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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용산 전쟁기념관의 고대~근대 이야기 2편입니다.
사진 중심으로 간단한 설명만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지난 이야기의 재래식 무기에 이어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화약무기들입니다.
유럽이나 일본이 초기형 탄알 형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화약무기를 훨씬 빨리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사체는 여전히 화살 중심이었습니다.
개인용 화기인 세(細)총통입니다. 아주 가늘고 작은 총통이라는 뜻입니다.
사전(四箭)장총통입니다. 4발의 세총통 화살을 넣어 쏘거나 금속조각을 넣어 발사했다고 합니다. 개발시기는 1450년 부근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시기보다 150년이나 앞섰는데도 화약무기에 대한 경계심으로 개선이 늦어졌던 점이 많이 안타깝습니다.
무려 500년 전에 개발된 MLRS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긴 화살만 넣어 발사하는 신기전을 알고 있지만 이런 총통기화차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초중반의 고급 군사기술이 무기력하게 묻혀 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우리나라를 구해냈던 명품무기 대형화포들입니다.
일본군은 개인화기와 사용전술은 상당히 앞서 있었지만 대형화기는 의외로 상당히 원시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저런 무기가 무슨?'이라고 냉소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둔한 군선에게 수 백미터 밖에서 내려 꽂히는 장군전이나 완구(아래 사진 참조)는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입로입니다.
이승만이 국민을 속이고 혼자 도망쳤듯이 무능한 왕권은 어찌나 빨리 도망을 쳤던지 일본군이 쫓아가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었으며, 따르는 신하가 체 100명도 되질 못했다. 점심은 벽제관에서 먹었는데, 주상전하와 중전마마의 찬은 간신히 마련하였으나, 대신들은 물론이요. 비빈들조차 찬도 없이 맨밥을 먹어야만 했다. 가마를 드는 교자꾼들이 중간에 계속 도망하여 가마를 들 인원이 부족해 비빈들이 가마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했다."
라고 선조실록에 기록해 마치 자신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것처럼 묘사했지만 뒤에 남겨진 국민은 온갖 학살과 약탈을 당했습니다.
일본군이 상륙해 공격한 부산진성과 동래성 전투입니다.
일본군에 대해 정보가 없고 주력의 진격로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진성은 4시간, 동래성은 2시간 만에 함락당합니다.
장검 중 독특한 모양의 귀(鬼)도입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대첩입니다.
이 순신 장군의 활약은 일본군의 보급을 끊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군이 작심하고 덤벼든 몇 번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거의 일본군이 배를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일본군의 전력을 크게 줄이지는 못했지만 워낙 많은 함선을 부수고 보급로를 끊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본토에서 군수품과 병력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본토에 대기 중인 병력을 태울 전선까지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한산대첩은 전장을 역동적으로 전시해두었습니다. 일본 해군 쪽은 어두워서 어쩔 수 없이 지휘하는 이 순신장군의 인형만 찍었습니다.
또 다른 대첩인 진주성 전투입니다.
겨우 3,800명으로 20,000명의 일본군을 6일 동안이나 막아내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낸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악에 받쳐 40,000명을 다시 동원해 2차 진주성 전투를 벌였고 진주성에 피신해 있던 일반인까지 60,000명을 학살했습니다.
마지막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산성대첩입니다.
군사정권의 애국충정식 무식한 역사교육으로 투석전으로 알려지기도 한 전투였습니다. 실제로는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신기전이 대거 동원되고 수비군이 10,000명이나 되었던 제대로 된 전투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무능한 정부가 일저지르고 강인한 국민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반복됩니다.
일본군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의병 활동입니다.
전국시대 약탈이 일반적이었던 일본국민은 누가 점령하던 순종해서 목숨을 보존했기 때문에, 점령지의 국민이 정권의 지원없이 무력저항을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전시실 중간 복도에 걸린 깃발 중 하나로, 용을 수놓은 것으로 봐도 임금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군대를 사열할 때에 걸었던 깃발이라고 합니다.
장군의 지휘깃발로 주작(남), 백호(우익), 청룡(좌익) 깃발입니다.
로비 중간의 조선시대 판옥선과 거북선입니다.
의병전투인 정암진전투입니다.
총신이 3개인 삼연자포입니다.
임진왜란 전후에 중국을 통해 유럽에서 들여왔던 블랑기포입니다. 프랑크를 중국이 블랑기라고 불러서 그렇게 붙은 이름으로 캐트리지 교환 식으로 발사속도를 크게 높인 화포입니다.
이것말고도 대형화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이후에 유럽식 조총을 도입했습니다만, 40년 후에 청나라의 침공에 무너진 것을 보면 대량으로 사용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대형 화약추진 화살입니다.
요강처럼 보이지만 화약을 채워 군선이나 공격군에게 던져 터뜨리는 지그릇 폭탄입니다. 수류탄의 초기 형태로 전세계 공통적으로 사용했었습니다.
지연신관과 파편으로 무장한 첨단무기 비격진천뢰입니다.
경주성에서는 이 무기에 놀란 일본군이 도망을 쳐 큰 전투없이 탈환했던 일화가 유명합니다.
초대형 박격포인 완구입니다. 돌덩이를 넣어 쏘는 단거리 무기로 함선을 공격하는데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블랑기포의 큰 녀석들입니다. 임진왜란을 거친 후에 화포의 위력을 실감한 일본군도 블랑기포를 도입합니다.
우리나라의 축성기술의 결정체인 수원 화성입니다.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방패의 일부입니다.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일반 사병은 거의 천옷만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일본에서 발견된 그림에서는 조선 병사들도 중무장한 병사들이 많이 보입니다.
지휘관이 입던 두석린 갑옷입니다.
당시 발달된 화약무기를 감안하면 방어효과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갑옷 안에 입었던 흉갑입니다.
가죽으로 보강한 피(皮) 갑옷입니다.
면으로 수십 겹을 덧댄 면 갑옷입니다.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수은을 칠한 수은갑옷입니다.
무관의 등급을 설명한 복식입니다.
조선시대 말기부터 들여온 서양의 화포입니다.
청나라에서 들여온 홍의포입니다. 위의 서양식 대포에 그리 뒤질 것이 없어 보입니다만...
이 큰 덩치에 구경은 고작 이 정도입니다. 90mm 밖에 안되었다고 하니 살상력은 서양식 대포에 크게 뒤졌습니다.
근세에 들어서 우리나라에 무력과 무역으로 자주 등장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시공간입니다. 먼저 영국군입니다.
이미 국운이 기울어 제국주의에도 끼지 못한 스페인인데, 아무래도 구색 맞추기 전시로 보입니다.
프랑스와 미군입니다.
일본군과 청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서양식 군대를 육성하려고 했습니다만... 다 아시는 잃어버린 36년이 되고 맙니다.
왜병기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일본군의 훈련을 받은 신식군대로 보입니다.
이 정도도 전쟁기념관의 전시물을 20%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국치 36년을 포함해 현대까지, 그리고 전차와 비행기 등의 대형전시물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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