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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피아가 뒤섞인 바쿠전투(1918) - 2부

by uesgi2003 2015. 9. 22.


정치와 사회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젊은 시절에는 사회고발 프로그램이 무척 신선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JTBC 뉴스조차도 피하게 됩니다.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패와 후진국 상황이 매일같이 보도되기 때문입니다. 


국감이 벌어지면서 너무나도 웃긴데 웃을 수 없는 일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공군은 2,000원이면 사는 SD 메모리카드를 26만원을 주고 구입했다고 하죠. 보안 프로그램도 함께 납품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일반 SD 카드일 뿐입니다. 


매년 이렇게 사라지는 국방비가 몇 천억인데도 생계형 비리라고 쉴드를 치고 북한군에 진다는 멍멍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입에서 떼놓지 않는 헬조선이라는 말에 저절로 동의하게 됩니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심했고 내년에는 훨씬 더 심해지겠죠.


그런데도 헬조선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구두의 왼쪽 오른쪽도 구분 못하고 마냥 좋아 죽을 판이고 십상시는 호가호위로 국민에게 고통을 하사(?)하고 있습니다. 


피아가 뒤섞인 바쿠전투(1918) - 2부


영국군은 중앙카스피아독재라고 자칭하는 바쿠 지역정부에게 압력을 넣어서 44명의 병사를 들여보냈고 바쿠에 남겨진 오스만군 일부가 벌인 무모한 공격을 좇아냈다.

2일 후, 키워스대령의 병력이 합류했는데 무척 한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방어선은 모두 단절된 상태였고 보급품 위치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식량도 모자랐고 바쿠 현지병력은 도적떼와 다를 바가 없었다.

 

던스터빌은 급히 현장에 있던 크루거, 아보, 크루스크호를 징발해서 중포를 장착하고 바쿠가 위험해지면 병력을 소개하기로 했다. 자신도 1개 대대를 이끌고 바쿠에 내려 방어선에 투입한 후에 바쿠정부에 병력과 물자를 더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영국군 1,000명 정도로는 바쿠를 방어할 수 없었다.



10일 후, 누리 파샤는 어떤 행동을 해도 독일군의 저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한 번 60,000명의 병력 중 선봉대에게 바쿠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영국군은 그 동안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바쿠 시내의 무기와 탄약을 징발하고 10,000명을 긁어모았다.

그렇지만 오스만군과 정규전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7,000명의 아르메니아 징집병은 훈련도 안되었고 3,000명의 러시아군은 언제라도 등을 돌리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바쿠일대의 타타르(몽골계)부족은 오스만군이 진입하면 총과 칼을 들고 영국군을 죽일 셈이었다.

 

바쿠는 카스피해 서쪽으로 돌출한 좁은 해안에 있다. 동쪽으로 이어지는 절벽지대의 철로가 북서쪽 유전을 통과한 후에 항구로 이어졌다. 동쪽의 절벽지대가 적의 동태를 한 눈에 지켜보고 도시를 지킬 수 있는 요충지였고 826일에 벌어진 오스만군의 분화구 공격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오스만군은1,000명이 기병과 포병의 지원을 받아 공격해왔고 노스 스태포드셔 대대는 4번이나 공격을 막아냈지만 기다렸던 아르메니아군이 나타나지 않자 80명의 병력을 잃은 후에 분화구를 내줄 수 밖에 없었다.


 

던스터빌이 증원군을 급파했지만 130명의 병력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고 패잔병과 함께 분화구 동쪽의 유전지대에 2차 방어선을 폈다. 오후에는 1개 중대가 더 합류했다. 분화구는 영국군 방어선의 핵심이었지만 오스만군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32km 방어선이 모두 뒤로 물러나야 했다.

오스만군은 분화구를 공격하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반도 북쪽의 놉카니Novkhany마을에서 전진 중이었다. 이 일대가 저지대라 방어군의 눈을 피할 수 있었고 갑자기 아르메니아 대대가 지키던 비나가디Binagadi마을 동쪽의 고지를 공격했다.

영국군이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아르메니아군은 달아난 상태였고 250명의 오스만 병력이 반대편에서 접근 중이었다. 루이스 기관총을 설치하고 오스만군의 공격을 두 차례 막아냈고 오스만군은 다시 놉카니로 후퇴했다.

 

던스터빌은 두 번째 방어선이 곡선 투성이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오스만군은 이제 분화구를 차지해 방어선을 마음대로 포격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아르메니아 징집군이 고지를 포기했다는 비보까지 들어왔다. 영국군은 사방으로 달려가며 오스만군을 막아냈지만 지역 민병은 시내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은 정치토론에만 몰두했다.

영국군만으로는 오스만군을 상대하지 못할테고 그렇다고 귀중한 유전을 적에게 넘겨줄 수도 없었다. 바쿠정부와의 협의 끝에 지역사령관 두쿠차옙Dukuchayev에게서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지만 중앙위원회는 유전을 폭파시키자는 제안은 거절했다.



바쿠시내에서 훈련 중인 아르메니아군과 방아선의 러시아군입니다. 

 

오스만군의 포격이 점차 심해졌다. 던스터빌의 사령부가 있던 호텔은 잿더미로 변했고 그가 사령부를 옮길 때마다 포격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오스만대령이 타타르 상인으로 가장해서 전투내내 포격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831, 무르살 파샤는 다시 비나가디 고지를 공격했고 영국군은 1개 중대를 보강했고 무장열차에 러시아군을 실어 오스만군이 분화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전 6, 오스만군 중화기가 비나가디 고지에 쏟아졌고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번에도 아르메니아 병력이 너무 늦게 증원되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후방 방어선으로 물러났지만 좌익이 무너지면서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유전으로 물러났고 다시 1개 중대가 더 보강되었지만 오스만군의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날이 저물자 전병력이 발라드자리Baladjari로 후퇴했다.

 

던스터빌은 부하들이 죽어 가는데도 수 백 명의 러시아군이 바쿠 거리만 오가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두쿠차옙에게 책임을 물었고 당황한 그는 던스터빌을 작전회의에 초대해서 무마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작전회의는 장황한 연설과 불가능한 계획만 난무했고 던스터빌은 화를 내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던스터빌은 그 동안 해군전력을 4척으로 늘려 바쿠항에 대기 시켜놓았었는데 중앙위원회에게 지역민병이 영국군을 돕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위협했다. 만약 러시아군이 정말로 싸운다면 영국군도 바쿠에 남겠다고 제안했다.

 

며칠 후, 오스만 제10 사단의 탈영병이 14일에 대대적인 공격이 있다는 정보를 전했다. 그리고 비체라콥에게서 500명과 기관총 10정이 도착해서 도시 방어에 귀중한 전력이 되주었다.

오스만군의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바쿠 전역을 방어할 수 밖에 없었고 일부 구역은 공격을 받는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할 판이었다. 기상상태도 좋지 않아서 비행기를 띄울 수 없었고 22km의 방어선 어디에 공격이 쏟아질지는 두고봐야 했다.


 

914일 동이 트기 전, 오스만군의 포격이 방어선 전체에 쏟아졌다. 8~10개 대대가 코자 하산Khoja Hasan 남쪽의 철로를 건너 비체라콥의 러시아군을 밀어내고 울프스 갭Wolf’s Gap을 뚫고 바쿠를 내려다 보는 절벽까지 장악했다.

39 여단이 달려갔지만 오스만군을 밀어내기에는 병력이 모자랐다. 맥케이와 포프대위는 폭격기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불태우고 소총을 들었다. 두쿠차옙도 반격을 명령했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오스만군은 계속 불어났고 포대가 도착하면 시내로 난입할 생각이었다.

던스터빌은 포탄이 시내로 떨어지고 방어선 곳곳이 무너지자 더 이상의 전투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해군에게 병력을 소개시킬 준비를 하라고 요청했다.


 

오후 8, 오스만군이 다시 압박을 하자 영국군은 도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만약 영국군이 떠난다는 것이 알려지면 바쿠주민은 진영을 바꿔 영국군을 공격하기 때문에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중앙위원회도 배치된 포를 해군쪽으로 돌릴 것이 뻔했다.

급조된 병원선 쿠르스크와 아보에 부상자부터 실은 후에 들키지 않고 항구를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200톤급 아르메니안에 장비와 탄약을 실었다. 영국군은 오후 10시에 크루거에 몸을 실었고 항구를 떠나기 직전에 러시아 병사에게 들켰다.

중앙위원회 위원 2명이 항의하자 던스터빌은 아르메니아군이 제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틸 방법이 없다고 대답하고는 출발을 명령했다.

 

크루거는 바다로 향하는 동안 바쿠시내에서는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러시아 경기선이 크루거를 발견했고 정박을 명령하다가 포문을 열었다. 다행히 거리가 멀어서 크루거는 아무 피해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속도가 느린 아르메니안은 크루거보다 뒤처졌고 오스만군의 포탄을 6발이나 맞았다. 그런데도 갑판에 있던 탄약이 터지지 않는 기적이 벌어졌다.

 

영국군은 바쿠전투에서 180명을 잃었고 오스만군은 2,000명을 잃었다. 오스만군은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에서 참패를 당했고 결국 19181030일에 휴전에 합의했다.

1117, 영국원정군이 다시 바쿠를 점령했고 오스만군의 철수를 감독했다. 그렇지만 런던정가는 바쿠상실의 책임을 던스터빌에게 물었다.

1차대전 종전 그리고 러시아 내정의 급변과 함께 남캅카스 상황도 무척 복잡해졌다. 결국 독일과 오스만군 나중에는 볼세비키군을 상대하느라 중앙아시아 구석까지 주둔했던 영국군은 이제 인도, 중동과 영국본토로 재배치되었다.

 

60년 동안 잊혀졌던 바쿠전투와 던스터빌의 분전은, 범카스피아 일대가 1980년대부터 국제분쟁과 강대국의 개입이 다시 벌어지면서 되살아나고 있다



1차대전 오스만제국의 코카서스 전역을 설명하다 보면 반드시 함께 설명해야 하는 비극,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 Genocide가 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혁명과 반혁명, 종교와 민족분쟁을 겪으면서 아르메니아인을 최대 150만 명(최소 80만 명)을 학살했던 비극입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세계 대부분이 유대인 대학살과 달리 잊고 있죠. 지도는 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 대학살 진행도입니다. 붉은 원은 학살규모를 나타내는데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스만제국이 1차 발칸전쟁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고 서쪽 영토를 모두 내주게 되자 수십 만 명의 터키계 주민이 대거 아르메니아계 거주지역으로 이주를 하면서 비극의 씨앗이 뿌려졌고 그렇지 않아도 아르메니아 독립운동을 벼르고 있던 참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다시 참패를 당하자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와 내통했다며 국민의 분노를 아르메니아로 돌리게 됩니다.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1800년대 말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인 민족청소는 1915년에 벌어졌습니다


영국정보부의 분석에 따르면 조금의 음식물도 없이 맨몸으로 시리아 땅으로 강제추방당하는 동안 무려 60만 명이 죽었다고 하며 유대인 수용소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르메니아 죽음의 행진 동안 벌어졌습니다. 물론 수십 만 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그런데도 터키정부는 여전히 아르메니아 대학살대신에 1915년 사건이라는 황당무계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아르메니아의 주장을 민간역사학자들이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어떤 나라와 무척 흡사하죠? 그러니 터키에 대해 너무 우호일변도의 시선을 보내지는 말도록 합시다. 


1차대전 당시 오스만군의 무장은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별다른 설명없이 사진만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