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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2) - 히데요시의 죽음

by uesgi2003 2016. 5. 20.


외국학자의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2) - 히데요시의 죽음


한성에 들어온 양호는 울산왜성(도산)전투의 패배를 바로 털어냈다.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어도 왜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고 왜군의 기세가 크게 꺾인데다가 명군이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오고 있어서 승전이 멀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린과 등자룡의 수군도 황해를 건너 합류할 예정이었다.

15982월 말이 되자, 양호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새로 합류한 병력으로 6월에 날씨가 좋아지고 군량을 구하기 쉬워지면 두 번째 공격을 퍼붓기로 했다. 병부상서 형개도 양호의 계획에 동의하고 황실로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 조선 왕실도 양호를 적극 지지했다.

 

그렇지만 북경의 분위기는 달랐다. 일련의 전투에서 계속 패전했기 때문에 사실파악이 필요했고 주화파(전쟁반대)에서 양호의 패전을 그냥 두지 않았다. 언제 양호의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양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병환을 핑계로 사직요청을 했다. 형개는 양호를 다시 한 번 옹호하며 만력제의 신임을 받아냈다. 상황파악을 위해 한성에 파악했던 감사역의 보고서가 그 이후에 도착했는데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도산성을 지켜낸 왜군은 기뻐할 수 없었다. 승전의 대가는 참혹했고 명군이 북쪽에 계속 집결하고 있기 때문에 막연히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33, 주요 다이묘는 일부 거점을 포기해서 전략요충지에 전념할 수 있게 해달라며 히데요시에게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히데요시는 일단 거부했지만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꾸었다. 정유재란은 조선을 징벌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교토에 코무덤을 만들고 조선의 장인을 대거 납치했을 정도로 이미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명에도 자신의 힘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더 이상 이 전쟁에서 얻을 것이 없었다. 조선남부는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져서 군량을 구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본토에서 실어나를 수도 없었다. 명의 반격을 가까스로 막아낸다고 해도 잘못하면 모양새를 더 구길 뿐이었다. 만약 패배라도 한다면 모든 고생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히데요시는 다이묘의 요청을 받아들여, 626일에 우키다 히데이에, 모리 히데모토, 하치스카 이에마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을 철수시켰다. 이제 조선에는 총 64,700명의 병력과 다이묘가 남았다.

 

울산(가토 기요마사, 1만 명),

서생포(구로다 나가마사, 5천 명),

부산(모리 요시나리, 5천 명),

김해와 창원(나베시마 나오시게, 12천 명),

거제도(야나가와 츠나노부, 1천 명),

고성(다치바나 무네토라, 7천 명),

사천(시마즈 요시히로, 1만 명),

남해도(소 요시타시, 1천 명),

순천(고니시 유키나가, 137백 명)

 

그동안 이순신도 조선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전설적인 대승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그 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순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금도로 본영을 옮기고 주변 지역에서 군량과 병사를 구했다.

군량과 병사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수군의 보호아래 고향으로 돌아온 배들은 기꺼이 군량을 내놓았고 명량해전의 명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문제는 전선이었다. 지금까지는 방어에 치중하느라 13척의 전선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공세에 나서려면 훨씬 많은 전선이 필요했다.

명량해전에 감동한 양호는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급히 전선건조 명령을 내렸고 비용도 조달했다. 15983월 말이 되자, 평안도 철산은 8, 황해도 장산곶은 40, 충청도는 건조시작, 전라도 변산은 13척을 개수하고 39척을 건조 중이었다. 한 두 달만 지나면 조선수군은 이전의 위용을 되찾을 수 있었다.

 

15984, 랴오둥반도에 반란이 일어나 양호가 계획한 두 번째 공세가 어려워졌다. 형개는 급히 한성에서 달려가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고 조선으로 이동하던 병력도 진로를 바꿨다. 도산성전투에 참전했던 병력은 미리 상주지역으로 내려가서 한성의 공세개시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명수군도 조선 서해안을 따라 집결하고 있었는데 주력 전선과 병력은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왜군의 본토공격을 대비하느라 남겨두었기 때문에 해전에는 적합하지 않은 선박이 대부분이었다.

진린은 구설수에 많이 오른 인물이었다. 군기문란 등으로 고발을 당한 적이 있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뇌물공여 혐의로 1년만에 해임되었다. 베트남 국경지역의 반란에 정규군을 투입하지 못하자, 진린은 자신의 돈으로 병사를 모아 반란을 진압했고 재물을 탐한다는 이전의 비난에서 벗어났다.




진린은 점차 이순신에게 감동해 진심으로 그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손자가 명제국 멸망 후에 조선에 들어와 광동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군요.

 

1598 5, 한강 동작에 진린이 도착했고 선조는 기쁜 마음으로 마중을 났다. 선조는 진린의 병사 3,400명과 조선군을 비교하며 애들 장난 같다고 한탄했는데 하필이면 서로의 무술을 뽐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진린은 조선군의 무술시범을 대놓고 비웃으며 모욕했다. 선조는 진린의 태도에 머리를 저었고 곧바로 명제독의 인성이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는 소문이 퍼졌다.

진린은 7월에 남쪽으로 향했는데 함대의 숫자가 무려 5백 척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대부분이 소형 갤리선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병력 5,000명이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진린은 이순신의 기함에 올라 함께 지휘했던 것을 보면 명수군 함대는 조선수군에 비해 열악했던 것이 분명하다.

 

4월에는 히데요시가 후시미성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왜군 주둔지에서 퍼진 소문이 한성으로 들어갔는데 조정은 단순한 소문으로 무시했고 양호도 믿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는 7월에 쓴 마지막 편지에서 이 편지는 여느 때의 편지 1만통보다 가치가 있다고 썼을 정도로 힘겨워 했다. 아내인 오네는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서 일황에게 남편의 회복을 빌어 달라고 요청했고 일황은 교토부근의 사찰과 신사에게 기도를 올리라고 명령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느끼고 아직 5살 밖에 안되는 아들 히데요리를 걱정했다. 1595, 1596년에 이어 1598817일에도 거대 다이묘를 불러 아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만들었다. 세 번이나 맹세를 강요했을 정도로 히데요시 정권은 취약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방대한 영지와 막강한 병력을 보유한 거대 다이묘(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통제할 장치가 없었다.



히데요시 사후 2년 만에 벌어진 동서내전 당시의 세력판도입니다. 히데요시 정권은 자체 영지보다는 가신과 다이묘의 충성이 기반이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가 압도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성에 파견했던 감사역이 돌아왔다. 그는 양호 수준이 아니라 주전파 모두를 겨냥해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도산전투에서 참패했고 양호는 달아났으며 심지어 자신을 매수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그대로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양호부터 해임시켜야 했다. 양호에게 귀국해 처벌을 기다리라는 전령을 보냈고 감사역을 다시 파견해 전투가 아닌 전쟁에 대해 조사하게 했다. 이번에는 주전파의 감사역도 함께 보냈고 명황실의 반목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선조는 주화파 감사역의 조사에 크게 반발하며 한성에서 대대적인 양호지지 시위를 벌이는 동시에 명황실에도 그런 의사를 전달했다.

 

명황실 안에서는 주화파의 공세가 힘을 점차 더했지만 명군의 집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랴오둥 반란을 진압한 병력은 6월에 조선으로 다시 향했다.

유정도 쓰촨성(미얀마 국경)과 국경 부족 2만 명을 이끌고 7월에 다시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 엄격한 규율과 청렴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단 한 번의 실수나 패전으로 해임이나 처벌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정의 태도는 매우 차가웠다.

유정은 광해와 고위 관료가 함께 출전할 것을 요구했다. 원래 왕이나 세자가 전선을 지휘해야 하는데 조선은 거꾸로 안전한 후방에만 있으며, 세자가 있어야 남부에서 군량을 구할 수 있다며 몹시 화를 냈다. 고위관료의 동반출전은 자주 있었기 때문에 지나친 요구는 아니었고 광해대신에 우의정 이덕형이 함께 가는 것으로 무마되었다.

 

817, 진린은 조선수군 본영인 고금도에서 이순신을 만났다. 이순신은 이미 진린의 거만한 인성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최대한 그를 잘 대우했다.

19, 100척의 왜선이 고금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거짓 보고였다. 며칠 후에 소수의 왜선이 군량을 구하다가 전멸했는데 현장에 있던 명수군은 역풍을 핑계대며 참전하지 않았고 조선수군이 전과를 챙겼다.

이순신과 술을 마시던 진린은 명수군의 한심스러운 태도에 대해 듣고는 잔을 바닥에 던지며 몹시 화를 냈다. 이순신은 명수군의 참전덕분에 가능한 전과라고 달래며 그가 황실에 보고할 수 있도록 머리 70개 중 40개를 양보했다. 진린의 부관은 나중에 자신의 몫으로 다시 5개를 달라고 요구했다.

 

159891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히데요리에 대한 오대로(고다이로)의 충성과 조선출정 병력철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오대로와 오봉행의 회의장면입니다. 우리에게는 간접적으로 한을 풀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만, 일본 역사상 최대의 간웅인 히데요시는 후계자 구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자신도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 가문을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 한 전력이 있는데도 후계자에게 가장 큰 위협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거대 다이묘인 상태로 남기고 죽습니다. 

더구나 조선원정에서 친히데요시 진영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도 부족해서 서로 원수가 되어 귀국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력은 그대로였으니 모반은 필연이었겠죠. 


그는 오봉행으로 행정체제를 만들고, 오대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섭정을 하기 원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256만 석

마에다 도시이에, 83만 석

우키타 히데이에57만 석

모리 데루모토, 120만 석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33만 석(이후 우에스기 가게가츠, 120만석으로 교체)


너구리 영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방적인 판도였습니다. 당시 계산으로 1만석당 최소 250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음만 먹으면 7만명이라는 대규모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절친인 마에다 도시이에를 따르는 다이묘가 많아 이에야스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역시 나이가 많아 6개월 만에 죽고 맙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오봉행 중심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이 1600년 10월 21일에 세키가하라에서 대회전을 벌입니다. 조선원정의 반목으로 히데요시의 절대충성파 다이묘가 대거 동군에 가담했고 심지어 오봉행조차도 동군에 가담하거나 서군을 돕지 않고 관망했습니다.

 

 


서군의 잇단 배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단으로 동군은 불가능해 보였던 전투에서 승리했고 히데요시 가문의 멸망을 기정사실화됩니다.  


NHK에서 한창 방영 중인 사나다 마루에 이 과정이 아주 잘 재현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