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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3부) - 콘스탄티노플 2차 공방전

by uesgi2003 2019. 4. 3.



656년, 비잔틴제국에게는 다행히도 우스만이 암살당해 해군을 재건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무아위야흐는 비잔틴제국이 이슬람내전에 참전하지 않도록 매일 금화 1,000개, 말 한 마리와 노예 한 명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고 휴전을 성사시켰다. 

황제는 제국 곳곳에 강력한 군사구역(테마Themata, 아래 그림참조)을 건설했다. 해군은 사모스Samos섬의 카라비시아노이Karabisianoi라는 군사구역에 집중시켜 에게해 제도, 소아시아 남부해안, 다르다넬레스 해협입구를 방어했다. 

스트라테고스Strategos(장군)가 각 구역을 맡았고 육군보병과 선원은 적절하게 배분되었다. 카라비시아노이의 해군지휘관은 육군지휘관보다 낮은 지위였고 제독은 천인장, 선장은 백인장계급이었다. 승선한 전투병은 중장기병 카타프락트Kataphractoi(두번째 그림참조)나 경기병 스트라티오타Stratiotai였다.




콘스탄스 2세는 이슬람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지고 군사거점을 확보하자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레반트와 이집트를 상실한데다가 이제 북아프리카 중앙해안도 내주면 서쪽 지중해 전체가 위험해졌다. 

662년, 함대에 보병을 실어 이탈리아로 보냈다. 아풀리아Apulia와 칼라브리아Calabria를 다시 장악한 후에 시실리 시라쿠스Syracuse(또는 시라쿠사)에 상륙했다. 지중해 중앙과 카르타고 교구를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운명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먼저 무아위야흐가 661년에 이슬람의 패권을 잡고 비잔틴제국을 향하기 시작했고 콘스탄스 2세는 668년에 시라쿠스 목욕탕에서 노예에게 살해당했다. 


무아위야흐는 다마스쿠스로 수도를 옮긴 후에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섰다. 672년, 그는 소아이사 남쪽 해안을 따라 2개의 함대를 보냈다. 크레테Crete와 로도스Rhodes를 약탈하고 킬리키아Cilicia와 리키아Lycia에서 겨울을 보냈다. 

콘스탄스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4세는 대규모 함대를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항Theodosian harbour에 집결시켰다. 673년, 이슬람함대가 마르마라Marmara해에 들어와 콘스탄티노플 남서쪽 바로 아래의 헵도몬Hebdomon구역을 점령하고 기지를 만들어 비잔틴제국의 수도를 계속 공격했다. 

몇 년 동안 이슬람함대의 일방적인 공격을 막아내던 비잔틴제국은 마침내 궁극의 무기를 손에 넣었다. 시리아에서 피신한 기독교인 칼리니코스Kallinikos는 수면 위에서도 꺼지지 않는 바닷불을 발명했다. 


그리스불의 정확한 성본은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다. 12세기 이슬람은 고래유와 염소신장기름 등을 조합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유황이나 생석회를 주성분으로 사용해 비슷한 효과를 냈다. 최근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주성분은 나프타나 경질원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비잔틴제국은 흑해 북동쪽의 코카서스Caucasus의 유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유가 지면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칼리니코스는 원류를 파라핀이나 석유로 정제한 후에 송진으로 경화시켰을 것이다. 이 원료를 밀봉된 동제 통에 넣고 가열하다가 펌프로 뿜어내면서 불을 붙였다. 

202년의 실험에서 1,000도의 화염을 15m 거리까지 쏘는데 성공했다. 


677년, 비잔틴해군은 드로몬에 그리스 불 발사관을 장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선수에서 방향을 자유롭게 바꾸는 관을 배치하고 이슬람해군을 궤멸시켰다. 이슬람해군은 처음겪는 공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바다로 뛰어들어도 타죽었다. 

그리스 불은 모래, 식초, 소변으로 끌 수 있었지만 이슬람해군은 알지 못했고 배에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닐 리도 없었다. 봉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간신히 살아남은 선박도 소아시아 남쪽 해안을 지나던 길에 겨울폭풍을 만나 완전히 전멸했다. 


이슬람세력이 크게 물러나자, 킬리키아와 시리아 사이의 아마누스Amanus산(현 누르Nur산)에 살던 마르다이트Mardaite(기독교계 약탈족이 이슬람에 반기를 들고 레바논Lebanon산을 향해 남진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경로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무아위야흐는 비잔틴제국이 배후에 있다고 오해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막대한 연공을 바치며 협상했다. 

그렇지만 마르다이트족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689년, 마아위야흐의 뒤를 이은 아브드 알 말리크 마르완Abd al-Malik Marwan은 다시 비잔틴제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12,000명의 마르다이트족을 비잔틴제국의 영토 안으로 불러들이는 조건으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2세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마르다이트족 대부분은 소아시아 남부에 정착해 선원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리스를 떼어내 코린트Corinth를 중심으로 별도의 해군구역을 만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곧바로 폭정으로 치달아 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암흑기를 열었다. 이슬람(우마이야 칼리파테Umayyad Caliphate)은 이 기회를 노려 서쪽으로 세력을 넓혔다. 알 말리크는 40,000명을 파병해 북아프리카를 공략했다. 695년 카르타고를 점령다.

유스티니아우스는 레온티오스Leontios에게 쫒겨나 케르손Cherson(크림반도 남부)으로 달아났다. 레온티오스는 697년에 함대를 보내 카르타고를 수복했지만 이슬람군이 내륙의 베르베르Berber족 반란으로 대응하지 못한 덕분이었다. 



이슬람군은 반란을 진압한 후에 비잔틴함대를 몰아내고 698년에 다시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레온티오스의 무자비한 처벌이 두려웠던 해군은 장군을 살해하고 아프시마로스Apsimaros를 황제로 세웠다. 아프시마로스는 레온티오스를 몰아내고 티베리오스Tiberios 3세로 즉위했다. 

이슬람군은 비잔틴해군이 언제라도 카르타고를 공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수도를 튀니지 내륙으로 옮겼다. 이집트총독은 1,000명의 조선전문가를 투입해 함대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704년, 100척의 선박이 완성되자 시실리와 사르디니아를 공격했다. 이제 이슬람해군은 비잔틴제국의 서쪽 영토를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자체의 문제가 심각했다. 705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불가르Bulgar칸 테르벨Tervel과 혼약을 맺고 군사지원을 받아 황위를 되찾았다. 그는 마구잡이로 주요 지휘관을 숙청하고 주변국가를 자극했다. 

그는 피난처였던 케르손을 침공했고 크림반도는 바르다네스Bardanes라는 장군을 황제로 옹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711년 11월에 처형당했다. 

이슬람군은 711년 세우타Ceuta를 점령하고 해협을 건너 서고트족의 스페인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12,000명이 타구스Tagus강을 따라 이슬람국가 알안달루스al-Andalus를 세웠다. 비잔틴제국은 지중해 서부를 영원히 잃었다. 


비잔틴제국의 혼란은 계속 되었다. 713년 6월,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os 2세가 군부의 지지를 얻고 황위에 올랐다. 새 황제는 이슬람의 확장에 대비해 수도의 창고에 곡식을 채우고 성벽을 보수하는 동시에 드로몬도 계속 건조했다. 

안타깝게도 아나스타시우스는 자신을 옹립한 병사들을 드로몬에 태워 이슬람과의 전투에 투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알렉산드리아의 이슬람함대가 리키아에 상륙해 선박용 목재를 벌목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옵시키온Opsikion군사구역의 병사를 파병했다. 

병사들은 지휘관을 죽이고 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세금징수관을 강제로 끌고가 테오도시오스Theodosios 3세로 옹립하고 6개월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봉쇄한 끝에 715년 11월에 아나스타시우스를 폐위시켰다.


다마스쿠스가 콘스탄티노플의 혼란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새 칼리프에 오른 술레이만 알 말리크Sluayman al-Malik는 714년, 아직 아나스타시우스가 재위 중일 때에 80,000명으로 소아시아를 침공하고 바다로는 1,800척의 대함대를 보냈다. 콘스탄티노플을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이슬람군은 672~8년 원정의 참패를 복수하고 싶었고 비잔틴제국을 무너트려야 서쪽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슬람군은 콘스탄티노플 동쪽의 옵시키온군사구역까지 진출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휴전협상 명목으로 사절을 다마스쿠스로 보내 정보를 수집했다. 

사절이 돌아와 이슬람군이 대규모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성벽을 보수하고 각종 무기를 성벽에 배치했다.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 3년치의 식량을 비축해두라고 명령했다. 


715년 2월, 알 왈리드가 갑자기 죽었고 술레이만 알 말리크가 바로 칼리프에 올라 침공준비를 이어갔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이슬람함대가 리시아에 정박해 벌목작업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함대에서 가장 빠른 선박을 골라 옵시키온군사구역의 병사를 태워 로도스섬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옵시키온병사는 로도스섬에 집결하자 반란을 일으키고 지휘관을 죽였다. 소아시아 서쪽의 아드라미티온Adramytion으로 가서 테오도시우스라는 세금징수관을 발견하고 강제로 황제로 옹립했다. 

옵시키온의 다른 병력과 함대를 모아 715년 11월에 아나스타시우스를 축출하고 테오도시우스 3세를 정식황제로 앉혔다. 비잔틴제국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아나스타시우스가 이사우리아인 레온Leo the Isaurian을 수도방위 지휘관으로 임명해두었다. 



716년, 최대 120,000명의 이슬람군이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레오의 아나톨리콘Anatolikon군사구역이 이슬람군을 가로 막았다. 술래이만이 직접 나와 레오에게 협상을 제시했다. 자신에게 복종하면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앉히겠다는 제안이었다. 

실제로는 시리아 출신으로 아랍어를 할 줄 알았던 레오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술래이만을 속이고 달아났다. 그는 아르메니아콘Armeiakon군사구역 지휘관 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와 혼인협정을 맺고 연합했다. 아나톨리콘과 아르메니아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그는 황제, 대주교, 상원과 협상했다. 술래이만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겨울이 다가와서 육군과 해군 모두 움직일 수 없었다. 


717년 봄, 레오는 테오도시우스를 폐위시키고 레오 3세로 황위에 올랐다. 여름이 되자 이슬람군이 소아시아를 약탈하며 진격하다가 8월 15일에 콘스탄티노플 성벽 앞에 이르렀다. 가슴 높이의 석벽진지를 쌓아 두 번째 콘스탄티노플 봉쇄를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은 한 번의 공격으로 무너트릴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성벽이 3중으로 가장 안쪽 성벽은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가, 그 바깥쪽 성벽인 테오도시우스성벽은 이중 성벽으로 너비 2m, 높이 9m였다. 20m 높이의 성탑이 5~60m 간격으로 있었다. 외곽 해자는 너비 20m, 깊이 10m였다. 




제국해군이 황금만Golden Horn에 정박해 바다쪽 성벽을 지키고 있었고 진입로는 거대한 쇠사슬이 걸쳐서 있었다. 이슬람군은 대형 공성무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을 굶주려 함락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술래이만은 우마르Umar에서 함대와 함께 이동해 9월 1일에 마라마라해에 도착했다. 해군은 육군의 공성전을 지원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의 보급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이슬람군에게는 불행하게도 각각 100명의 병사를 태운 20척의 수송선이 해협을 건너가던 중에 갑자기 바람이 죽었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해류에 황금만 입구까지 밀려났다. 레오는 즉시 드로몬함대를 보내 그리스 불로 공격했다. 일부 수송선은 바로 침몰했고 나머지는 불이 붙은 채로 바다 위를 떠돌았다. 

레오는 황금만의 쇠사슬을 낮춰 이슬람함대를 유인했지만 술래이만은 더 이상의 전투를 피하고 북서쪽 멀리로 물러나 콘스탄티노플의 해로봉쇄를 포기했다. 전투는 이 순간에 결정된 셈이었다. 

9월 말, 술래이만이 갑자기 사망하고 우마르 알 아지즈Umar al-Aziz가 칼리프에 올랐다. 10월부터 이슬람진영에 전염병이 돌았고 겨울기온은 예년과 다르게 떨어졌다. 100일 이상 눈이 녹지 않았고 월동장비가 부실한 이슬람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콘스탄티노플은 3년치의 식량을 비축해두었지만 이슬람군은 식량이 부족했다. 땅이 얼어붙어 시체를 그대로 방치했고 겨울에도 전염병이 사라지지 않고 이슬람군 진영을 휩쓸었다. 


봄이 되자 2개의 거대한 수송함대가 북아프리카를 출발했다. 먼저 400척이 그리고 360척이 그 뒤를 이어 보스포루스Bosporus해협의 아시아쪽에 나타났다. 기독교 선원들이 밤에 몰래 비잔틴군에게 투항했고 레오는 함대를 보내 수송함대를 공격했다. 배를 가득채운 식량을 노획한 후에 모든 수송선을 불태웠다. 

포위군은 굶주려 죽어가는데 포위당한 도시는 거꾸로 식량이 흘러 넘쳤다. 이슬람군은 말, 노새와 낙타를 모조리 잡아먹었다. 심지어 동료의 사체를 먹었다는 주장이 있다. 

북서쪽에서 다가오던 이슬람 지원군도 레오가 미리 숨겨 놓은 군대에게 쫓겨 다시 국경을 넘어갔다. 


비잔틴제국의 지원군은 별 어려움없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불가르족의 테르벨Tervel칸은 이슬람군보다는 비잔틴제국이 낫다고 판단하고 레오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여 이슬람군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병들고 굶주린 이슬람군은 불가르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약 22,000명이 학살당했고 우마르는 718년 8월 15일에 총퇴각을 명령했다. 이슬람육군은 다행히 소아시아를 건너 후퇴했지만 이슬람해군은 그렇지 못했다. 해군은 연거푸 폭풍과 악천후를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때마침 에게해 남쪽에서 화산폭발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0척이 살아남았는데 그 중에 5척은 부근의 비잔틴선박에게 나포되고 겨우 5척만 시리아로 돌아갔다. 



이슬람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우마이야왕조가 무너졌고 아바스왕조는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Baghdad로 옮겼다. 

비잔틴제국은 이후 700년 동안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내는 기독교 방벽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