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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구스타브의 죽음, 뤼첸전투

by uesgi2003 2017. 3. 16.


구스타브의 죽음까지 일단락하고 다른 시대로 옮겨가려고 했는데, 발렌슈타인을 그대로 두고 맺고 끊기에는 미련이 남아서 아예 그의 죽음 이후 프라하조약까지 정리하고 한 동안 다른 시대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한국전쟁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구스타브의 죽음, 뤼첸전투


발렌슈타인은 뉘렘베르크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작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구스타브의 대응이 빨랐다. 에르푸르트를 구원한 후에 나움브르크에 입성했다. 그가 거리를 지나자 피난민이 몰려 들어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작센군은 토르가우Torgau에 주둔하면서 요충지를 방어했다. 발렌슈타인은 뤼첸Lutzen에 들어가 방어진지를 세웠다. 이제 11월이 되었고 발렌슈타인은 구스타브가 겨울 숙영지로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황제군에서는 파펜하임Pappenheim의 저돌적인 태도가 큰 인기를 모았고 거의 독립적인 위치가 보장되었다. 그는 라인 교구에 별동대 작전을 펼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발렌슈타인은 요청을 승인하며 도중에 할레Halle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구스타브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병력을 나눈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11월 16일 이른 아침, 구스타브는 뤼첸에 나타났다. 구스타브는 주도권을 쥐고 싶었지만 발렌슈타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해자와 참호 뒤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공격을 기다렸다. 

짙은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스웨덴군은 아침기도를 드리며 트럼펫을 불었다. 구스타브는 측근이 내미는 갑옷을 마다했다. 얼마 전에 당한 부상 때문에 갑옷이 편치 않았다. 그는 그대로 말에 올라 병사들 틈을 누비며 사기를 올렸다. 




11시에 안개가 걷혔고 태양빛이 비쳤다. 구스타브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후에 하늘을 쳐다보며 “예수님. 저희가 하나님을 대신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기도했다. 

구스타브가 “전진!”이라고 소리지르며 우익의 기병대 선두에 섰고 전 병력이 전진했다. 스웨덴군은 격전 끝에 황제군의 방어선 곳곳을 무너트렸다. 발렌슈타인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예비대를 불러들여 중앙을 침투한 스웨덴 보병을 밀어냈다. 

구스타브는 이 보고를 듣고 바로 구원에 나섰다. 안개가 다시 짙게 깔리며 구스타브는 근위대와 떨어져 나와 황제군 흉갑기병 연대 사이에 고립되었다.


양쪽의 병력에 대해서는 약간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탄 말이 흰말이었는지 갈색말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그림마다 다릅니다. 양쪽 모두 20,000~23,000명 정도였는데 파펜하임의 병력 5,000명이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스웨덴군의 전력이 훨씬 많았습니다. 격전이었기 때문에 양쪽 각각 5~6,000명의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습니다. 



스웨덴은 선두에서 전투를 이끄는 전사왕이 연달아 출현했는데 그 덕분에 북유럽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왕이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뛰어드는데 그 뒤를 따르지 않을 병사는 없겠죠. 전사왕 카를 12세는 무척 무모한 돌격을 손수 이끌었는데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결국에는 스웨덴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래는 직접 포를 조준하는 구스타브 왕입니다. 



총성이 울리며 말의 목을 뚫었다. 두번째 총성은 그의 왼쪽 팔을 뚫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도움을 요청하려는 순간에 세번째 총성이 울리며 등뒤를 뚫었다. 옆을 지키던 18세의 병사가 그를 말에 끌어 올리려 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흉갑기병이 달려와 누구인지 물었다. 구스타브는 “스웨덴의 왕이다”라고 중얼거렸고 흉갑기병은 머리에 총을 쏴 그의 고통을 끝냈다. 




일부 그림은 극적인 효과를 노려서 백마로 기록했는데 실제로는 아래와 같은 갈색마였다고 합니다. 스웨덴 역사박물관에 있다고 하는군요.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ard of Weimar가 지휘권을 넘겨 받았다. 파펜하임은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할레에서 돌아왔지만 기병만 데리고 왔다. 보병대는 아직 몇 시간 거리에 있었다. 

스웨덴군은 왕의 전사소식을 듣자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몇 시간 동안 양쪽 모두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스웨덴 연대 하나는 15%만이 온전할 정도였다. 파펜하임도 전사했다. 백산White Hill전투에서도 부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났는데 이번에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보병대가 도착했지만 전세를 뒤집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발렌슈타인은 결국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제 복구령은 사라졌고 개신교 행정관이 독일북부 교구를 장악하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사망상태가 되어 독일국민과 영주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기다려야 했다. 구스타브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그 구심점이 되었을 수 있겠지만 독일이 구스타브의 개신교 동맹에 순응했을 지는 의문이다. 

구스타브는 절반만 독일혈통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독일과 무관했다. 그는 언제나 스웨덴을 먼저 생각했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의심했다. 그는 스웨덴이 발트해를 장악할 수 있도록 포메라니아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독일 개신교 동맹은 그 다음이었다. 그가 계속 살아남았다고 해도 스웨덴을 중심으로 발트해 연안의 도시연합 정도가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뤼첸전투의 여파는 상당했다. 스웨덴에서는 어린 크리스티나Cristina가 왕좌를 물려 받았고 옥센세르나Oxenstjerna재상이 그대로 행정을 맡았지만 군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총사령관이 된 베른하르트는 발렌슈타인처럼 독립지위를 요구했다. 개인적으로는 작센가문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고 지휘관으로는 병사들의 급여와 뤼첸승전의 보상을 원했다.

옥센세르나는 새로 만들어진 독일남부의 프랑켄Franconia공작령을 그에게 하사할 수 밖에 없었다. 구스타브가 심각하게 생각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대부분이 구교인 지역을 개신교 영주가 차지했으니 또 다른 불씨가 되었다.

어쨌든 1633년 4월 23일, 슈바벤Swabia, 프랑켄, 라인 저지대와 고지대가 스웨덴과 함께 상호지원을 약속하는 하일브론Heilbronn동맹을 맺었다. 

작센선거후는 이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더라도 군사력으로 영토를 차지하는 일에는 항상 반대했다. 보헤미아에서 프리드리히가 그랬던 것에도, 메클렌부르크에서 발렌슈타인이 그랬던 것에도 반대했다. 베른하르트의 프랑켄 공작령에도 반대했고 하일브론동맹 뒤에 서 있는 프랑스가 보였기 때문이다. 



구스타브의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는 그림이고 아래는 박물관에 전시된 구스타브의 군복입니다. 




데카르트와 대화 중인 크리스티나입니다. 그녀는 6살에 즉위해서 29살에 사촌 카를 10세에게 자진해서 양위했는데 구교로 개종하기 위해 그랬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스웨덴은 이후에도 권력 공백기에 여왕이 즉위를 합니다. 



베른하르트공입니다. 스웨덴왕에게 충성했다가 프랑스왕에게 충성한, 30년 전쟁의 복잡한 관계에 휘말린 지휘관 중 한 명입니다. 


1631년, 프랑스는 왕실에 대한 지방귀족의 저항이 극에 달했지만 리슐리외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3월에는 루이의 동생인 오를레앙Orleans공 가스통Gaston이 해외로 도망쳤다. 7월에는 루이의 어머니 마리가 그 뒤를 따라 브뤼셀로 추방당했다. 

그들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 지방귀족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리슐리외는 여전히 강경하게 대처했고 기스Guise공은 이탈리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법무상keeper of the seals은 감옥에서 죽었고 프랑스 원수는 교수형당했다. 

구스타브의 원정이 절정에 달했던 1632년 여름, 프랑스 남부는 반란에 휩싸였다. 몽모레시Montmorenci공 앙리Henry 2세가 주도헸고 가스통도 입국해 개입했다. 앙리 2세는 용감한 기병지휘관이었지만 카스텔노다히Castelnaudary전투에서 왕실군 보병에게 참패하고 처형당했다. 가스통은 이번에도 용서를 구하고 목숨을 건졌다. 


리슐리외는 지방의 군소 토호세력을 무너트리고 왕실의 절대독재를 확립했다. 그리고 국민이 질식하지 않도록 상업과 공업을 부흥시키고 과학과 예술도 지원했다. 코르네유Corneille가 희곡을 썼고 데카르트Descartes가 과학의 시대를 열었다. 

프랑스의 절대왕권과 부흥은 독일에게 절대로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국가의 개념이 희박해서 구교와 개신교 모두 조국보다는 세계에 공헌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은 네덜란드에서 전쟁을 벌였고 영국 의용병은 유럽전역의 전투에 참전했다. 

17세기에 들어서 프랑스부터 종교와 무관하게 국가를 강조했고 리슐리외는 개신교나 독일에 상관없이 프랑스의 이익을 위한 대외정책을 수립했다. 그는 하일브론동맹에 참여하는 동시에 독일을 분열시킬 목적으로 바바리아Babaria선거후와의 동맹도 생각했다. 

리슐리외는 구스타브와 달리 독일의 통일은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라인강 왼쪽 강변을 노리고 있었다. 로렌Lorraine공은 스페인과 협력하고 가스통과 내통했다가 1632년 여름에 왕실군에게 항복했다. 이듬해에 다시 내통했다가 수도 낭시Nancy를 빼았겼다. 리슐리외는 독일 국경지대는 프랑스왕의 영지로 간주했다.


하일브론동맹이 체결되기 오래 전부터 작센선거후 요한 게오르크는 발렌슈타인과 평화협상을 거의 끝낸 상태였다. 복구령을 철회하고 발트해 연안도시 일부는 스웨덴에 양도하고 팔츠 일부는 프리드리히의 아들에게 돌려준다는 조건이었다. 

독일 개신교도와 황제 모두가 외세의 간섭을 몰아낼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베른하르트와 황실에서도 동의할 리가 없었고 발렌슈타인도 이제 적에게 넘어간 메클렌부르크대신에 팔츠를 영지로 차지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던 평화협상은 모든 사람을 실망시켰고 심지어 스페인도 발렌슈타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스페인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가도에 장애물을 두고 싶지 않았다. 


발렌슈타인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전권을 가진 지휘관이 되고 싶었고 독립영주가 되고 싶었다. 황제의 결정을 묻지 않고 스웨덴 본국정부와 협의를 시작했다. 옥센세르나는 발렌슈타인이 먼저 황제를 공격해서 믿을 수 있게 해달라는 답변을 보냈다. 

정말로 발렌슈타인이 모반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처지였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슐레지아Silesia를 공격해서 스웨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내고 작센 국경에 접근해 다시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작센선거후가 답변을 미루는 동안 베른하르트가 레겐스부르크Ratisbon로 들어가 자리잡았고 발렌슈타인은 황급히 남쪽으로 향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이제 한 번만 더 패전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판이었고 12월에 보헤미아로 퇴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