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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2부) - 비잔틴과 이슬람의 충돌

by uesgi2003 2019. 3. 21.


우선 용어에 대해 통일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혼용하기 때문에 여러분도 혼용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동로마제국 = 비잔틴제국 = 비잔티움제국입니다. 그리고 이슬람, 무슬림, 아랍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원 자료가 혼용하고 있기 때문에 편의상 구분없이 사용하겠습니다. 




고대와 중세선원에게 지중해는 축복이었다. 조류는 완만했고 바람은 부드러웠고 기온도 나쁘지 않았다. 폭풍이 드물어서 북해처럼 큰 선박이 필요하지 않았다. 3월~10월말까지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천문항법의 정확도가 높았다. 

지중해 지형도 항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북부연안은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랜드마크가 많았다. 피신할 만이 많았고 물이 풍부한 섬이 서쪽에서 동쪽까지 이어졌다. 이런 특성 때문에 노를 사용한 전함이 주로 사용되었다. 

갤리선은 좁고 긴 선체에 가능한 한 많은 노를 달았고 선체를 낮춰서 거의 수평으로 노를 저어야 했기 때문에 얌전한 바다에 어울린다. 당연히 물이 쉽게 넘어 들어왔다. 남부에서는 그럴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갤리선이 대세였다.


고대에는 선체우선 방식을 사용해서 건조했다. 가볍고 단단한 선체를 만들 수 있었지만 노동력,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다. 선체가 충각공격에 약한 단점이 있었다. 수면높이의 충각으로 선체의 목재를 안으로 밀어 넣어 전함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고대전함은 대부분 충각을 장착했다. 

로마시대에는 속도와 기동성이 우선하면서 작고 민첩해졌다. 로마제국말기의 주력선인 Liburnain은 50개의 노를 장착한 2단 노선으로 고대 그리스 3단노선의 절반 길이였지만 훨씬 빠르고 민첩했다.


로마가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무기 까마귀입니다. 적선에 안전하게 건너가는 다리를 걸치고 중무장보병이 건너가 경무장 적병을 없애는 등선육박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까마귀는 방향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험한 날씨에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는데 지중해가 비교적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위력을 발휘했을겁니다. 






비잔틴제국시대에는 드로몬으로 진화했다. 5세기 말에 등장한 드로몬은 중무장한 1단노선이었다. 조선기술이 발전하면서 선체도 길고 정교해졌다. 선체우선기법은 7세기부터 점차 사라졌고 골조우선기법이 대세를 이루면서 충각을 달지 않았다.  





드로몬은 30.5m까지 길어져서 10세기부터 2단의 노 108개, 2개의 삼각돛Lateen Sail, 선미 양쪽의 방향타를 장착했다. 충각대신에 적선의 노 위에 올라타서 부수는 돌출Spur뿔을 달았다. 

그리스불을 뿜는 화염관은 선수에 고정되거나 선체중간에 배치되었다. 선수 방벽에 까마귀라고 부르는 주 화염관을, 중간의 성채에 보조 화염관을 배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드로몬은 다양한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첼란디온Chelandion은 말수송선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가 대형 드로몬의 이름이 되었다. 2단 노선으로 양쪽 모두에 300명의 노꾼을 배치할 정도로 대형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장 작은 드로몬은 초기형 갈레아Galea였다. 겨우 50명의 노꾼이 있는 1단 노선으로 주로 정찰용이었다. 



비잔틴제국의 적국도 드로몬을 주력으로 사용했다. 이슬람은 그리스식 이름을따라 드로모나리오스 또는 데르민으로 불렀는데 길이 35~40m, 너비 6m, 삼각돛 2개, 100개정도의 노를 사용했다. 무슬림은 코움바리아Kormbaria라는 3단노선도 사용했지만 느리고 거추장스러웠다. 

9세기에는 그리스 불을 쏘는 이슬람식 화공선인 하라카Harraqa가 등장했다. 비잔틴식의 화염관이 아니라 인화물질을 투척기로 쏘거나 던져서 공격했다. 

드로몬은 피사, 제노바, 베니스 등의 이탈리아 해양국가의 주력전함인 갈레아로 이어졌다. 크기가 커지고 더 빨라진 2단노선 갈레아는 알라 센실레Alla sensile 노를 저었다. 센실레는 주갑판에서 1명이 노 한 개를 서있다가 앉는 방식으로 젖는 방식이었다. 


비잔틴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 드로몬함대를 바탕으로 지중해를 장악했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1세가 벨리사리우스Belisarios에게 600척을 주어 반달해적왕국을 멸망시키려고 했다. 원정에 참여했던 궁정학자 프로코피우스Procopius는 92척의 전함(드로몬?)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달족을 지중해에서 쫓아내서 로마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 그리고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에서 정교신부를 처형해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황제는 사르디니아Sardinia의 반달족총독에게 밀사를 보내 반달왕 겔리메르Gelimer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겔리메르는 5,000명의 병력을 120척에 태워 사르디니아로 파병했고 벨리사리오스의 원정군 15,000명은 그 틈을 노려 카푸트 바다Caput Vada(현 튀니지 체바Chabba)에 상륙에 무인지경으로 카트라고로 진격했다. 



비잔틴제국 최고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입니다. 로마의 영광을 되찾은 반면에 희대의 명장인 벨리사리우스를 시기하고 견제해서 스스로 한계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교리분쟁으로 제국의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게임 문명의 매력적인 캐릭터이자 부인인 테오도로황후와의 인연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테오도로의 신분이 하층민으로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데, 예상과 달리 유스티니아누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결혼한 후에는 가장 확실한 지원군이 되었습니다.  

내란때문에 수도를 버리려던 황제를 만류하며 벨리사리오스를 불러들여 위기를 수습한 일도 있습니다. 



겔리메르는 카르타고 남쪽에서 원정군을 상대하다가 참패를 당했다. 원정군은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몇 개월 후에 겔리메르를 붙잡고 반달해적왕국을 멸망시켰다. 사르디니아로 향했던 반달함대는 본국이 사라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벨리사리오스는 보병부대를 체르첼Cherchell(현 알제리)까지 보내 북아프리카 해안을 장악하고 함대는 사르디니아, 코르시카Corsica와 발레아레스군도Balearic islands까지 보내 반달해적을 소탕했다. 

유스티니우스는 반달해적을 소탕한 후에 이탈리아 본토로 눈을 돌렸다. 526년에 테오도릭Theodoric왕이 죽자 오스트로고트Ostrogoth족의 통치가 불안해진 상태였다. 535년, 황제는 벨리사리오스를 보내 시실리Sicily를 점령했다. 

벨리사리오스는 칼라브리아Calabria로 건너가 이탈리아 반도를 거슬러 올라가 로마를 점령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황제는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541년, 토틸라Totila가 왕위에 오르고 오스트로고트족은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했다. 토틸라는 전선 400척의 함대를 모았다.

542년, 토틸라는 비잔틴제국함대를 격파하고 나폴리Naples의 항복을 받아냈고 546년에는 로마를 봉쇄해 항복을 받아냈다. 벨리사리우스는 200척의 드로몬으로 구원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유스티니우스는 548년에 벨리사리우스를 소환하고 궁정내시 나르세스Narses로 교체했다. 



비잔틴제국 최고의 명장인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입니다. 벨리사리오스는 원정에서 임의적인 결정 그리고 궁정의 모함으로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습니다. 반란과 암살이 판쳤던 로마역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에게 더 큰 사업을 맡겼다면 비잔틴제국의 역사는 더욱 화려했을겁니다.

나르세스는 의외의 전업에 대성공한 환관출신입니다. 무려 74세의 나이에 벨리사리우스를 대신해 고트족을 진압했습니다. 이탈리아총독으로 눌러 앉았다가 90세에 다시 지휘권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나르세스가 육로로 진격하는 동안, 비잔틴함대는 안코나Ancona를 봉쇄 중이던 오스트로고트함대에 대승을 거뒀다. 50척의 비잔틴제국전함이 47척의 오스트로고트전함을 상대했는데 고트족은 비잔틴제국에 비해 항해기술이 크게 떨어졌다. 

고트족은 36척을 잃었고 달아난 11척도 해안가에서 선원이 모두 부수고 도망갔다. 토틸라는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552년 여름, 나르세스가 부스타 갈로룸Busta Gallorum(현 구알도 타디노Gualdo Tadino)에서 토틸라를 쓰러트리고 고트족 통치를 끝냈다. 

유스티니우스는 554년에 다시 함대를 보내 비시고트족을 안달루시아Andalusia와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몰아내 지중해를 다시 로마의 바다로 만들고 해양제국Thalassocracy(탈라소크러시, 대륙제국은 텔루로크라시Tellurocracy)의 시대를 열었다. 


비잔틴제국은 해양제국이었다. 아나톨리아Anatolia(소아시아)를 제외하면 영토 대부분이 해안선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함대가 필수적이었다. 로마가 제국을 도로로 연결했듯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해로를 연결해 멀리 이집트에서 곡식을 수송해왔다. 

주력함대는 수도에 머물렀지만, 흑해 체르손Cherson, 시리아해안 티레Tyre와 아크레Acre,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아드리아해 라벤나Ravenna, 시실리 시라쿠스Syracuse,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와 세우타Ceuta, 안달루시아와 발레아르제도에 소함대를 배치해 육지에 문제가 생기면 육군을 지원했다. 

제국은 6세기 발칸반도를 침입한 투르크유목민 아바르Avar족과 페르시아 사산Sassanid왕조의 협공을 막아냈다. 장군출신의 마우리키우스Maurice황제가 20년 동안 국경선을 막아냈지만 602년에 암살당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603년, 사산 호르세Chosroes 2세가 대대적으로 침공했고 마우리키우스의 뒤를 이은 포카스Phokas는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608년, 패르시아군은 콘스탄티노플 건너의 칼케돈Chalcedon까지 진격했다. 

611년 안티오크Antioch, 613년 다마스쿠스Damascus, 614년 예루살렘Jerusalem, 619년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되었다. 아바르족은 마케도니아Macedonia와 트라키아Thrace를 침공했다. 

황위를 이은 헤라클리오스Heraklios(또는 이라클리오스)는 622년에 아바르족과 휴전을 맺고 아나톨리아 원정으로 사산의 확장을 막았다. 그렇지만 두 적대국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626년, 페르시아장군 사흐르바라즈Sahrvaraz는 칼케돈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아바르족은 다뉴브강을 타고 내려와 금각만Golden Horn을 봉쇄했다. 그렇지만 비잔틴제국의 함대가 훨씬 강력했다. 황제는 함대를 투입해 아바르족의 원시적인 조각배를 쫓아내고 10일만에 봉쇄를 풀었다.

627년, 헤라클리오스는 다시 함대를 보내 페르시아 레반트Levant를 침공하고 니네베Nineveh 부근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비잔틴제국은 내륙으로부터의 대규모 침공에 약했다. 특히 아라비아반도 방면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해서는 역부족이었다. 황제 자신이 문제를 발생시켰다. 역대 비잔틴황제는 종교분쟁을 유발시켰고 1,000년 후의 제국멸망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유스티니우스가 시초였다. 그는 양성설 동방정교Dyophysite Orthodox교리(예수가 신이자 사람)를 앗시리아와 이집트의 단성설Monophysite(예수는 신)교회에 강요했다. 후계자도 전국에 같은 교리를 철저하게 강요했다. 

헤라클리오스는 동방정교 양성과 단성교리를 어설프게 화합시켰다가 실패했다. 그는 설상가상으로 그리스어를 제국의 공식언어로 선포했다. 앗시리아와 이집트 기독교인을 박해하면서 제국전체에 균열이 생겼고 외부 침입에 노출되었다. 

제국남부와 동부국경의 셈Semitic족은 무슬림의 일신교Monotheism를 추종했고 이슬람침략자를 오히려 반기는 일이 늘어났다. 제국이 바로 붕괴되어도 당연할 정도였다. 


632년 6월 8일, 무하마드Muhammad가 메디나Medina에서 사망했다. 634년에는 이슬람폭풍이 앗시리아를 덮쳤다.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었다. 이슬람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육로로 침공해왔다. 

헤라클리오스가 바로 대응하기에는 위기가 너무 빨리 그리고 대대적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636년 봄에 80,000명의 병력을 직접 이끌고 안티오크까지 나아가 절반규모의 칼리드 이븐 왈리드Khalid ibn Walid군을 상대했다. 

8월, 양쪽은 갈릴리Galilee해 남동쪽의 야르무크Yarmouk강에서 대치했다. 6일 동안 전투를 벌인 비잔틴군은 바람을 안고 싸우다가 참패했다. 시리아 전체가 이슬람에게 넘어갔다. 

이슬람의 침공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팔레스타인Palestine이 함락되었고 637년 4월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639년 말이 되자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포함한 페르시아 대부분을 빼앗겼다. 

640년, 이집트를 침공한 이슬람은 7월에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와 바빌론Babylon을 점령했다. 641년 2월, 헤라클리오스가 병사하고 이슬람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이집트 전체를 차지했다. 


비잔틴제국은 아직 강력한 해군을 보유했기 때문에 언제라도 이슬람의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을 노릴 수 있었다. 645년, 콘스탄스 2세Constans II는 아르메니아출신 마누엘Manuel을 보내 알렉산드리아를 탈환했다.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Uthman ibn Affan은 해임했던 지휘관이자 이집트총독인 아무르Amr를 급히 재임명했고 아무르는 15,000명을 모아 마누엘을 밀어냈다. 이슬람은 두 번 당할 수 없었다. 

이집트 수도를 알렉산드리아에서 160km 상류에 있는 카이로부근으로 옮겼고 비잔틴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해군을 양성했다. 아무르의 후임인 압둘라 아비 아샤르흐Abdillah Abi as-Sarh는 전함을 건조할 조선소를 마련했다. 



13세기 이전의 초기 이슬람선박에 대해서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비잔틴제국과 상당히 비슷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슬람은 새로 점령한 레반트지역의 시리아와 이집트 기독교인을 동원해 선박을 건조했기 때문에 비잔틴함대와 비슷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슬람선박은 비잔틴선박과 비슷한 용어를 사용했다. 이슬람과 비잔틴 기록 모두에서 드로몬이 존재한다.

이슬람선박은 비잔틴선박에 비해 크고 높고 무겁고 느린 점을 빼면 거의 비슷했다. 지휘체계와 선원구성도 빼닮았다. 아미르Amir를 제독으로 임명했고 함장은 항해와 정박을 관장한 반면에 선원관리는 선원장이 책임졌다. 

초기 선원은 시리아와 이집트 기독교인으로 채웠지만 병사와 수병은 모두 이슬람이었다. 

 

이집트총독이 함대를 건조하는 동안 시리아총독인 무아위야흐 아비 수퍈Muawiyah Abi Sufyan도 티레와 아크레에서 함대를 모으고 있었다. 시리아기독교인에게서 상선을 몰수해 649년에는 1,700척으로 키프러스Cyprus의 중립약속을 받아냈다. 

652년, 200척의 시리아선박이 시실리를 약탈했고 653년에는 로도스Rhodes를 공격해 거상Colossus을 쓰러트렸다고 한다. 무아위야흐는 500척으로 다시 키프러스를 공격해 중립약속위반의 책임을 물었다. 

655년, 아타톨리아 루키아Lycia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 결정적이었다. 콘스탄스 2세는 무아위야흐가 콘스탄티노플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500~1,000척의 선박을 모아 소아시아 해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3세기에 완공되었다는 거신상입니다. 지금도 재건비용이 막대한데 그 당시에는 더더욱 불가능했겠죠.

지진으로 붕괴되어 다리만 남았는데 이슬람이 침공해서 그것마저 부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입니다. 


무아위야흐는 육군을 이끌고 카파도키아Cappadocia(중앙 아나톨리아)로 진격 중이었고 이집트총독 압둘라가 이집트-시리아연합함대 200척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남쪽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양쪽 함대는 포이닉스Phoinix(현 피니케Finike)에서 마주쳤다. 

황제는 전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명령을 내렸고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이슬람은 쇠사슬로 배를 묶어 전열을 유지하면서 긴 쇠고리로 비잔틴선박의 삭구Rigging을 끊거나 엉키게 만들었다. 

이 해전을 돛대Mast전투(그림 참조)라고 부르는데 멀리서 보면 결전을 벌이는 선박의 돛이 숲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황제는 나팔수의 아들과 옷을 바꿔 입고 간신히 달아났다. 이 전투로 이슬람은 지중해 동부까지 진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