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정리하려고 했던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이제야 끝이 보이는군요. 원균을 재조명해야 한다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고 심지어 충무공의 동상 옆에 '충무공을 도운 인물'로 소개되는 일까지 벌어져서 결국 노량해전까지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군 지휘관은 이래야 하고 전투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과부적이어서 동북아 최강의 함대를 자침시키고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 원균은 노량해전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자침시키고 달아난 것입니다. 원균과 같은 사람이 최고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땅을 밟고 마음껏 유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외국학자의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4) - 노량해전
명제국은 이미 바닥난 국고를 털고 각지에서 무리하게 병력을 빼내 조선에 파병했다. 그 병력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도 사천과 순천에서 참패를 당했고 명황실은 기절초풍했다.
만력제는 3로군 지휘관이 전쟁의 기본규칙조차 지키지 않아 황실을 더럽혔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그 중에서는 전선을 통째로 비워 좌우군을 위험에 빠트린 중로군 동일원에게 책임을 물었다. 부관 3명 중 2명의 목이 잘렸고 다른 한 명은 처형집행을 간신히 모면했고 동일원도 한단계 강등당했다.
결정적인 위기를 대승으로 막아낸 다이묘에게 드디어 히데요시 사망소식과 철군결정 소식이 알려졌다. 아사노 나가마사와 이시다 미츠나리가 철군을 돕기 위해 나고야 사령부로 갔고 조선에서는 도쿠나가 도시마사와 미야기 도요모리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에 주둔한 모든 다이묘가 최대한 체면을 살리면서 철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강하게 반발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반색을 하며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가토군은 자유롭게 본토와 오가며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한 반면에 고니시군은 육로와 수로 모두 막혀 있었다.
마귀, 동일원과 유정은 왜군의 철군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종전협상에 놀라지 않았다. 이미 상당수의 병력이 본토로 되돌아가고 있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정의 계략에 적극적으로 호응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정보도 사실로 확인된 상태였다.
왜군의 철군은 이제 시기와 방법만 남았다. 사천과 순천전투를 보면 마구잡이로 달아날 리 없었다. 명군은 안전한 거리에서 왜군의 반응을 지켜 보기로 했다.
이렇게 한달 반 정도 두 진영 사이를 전령이 오가며 종전협상을 벌였다.
사방이 막힌 고니시는 우선 유정과 협상을 벌였고 육로는 매우 간단하게 풀렸다. 조선군은 유정의 결정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고 복수를 원했지만 조선군만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반면에 해로는 조선수군이 모든 면에서 압도했고 이순신은 진린의 결정과 상관없이 절대로 고니시를 그대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12월 5일, 이순신은 고니시가 성을 비우고 본토로 달아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진린과 함께 왜교성으로 나가 광양만을 봉쇄했다.
고니시는 10척을 내보내 수군의 의지를 확인한 후에 고민에 빠졌다.
고니시는 유정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 인질로 가두고 있던 두 사람의 손을 잘라 명군진영으로 보냈다. 유정은 두 사람의 밀약이 육군에만 적용되며 수군은 자신의 통제권 밖이라고 해명했다.
고니시는 다시 진린에게 접근했다. 부관이 11일, 12일, 13일 갈수록 더 많은 뇌물을 들고 진린을 찾아갔다. 진린은 13일에 고니시에거 넘어가 이순신에게도 평화적으로 전쟁을 끝내자고 설득했다.
“종전은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놈도 그대로 돌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고니시는 진린이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착각하고 이순신에게 직접 뇌물을 보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린은 명수군을 봉쇄망에서 빼내 남해도에 있는 왜군을 소탕하겠다는 핑계를 댔다. 이순신은 왜군이 이미 남해도를 비웠으며 거기에 남은 사람은 모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대로 봉쇄망에 남아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진린은 조선인이라도 이미 적과 내통했기 때문에 남해도로 가서 머리를 베어야 한다며 억지를 부렸다.
“황제께서 귀관에게 조선인의 목숨을 살리고 적을 섬멸하라고 하교하셨는데 거꾸로 조선인을 죽이려 하시오. 황제폐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오!”
“황제께서는 내게 긴 칼을 주셨소!”라며 유정은 칼을 쥐고 위협했다.
이순신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하루 더 봉쇄를 유지하기로 했다.
14일, 고니시는 마지막 전령을 진린에게 보내 철군계획을 부근 다이묘에게 알릴 수 있도록 배 한 척만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진린의 비호 아래 한 척이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그대로 있다가는 고니시와 시마즈 함대의 협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구원군이 합류하기 전에 선제공격하기로 했다.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진린은 죄책감을 느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일부러 구원군을 불러들인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봉쇄망이 풀렸다.
조명연합수군은 마지막으로 더운 식사를 한 후에 왜군이 다가올 노량으로 향했다.
이순신이 예상한 대로 12월 15일, 약 300척의 왜군전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병력이 대부분이었고 소 요시토시의 병력도 있었다. 왜군을 고니시군에 합류한 후에 일시에 먼바다로 밀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이순신의 판단이 더 빨랐다.
밤중에 노량 해협을 빠져나온 왜군은 날이 밝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합수군을 발견했다. 85척의 판옥선이었다. 명수군(6척의 정크선과 57척의 소형 갤리선)도 중간에 끼어 있었다. 이순신이 우익(2,600명의 명수군이 탑승)을, 진린이 중앙을, 등자룡이 좌익을 맡았다.
왜군의 전선은 대부분 수송선이어서 처음부터 크게 밀리기 시작했다.
중앙의 진린이 먼저 교전을 벌이다가 기함이 왜군에 포위당했다. 왜군을 적당히 보내주고 싶었던 진린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죽기살기로 싸우는 수 밖에 없었다. 조총세례를 받은 명군이 움츠러들면서 왜군의 장기인 등선육박전이 벌어졌다.
진린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향하는 칼을 막아내다가 부상당했고 부관 한 명이 달려들어 그를 구해냈다.
진린의 기함이 위기에 몰리자, 등자룡과 200명은 판옥선으로 옮겨 타 그를 도우려 했다. 뒤에 있던 다른 전선은 이 모습을 왜군의 등선으로 오해하고 화포를 쏘아 많은 피해를 입히고 판옥선을 손상시켰다. 왜군은 만신창이가 된 판옥선에 올라 등자룡과 나머지 병사를 모두 죽였다.
이순신의 함대는 우측에서 급히 다가와 적선의 갑판에 포격을 퍼 부으며 불덩어리로 만들었다. 조선수군이 판자에 불을 붙여 왜군에게 던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조선수군도 다른 어느 해전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
이순신의 기함은 왜군의 기함 중 하나로 추정되는 선박을 포함해 10척을 부쉈다고 한다. 이순신도 활을 쏘아 지휘관 중 한 명을 맞춰 쓰러트렸다. 기함이 부숴지자 진린을 둘러싸고 있던 왜군이 기함을 구하러 몰려갔다.
배에 불이 붙자 왜군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시마즈의 기함도 좌초되었다가 뒤집혀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기 직전에 간신히 구조되었다고 한다.
궁지에 몰린 왜군은 필사적인 저항으로 조총을 철의 장막처럼 펼치며 반격했다. 조선수군의 송희립은 투구에 총탄을 맞고 기절했다가 일어나서 머리를 천으로 감은 후에 다시 용감하게 싸웠다.
(송희립장군 삼형제는 모두 참전했는데 송희립장군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 기사를 꼭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64239 )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초계군수 이언량,흥향현감 고득장 등이 전사했고 그리고 이순신도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이순신은 단 한 척의 적선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던 다짐대로 달아가려는 왜군함대를 바짝 추격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북을 두들기며 격려했고 그 옆에는 큰 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이 함께 있었다.
갑자기 이순신이 가슴을 움켜쥐며 갑판에 주저 앉았다. 눈먼 탄 하나가 그의 왼쪽 겨드랑이 부근을 뚫고 심장까지 이른 것 같았다. 세 번째 부상이었는데 이번은 치명상이었다. 이순신은 이회와 이완에게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짧은 유언을 남기고 전사했다.
두 사람은 시신을 안으로 옮겨 숨긴 후에 계속 북을 두들기며 승전을 마무리 지었다.
가장 유명한 그림일텐데, 기록과는 많이 다릅니다.
진린은 그의 죽음을 듣고는 너무 놀라 주저 앉아서 가슴을 두들기며 흐느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 연기가 걷히자 대승이 확인되었다.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약 200척을 격파하고 수많은 왜군을 죽였다고 한다. 진린은 200척을 격파하고, 100척을 노획했으며 500개의 머리를 취했으며 익사한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기록했다.
고니시군은 노량해협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배에 올라 달아났고 유정은 왜교성에 무혈입성했다. 동일원도 시마즈군이 비운 사천성에 들어갔다. 고니시함대는 부산으로 향했고 시마즈함대가 그 뒤를 따랐다. 21일에 부산에 들어가 본토철수를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군수품에 불을 지르며 도산성을 비웠다. 곧바로 성에 들어올 마귀에게 ‘내가 물러가는 것이다. 너희를 나를 밀어내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편지를 남겼다. 그러니 순순히 종전협상에 임하라는 경고였다.
부산의 왜군은 연합군이 압박하기 전에 서둘러 본토로 떠났고, 1598년 12월 24일에 정유재란이 이렇게 끝났다.
후임 이시언과 진린이 남동쪽 해안을 순회하며 낙오한 적선이나 왜군을 처리하고 버려진 군수품을 챙겼다. 진린은 귀국해서 최고의 수훈을 인정받았고 1607년 6월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수군 편제인데 보다 자세한 내용은 http://www.yi-sunsin.com/02battle/03_01_02.jsp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수군에 대한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서인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류성룡은 영의정에서 물러나 징비록을 집필해서 후대에 경고와 교훈을 남겼고 1607년, 6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던 정응태는 1599년 초까지 조선에 머물면서 자신의 억지를 뒷받침할 증거를 모으려고 했지만 종전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3월 16일에 소환되어 무고한 혐의로 해임되었다. 조선에서는 그거 허리가 잘리는 처형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 훈장으로 여생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유정은 1599년 초에 귀국해 이등공신 인정을 받았고 쓰촨성 국경을 지키다가 1619년 후금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조선은 그가 폭약에 불을 질러 자폭했다고 기록했다.
도산성에서 참패해 해임되었던 양호는 1619년까지 복귀해 후금토벌에 나섰다가 샤르흐전투에서 다시 참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10년 가까이 구금되었다가 처형되었다.
1619년 후금과 벌인 샤르후전투에서 조명연합군 54,000명 가량이 전사하면서 명제국은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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