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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3) - 사천성과 순천왜교성 전투

by uesgi2003 2016. 5. 23.


두 막장 사이트를 중심으로 여혐남혐이 극으로 치닫고 있군요. 반면에 진리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해도 건너기 힘든 헬조선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더더욱 힘든 곳입니다. 




외국학자의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3) - 사천성과 순천왜교성 전투


1598812, 양호는 황실의 해임소환을 받아 한성을 떠났다. 주화파의 감사역인 병부주사 정응태의 고발이 주효했다. 선조는 홍제까지 나가 눈물을 흘리며 양호를 배웅했다. 그의 후임으로 천진지역의 해안방어와 명군 보급을 책임지던 만세덕이 임명되었지만 연말까지 조선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후의 전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일본의 오대로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공개하지 않았다. 히데요시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가 정무를 이끌어서 태합(히데요시의 직위)이 살아있는 것처럼 꾸몄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경우, 후계자구도가 안정될 때까지 군주의 죽음을 공개하지 않는 일은 여러 번 있었다.

(급사하지 않았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를 멸망시켰을, 다케다 신겐의 죽음도 가신과 영지의 동요를 막기 위해 한동안 알리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알리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원정군 철수를 유언으로 남겼는데 죽음이 먼저 알려지면 일부 다이묘가 고집을 부리고 철수하지 않거나 일시에 철수해서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925, 오대로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태합이 마침내 병환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고 종전을 협의할 두 명의 대리를 보낸다고 알렸다. 도쿠나가 도시마사와 미야기 도요모리가 종전안을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는 왕자 한 명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하면 쌀, , 호랑이 가죽 등을 얻어내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조선에게서 아무 것도 받아내지 못했다.

 

918, 히데요시가 죽은 바로 그 날에 조명연합군은 남쪽으로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 곳에 집중시키지 않고 3개 거점으로 넓게 진격했다.

마귀는 명군 24,000명과 조선군 5,500명의 총 29,500명으로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를 노렸고, 최근에 도착한 동일원은 총 29,100(명군 26,800명과 조선군 2,300)으로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유정은 권율과 함께 23,600(명군 13,600명과 조선군 10,000)으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기로 했다. 유정은 군량을 염려해 명군 절반을 그대로 한성에 둔 상태였다.



의도는 좋았습니다만 결과는 참담했던 사로병진 전략입니다. 

 

68,400명의 연합군이 공격에 나섰고 후방에는 30,000명이 예비군으로 남았다. 앞에서 설명했던 진린의 수군 5,000명도 조선수군 16,000명에 합류했고 등자룡이 뒤늦게 합류했다. 그도 진린과 같이 미얀마와의 전쟁에서 고발을 당해 1592년에 해임당한 후에 처음으로 참전하는 전쟁이었다.

조명연합군은 수륙 양면으로 10만 명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으로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성에서 주전파에게 불리한 증거를 모으는데 주력하던 정응태는 양호 수준이 아니라 형개를 목표삼아 아예 주전파의 실각까지 노렸다. 103, 정응태가 다시 한성에 도착했고 선조는 그를 무시하고 대신에 주전파의 감사역을 환대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도산성전투의 피해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겨우 2천 명이라는 숫자가 나오자, 정응태는 하급 지휘관을 대거 불러들여 매질까지 하면서 1만 명의 숫자를 찾아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이 왜군을 일부러 불러들였다는 억지를 부렸다. 이미 교역을 하고 있었고 아예 남해안에 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근거를 댔다. 더 나아가 압록강 너머의 옛 고구려 땅을 되찾으려 했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했다.

 

조선건국이후 사대교린(명나라를 섬기고 여진/왜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 정책을 줄곧 고수해온 조정은 정응태의 황당무계한 주장에 경악했다. 조선은 왜구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제한적인 교역을 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 사신을 주고 받은 것뿐이었다.

전란의 가장 큰 피해자는 조선이었다.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주요 도시는 잿더미로 변했고 논밭은 잡초로 뒤덮였다. 명제국으로 향하려는 왜군을 죽기 살기로 막았다. 정응태의 비난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작이었다.

 

1020, 선조는 정응태의 보고서를 입수하고는 이제부터 모든 정무를 세자에게 맡기며 신하에게 그렇게 알리라고 한 후에 은둔에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방에 틀어박혀 고통스러워했다.

조선 조정은 대혼란에 빠졌다. 명황실은 만력제가 오랜 동안 정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력이 붙었지만 조선에서는 왕권이 절대적이었다.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왕의 결정에 따랐다. 류성룡과 윤두수의 설득에도 움직이지 않다가 일주일 만인 27일에 정무에 다시 복귀했다.

명황실에서 주전파가 다시 힘을 얻고 형개가 적극적으로 정응태의 무고에 반박했다. 결국 정응태는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만력제는 선조에게 신임한다는 뜻을 밝혔다.

 

마귀는 29,500명의 연합병력을 이끌고 울산 도산성에 도착했지만 도산성은 이전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보완되어 있었다. 심지어 해자에 태화강 물을 끌어들인 데다가 가토군의 병력은 다시 1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마귀는 부근의 왜군 전초소를 청소하는 정도에 그치고 움직이지 못했다. 지난 전투에서 왜군의 필사적인 저항을 실감한 데다가 시간을 끌면 어차피 왜군은 후퇴할 판이었다.

 

마귀와 달리 동일원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진주성에 무혈입성한 후에 사천에 들어가 미처 달아나지 못한 왜군 500명을 공격해 8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사천성에는 63세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23세의 아들 다다츠네가 8천 명의 병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동일원은 농성하는 왜군을 상대해 본 적이 없었고 조명연합군 29,100명의 대군을 믿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일본에서도 손꼽는 시마즈 가문이었다. 연합군은 대포로 성벽을 두들기다가 화약항아리를 투석기(공성무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로 쏘아 성문을 부수려고 했다. 시마즈는 조총병을 대거 배치해 구멍이 난 성문으로 접근하는 연합군을 저격했다.

 

명군 진영의 화약항아리에 불이 번지면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연합군의 공격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시마즈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왜군은 성밖으로 몰려나와 공격대열을 무너트리고 달아나는 연합군을 마구 베어 넘겼다. 연합군의 시체는 진주까지 이어졌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나중에 무려 38,700명을 죽였다는 터무니없는 기록을 남겼는데 대단한 전과인 것은 분명했다.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마구 도망치다가 7~8천 명이 죽었고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왜군에게 넘겨주었다.

동일원은 백중지세였다고 애써 왜곡했고 군대가 휴식을 취하면 다시 공격하겠다고 했지만 조선은 믿지 않았다.



왜군의 반격에 붕괴하는 조명연합군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당시 일본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용장이었고 다른 다이묘의 지원제의를 거절하고 자신의 병력만으로 대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조명연합군의 다른 두 축도 무너트리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원균을 재조명하자는 사람들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군지휘관이라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적의 숫자와 상관없이 죽기살기로 싸워야지, 동북아 최강의 수군전력을 자침시키고 달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정은 조명연합군 23,600(권율의 조선군 10,000)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교성으로 향했다. 바닷물로 채워진 해자를 다리로 연결해 왜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왜교성은 광양만 끝에 섬처럼 성을 올렸기 때문에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공격측은 엄폐물이 일체 없었다.



유정은 왜교성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전진을 늦추다가 전주에서 온갖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심지어 조선군에게도 맹세서약을 하는 의식을 치뤘다.

고니시는 유정에게 협상하자는 제의를 했고 유정은 반강제로 동반했던 이덕형에게 고니시를 잡아오겠다고 말했다.

 

유정이 고니시를 만나기로 한 1019, 이순신의 조명수군과 수륙양동작전이 시작되었다. 유정은 부관에게 자신으로 위장시켜 고니시를 불러냈고 고니시가 성밖으로 나오면서 계략이 맞아 떨어지는 듯 했다. 하필이면 바로 그 때에 수군과 육군 중 한 곳에서 대포가 터졌고 고니시 일행은 바로 성안으로 도망쳤다.

이후 3일 동안 수군은 아침에 밀물이 들어오면 왜교성을 포격하다가 저녁 썰물에 후퇴했다. 무척 위험한 작전이었다. 조금만 실수하면 좌초되어 왜군의 손쉬운 사냥감이 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육군의 압박으로 왜군을 둘로 나눠 주기를 원했지만 유정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육군의 공성준비에만 신경을 썼고 결국 수군은 1021일에 완전히 물러나 유정의 공격을 기다리기로 했다.



명황실 화가가 종군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그림(정왜기공도권)으로 남겼습니다. 

 

유정은 30일이 되어서야 다양한 공성무기를 완성했고 진린과 유정은 31일 새벽에 수륙양동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수군은 오전 6시에 왜교성에 접근했다. 2일 전에 명전선 100여척이 합류했기 때문에 사기는 매우 높았다. 6시간 동안 포격을 가해 왜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수군의 피해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 중에는 이순신의 조카도 있었다.

유정의 공격을 좌절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공격부대는 고니시가 성 앞에 설치한 장애물을 넘다가 조총공격과 반격에 물러났고 유정이 세 번째 공격을 이끌었지만 조총세례를 뚫지 못했다. 공들여 만든 공성무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합동작전의 첫 날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명군의 공성무기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오히려 조총이 집중되어 안에서 꼼짝도 못했다는군요.



그림 일부를 복제해 확대한 전황입니다. 

 

유정의 재촉을 받은 수군은 저녁 썰물에 나섰다. 밤에는 왜군의 수송선이 왜교성 앞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 차례 수군의 공격을 받았던 고니시는 모든 배를 성 안쪽으로 들여 놓아 성과가 없었다.

물길이 바뀌는 것을 본 이순신은 급히 먼 바다로 수군을 이동시켰지만 진린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39척이 좌초되어 후퇴할 수 없게 되었다. 왜군은 수군의 상륙으로 오해하고 성밖으로 몰려나와 명수군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전선 일부를 보내 대포를 쏘아 왜군을 쫓아내고 명군 140명을 구출했다. 좌초된 전선은 모두 불타거나 노획되었고 그 중 2척은 오사카 고라이교 옆에 전시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육상공격은 끝난 지가 오래 전이었다. 유정은 사천성 참패를 들었기 때문에 패배가 두려웠다. 왜교성에 끌려 들어갔던 조선인이 성벽에 올라 모든 왜군이 반대편에 몰려 있으니까 지금 공격하면 성벽을 넘을 수 있다고 외쳤는데도 유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권율과 이덕형이 유정에게 달려가 내부에서 알려준 지점을 공격하자고 애원해도 거부했다.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었다.

왜교성전투는 112일에 수군 단독공격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전날 참담한 패배를 겪었던 진린은 멀리서 구경만 했고 육군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순신은 이틀 후에 유정이 진영을 부수고 후퇴한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군수품을 불태우지 않고 그대로 남기고 떠나서 왜군이 모두 챙기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다. 수군도 눈물을 삼키고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

 

마귀도 사천성참패를 듣고는 도산성 포위를 풀고 112일에 40km 떨어진 경주로 물러났다. 기병을 모두 여기에 불러 들인 후에 서쪽으로 좀 떨어진 신원에 사령부를 차렸다. 이후 6주를 머물면서 도산성의 왜군이 물러날 기색이 있는 지만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