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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2차 시크교도전쟁 (1849) - 1부

by uesgi2003 2015. 7. 14.


역사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유럽, 중국과 일본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인터넷이 전세계를 연결한 지가 오래되어서 책으로 출간되지 않는 많은 소수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접할 수 있다고 해도, 안타깝게 언어의 장벽이 너무나도 높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영어만큼은 독해가 자유로워서 최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찾고 있지만 그나마도 유럽과 연결된, 유럽이 중심인 자료 밖에 없습니다. 


오래간만에 인도 역사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은 강남스타일만 부르고 김치만 먹는다고 알고 있듯이 우리도 인도는 카레만 먹는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 이야기가 인도 역사에 비하면 태평양 바다의 물 한 컵 수준도 안되는 아주 작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이렇게라도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최대한 인도역사 편에서 설명하려다 보니 시크교도에게는 저항, 영국군에게는 반란이라는 상충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혼선이 있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1차 시크교도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http://blog.daum.net/uesgi2003/201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먼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차 시크교도전쟁


184811, 펀잡Punjab으로 향하는 휴 고프Hugh Gough장군의 군대는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영국군은 펀잡 반란군에게 영국시민을 절대로 해치면 안되며 물탄Multan 주도 영국의 통치를 받는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호프군은 24,000명의 병력, 코끼리가 끄는 곡사포, 3,000명의 기병과 경중 야전포 등 온갖 종류의 무기가 가득했고 고프가 유명한 흰색 전투복을 입고 선두에 섰다. 그렇지만 영국군은 초기의 기세와 달리 막대한 피해를 입을 운명이었다.

 

고프는 상대를 얕잡아보지 않았다. 1845~1846년에 있었던 1차 영-시크Anglo-Sikh전쟁에서 시크군(칼서Khalsa, 세례받은 시크교도인)은 의외로 현대식 유럽무기를 무장하고 훈련도 잘 받은 상태였다.

호전적인 시크교인은 고프의 잘 훈련된 6,400명의 유럽병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크교도는 내부의 분열과 배반 때문에 1차 전쟁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만약 칼서가 분열하지 않았다면 소브라온Sobraon에서 고프가 저지른 무모한 판단덕분에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운좋게 승리한 영국군은 라호레Lahore까지 진군한 후에 남부지방을 합병하고 펀잡의 나머지 지역도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시크교의 문장으로 문명게임에서 자주 봤을 겁니다. 시크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상당히 유연하며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사제나 수도승이 없고 모든 종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군요.


미국출장 길에 시크교도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터번을 쓰고 있지만 터번을 벗으면 상투를 머리 앞쪽에 틀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펀잡지방 독립운동으로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힌두교와 시크교의 분쟁으로 인도는 대혼란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시크교도는 복수의 기회만을 기다렸다. 1848418, 반스 애그뉴Vans Agnew와 윌리엄 앤더슨William Anderson이 물탄으로 부임하면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20, 물탄주민은 저항에 돌입해 두 사람을 죽이고 시크교도의 동참을 호소했다. 칼서는 1차 전쟁에서 배반을 당해 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칼서의 대대적인 저항과 시크군의 무장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후작으로 올라간 고프는 예전처럼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다. 이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최소한 2만 명 이상의 병력과 상당한 포병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데다가 그만한 병력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병력이 있다고 해도 바로 펀잡으로 진군해서 시크교도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반란은 국지적이었고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당분간은 친영국 시크군에게 맡기기로 했다.

영국은 시크왕국을 건설한 란지트 싱Ranjit Singh의 어린 아들 둘레프 싱Duleep Singh이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까지만 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영국의 말을 그대로 믿는 시크인은 아무도 없었고 미망인 마하라니 진드 카우르Maharani Jind Kaur가 영국령 인도로 이송되면서 시크교인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라호레 주둔 영국 수비군도 보강되었다.

 

618, 8,000명의 물탄주민이 허버트 에드워즈Herbert Edwardes가 지휘하는 5,000명의 파슈툰Pashtuns(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인)군과 충돌했다. 병력을 증원받은 에드워즈는 72일에 반란군에게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뒀다.

보고를 받은 고프는 크게 기뻐했다. 아직 병력이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펀잡으로 급하게 끌려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즈는 물탄을 점령할 정도의 전력이 아니었다. 알렉산더대왕이 부상을 입은 후에 모든 시민을 죽였던 일이 있는 물탄은 요새도시였다. 에드워즈는 외곽에서 더 많은 병력과 중포를 기다렸지만 86일에 하리푸트Hariput에서 추투르 싱Chuttur Singh이 다시 저항군을 일으켰다.

 

812, 레호레를 출발한 선봉대가 물탄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병력도 25일까지 모두 도착했지만 펀잡지역은 찜통이나 마찬가지여서 급한 행군은 큰 피해를 가져왔다32연대는 14명이 열사병에 걸려 죽었고 175명이 앓아 누웠다

5일 정도 지나자 도시 쪽으로 800미터 전진했고 두 번째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바로 그 직후에 세포이Sepoy병사가 반란군쪽으로 탈영했고 에드워즈는 봄베이Bombay군이 도착한 후에 다시 공성전을 펼치기로 했다.

 

지루한 공성전이 이어졌다. 3주 후에 반란군 지도자 라자 쉐르 싱Raja Sher Singh이 갑자기 첸납Chenab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영국군은 여전히 그 뒤를 추격하거나 물탄을 공격할 전력이 아니었다. 친영국 시크병사들은 계속 반란군에 합세했고 파슈툰과 벵갈 병사만이 믿을만 했다.

11 7, 결국 에드워즈는 물탄 포대 몇 곳을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1843년, 쉐르 싱이 축출되기 전에 라호레 요새에서 측근과 함께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쉐르 싱이 물탄을 버렸다는 소식이 퍼졌지만 영국이 새로 합병한 지역에서는 계속 저항이 일어났다. 휴 휠러Hugh Wheeler장군의 군대를 급히 파견해 란가르 나갈Rangar Nagal, 모라리Morari, 칼란왈라Kallanwala 요새를 점령했다. 캘커타의 영국총독부도 이쯤 되자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프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고프는 벵갈보병연대를 1,000명 그리고 기병연대를 500명으로 증편해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총독은 시크국이 전쟁을 원했기 때문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연설과 함께 10 10일에 펀잡으로 출발했다.

 

고프는 라호레의 친영국 시크교도를 대신해 반란군을 진압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친영국 시크교도를 진압해야 할 지 애매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펀잡군이 편성되었고 인도군의 벵갈 세포이 병사의 사기는 1차 전쟁 당시보다 높았다. 1차 전쟁에서는 칼사를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노골적이었던 반면에 2차 전쟁에서는 시크군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쉐르 싱은 북쪽에서 대규모 병력을 모은 후에 라호레를 향해 움직이다가 50km 정도 떨어진 구즈란왈라Gujranwala에 잠시 멈췄다. 진군로에 있던 이슬람 마을은 모조리 불탔다.

영국군은 기병 여단을 풀어 시크군의 진격을 막는 한편 라비Ravi강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쉐르 싱은 예상과 달리 영국군과 맞서지 않고 6,000명의 병력과 30문의 대포를 가지고 람나가르Ramnagar로 후퇴했다.



이번 이야기의 주 무대인 펀잡 지역입니다. 5개의 강이 가로 질러 흐르고 있습니다. 강과 주요 도시 이름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고프의 본대는 11 9일에 펀잡에 들어섰고 21일에는 쉐르 싱과의 거리를 13km까지 좁혔다. 시크군 주력은 첸납Chenab강을 이미 건너가 있었다. 강폭이 넓은 곳은 5km에 달해 기병작전이 불리했는데도 영국기병은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시크군을 공격하다가 무의미한 피해를 입었다.

시크군이 모두 강 건너로 이동하자 영국군은 람나가르에 주둔했다.  


난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나름대로 사기를 유지했다. 2 벵갈 유럽연대Bengal Europeans는 크리켓 경기를 여러 차례 가질 정도였다. 고프는 증원을 기다리지 않고 첸납을 건너 쉐르 싱을 치기로 했다.

넓고 발이 빠지는 강바닥을 곧바로 건넜다가는 시크군의 포격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 15km23km 떨어진 여울목이나 훨씬 멀리 떨어진 와지리바드Waziribad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벵갈 유럽연대는 벵갈군 소속이지만 대부분이 백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130일 밤에 가장 가까운 여울목으로 선봉대를 보냈지만 황당한 실수로 와지리바드로 가버렸다. 양쪽의 정찰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123, 와지리바드로 간 선봉대는 연락도 안 되는데다가 식량마저 떨어졌다.

가까스로 선봉대가 싱의 위치를 파악하자 싱은 곧바로 젤룸Jhelum강쪽으로 퇴각했다. 기병이 그 뒤를 추격했지만 싱은 이미 퇴각한 후였다. 선봉대는 그 자리에 멈춰서 본대를 기다렸다.

 

고프는 선봉대의 보고를 받은 후에 128일에 첸납강을 건넜고 증원을 기다리며 다시 한 달을 기다렸다. 젤룸에 틀어박힌 싱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에 라호레 주변에 있는 작은 반란군요새를 모두 청소했다. 다른 시크군이 라호레를 위협하지도 않고 쉐르 싱의 전력이 크게 보강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던지 기다릴 수 있었다.

 

물탄에서는 봄베이군이 합류해 공성작업이 매우 활발해졌다. 봄베이군의 원주민 장교는 젊은데다가 훈련을 잘 받았고 장비도 좋아서 벵갈 세포이 병사와 비교가 안되었다. 1227, 예비공격이 성공을 거뒀고 본격적인 공성전은 184912일에 시작하기로 했다.

1227, 젊은 영국군 장교 한 명은 물탄에서 거대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잘 조준한 구포 한 발이 시크군 탄약창고를 때렸고 대대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예정대로 진행된 공격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3,000명의 시크병사를 궁지에 몰아 넣었고 20일 후에는 최후의 병사까지 모두 항복했다. 저항의 시작이 되었던 2명의 영국장교 시체는 다시 장례를 치뤘다.

물탄을 점령한 영국군은 헤일라Heylah에 있는 고프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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