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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706

우크라이나 역사 - 코사크 수장국 (2부) 1595년, 동방정교 주교 2사람이 로마로 먼 길을 떠났고 교황에게 피렌체 공의회Council of Florence와 비슷한 조건으로 자신들을 가톨릭교회 안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키이우대교구를 로마에게 넘겼다. 1431년, 로마가톨릭이 7번째 공의회를 열고 오스만제국, 동방정교, 교황권위 등을 논의했습니다. 교황, 왕과 주교단은 합의에 만족했지만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Kostiantyn Ostrozky공과 같은 이해당사자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왕권에 대항하기 위해 동방정교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 로마로 가는 주교를 납치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었다, 그는 동방정교 귀족과 리투아니아 귀족의 지원을 받아 무장병을 이끌고 브레스트Brest회의로 갔고 왕의 대리인도 무.. 2022. 5. 29.
우크라이나 역사 - 코사크 수장국 (1부) 이제 현대 우크라이나와 직결된 역사배경이 나옵니다. 코사크는 카자크 기타 등등으로 부르는데 저는 코사크로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번 연재는 우크라이나 역사 그리고 우크라이나 학자의 자료를 정리하기 때문에 훨씬 굵직한 러시아 역사와 사건은 아주 가볍게 넘어갑니다. 러시아쪽에서도 코사크족이 정착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 때문에 코사크 = 우크라이나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크라이나어를 모르기 때문에 발음에 혼선을 있을 수 있습니다. 1385년, 리투아니아의 대공 조갈리아Jogalia는 폴란드여왕과 조약을 맺고 폴란드왕위에 오르는 대신에 가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였다. 1387년, 연합군은 헝가리군을 몰아내고 갈리키아를 폴란드에 합병했다.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Polish-Lithuanian Com.. 2022. 5. 28.
우크라이나 역사 - 몽골침입과 공국소멸 키이우에서 분화된 공국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의 공국은 몽골에 대항하고 로마교황과 협력하다가 완전히 소멸되었고, 러시아 지역의 공국이 지역패권을 잡는 계기가 됩니다. 아직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등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힌 상태라 우크라이나의 역사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이렇게 복잡한 배경이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몽골군과 타타르족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타타르족은 몽골 이외의 다른 유목민족도 모두 포함하는 이름입니다. 키이우 루스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어도 소멸시점은 확실했다. 1240년 12월 7일, 몽골이 키이우를 점령했다. 몽골의 침입으로 다시 평원 유목민의 시대가 부활했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던 키이우 루스는 사라지고 하자르.. 2022. 5. 25.
우크라이나역사 -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기원 키이우 이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복잡하게 얽힌 배경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학자마다 키이우 루스Kyivan Rus라는 개념을 민족이나 영토로 혼용하고 있는데 둘 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키이우 -> 키이우 루스 확장 -> 공국과 대공국 -> 몽골 킵차크 한국으로 이어지는데 몽골침입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군요. 972년, 스비아토슬라브가 죽자 후계자들은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리스를 노리지 않고 드네르프 부근에 교역중심지를 만들기로 했다. 아들 볼로디미르Volodymyr와 손자 야로슬라브Yaroslav는 50년 이상 키이우를 통치하며 분명한 국경, 정부체제, 사상 등을 갖춰 본격적인 중세영주국이 되었다. 볼로디미르는 형제들과의 권력암투 전에 스칸디나비아에서 5년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가 바이킹군대를 이끌고 귀국했다. 그는.. 2022.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