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경영과 유전이 가져온 수단 내전 (2부)
혼란이 계속되면서 존 가랑John Garang(사진 참조)이 수단인민해방군Sudanese People’s Liberation Army를 장악하고 반군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아이오와Iowa주의 농경제 박사학위를 가진 딩카족 인텔리로 개혁과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유연한 자세를 보이다가 점차 내전이 격화되어 아냐냐 2차전으로 확전되자 수단인민해방군에 가담했다. 수단인민해방군SPLA는 폭력을 지향하는 조직이었고 12살의 소년까지 대거 병사로 만들었다.
SPLA는 어린 아이들에게 ‘내 아버지라고 쏴죽일 것이다’라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세력이 거치면서 정당인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은 1984년 3월에 누메이리 정부의 해산을 요구했다.
5월, 리비아공군의 투폴레프-22가 북부 대도시인 옴두르만Omdurman의 정부방송국을 폭격했다. 5번이 죽었고 누메이리는 남부 수단의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긴급사태를 발령하고 북부군과 경찰관에게 가택수색, 우편검열, 체포할 수 있는 전권을 주었다.
남부 수단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SPLA가 관공서와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SPLA 병사는 쉐브론 근로자 3명을 납치하고 유전을 파괴해서 쉐브론은 조업을 중단했다. SPLA는 북부 농경지대로 물을 수송하는 수로공사도 중단시켰다.
북부군은 보복으로 남부마을을 포격하고 소떼를 약탈했다. 설상가상으로 전국에 가뭄이 겹치면서 남부와 서부의 피난민이 카르툼으로 몰려들었다.
북부군은 압도적인 화력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 1985년 3월, 조지 부시 부통령이 방문하자 휴전을 선포하고 서방세계에 가식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누메이리는 끝이 보였다. 1985년 초가 되자 내전은 절정에 달해 훨씬 많은 피난민이 북부로 몰려들었다. 전쟁, 기아, 무능력에 질린 북부 노동조합, 학생과 전문직이 군과 경찰 내부의 반 정부세력을 지지했다. 4월에는 북부 주요도시에서 대대적인 시위와 파업이 일어났다.
누메이리가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 수단군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국가긴급사태 발령을 완화시켰다. 극단적인 이슬람 법원을 폐쇄하고 정당을 허용했다. 군은 1986년 봄에 자유선거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지만 남부는 내전 때문에 제대로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선거로 연합정부가 설립되자, SPLA는 제대로 남부를 대표하지 못한다며 비난했다. SPLA가 말라칼Malakal의 정부수비대를 포격하고 정부는 룸베크Rumbek의 반란군을 공습하면서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SPLA는 나일강의 증기선을 침몰시키고 여객기와 군수송기를 격추시켰다. 남부 교외지역을 장악하고 정부군 지역으로 식량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와우에서는 북부군과 민병대가 딩카족 수백 명을 학살하고 남부 부족간의 내전을 조장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정부군은 남부지역을 대대적으로 공습했다. 기아와 폭격에 몰린 200만 명의 피난민이 고향을 떠났다. 피난길에 살아남은 청소년은 소년병이 되었고 소녀는 강간당하고 노예로 팔렸다.
수십만 명이 수백 km를 걸어 에티오피아와 케냐 난민수용소를 찾았다. 그 중에 3,700명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1991년 8월, SPLA는 두 파벌로 분열되었다. 누에르족의 리에크 마차르Riek Machar는 가랑의 독재와 딩카족에 반발해 독립했고 이 분열로 민간인 피해가 급증했다. 국제사면기구는 2,000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무장군이 마을을 습격해 UN와 미국이 제공한 긴급구호식량을 조직적으로 강탈했다. 먹고 살 길이 사라진 사람들은 다시 무장군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다.
존 가랑은 경제학자답게 ‘남부의 반란군 한계비용은 0에서 마이너스로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서 남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는 편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 10년 동안, 휴전협상이 조금씩 진척을 보였다. 부시 대통령은 기독교단체의 의견을 받아들여 수단의 이슬람법이 종교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했다. 2001년, 부시는 전상원의원을 특별공사로 수단에 보내 종전협상을 벌였다.
SPLA와 카르툼은 마차코스Machkos협의에 합의하고 수단전역의 전투를 중단하고 이슬람법은 북부에서만 시행하기로 했다.
2005년 1월, 양측은 포괄적인평화합의에 서명하고 아냐냐 2차전을 끝냈다. 가랑은 수단의 부대통령이 되었고 오마르 알 바시르Omar al-Bashir가 대통령이 되면서 6년간의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유전수입은 남과 북이 절반씩 가져가기로 했다.
SPLA는 유전수입을 받지 못했고 대부분의 돈은 엘리트 집단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2005년 7월, 가랑이 우간다에서 돌아오던 중에 헬리콥터가 추락하면서 의문사를 당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간신히 유지되던 균형이 깨졌다.
딩카족 살바 키이르Salva Kiir가 남부 정권을 잡았고 부패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상화되었다. 남부 엘리트는 공공연하게 공금을 유용했고 정부요직에 측근을 임용했고 국가예산을 사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05년 이후 국고에서 유용한 예산이 최소 40억 달러에 달했다.
임시정부 기한이 다 되자 2011년 1월, 99%의 유권자가 독립을 선택했고 알 바시르는 결과를 받아들였다. 키이르가 남수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누에르족의 마차르가 부통령이 되었다(사진 참조, 왼쪽이 키이르). 키이르와 다른 고위직 관료는 예산과 정부자리를 마구 유용하며 사욕을 채웠다.
석유생산이 계속되는 한은 엘리트집단의 영화는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남수단의 유전수입 전부는 모두 정부에 귀속되었는데 국가예산의 98%를 차지했다.
수단이 비용분쟁 때문에 2012~2013년 13개월 동안 남수단의 송유관을 폐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경제혼란 속에서, 지역군벌은 다시 반란의 이익을 깨닫았다. 국가를 뒤흔들 정도의 반란에 성공한다면 정부는 막대한 돈을 지불할 것이 분명했다. 2013년 12월, 다시 내전이 터졌다.
이번에도 민간인이 먼저 학살당했고 강간당했다. 기아도 다시 닥쳤다. UN은 남수단의 식량위기를 최악의 상황으로 분류했다.
2013년 3월, 마차르와 SPLM 지도자 두 사람은 2015년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키이르는 마차르가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비난했고 대통령 근위대의 딩카족과 누에르족의 충돌이 주바 전체로 번졌다.
키이르 충성파는 집마다 뒤지며 마차르 지지자를 찾고 다녔다. 무장군이 딩카말로 ‘이름을 말해’라고 윽박질렀고 딩카말로 대답하지 못하면 죽였는데 주바에서만 한 주 동안 5,000명이 죽었다.
폭력은 보복을 불렀다. 남부 전체에서 부족간 충돌이 벌어졌고 모두 유전을 노렸다. 나일 상류의 유전지대인 말라칼은 세번이나 주인이 바뀐 후에 SPLA에게 점령되었고 SPLA는 2014년 1월에 남수단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2015년 말까지 휴전에 8번이나 합의했다가 다시 전투를 벌였다. 수잔 페이지 대사는 USA 투데이와 가진 2014년 인터뷰에서, 젊은 층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수단에서 젊은 층이 가장 큰 구성원입니다. 딩카도, 누에르도, 바리도 아니고 젊은 세대가 가장 크죠. 남수단의 희망입니다.”
그렇지만 10년이 지나면 남수단의 유전도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내전이 계속되면 젊은 세대가 살아갈 자원이 남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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