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IS가 소년을 동원해 쿠르드 포로를 처형하자 커뮤니티마다 비판이 들끓었습니다. 그만큼 보여주는 것에만, 보고 싶은 것에만 반응을 한다는 뜻이겠죠.
소년병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비극입니다. 병사로 키우기 쉽고 맹목적이기 때문에 아프리카 군벌의 주요수단으로 자리 잡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프리카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되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단의 남북분단 그리고 계속되는 내전의 비국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다음에는 소년병사에 대한 외국자료를 정리해야겠군요.
식민지 경영과 유전이 가져온 수단 내전 (1부)
2011년 7월 9일, 백나일White Nile 강변의 주바Juba에 수천 명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드럼을 두들기고 새국기를 흔들면서 독립기념일을 축하했다. 남수단 미대사 수잔 페이지Susan Page는 그들의 흥분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남수단은 아프리카 동부의 유전이 풍부한 지역으로 수십 년 동안 아랍인이 지배한 수단과 자치권 투쟁을 벌여왔다.
2015년 12월 10일, 이제 그만!The Enough Project 프로젝트의 설립이사인 존 프렌더가스트John Prendergast는 미의회에서 남수단이 폭력적인 부패정치Kleptocracy로 빠져들고 있어서 국제감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족간 폭력, 부패만연, 기아와 불안한 정세로 남수단은 국가기능을 잃었다. 그리고 그 뿌리는 먼 과거부터 깊게 자리잡고 있어서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할 수도 없다.
성서에 히브리어로 ‘검은’을 뜻하는 쿠시Kush가 나온다. 지금 수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지금도 그 지역을 검은 공백으로 지칭해도 될 정도다. 로마황제 네로가 1세기에 나일강 상류를 탐험하라고 파견한 군대는 수드Sudd라는 넓은 습지대를 만났다. 아랍어로 장벽의 뜻이었다.
군대는 악어와 하마떼, 모기와 폭염에 질려 발길을 돌렸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나일강 상류지역은 외부인의 침입이 없었다.
간혹 아랍노예상인이나 포르투갈 선교사가 방문하는 정도였다. 16세기가 되자 무슬림이 지중해부터 수드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이 지역을 빌라드 알 수단Bilad al-Sudan(흑인의 땅)으로 불렀다.
19세기 초, 오스만제국의 무하마드 알리 파샤Muhammad Ali Pasha가 북아프리카에 행정기관을 세우고 수드 너머의 지역과 교역을 시작했다. 아랍군이 1839년, 습지대를 통과해 현재의 주바까지 진출했다.
침략군은 마을을 습격하고 노예로 잡아 카르툼Khartoum에서 그리스와 북수단의 노예상과 거래를 했다. 수드 아래 지역의 최대부족인 딩카Dinka는 이 시절을 세상의 붕괴라고 부른다.
현재 카르툼은 수단의 수도, 주바는 남수단의 수도입니다.
1870년대, 영국이 이집트와 수단에 발을 들이밀고 이집트의 이스마일Ismail에게 노예교역을 중단하라고 압박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영국군 장군 조지 고든George Gordon도 노예교역을 중단시킬 수 없었고 1884년에 병력을 이끌고 되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무하마드 아흐마드Muhammad Ahmad가 자신을 선지자라고 주장하며 투르크-이집트-영국인을 몰아내고 수단을 이슬람권으로 통일하려고 했다. 남부부족도 처음에는 아흐마드를 환영했다가 또 다른 독재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남부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도와 금식시간이 너무 복잡했고 농사와 축사에 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흐마드군이 고든을 격파하고 그의 목을 자르자 경악했다.
아흐마드는 1898년까지 수단을 지배했다가 영국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났다. 영국은 오스만제국과 함께 수단을 분할통치하다가 1차대전 후에 이집트와 함께 수단을 경영했고 수단은 이슬람권의 북수단과 다종교의 남수단으로 분리되었다. 입국허용과 여권법The Permits and Passports Ordinance이 발효되면서 수단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영국은 기독교 선교사의 남수단 포교를 허용했었기 때문에 남수단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서구식 교육이 자리잡았다.
남부 부족은 서구의 기술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딩카족에게는 신이 위대한 동물 소와 비밀의 재능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딩카족은 소를 선택했고 신은 비밀의 재능을 서구에 선물했다고 믿는다. 법과 지리적인 장벽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낙후된 채로 살았지만 만족했다.
2차대전 후에 영국은 식민지를 포기했고 수단은 자치독립을 맞이했다. 북부의 무슬림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방해하고 있으며 영국이 일부러 남북으로 분리시켰다고 주장했다. 1953년 2월, 영국은 3년 후에 수단을 독립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딩카족에게는 소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자치독립은 큰 곤란을 겪었다.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였고 당시 1천만 명의 국민은 572개 부족과 114개 언어로 나뉘어져 있었다. 다수인 북부 유럽인이 정부를 장악했고 남부는 분열된 상태였다.
지금도 남부에서는 1/3인 딩카족과 1/6인 누에르Nuer족이 최대부족이다. 남부는 도로망이 발달되지 않아서 지금도 작은 마을로 분리되어 있다. 수도인 주바가 가장 큰 도시이며 40만 명 정도가 산다.
수단이 독립하기 이전부터, 남부는 북부가 모든 것을 장악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1955년 8월, 에콰토리아Equatoria주의 남부수단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아냐냐Anyanya(독사의 독)이라고 자칭하며 내전인 아냐냐 1차전을 일으켰다.
아냐냐는 정부 호송대, 경찰서와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고 1962년에는 와우Wau지역을 휩쓸었다.
이스라엘은 반란군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1971년에는 반란이 확전되었다. 아냐냐 반란군 1만 명이 에콰토리아, 나일상류Upper Nile, 바흐르 엘 가하잘Bahr el Ghazal 3개 주를 장악했다. 중화기까지 갖췄지만 지도력과 내부파벌 때문에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다.
2차대전과 이슬람확대의 베테랑인 이브라힘 압보우드Ibrahim Abboud장군은 1958년에 권력을 장악하고 반란군과 협상을 벌여 수단을 통일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어설픈 독재통치로 오히려 아냐냐를 자극시켰다.
그는 국회에 이슬람 안건만 상정하고 이슬람기준으로 국경일을 제정했다. 국회는 중과세를 부과하고도 남부에는 예산을 거의 투입하지 않았다. 남부 기독교 선교사를 추방하고 모스크를 지었다.
남부부족은 북부의 강요에 저항하며 지역에 내려온 북부인을 살해했고 정부는 반란군 거점으로 의심되는 도시와 마을을 공격했다.
1969년, 가파르 무하마드 누메이리Gaafar Muhammad Numeiry대령(사진 가장 오른쪽)이 북부에서 사회공산주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누메이리는 일당독재체제를 만들었지만 언젠가는 남부수단이 지역자치권을 가져야 한다고 인정했다.
1970년대 초반, 정부는 남부를 공격하는 동시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주자치권을 허용하고 게릴라의 정부군 입대를 허용하는 식으로 평화를 모색했다. 남부부족은 누메이리를 믿지 않았고 전투가 계속되자 정부군은 주바를 포격하고 에콰토리아 주의 모든 도로에 지뢰를 매설해서 고립시켰다.
반란군은 힘을 모아 모르타Morta, 지금의 라이냐Lainya 전략요충지를 점령했다. 정부군은 소련이 제공한 미그 17과 헬리콥터로 공습하고 지상군을 투입했다. 2개월 동안 양쪽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가며 모르타를 뺏고 빼앗기다가 반란군이 1970년 10월 20일에 영구점령했다.
1971년, 정부군 장교출신의 조세프 라구Joseph Lagu가 남부수단해방운동Southern Sudan Liberation Movement을 만들면서 반란군도 지도체계가 단일화되었다.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1971년 5월, 에티오피아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에서 평화협상이 열렸고 9개월 후에 북부와 남부 대표단이 10도 이하의 남부수단은 완전히 자치를 인정받는 대신에 북부와 연방연합국을 유지한다고 합의했다.
헌법도 제정되어 사회주의 수단공화국이 1973년 5월에 수립되었다. 정부는 이슬람을 국교로 공표했지만 기독교도 허용했다.
아냐냐 1차전은 50만 명을 죽였고 그 중에 4/5가 민간인이었다. 1972년 종전 후부터 1983년까지 평화를 유지했는데 1800년대 중반 이후 가장 긴 평화기간이었다.
1978년에 쉐브론Chevron 지질탐사단이 당시 북부 국경선, 지금은 남 수단 영토인 벤티우Bentiu 부근에서 대량의 유전을 발견했다. 향후 몇 년 동안 더 많은 유전이 발견되어 총 2십억 배럴에 이르렀지만 실제로는 극히 일부만 채굴이 가능했다.
유전은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수단정부는 국경선을 다시 그려 유전을 남부 밖에 있게 만들었다. 쉐브론과 수단정부는 기업을 설립해 홍해까지 긴 송유관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남부 인사는 이사회에서 배제되었다.
송유관 건설은 1998년 4월부터 시작되어 일년 후에 완공되었다.
남부는 누메이리의 탐욕에 분노를 터트렸다. 북부 수단군 일부가 누메이리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에 항의하며 남부군에 합류했고 황당하게도 유전국에서 기름이 부족해지면서 폭동이 터졌다.
1983년, 누메이리는 남부의 군대를 북부에 주둔시키고 북부 군대는 남부에 주둔시켜 저항의 불씨를 없애려고 했는데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냐냐 1차전 후에 많은 반란군이 정부군에 입대했었는데 고향을 떠나 적대적인 지역으로 가라는 명령에 경악했다. 그리고 북부군이 자신의 마을에 주둔하는 것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부의 주요도시인 보르Bor에서 대대적인 명령불복종이 일어났다.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면서 사상자가 늘어났는데도 누메리이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군복을 벗고 이슬람식 복장으로 바꾼 후에 전국에 엄격한 이슬람규율을 강요하고 공개처형으로 협박했다. 기독교 사회는 종교자유를 부르짖으며 저항했고 1983년 여름의 정전사태 후에 카르툼의 학생이 시위를 벌였다. 의사 2,000명은 저임금에 항의하며 6개월 파업을 벌였다.
무하마드 아흐마드의 군대가 카르툼을 포위하자 영국군이 구원하러 가기 전에 벌인 아부 클레아전투입니다.
영상과 달리, 막대한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 구원군은 겨우 158명의 사상자로 전체병력 10%만 상실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지체된 구원군은 카르툼이 함락되고 2일 후에야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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