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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1부) - 로마의 유산

by uesgi2003 2019. 3. 14.


집을 짓는 일때문에 그리고 하이파이에 다시 빠져서 오랜 동안 역사이야기 정리를 멀리 했습니다. 

이제 착공이 눈앞이고 하이파이 카드금액에 놀라서 조용히 자료를 읽으며 역사이야기를 정리할 생각입니다.

중세해전 이야기는 상당히 긴 연재가 될 겁니다. 


중세해전 이야기 (1부) - 로마의 기원을 따라 


기원전 31년 9월 2일, 옥타비우스Octavius 함대가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안토니우스Antonius연합함대를 알티움Actium에서 격파한 후에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가 되었다. 지중해를 둘러싼 연안은 로마의 땅이었다. 



악티움해전인데... 1672년 작품으로 뒷부분에 설명한 시대착오적 상상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영화, 드라마와 그림으로 배우면 안된다고 하죠. 



당대 최고의 지휘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해전에 취약한 로마함대를 상대로 의외로 완패당했던 악티움해전입니다. 

이 해전과 함께 로마의 긴 내전도 끝이 납니다. 


로마를 괴롭히던 해적도 폼페이우스Pompeius가 기원전 67년에 이미 청소해두었다. 악티움해전 이후 20년 동안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와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우리의 바다)가 계속되었다. 

로마는 나폴리 부근 미세눔Misenum과 아드리아해 라벤나Ravenna에 함대를 배치해서 시실리와 이집트의 곡식 수송로를 열고 해적을 몰아냈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황제의 트라아콘테르Triaconter(노 30개의 전투갤리)와 펜테콘테르Penteconter(노 40개의 전투갤리) 200척이 다르다넬레스Dardanelles해협에서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노스Valerius Licinianus의 3단노선Trireme을 격파한 324년까지 큰 충돌이 없었다. 


5세기,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로마는 크게 쇠약해졌고 476년에 오도아케르Odoacer가 로마를 멸망시키면서 로마의 바다도 사라졌다. 밀려났던 해적이 되돌아왔고 반달Vandal족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이베리아반도로 남하한 후에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439년에 카르타고Carthage를 점령했다.



서로마제국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황위를 오도아케르에게 넘기고 있습니다. 로물루스는 정식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지막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이 있습니다. 


가이세리크Gaiseric는 강력한 함대를 바탕으로 해적왕국을 만들었다. 120척의 전함으로 사르디니아Sardinia, 코르시카Corsica와 발레리아Balearic제도를 장악했고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까지 약탈했다. 455년에는 티베르Tiber강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를 약탈했다. 

북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367년, 프랑크족, 색슨족, 아타코티Attacotti족 등이 연합해 영국에서 로마에 대항했고 영국해협 전체가 색슨 해적의 손에 넘어갔다. 해변를 따라 조성된 로마의 요새라인을 색슨해안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시리아, 유대, 그리스, 콥트(이집트의 기독교주민)는 지중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교역을 계속한 반면에 북해에서는 켈트, 프랑크와 색슨이 교역을 독점했다. 자중해 상선은 자위권을 위해, 북해 상선은 약탈을 위해 무장을 갖추면서 상인과 선원은 전투병이 되었다. 

이렇게 중세의 바다가 시작되었다. 


중세에 들어서도 항해술은 고전시대와 다르지 않았다. 4세기 로마의 상선은 10세기의 상선과 비슷했다. 북유럽과 남유럽의 기후와 문화차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달라지지 시작했다. 

중세 초의 전함은 거의 모두 갤리Galley선으로 길이와 너비가 10:1이었고 용골이 거의 없어서 흘수선(선박과 수면이 닿는 선)이 얕고 건현(짐을 실었을 때에 수면 위에 있는 부분)이 낮았다. 노가 주 동력이었고 한 두 개의 돛을 달았고 조타용 노를 측면에 달아 방향을 바꿨다. 

리부르니안Liburnian(또는 리부르나)가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 경에 일리아해안의 리부르니족이 사용했던 작은 갤리선으로 로마해군의 주력함이 되었다. 길이 20m, 너비 4m 미만으로 노 50개와 큰 4각 돛을 달았다. 

최고 7노트, 평균 3노트로 비교적 날렵했다. 

리부르니안은 6세기 비잔틴의 드로몬Dromon으로 이어졌고 11세기 말까지 지중해의 모든 전투용 갤리선의 원형이 되었다. 



독일 마인츠 고대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잔틴 드로몬(가장 위) 모형입니다. 갤리선은 노가 주요 동력인, 얇고 길며 홀수선이 얕은 중세 주력선박입니다. 


리부르니안은 북유럽 선박에도 영향을 주었다. 1~2세기 영국해협과 라인강을 항해한 선박은 앵글Angle족과 색슨족의 선박과 공통점이 있었다. 라인강 마인츠Mainz에서 발견된 로마선박 나비스 루소리아Navis Lusoria는 길이 18.3m, 너비 3m이며 노 30개와 돛 1개로 리부르니안과 흡사했다. 

덴마크에서 발견된 4세기 오크선박은 길이 21.3m, 너비 3.6m이며 노 30개를 장착했다. 영국 서포크 우드브릿지Suffolk Woodbridge에서 발견된 7세기의 서턴 후Sutton Hoo 선박도 27.13m와 4.27m에 노가 28개였다. 



서턴 후 매장선에서는 앵글로 색슨족의 귀중한 유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초에는 나침반과 해도가 없어서 천문항법과 연안항해에 의존했다. 대부분의 선박은 육안으로 육지가 보이는 범위 내에서 항해했기 때문에 좌초 등의 사고가 잦았다. 베게티우스Vegetius의 군사학Epitoma Rei Militaris 6개 장 중 4개가 천문항법에 대한 것이었을 정도였다. 

겨울에는 낮이 짧고 밤이 길어지고 구름과 안개가 두텁고 그렇지 않아도 거친 바람이 비와 눈으로 거칠어지기 때문에 항해를 되도록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갤리함대는 주로 봄부터 여름까지 그리고 낮에만 항해했지만 폭풍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기록이 많다. 

선박의 속도는 무척 느렸다. 돛을 한 개 이상 달고 있어도 순풍이 불지 않으면 거의 소용이 없었다. 역풍이 불면 1~1.5노트가 고작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연안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한Mahan이 주장한 해양력은 아예 불가능했다. 


놋꾼의 생활은 최악이었다. 여름의 지중해 온도는 35도까지 치솟았고 공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갑판 아래에서 노젖기는 고통스러웠다. 당연히 탈수증세가 심각했다. 갤리놋꾼은 엄청난 양의 물을 먹었다. 한 명이 시간 당 최소한 1리터, 하루 8리터를 먹었다. 10세기 108명의 놋꾼과 수병은 하루에 1톤 이상의 물이 필요했다. 

놋꾼은 밀을 구워 말린 덩어리를 물에 풀어서 매일 680그램을 먹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치즈 28그램,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45그램, 말린 채소 100그램을 더 먹었다. 놋꾼은 제 자리에서 먹고 잤다.  

물이 갤리함대의 연료인 셈이었지만 선적화물 때문에 물은 겨우 4일치만 실었고 계속 보충해야 했다. 선박은 물을 구할 수 있는 연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항로연안을 먼저 장악하거나 우호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어떤 선박도 며칠을 버티지 못했다. 연안을 장악하는 국가가 해양을 지배했다. 



갤리선 노꾼은 극한직업이었기 때문에 전쟁포로나 노예를 사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해전전술도 원시적이었고 로마시대와 달라지지 않았다. 전함이 마구잡이로 맞붙었기 때문에 대규모 전투는 거의 없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함대의 운명을 걸 지휘관도 없었기 때문에 양측이 피할 수 없는 경우에만 전투가 벌어졌다. 

고전시대 해전에서 주요한 무기였던 홀수면 충각Ram은 중세의 튼튼한 선체에 효과가 없었다. 북해의 훨씬 튼튼한 선체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로마전함의 충각이 골Gual족의 오크선박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동로마제국의 드로몬Dromon에는 적선에 건너가는 잔Bowsprit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불이 사용되었다. 그리스 불은 7세기에 시리아 과학자가 발명한 비밀병기로 드로몬의 선수에 설치한 원통관으로 적선을 향해 쏘았다. 사거리가 무척 짧았고 풍향이 결정적이었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가장 현실적인 무기는 회전식 투척기Ballista였다. 육지에서 사용하던 인장식 대형 석궁으로 주로 대인용 화기로 사용되었다. 선박에 피해를 입힐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다. 



비잔틴제국을 구원한 그리스 불입니다. 이 그림은 과장이 심한데 실제 그리스 불 사용법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까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중세해전의 적선침몰이 아니라 노획이 우선이었다. 정규해전과 해적질을 막론하고 전리품이 있어야 위험을 무릅쓴 선원을 보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해전은 보통 화살, 창, 돌 등을 적선에게 퍼붓는 것부터 시작했다. 심지어 독사, 전갈, 생석회, 나프타를 채운 항아리를 투척하기도 했다. 갑판에서 저항하는 적을 최대한 정리한 후에 배를 붙이고 건너가 백병전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렇다고 전술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9세기, 비잔틴제국의 전술서는 먼저 정찰선을 10km 전방에 보내 적을 먼저 발견하고 전투를 피할 수 없다면 먼저 전투대형을 갖추라고 가르쳤다. 

반달형 대형을 가장 선호했다. 기함을 중앙에 두고 전력이 가장 막강한 전함을 양쪽 뿔 끝에 배치했다. 무기투사는 높이가 관건이었기 때문에 양쪽 끝에 주력전함을 배치하고 적 함대를 포위했다. 

실제로는 대규모 함대가 결전을 위해 집결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적 항구를 봉쇄하거나 지상작전을 보조하거나 보급품을 수송하는 해양작전이 대부분이었다. 


중세해전기록은 아쉽게도 신뢰성이 떨어진다. 지상전투와 달리 기록이 부실한데다가 항해를 해본 적도 없는 성직자가 기록을 남겼다. 테오파네 증거자Theophanes the Confessor는 포기 비잔틴제국과 무슬림의 해전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718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2차 봉쇄 기록을 보면 심지어 영적인 묘사까지 나온다. 

‘신의 가호와 순수지극하신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적선은 그 자리에 침몰했다.’

중세기록자는 고전을 읽으며 교육을 받았고 해전에 대한 무지를 고전으로 보완했다. 선박과 장비용어는 오류가 많았다. 11세기 노르만기록자인 윌리암 아풀리아William of Apulia는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가 베네치아(베니스)를 코르푸Corfu에서 3단노선으로 격파했다고 기록했다. 노르만은 어떤 종류의 3단 노선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기스카르함대는 아마도 2단 갤리선이었을텐데 고전교육을 받은 윌리암은 당시의 모든 갤리선을 3단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영국기록자 매튜 패리스Matthew Paris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1217년 도버Dover전투에 투입된 영국선박이 철제충각을 달고 있는 것으로 기록했지만 당시 어떤 영국선박도 충각을 달지 않았다. 



노르만영주인 기스카르는 교황이 인정한 이탈리아내 비잔틴영지를 정복하고 비잔틴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비잔틴과 베네치아 함대에게 패했습니다. 연합함대가 승리에 취해 전력을 분산시키자 곧바로 베네치아함대를 기습했고 1084년 코르푸해전에서 선원 12,000명을 죽이고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렇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85년에 병사했습니다. 


그나마 전해진 그림도 정확하지 않았다. 중세기록의 이미지를 보면 단순한데다가 상상이 많았다. 밀라노 암브로시아 도서관Biblioteca Ambrosiana의 6세기 암브로시아 일리아스Ilias Ambrosiana 필사본을 보면 드로몬의 초기형태를 담고 있는데 너무 단순해서 어떤 특징도 찾아보기 힘들다. 

12세기 이탈리아 갈레아Galea선도 제네바 아날레스 이아누엔세스Annales Ianuenses 필사본에 그려진 단순한 그림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일반인에게는 바나나 모양의 장난감 배처럼 보인다.  

해양고고학으로 공백을 채우고 오류를 바로 잡고 있지만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중세선박 중 발견되거나 복구된 선박은 거의 없다. 


1960년대, 터키 보드럼Bodrum 부근에서 11세기의 소형 연안교역선이 발굴되어 선체우선건조Shell-first ship construction(아래 그림참조)에서 골조우선Skeleton-first건조(아래 두번째 사진참조)로 바뀐 것이 입증되었다.



  

세르케 리마니Serçe Limani에서도 11세기 소형상선이 발굴되었는 로마말기의 건조방식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골조우선건조가 정착한 것을 증명했다. 1962년, 브레멘부근에서 14세기말 한자동맹Hanseatic League 주력선박인 코그Cog가 발굴되었고 1986년 네덜란드 알메러Almere에서 15세기 코그가 발견되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의미있는 발굴이 계속 있었지만 거의 모두 비슷한 종류의 상선이었다. 중세시대 전함, 특히 지중해전함의 특징은 안타깝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1880년, 노르웨이 사네피오르Sandefjord에서 9세기 말의 바이킹 장선Longship인 고크스타트Gokstad(아래 사진참조)가 발견되었고 1962년, 덴마크 로스킬레Roskilde에서 11세기의 스쿨델레브Skuldelev 2가 발견되었다. 

반면에 지중해에서는 중요한 발견이 없다가 2004년, 이스탄불에서 4세기 콘스탄티노플 테오도시아Theodosia항의 선박잔해 31개를 발굴했다. 그 중 4개는 비잔틴제국 중기의 전투용갤리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러 학자가 신뢰성높은 증거를 찾아내고 있다. 미국인사학자 버나드 바치라크Bernard Bachrach는 바이외 테피스트리Bayeux Tapestry의 선박이미지를 연구해 1066년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의 영국상륙작전 보급문제를 찾아냈다. 

존 프라이어John Pryor는 베른Bern 필사본을 조사해 12세기 이탈리아 갈레아선의 주요 특징을 밝혔다. 매사츄세츠공과대학의 Dibner Institute for the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는 베네치아 미카엘 로데스Michael of Rhodes의 15세기 초 필사본을 연구해 세계최초의 조선기술자료를 되살렸다.

해양고고학자는 연구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의 선박을 재현해 실제 기능을 증명했다. 아테네 3단노선 올림피아스Olympias(아래 사진참조)를 재현해 중세 지중해의 실제 갤리선 항해를 밝혀냈다. 북해에서는 바이킹이라고 이름붙인 고크스타트를 정확하게 재현해서 노르웨이에서 시카고까지 항해했다. 브레멘 코드도 실제 크기대로 3척을 건조해 항해를 했었다. 



신뢰성이 떨어지고 부족한 기록을 바탕으로 역사학자가 연구하고 실증한 덕분에 중세시대 해전을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중세부터 북유럽과 지중해의 환경과 문화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해전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로마기원을 따라 지중해부터 설명해야 한다. 



코그는 바이킹 특유의 조선기술인 클링커Clinker를 더욱 발전시킨 중세선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