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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5_1) - 조명일 3국의 여파

by uesgi2003 2016. 5. 27.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5_1) - 조명일 3국의 여파


왜군은 많은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돌아와서 일꾼으로 부리거나 노예시장에 팔았다. 조선인 장인과 금속활자 덕분에 일본의 원시적인 도자기와 출판산업은 크게 발전했다. 통째로 훔쳐간 수천 권의 서적은 일본 지식층의 보물이 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고를 만들어 보관했다.

왜군은 아예 석탑과 진귀한 모양의 나무까지 뽑아갔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도자기전쟁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반면에 7~8만 명을 잃고도 명제국 땅은 밟지도 못했기 때문에 용두사미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역사상 이렇게 큰 피해는 한국전쟁밖에 없었다. 전쟁기간 동안 수십만 명이 죽었고 그 여파(기아와 질병)로 죽거나 노예로 끌려간 사람까지 감안하면 2백만 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인구의 20%가 죽거나 납치되었다.

정유재란에서는 왜군이 곡창지대인 경사도와 전라도를 아예 초토화시켰다. 1601년 조사에 따르면, 1592년 당시 농경지 150~170만 결에서 겨우 30만 결만이 남았다. 농경지 80% 손실은 국민의 생존과 왕정의 과세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100년 후에도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다.

경복궁은 250년 후에 재건되었다.

 

(토지 면적과 수확량의 계량단위로 곡식단 한 줌이 1, 10파가 1, 10속이 1, 100부가 1결이었으며 1등급 토지의 경우에는 1결이 3,000, 6등급 토지의 경우에는 1결이 12,000평이었습니다.)

 

조선은 급격한 사회변화도 겪었다. 전쟁 중에 노비명부가 사라지면서 많은 노비가 평민으로, 반대로 생존하기 힘들었던 평민은 자발적인 노비로 신분교체를 했고 턱없이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양반신분을 매매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전과 함께 당파싸움이 다시 격화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지면서 조선은 다시 외세와 상관없는 길을 걸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제국을 정벌하지는 못했지만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재정이 취약했던 명제국은 빈혈상태까지 몰렸다. 1593~95년 첫 번째 파병에서는 은 1천만냥(368,550kg)을 지출했고 1597~98년 두 번째 파병에서도 은 1천만냥을 지출해서 모두 737,100kg을 지출했다. 2,600만냥을 지출했다는 계산도 있다.

앞선 명제국 편에서 설명했듯이 병적에 있는 상비군은 숫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국경에 배치한 병력까지 빼내야 했다. 특히 여진족을 통일해 만주라고 부른 누르하치가 이 시기에 세력을 크게 확장했고 명의 국경을 계속 압박했다.

대응할 병력을 모두 조선에 보낸 명은 누르하치에게 관직과 교역권을 주며 무마했다. 잠시 만족하는 듯 했던 누르하치는 1616년에 본격적으로 명제국을 무너트렸다.

 

그는 중국을 지배했던 몽골의 쿠빌라이 칸을 따라 후금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국경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명은 정유재란에서 물러났던 양호에게 9만 명의 토벌군 지휘를 맡겼다.

조선도 1만 명의 병력을 내놓았지만 김응서와 강홍립은 전투가 불리해지면 투항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16194월에 벌어진 대회전은 재앙이었다. 조선군은 명령에 따라 일부러 전진을 늦췄고 후금군은 기병을 모아 명군의 4로군(동서남북)을 차례로 격파하며 46,000명을 죽였다. 4로군 지휘관은 모두 전사했으며 양호도 9년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가 처형되었다.


 

조선의 광해는 명의 운명이 기울자 후금과의 실리외교를 결정했는데 지지기반인 북인의 횡포와 서인의 반발로 1623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인조는 명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반 후금 노선 향명배금 정책을 공표했다.

후금은 누르하치(천명제)1626년 영원성공격에서 부상당해 죽고 홍타이지(숭덕제)16272차 공격에서 참패하자 후방인 조선부터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 벌어졌고 인조는 결국 항복했다. 후금군은 철수하면서 한강변에 커다란 비석을 남겼다.

신은 이슬과 서리를 내리신다. 자애와 엄격함을 가지신다.”

 

1644년에 북경에서 밀려나 상하이 앞바다의 섬에서 이름만 유지하던 명은 1649년에 불교 대장경을 선물로 들고 나가사키를 방문해서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나가사키 관리는 대장경에만 관심을 가지고 막대한 은으로 구입하려고 했고 명사절은 값을 정할 수 없는 보물을 팔 수 없다며 돌아갔다. 대장경은 사찰로 반환되었고 명은 그렇게 사라졌다.

 

명에서 청으로의 권력이동은 중국역사상 가장 순조롭게 이뤄졌다. 명말기에는 북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공백상태라 후금이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은 명의 사회와 문화를 받아들였고 청복과 변발정도만 강요했다.

명을 그리워하는 중국인도 적지 않았고 조선에서는 1865년까지도 명제국의 은혜를 강조하는 학자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중국인은 청이 가져온 안정과 평화를 반겼다.


 

히데요시의 5살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기미(챠챠)와 함께 오사카성에 은둔했다.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5대로와 5봉행이 그를 보좌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일본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대로 중 한 명으로 유일한 걸림돌이었던 마에다 도시시에가 1599년에 죽자 오사카성에 들어가 본격적인 권력장악을 시작했다.

일본은 다이묘의 충성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봉건국가였기 때문에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는 다이묘가 늘어갔고 히데요시의 오른팔로 이에야스 못지않은 야심가였던 이시다 미츠나리도 우키타 히데이에와 모리 테루모토를 앞세워 반대세력을 모았다.

 

16001021, 크고 작은 교전 후에 동군(도쿠가와 진영)과 서군(이시다 진영)이 교토에서 약 100km 떨어진 세키가하라 계곡에서 일본의 패권을 놓고 대회전을 벌였다.

먼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서군 80,000명과 무모하게 계곡 안으로 들어간 동군 70,000명이 벌인 전투는 누가 봐도 동군이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그렇지만 동군은 도쿠가와군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반면에 서군은 총사령관 모리 테루모토부터 애매한 태도를 취했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군이 배반해 서군을 역습하면서 대반전이 일어났다.



세키가하라전투는 오래 전에 정리해두었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3

 

세키가하라전투 후에 서군으로 참전했던 87개 다이묘의 영지가 몰수되거나 축소되어 일본역사상 가장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포함한 서군 다이묘 대다수가 전사, 처형, 추방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톨릭 교리에 따라 자살하지 않고 처형되었는데 세 번을 내리쳐서 목을 잘랐다고 한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하치조지마라는 작은 섬으로 추방되어 90세에 죽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아들 조소카베 모리치카도 영지를 모두 잃었고 벽제관승리의 주역 다치바나 무네시게도 영지를 잃었다. 모리 테루모토는 1/3의 영지만 간신히 인정받았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매수해 동군의 일등공신이 된 구로다 나가마사는 후쿠오카성 부근을 새로 받아 영지를 4배로 늘렸고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모두 합병했다. 소 요시토시는 동군을 지지하고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영지를 그대로 유지했다.

 

히데요리는 물려받은 영지 중 1/365만 석으로 줄어들었지만 오사카성과 막대한 금은을 가지고 있어서 이에야스 다음으로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전투 직후에 히데요리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인데다가 시간은 어차피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구리영감이라는 별명답게 14년을 더 기다려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족시켰다.



도요토미 가문이 멸족하는 오사카성 전투도 매우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NHK 사극 사나다마루를 강추합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159


http://blog.daum.net/uesgi2003/160


http://blog.daum.net/uesgi2003/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