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에 관심을 가진 분이 있어서 다음 이야기부터는 당분간 30년 전쟁을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2부)
1943년 2월 28일, 히틀러는 상급대장Generalloberst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사진참조)을 기갑총감Inspekteur der Panzertruppen으로 임명했다. 그는 1941년 12월에 해임되었다가 동부전선의 상황이 악화되자 다시 요직에 기용되었다.
구데리안은 무장친위대와 공군 휘하의 기갑부대까지 감독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돌격포와 전차엽병 부문의 반대로 절반의 출발을 했고 결국에는 완전히 좌절하고 만다. 그는 1943년 3월 3일에 히틀러에게 긴 보고서를 제출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지만 실제로는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결국 동부전선의 전차사단의 상황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육군총사령부 휘하에 상당한 규모의 전략기갑예비대를 만들자는 좋은 제안을 한 반면에 전차사단의 규모를 400대의 중전차로 크기 키우자는 불가능한 제안도 했다. 상대적으로 상황이 좋았던 소련의 전차군단도 T-34 200대가 고작이었다. 구데리안은 전차가 중심이었던 개전초기의 개념에 집착했던 것이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 전체 기갑전력의 3/4를 배치했고 서부전선에는 극소수만 배치했다. 육군총사령부는 적군과 달리 전략예비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위기상황에 대처하지 못했다. 서부전선으로 돌려 재정비 중인 전력을 다시 불러들이거나 새 부대를 급조해야 했다.
1943년 말부터는 독일본토의 전차학교 교관까지 동원했다. 각 전차사단의 자체 훈련소 병력도 동원되었다.
1942년 말까지만 해도 서부전선은 바다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방어선 역할을 해주었고 연합군의 위협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는 후방 훈련지대 역할을 했고 동부전선에서 탈진한 부대를 여기로 돌려 6개월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장비를 재정비했다. 대부분의 장비가 본토나 폴란드 장비창에 있었기 때문에 병력은 휴가를 떠나거나 프랑스에서 포도주, 여성과 태양을 마음껏 즐겼다.
1942년 8월, 영연방군이 디에프Dieppe 기습을 감행했고 상당수의 처칠전차가 프랑스에 상륙했다.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연합군의 대륙상륙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11월에는 미영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서 횃불Torch 작전을 성공시켰고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귀중한 기갑전력을 빼내 대서양과 지중해 해안에 배치시켜야 했다.
1942년 12월, 르제프에서 제1 전차사단을 빼내 프랑스로 보냈다가 1943년 5월에 다시 그리스 해안으로 보냈다. 1943년 서부전선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히틀러는 전차예비대를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디에프 참사의 상징과도 같은 사진입니다. 프랑스에 배치된 독일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독일군의 동부전선병력을 대거 이동시켜 소련을 도우려고 했던 이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전에 반드시 필요했던 함포와 공중폭격은 지역주민의 피해를 우려해 취소되었고 독일군의 주요거점을 파악하지 않고 우편엽서로 디에프 일대를 파악하는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독일군의 방어거점은 처칠전차로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결과는 사진과 같았습니다.
결국 해변과 시내에는 영연방 병사의 시체가 쌓였고 캐나다군은 5,000명 중 3,367명이 사상당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노획한 처칠전차를 검토한 독일군은 무척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고 합니다.
1943년 7~8월 기간 동안 동부전선으로 보내야 할 보충병력과 전차를 모아 새 전차예비사단을 편성했다. 프랑스에는 155와 179 전차예비사단을 배치하고 덴마크에는 233 전차예비사단을 배치했다. 언제라도 연합군이 상륙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부대부터 편성해 배치하고 신병은 그 후에 훈련시켰다.
155사단만이 구형 3호와 4호전차 60대를 보유했을 뿐이고 다른 사단은 전투사단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동부전선에서 귀중하게 사용될 전력이 이렇게 전용되었다.
이밖에도 1942년부터 2개의 전차사단을 편성하기 시작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계속 지연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23보병사단과 202전차연대를 모아 26전차사단을 편성했지만 실제로는 1943년 중반이 되어서야 부대모습을 갖췄다. 그나마도 노르웨이의 수비병력을 긁어 모았고 폐기물에 가까운 프랑스전차(사진참조)까지 동원해서 겨우 여단전력 수준의 부대가 되었다. 25사단은 9월을 넘어서야 완편되었고 프랑스에 배치되었다.
히틀러는 14, 16과 24전차사단이 스탈린그라드에 갇혀 전멸하기 전인데도 본토에서 재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943년 봄까지 3개 사단을 재편성하느라 동부전선에서 필요한 귀중한 전력을 빨아들였다. 당연히 구데리안은 이 명령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러시아 역사학자는 대부분 미영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서 벌인 제2 전선을 폄하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전선을 동부전선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되지만, 실제로 북아프리카전선은 동부전선이 받아야 할 귀중한 전력을 크게 축냈다.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원수의 아프리카군단Deutsche Afrika Korps은 15와 21전차사단을 보유하고 있다가 1942년 11월에 이집트 엘 알라메인El Alamein전투에서 참패를 하고 리비아로 모두 후퇴한 상황이었다.
미영연합군이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했고 북아프리카전선은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롬멜은 정예군단을 본토로 옮겨 서부전선 방어에 투입하자고 주장했다. 광기에 집착한 히틀러는 오히려 새로 정비한 10전차사단과 501중전차대대를 튀니지에 투입해 롬멜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동부전선에서 더 급한 300대의 전차(타이거 31대)를 북아프리카에 보낸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만약 이 전력이 동부전선으로 향했다면 만슈타인이 1943년 2월에 하르코프Kharkov에서 벌인 대반격은 훨씬 대단한 전과를 보였을 것이다.
구데리안은 타이거라도 동부전선에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무시되었다. 결국 1943년 5월, 북아프리카로 보낸 보충전력을 포함해 독일군 전차사단 3개와 기갑척탄병사단 1개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귀중한 중장비 모두를 잃었다.
육군전차부대가 동부전선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동안 무장친위대 하인리히 히믈러는 막대한 지원을 받아내 무장친위대 3개 사단을 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했다. 그동안 무장친위대사단은 기계화보병부대로 약간의 돌격포만 가지고 있었다. 1942년, 뷔킹Wiking사단은 전차대대 1개만 가지고 코카서스에 주둔했다.
히믈러는 자신의 부대를 보조역할이 아니라 독립작전을 벌이는 최정예 기동타격전력으로 강화시키고 싶었다. 한 명의 병사, 한 대의 전차가 귀중했던 1942~43년 겨울동안,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 다스 라이히Das Reich, 토텐코프Totenkopf 3개 사단이 프랑스에서 기갑척탄병사단으로 개편되었고 각각 전차연대 2개를 새로 보급받았다.
당시 육군전차사단은 겨우 1개 대대도 안되는 전차로 버티는 중이었는데 히믈러는 공장에서 나오는 최신전차를 가져갔다. 신형 3호와 4호전차를 포함해 317대의 전차가 무장친위대사단으로 향했다. 심지어 귀한 타이거전차를 10대씩 나누어 주었다.
재현행사에 출연한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사단입니다.
이렇게 편성된 무장친위대 전차군단은 분명한 기동전력이 되었지만 반대로 보급을 못 받은 육군전차사단은 그대로 시들어갔고 분명한 전력손실이었다. 특히 인력유출은 더욱 심각했다. 1943년 당시의 육군전차부대 지휘관은 무장친위대 지휘관보다 훨씬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유능한 지휘관을 마구 전출시켰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강력한 반대를 표시했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히믈러에게 기갑척탄병사단을 3개 더 창설해도 좋다고 승인했다. 히믈러는 무장친위대 전차군 창설을 제안했고 이정도가 되자 육군전차사단은 명목만 유지하게 되었다.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도 공군Luftwaffe사단을 전차사단으로 재편성하려고 했다. 1942년 말, 괴링은 헤르만괴링사단의 연대급 전투단을 튀니지에 파견했다가 순식간에 전멸했고 사단은 이탈리아에서 재편성되었다.
괴링은 전차연대 2개의 새 사단을 편성했고 히믈러처럼 신형전차를 우선 보급받았다. 그렇지만 괴링은 타이거전차만큼은 못 받았고 대신에 돌격포대대를 받았다. 공군에는 전차부대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육군에서 장교를 전출시켰다. 이렇게 해서 무장친위대와 공군은 전차대대 8개, 총 420대의 전차를 새로 받았다.
그런데도 괴링은 더 많은 전차사단(사진과 그림참조)을 욕심냈고 무려 34,000명의 병력을 육군에게서 빼내 오자 구데리안은 몹시 화를 냈다. 그는 ‘상당수의 병력이 네덜란드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는 일이다’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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