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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발렌슈타인의 재기용

by uesgi2003 2017. 3. 15.


역사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면 이런 저런 사람의 이름과 일화가 떠 오릅니다. 요즘 삼성동에 쫓겨 들어간 모 할매의 이야기도 역사에 남을텐데, 주제를 모르고 날뛰던 김모씨 두 사람의 일화도 남겠죠. 잊혀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연예계 노이즈 마케팅이 있는데 그렇게라도 이름과 일화를 남기려고 했다면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있겠죠.


관등성명 묻던 김모씨는 모르겠지만 이 김모씨는 분명히 역사에 이름을 남길겁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발렌슈타인의 재기용


스웨덴군은 거침없이 진군했다. 10월 2일, 구스타브는 에르푸르트Erfurt, 10일에는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 들어갔다. 8일 후에는 치열한 전투 끝에 마인Main을 점령했다. 독일북부 전역에서 복구령으로 자리를 차지했던 사제가 축출되었다. 구스타브는 그런 보복을 막지 않았다. 

12월 16일, 오펜하임Oppenheim을 공격해서 스페인 수비대를 전멸시켰다. 사제의 회랑Priest's Lane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구스타브는 멘츠Mentz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북부에서 고생을 했던 병사들은 편안한 남부의 생활을 즐기며 라인지역 포도주를 헬멧에 부어 마음껏 마셨다. 

구스타브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페르디난트처럼 확고한 계획도 없었고 발렌슈타인처럼 순식간에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의 기본정책은 항구적인 개신교 연맹Corpus Evangelicorum이었다. 그리고 부관과 독일 영주에게 행정을 맡길 생각이었다. 





리슐리외는 황제가 몰락하면 독일 영주가 알아서 그 이후를 맡을 줄 알았다.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돌출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루이는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 하오”라고 말했다. 

구스타브는 프랑스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교연맹과의 협상을 시작했지만 자신도 프랑스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3월 31일, 그는 뉘렘부르크에 입성했다. 구스타브는 해방자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그의 그림이 모든 집에 걸릴 정도였다. 그는 황제와 영주보다 훨씬 큰 존경을 받았다. 

구스타브는 냉정한 전략가였다. 그는 4월 5일,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의 황제군과 격전을 치루고 몰아낸 후에 부활절을 보냈다. 14일, 스웨덴군은 틸리가 있는 레흐Lech 협곡으로 향했다. 수비군에게 더 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었는데도 맹렬한 포격 후에 바로 강을 건넜다. 틸리는 지휘 중에 대포탄을 무릎 위에 맞고 쓰러졌다. 측근이 급히 인골슈타트Ingolstadt로 후송했지만 명장 틸리의 운명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은 레흐강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50일 후에 잉골슈타트에서 파상풍으로 죽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틸리가 부상을 당해 이탈하자 황제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와해되었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전멸을 면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틸리가 원하는 위치에서 벌어진 전투였지만 스웨덴군의 병력(약 40,000명)과 화력이 황제군(약 25,000명)을 압도했고 초기 정면돌파 후에 스웨덴 기병대가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참군인이었던 틸리는 당연히 빈 전사박물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틸리는 존경과 평판만을 바랬을 뿐이며 어떤 물질보상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대단한 지휘관이었고 명령에 복종하는 참군인이었다. 불가능한 명령을 받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그 명령을 수행하려고 했다. 

구스타브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맹세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아마 이때부터 프랑스없이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바바리아Bavaria로 들어갈 차례였다. 뮌헨Munich에서는 추방당한 팔츠선거후 프리드리히가 그의 옆에서 함께 걸었다. 

그렇지만 프리드리히는 예전의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구스타브는 전쟁이 계속 되는 동안에는 스웨덴 수비대를 하이델베르크에 주둔시키고 루터파와 칼뱅파 모두에게 동등한 종교자유를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독실한 칼뱅파였던 프리드리히는 이 조건을 거부하다가 병에 걸려 망명객 신세로 죽었다. 막시밀리안은 뮌헨 병기창에 상당한 총포를 숨기고 있었는데, 구스타브가 지역 농부에게 돈을 주고 모두 파내게 했다. 


구교연맹은 무기력했다. 브라이텐펠트에서 일찌감치 달아났던 요한 게오르크조차 보헤미아를 무인지경으로 누비고 다녔다. 그는 열렬한 환영 속에 프라하Prague에 입성했다. 

황제에게는 더 이상 힘이 없었고 외부에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끝장날 판이었다. 그는 스페인에게 도움을 바랬지만 스페인은 리슐리외 하나로도 벅찼고 겨우 약간의 군자금과 조언만 보내왔다. 스페인은 발렌슈타인 해임에 대해 반대했다. 발렌슈타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귀중한 전력이었다. 

브라이텐펠트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발렌슈타인의 재기용을 추천했고 궁정에서도 발렌슈타인의 오랜 지지자인 에겐베르크Eggenberg가 힘을 보탰다. 발렌슈타인도 이제는 구스타브와의 연락을 끊었다. 


작센군이 보헤미아에 진입하자 발렌슈타인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가 복구령을 취소하면 작센군이 다시 동맹이 될 수 있었다. 황제의 이름아래 독일을 통합하면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과 프랑스를 몰아낼 수 있다는 계획을 버리지 않았다. 

1631년 11월, 발렌슈타인은 이제 작센군 지휘관이 된, 예전의 부관 아르님을 만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12월, 구스타브가 라인주로 진군했고 에겐베르크는 발렌슈타인을 만나 지휘권을 제안했다. 

발렌슈타인은 독일 영지를 복구령 이전으로 되돌려야 하며 자신에게 모든 지휘권을 일임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자신이 황제의 이름을 빌어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는 조건이었다. 구스타브가 독일영주에게 당근과 채찍을 내밀듯이 자신도 스웨덴편에 서있는 영주를 처벌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신성로마제국이 아니라 발렌슈타인의 군대였고 초기 군자금은 스페인 지원을 받겠지만 그 후에는 자체조달해야 했다. 결국 보헤미아에서 병력을 모으고 무장시켜야 했다. 구스타브가 뮌헨이 아닌 빈을 점령했다면 이 병력을 차단했을 것이다. 

전쟁을 바라는 많은 사람이 멀리서 발렌슈타인의 기치로 몰려들었다. 따뜻한 이탈리아와 춥고 어두운 스코틀랜드부터 독일전국에서 몰려들었고 개신교와 구교 여부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발렌슈타인의 지휘권은 처음에 3개월 한정이었다가 4월에는 영구직으로 강화되었다. 그는 먼저 작센군부터 상대했다. 그는 계획대로 한 손에는 올리브 가지를 다른 손에는 검을 들었다. 5월 21일, 그의 전령이 복구령 철회를 조건으로 평화협상을 전달했고 22일에는 프라하의 작센군 수비대를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냈다. 


요한 게오르크에게 빨리 마음을 바꾸라는 신호였다. 작센군은 보헤미아 전역에서 밀려났고 요한 게오르크도 강요에 못 이겨서 스웨덴군에 합류했지만 구스타브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구스타브의 동의없이는 적과 휴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발렌슈타인의 조건을 구스타브에게 전달했다. 

구스타브는 상황에 맞춰 계획을 바꾸는 전략가였다. 그는 즉시 라인일대의 주교직 전체를 통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발렌슈타인과 게오르크 모두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는 향후의 해군공격을 막기 위해 포메라니아 일부와 개신교 주교직 일부만 요구했다. 

발렌슈타인은 구스타브와 생각이 달랐다. 그리고 요한 게오르크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했다.


요한 게오르크의 답변이 오기 전에 구스타브가 먼저 대응했다. 그는 작센군에 대한 신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병력을 뉘렘베르크로 이동시키고 자신이 직접 수비를 지휘했다. 그는 게오르크에게 영지를 포기할 것을 권하는 동시에 뉘렘베르크 시민에게는 영주를 버리고 자신을 따를 것을 제안했다. 

뉘렘베르크 시민은 모든 도시와 영주가 협의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구스타브는 작센선거후에게서 회담초대가 나가는데 만도 6개월은 걸릴 것이고 각 도시의 대표단이 모여도 갑론을박만 벌어질 것이라고 쓴 웃음을 지었다.  


발렌슈타인은 60,000명의 병력인 반면에 구스타브는 20,000명의 병력이 전부였지만 리슐리외가 스페인을 상대해 준 덕분에 배후에 분산되어 있던 스웨덴과 독일 병력이 뉘렘베르크로 속속 모여들었다. 구스타브는 대회전을 원했고 발렌슈타인은 압도적인 병력이 모일 때까지 전투를 피했다. 

그는 뉘렘베르크 북쪽의 퓌르트Fürth에 틀어박혀 20km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약탈했다. 뉘렘베르크에는 수많은 피난민이 들이닥쳤고 스웨덴군의 군량도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스웨덴군과 함께 있던 독일군은 궁지에 몰리면 버릇처럼 나오는 약탈을 일삼아 구스타브의 분노를 샀다.

“공, 백작, 귀족 여러분. 여러분은 조국을 망가트리며 불충과 나약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신께서 내 혐오감을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여러분에게 봉사하는 내 인생을, 여러분을 위해 쓰고 있는 막대한 금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독일인에게서 허름한 옷 한 벌도 빼앗지 않았습니다.”



구스타브는 소를 훔치는 하사를 붙잡고는 “신께서 너를 벌하기 보다는 내가 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며 헌병대로 넘겼다. 

9월 3일, 구스타브는 병력을 이끌고 발렌슈타인 진지 부근으로 접근했지만 방어선이 얼마나 단단했던지 도저히 돌파할 자신이 없었다. 반대로 발렌슈타인도 데사우전투처럼 공세로 나설 수 없었다. 

구스타브는 군량이 떨어져서 더 이상 뉘렘베르크에 머물 수 없었다. 독일상륙 후 처음으로 그는 전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드럼을 울리고 깃발을 흔들며 발렌슈타인의 진지 옆을 지나갔지만 발렌슈타인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발렌슈타인은 스웨덴 연합군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구스타브가 사라지자 북쪽으로 달려가 작센을 마구 약탈했다. 작센선거후가 견디지 못하고 연합군에서 이탈하면 구스타브는 발렌슈타인을 추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한 번 작센에 견고한 요새를 만들고 버티다가 엘베Elbe와 잘레Saale강을 장악하고 에르푸르트와 나움부르크에서 병력을 더 모을 생각이었다. 

발렌슈타인은 구스타브를 계속 옭아매다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끌어들여 방어전을 편다는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