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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발렌슈타인의 죽음과 프라하조약

by uesgi2003 2017. 3. 16.


괜히 손댔다고 후회했던, 미로와 같았던 30년 전쟁도 이제 끝이 보입니다. 일단 여기에서 일단락하고 잠시 다른 시대로 이동하겠습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발렌슈타인의 죽음과 프라하조약


스페인의 태도는 날로 강경해졌다. 스페인은 막대한 원조에 대한 보상을 원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알자스Alsace 진출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발렌슈타인은 스페인의 염려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스페인은 프랑스나 마찬가지로 반드시 독일에서 몰아내야 할 외세였다.

황제의 큰 아들인 헝가리왕 페르디난트가 스페인 펠리페 4세의 여동생 인판타Infata와 결혼했다. 그녀는 원래 영국 찰스 1세와 결혼하기로 혼담이 오가다가 해프닝으로 끝났었다. 그녀의 또 다른 오빠 카디날 인판테 페르디난도Cardinal-Infante Ferdinand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를 거쳐 브뤼셀로 가려고 했다.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도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스페인은 용납할 수 없는 태도였다.



추기경이자 군인이었던 카디날 인판테 페르디난도는 뇌르틀링겐전투에서도 한 실력보여주더니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해서도 훌륭한 지휘를 합니다. 

연이은 전투와 본국과의 갈등으로 병에 걸려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그 이후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급속하게 쇠퇴합니다. 그는 프랑스와 내통해 독립군주가 되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래서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양쪽에서 충분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발렌슈타인의 계획을 따라 개신교에게 막대한 양보를 할 수도 없었고 스페인의 계획을 따라 프랑스와 개신교를 상대로 계속 전쟁을 벌일 수도 없었다.

발렌슈타인은 이미 황제의 결정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의 계획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부터 완전히 장악해야 했다.

그는 고위 지휘관 옥타비아 피콜로미니 Ottavio Piccolomini(그림 참조), 마티아스 갈라스 Matthias Gallas, 요한 알드링겐Johann von Aldringen에게 무조건 충성맹세를 받아냈다. 이 당시만 해도 4사람 모두 일이 어디로 번질지를 모르고 있었고 황제에게서 유리한 조건만 받아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스페인 사절 오냐테Onate는 발렌슈타인을 의심했다. 발렌슈타인이 뭔지 모르지만 구교와 신성로마제국에게 나쁜 일을 꾸미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조심하지 않았다. 오냐테는 황제는 내 도움을 받기도 전에 죽어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 발렌슈타인이 보헤미아 망명객과 내통하고 보헤미아 왕관을 쓰려 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사실 발렌슈타인은 실제로 왕위에 오를 생각이 없었지만 그런 움직임을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유리할 때에 이용하려고 그런 움직임을 숨겼다.

오냐테는 당연히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황실에도 그 내용을 알렸다. 황제도 계속되는 보고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발렌슈타인과 스페인 사이에서 잠을 못 이루고 번민하던 황제는 스페인과의 동맹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발렌슈타인을 해임하고 갈라스를 후임으로 정해야 했다. 나중에 상황이 허락되면 아들인 헝가리왕에게 지휘권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이런 결정은 극비에 부쳐졌다. 주요 지휘관을 매수하기 전에 알려지면 반란으로 번질 것이 분명했다. 2월 초, 피콜로미니와 알드링겐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두 사람은 발렌슈타인보다는 헝가리왕 아래에서 더 큰 권한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변절했다.

두 사람은 발렌슈타인을 빈으로 호송해서 심판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냐테는 수고스럽게 발렌슈타인을 호송해서 재판하고 처형하는 것보다 그냥 암살하는 편이 훨씬 쉽다고 생각했다. 2 7, 알드링겐과 피콜로미니는 플젠Pilsen으로 가서 발렌슈타인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수비대의 태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일반 병사들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19, 발렌슈타인은 연대장들을 불러 모병하는데 든 돈을 지불하겠다고 말해 호응을 얻은 후에 황제를 공격하고 개종하겠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황제와 독일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평화협상을 위해 노력 중이지만 반대가 커서 군대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가 말했다.

한 달 전에도 황궁의 분위기 때문에 연대장의 맹세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2 20일에 다시 연대장이 자신에게 충성하겠다는 서명을 받았다.

 

발렌슈타인은 군대와 작센건거후의 지지로 황제를 평화협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기대했다. 2월 초부터 옥센세르나와 베른하르트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양쪽 군대가 모두 평화를 선택하면 페르디난트도 스페인을 포기하고 그 요구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스페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연대장들에게 스페인 금이 배급되었고 승진약속이 떠돌았다. 최고 지휘관 중 2명은 이미 황궁으로 넘어갔고 이들이 플젠에 가기 전에 발렌슈타인의 반역죄와 해임을 알리는 두 번째 선포가 있었다.

발렌슈타인도 21일에 병사들을 모아 연설을 했지만 빈틈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프라하Prague수비대가 그의 명령을 거부했고 시민도 황제편을 들었다.

 

그는 모든 연대장을 에게르Eger로 불러 자신의 모든 행동은 황제를 위한 것이라고 해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희망이었던 옥센세르나는 그가 황제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어떤 지지도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고 베른하르트도 황궁의 결정을 듣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발렌슈타인은 상황이 무척 위태로웠지만 24일에 에게르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동반했던 아일랜드 구교도 버틀러Butlet대령은 발렌슈타인이 스웨덴과 작센 이교도와 벌이는 협상에 불만이 많았고 피콜로미니에게서 생사여부를 가리지 말고 그를 끌고 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스코틀랜드 장교 레슬리Lesie와 고든Gordon도 합류했다. 개신교였던 그들은 발렌슈타인보다는 군인의 명예가 더 중요했다. 25일 오전 두 사람은 상관에게서 발렌슈타인의 명령만을 따르라는 지시를 받았고 황제에게 충성서약을 했는데 누가 내 서약을 깨트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귀관은 외국인인데 제국과 무슨 상관인가?”라는 언쟁이 오갔다.

 

그날 오후 버틀러, 레슬리와 고든이 모였다. 침묵을 지키던 레슬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역자를 죽입시다.” 그날 밤 발렌슈타인의 측근을 살해한 후에 발렌슈타인을 살려 둘 것인지를 논의했다. 베른하르트의 군대가 접근 중이었기 때문에 후환을 남기지 않기로 했다.

아일랜드 대위 데브러Devereux가 몇 명의 병사를 데리고 발렌슈타인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발렌슈타인은 이 더러운 배반자놈들이라고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양팔을 붙잡힌 후에 가슴에 칼을 맞았다. 그렇게 위대한 모험가는 세상을 떠났다.

발렌슈타인은 군인이었고 군사력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원대한 계획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종교자유는 공존할 수 없었고 황제와 국가체제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계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발렌슈타인을 제거한 황제는 모든 것을 해결한 것처럼 보였다. 아들 헝가리왕에게 군대를 맡겼고 카디날 인판테도 무사히 입국해 티롤을 지나 황제에게 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독일의 상황은 한쪽이 단합하고 해결되면 다른 한쪽은 다시 분열되고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작센선거후는 하일브론동맹과 거리를 두며 발렌슈타인의 평화협상을 황제가 승인해주기 바랬다. 베른하르트와 호른은 옥센세르나가 충분한 군자금을 보내지 않는다며 본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황제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7, 헝가리왕은 베른하르트가 1년 전에 점령했던 레겐스부르크를 탈환했다. 이어 도나우뵈르트를 점령하고 뇌르틀링겐Nördlingen을 포위했다. 9 2, 카디날 인판테가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했다.

베른하르트는 호른의 조언을 듣지 않고 포위망을 풀려는 무모한 전투를 벌였다. 9 6일 벌어진 전투에서 호른은 포로가 되었고 베른하르트는 전장에 10,000명의 시체와 6,000명의 포로를 남긴 채로 달아났다. 황제군은 겨우 1,200명만 잃었다.


 

두 최고사령관 모두 페르디난트()라는 이름의 사촌입니다. 부관은 두 사람이 모두 미숙하기 때문에 전면전을 피하고 싶었지만 황제 연합군의 병력이 훨씬 많았고 여전히 스페인 보병의 전력이 막강한 위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대로 대회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대로 스웨덴군 지휘관 호른은 군수품 부족과 병력열세를 이유로 전면전을 피하자고 조언했지만베른하르트는 뇌르틀링겐을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며 결전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포로에게서 얻은 정보를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스페인 원군을 7,000명으로 생각했는데 실제 병력은 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병도 13,000기로 자신보다 4,000기가 많았습니다.


 

베른하르트는 병력 절반을 데리고 황제연합군 본대를 못박아 두고 호른이 나머지 절반으로 숲을 통과해 황제연합군의 좌익에 있는 언덕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후에 포대를 올려 적의 좌익을 두들겨 쫓아내고 뇌르틀링겐을 구원할 생각이었습니다.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호른의 공격은 온갖 실수의 연발이었습니다. 지휘관들에게 작전을 제대로 설명했는데도 기병이 너무 빨리 공격에 나서 보병과 포대가 뒤처졌습니다. 언덕에 포진한 황제군이 공포에 질려 포대를 내주었지만 숲을 통과하는 동안 스웨덴군 2개 여단이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고 전투를 벌여 기병의 돌격효과는 사라졌습니다.




 

카디날 인판테는 스페인 보병과 기병을 급히 보내 언덕을 되찾았고 호른의 뒤늦은 언덕공격은 15번 모두 실패했습니다. 스페인 보병의 밀집대형 테르시오는 수비에서는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중앙에서 선전하던 베른하르트는 우익의 위기를 보고 지원군을 나누어 보냈고 이 순간에 황제군이 대거 공세로 나와 순식간에 전세가 기울었습니다. 호른은 포로가 되었고 그의 병력은 전멸했습니다. 나머지 생존자는 하일브론으로 달아났습니다.

 

브라이텐펠트전투로 북부에서 개신교 교구를 되찾았다면 뇌르틀링겐전투로 남부의 구교 교구를 되찾았다. 베른하르트의 프랑켄공작령은 단 한 번의 전투로 사라졌다. 1635년 봄이 되자 독일남부는 한 두 곳만 빼고는 모두 황제군이 장악했다. 카디날 인판테는 브뤼셀로 이동하면서 개신교 도시를 무너트렸다.

그렇지만 1622년 틸리가 대승을 거두면서 덴마크가 참전했고, 1626년 발렌슈타인이 대승을 거두자 스웨덴이 참전했다. 뇌르틀링겐전투 후에는 하일브론동맹에 참가한 프랑스가 힘의 공백을 메웠다.

 

요한 게오르크와 페르디난트 모두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요한 게오르크는 발렌슈타인과 협의했던 조건이 무산되어 당황스러웠고 페르디난트도 복구령을 철회하더라도 30년 전쟁 이전의 지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양쪽의 협상기준으로 1627년 당시의 상황을 선택했다. 이렇게 되면 개신교는 북부 교구 대부분을 가져갈 수 있지만 할베르슈타트Halberstadt는 구교 교구가 되었다. 그리고 팔츠는 영원히 개신교 진영에 넘겨주고 작센선거후에게 전쟁비용으로 주었던 루사티아Lusatia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슐레지아에서는 개신교의 안전을 보장하지만 루터파만 인정하기로 했다.

1635 5 30, 황제와 작센선거후 대리인은 프라하에서 협정에 서명했다. 많은 도시와 영주가 이 조약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끝내기에는 부족했다. 페르디난트와 개신교 신민은 여전히 단절되어 있었고 용서와 이해만으로는 뜻을 모아 외세를 몰아낼 수 없었다.

하일브론동맹은 항복해야 용서를 구할 수 있었고 칼뱅파였던 헤센카셀은 아예 고려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그리고 베른하르트처럼 여전히 기회를 노리는 군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