합스부르크 궁전에 조사를 요청했고 합스부르크 궁정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모든 대신이 보는 앞에 부대법관 쇤보른백작을 조사했고 황제나 쇤보른 모두 황태자에게 편지를 강요한 적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알렉세이 스스로 편지를 쓴 후에 쇤보른에게 러시아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그는 마음대로 편지를 발송하지 않고 빈에 남겨두었다. 다시 말해 황태자가 거짓말을 했고 이번에는 합스부르크 황실까지 끌어들였다.

 

표트르의 결정만 남았다. 알렉세이를 체포한 후에 표트르와 바울 요새에 수감했다. 614, 상페테르부르크 의원강당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알렉세이는 메클렌부르크 주둔군이 요청했다면 표트르의 생사와 상관없이 지도자로 나섰을 것이라고 실토했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그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외국의 도움이나 반란군의 무력으로 왕위에 오르려 했음을 알 수 있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말이오.”

표트르는 마지막에 알렉세이가 국가의 성직자와 행정부 대표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이자 군주에게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고 비난했다.

 

성직자 법원은 직설적인 응답을 피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성직자 법원에 맞지 않는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표트르가 보다 구체적인 답변을 달라고 압박했고 차르가 아들을 처벌하기 원한다면 구약성서에 따라 그래도 된다고 대답했다.

반대로 차르가 관용을 베풀겠다고 생각하면 신의 가르침에도 돌아온 탕자Prodigal Son와 같이 많은 예가 있다고 대답했다.

표트르는 여전히 애매한 판결에 불만을 갖고 행정부대표 127명의 법원에 기대했다. 616, 표트르는 다른 반역자를 심판할 때와 같이 필요하다면 고문을 해도 좋다는 권한을 법원에 위임했다.

 

619, 알렉세이는 25대의 매듭태형을 받았지만 새로운 자백은 없었다. 24일에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15대를 맞은 그의 몸은 살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고 고해신부에게 말한 내용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원했소!”

비참한 심정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는 러시아 왕좌를 찬탈하기 위해 외국군대라도 빌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 없었다. 그 날 저녁, 법원은 토의도 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사형선고를 받았다.

판결문은 표트르의 손에 넘겨졌고 그의 승인과 서명이 마지막으로 필요했다.

 

624일 목요일 이른 아침, 황태자가 견딜 수 없는 울화와 죽음의 공포로 뇌졸증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오가 되자 황태자의 생명이 위독하는 보고가 들어와서 아버지를 뵙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아버지를 본 황태자는 울음을 터트리며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를 말했다. 차르가 내린 저주를 취소하고 중죄를 용서하고 아버지의 축복과 영혼을 위한 기도를 내려달라고 간청했다. 양쪽 모두 눈물과 후회를 머금고 이별했다.

 

5시에 네번째 전령인 근위대 소령이 황태자가 다시 한 번 차르를 뵙기를 청한다고 전했다. 차르는 아들의 요청을 거부했는데, 측근은 죄책감으로 죽어가는 아들의 간청을 외면하지 말라며 설득했다. 차르가 요새로 가기 위해 썰매마차에 오르는 순간에 다시 전령이 와서 알렉세이의 죽음을 알렸다.  

 

알렉세이의 죽음에 대해 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처음에는 뇌졸증으로 죽었다고 하다가 칼이나 도끼로 머리가 잘렸다고 본국에 보고하기도 했다. 몇 년 후에는 표트르가 직접 머리를 잘랐다는 소리도 있었다. 나르바 출신의 한 여성을 요새로 불러들여 머리를 몸에 꿰맨 후에 매장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네덜란드인은 침으로 정맥을 찢어서 출혈로 죽었다고 보고했는데 나중에는 4명의 근위대 장교가 베개로 질식시켰다는 소문이 힘을 얻었다.

 

멘시콥의 일기는 그날은 화창 했고 산들바람이 불었다. 황태자 알렉세이 페르토비치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했다.

어떤 기록에도 알렉세이의 죽음원인을 알 수 있는 참수, 출혈, 질식이나 뇌졸증에 대해 언급하지않았다. 가장 간단한 설명이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아무리 건강한 남성이라도 매듭채찍 40대를 견디지 못했다. 알렉세이는 건장하지도 않았고 빈약한 등을 40대나 때리면 충격과 상처때문에 죽기 충분했다.

 

알렉세이 사망원인과 상관없이 그 당시 사람들은 차르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알렉세이가 죽어서 표트르의 문제가 가장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황태자의 죽음과 함께 반란과 음모의 모든 근원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했던 불길한 사건을 해소시켰고 적시적소에 대중의 진정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고 차르의 결정을 칭송하기도 어렵습니다.”

 

표트르는 비난을 피하지 않았다. 신이 알렉세이의 목숨을 가져갔다고 말하면서도 아들을 재판에 세우고 사형언도를 받게 한 것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판결문에 서명하지 않았어도 언도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했다. 거짓 슬픔으로 가장하지도 않았다.

황태자가 죽은 다음 날은 폴타바 승전일이었는데 행사를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았다. 표트르는 승리 찬송가를 불렀고 저녁에는 연회에도 참석했다. 2일 후인 29일에는 자신이 설계한 49문 전함 레스나야를 해군성에서 진수시켰다. 그는 모든 관료와 함께 진수식에 참석했고 즐거운 행사했다고 말했다.

 

알렉세이가 저주받은 범죄자로 죽었는데도 신분에 맞는 애도미사가 진행되었다. 표트르도 이제 더 이상 위협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태자에 맞게 대우하려고 했다. 알렉세이가 죽은 다음날 아침, 시신을 감옥에서 꺼내 총독저택으로 옮겨 관에 안치하고 630, 장례식과 매장이 거행되었다. 표트르의 지시에 따라 남성은 상복을 입지 않았지만 일부 여성은 상복을 입었다. 외교관은 아예 초대받지 못했다

신부는 오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는 다윗의 문구를 선택했고 참석자 일부는 표트르가 울었다고 주장했다.  

요새 성당의 아내 샤를로테 관 옆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