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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4부) - 노르만의 지중해진출

by uesgi2003 2019. 5. 8.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매일 90분 이상, 1만보 이상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건축현장을 들여다 보니 시간이 무척 빨리 흘러갑니다. 덕분에 이야기 정리가 너무 뜸했습니다. 


중세해전 이야기 (4부) - 노르만의 지중해진출


시실리Sicily(시칠리아)는 지중해의 전략거점이었다. 동서를 잇는 해로 중앙에 위치한 시실리는 바다로 진출하려는 세력의 목표물이었다. 중세이전 갤리함대는 신선한 물과 음식을 구하고 폭풍을 피난하고 휴식을 취할 최고의 안식처였다. 

시실리를 장악하면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고 지중해 중앙을 장악할 수 있었다. 시실리를 장악한 무슬림은 9세기와 10세가 초에 지중해를 지배했다. 콘스탄티노플은 10세기와 11세기 초에 시실리를 탈환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지중해를 영원히 잃었다. 

교황의 지원을 받은 신성로마제국도 시실리를 탈환하지 못했다. 무슬림의 지중해 패권은 프랑스 북부 출신의 탕크레드 드 오트빌Tancred de Hauteville이 이끄는 노르만기사단에 무너졌다. 




1차 십자군전쟁에 참전했던 탕크레드입니다. 본격적인 등장은 5부로 미뤄야겠습니다.  


11세기 초, 프랑스 북부는 노르만족의 영토였다. 부족한 영지를 장자가 상속하면서 밀려난 세력은 남진하기 시작했다. 분쟁과 모험에 용병세력이 대거 합류했다. 노르만족이 육지에 올라왔다고 해도 바이킹의 유전자는 그대로 살아있었다. 무모할 정도로 위험을 감수했고 끊임없는 탐욕으로 다른 세력을 지배했다. 

노르만족이 처음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발을 들일 때에는 지중해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소규모 순례자무리로 왔다가 무시무시한 전투력이 알려지면서 지역영주에게 고용되었다. 예루살렘에서 귀환하던 노르만기사 40명은 살레르노Salerno를 공격하던 무슬림을 물리쳤다. 영주에게서 막대한 보상을 받은 기사단은 더 많은 동료를 데리고 돌아왔다. 



11세기 당시의 이탈리아 지도입니다. 눈여겨 잘 봐두시기 바랍니다. 


1016년, 롬바르드Lombard의 멜루스Melus는 노르만순례자를 만나자 비잔틴제국에 대항하는 전력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수백 명의 노르만기사가 요청에 화답했고 일부는 살레르노공 과이마르Guaimar 3세에게 합류했고 일부는 멜루스에게 합류해 비잔틴령의 아퓰리아Apulia를 침공했다. 

처음 5차례의 공격은 성공했지만 1018년 칸나에Cannae에서 참패를 당랬다. 살아남은 노르만기사는 진영을 바꿔 캄파니아Campania의 롬바르드공에게 합류했고 이탈리아 남부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노르만족은 공동의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는 귀족으로 진영을 바꿨다. 영지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교한 계획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1031년, 나폴리의 Sergius 4세 공작은 노르만용병단이 숙적인 카푸아Capua의 판둘프Pandulf 4세를 막아주었다며 아베르사Aversa를 하사했다. 


오트빌Hauteville가문이 도착하면서 서서히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오트빌 아들 12명 중에서 8명이 운명을 개척하려고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왔다. 윌리암William, 드로고Drogo, 험프리Humphrey는 1038년의 비잔틴 시실리 침공에 참여했다가 실패했다. 

재미있게도 오트빌가문은 이 원정에서 해양력의 가치를 경험했다. 형제가 노르만부대를 이끌었는데 윌리암은 결투에서 시라쿠스Syracuse의 무슬림사령관을 죽여 명성을 높였다. 요르요스 마니아키스George Maniakes의 부당한 대우에 분노한 노르만부대는 1041년에 본토로 귀환해 멜피Melfi에 본거지를 만들었다. 

윌리암을 백작으로 옹립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비잔틴령 영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1041년 2차례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3월에는 베노사Venosa 북쪽 부근의 올리벤토Olivento강에서, 5월에는 칸나에에서 1018년의 참패를 복수했다. 


윌리암은 1045년에 열병에 걸려 죽었고 동생 드로고에게 아퓰리아 백작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1년도 안되어서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를 실제로 정복한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그림 참조)가 도착했다. 로베르는 형제 드로고의 요청으로 칼라브리아Calabria에서 기병부대를 이끌다가 1951년 드로고가 약탈을 자행하다가 살해당하자 전면에 나섰다. 

험프리가 아풀리아 노르만군을 이끌고 약탈을 이어갔다. 1053년, 레오Leo 9세는 고향인 독일병력까지 모아 노르만군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했다. 노르만군은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베르의 분전으로 카피타나타Capitanata 치비타테Civitate에서 대승을 거뒀다. 




1057년, 험프리가 죽자 로베르가 아풀리아 작위를 물려받았고 동생이 노르망디에서 합류했다.  두 형제는 무자비하게 칼라브리아를 점령해나갔다. 교황군이 참패했고 비잔틴제국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들을 막을 세력이 없었다.

오트빌가문은 카날레아Canalea, 마이다Maida, 니카스트로Nicastro를 순식간에 차지했다. 1059년, 로베르는 카리아티Cariati를 포위하던 중에 교황 니콜라스Nicholas 2세가 멜피Melfi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니콜라스는 베네딕트Benedict 10세와 교황직위를 두고 심각하게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이 필요했고 로베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059년 8월, 로베르는 멜피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지중해로 진출할 명분을 얻었다.   


로베르는 교황의 허가를 받고 본격적인 지중해 진출을 시작했다. 가을 말에 카리아티를 함락시키고 코센자Cosenza와 게라체Gerace를 점령했다. 1060년 봄에는 레기오Reggio를 손에 넣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메시나Messina해협에 서서 9세기 초부터 기독교의 간절한 목표인 시실리를 바라보았다. 로베르가 해군전력을 모으는 동안 동생 로제Roger는 60명의 기사만 데리고 정찰에 나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회가 왔다. 

시라쿠스와 카타니아의 무슬림총독인 알 쑴나흐al-Thumnah가 처남과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로베르형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061년 3월, 로제가 160명의 기사를 이끌고 다시 항해에 나섰지만 악천후로 전멸위기까지 몰렸다. 피해가 컸지만 귀중한 항해경험을 쌓았다. 


형제는 5월에 레기오와 칼라브리아항구에서 닥치는 대로 선박을 징발해서 지중해항해에 나섰다. 팔레르모Palermo총독은 노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24척의 전함을 보냈다.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전력이었지만 노르만족 특유의 무모함이 성공을 만들어냈다. 

로제는 13척에 기사 300명을 태우고 밤에 해협을 건너 메시나남쪽 트레메스티에리Tremestieri에 상륙해 메시나를 점령했다. 무슬림함대는 보급항구를 잃자 무기력하게 선수를 돌렸고 로베르는 나머지 병력을 수송선에 태워 해협을 건넜다.

그렇지만 로베르는 아풀리아 상황이 악화되어서 본토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고 로제는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칼라브리아로 후퇴해서 결혼했다. 형제는 점령지 분할을 두고 사이가 벌어졌고 그동안 무슬림동맹이었던 알 쑴나흐가 암살당했다. 로제는 형과 화해하고 서둘러 섬으로 건너갔지만 지역주민이 반란을 일으켰다. 


천만다행으로 시실리를 구원하러 다가오던 무슬림함대가 가을폭풍을 만나 판텔레리아Pantelleria 부근에서 전멸했고 이듬해에 나타난 무슬림함대는 교전을 피하고 관망만 했다. 로제는 그 동안 반란을 진압하고 본토에서 자유롭게 병력을 증원해 1063년 체라미Cerami에서 아프리카-시실리 연합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1064년, 로베르는 아풀리아를 안정시킨 후에 500명의 기사를 모아 팔레르모로 진격했다. 노르만군은 독거미가 가득한 언덕에서 야영을 했지만 팔레르모는 항구를 통해 보급을 받으며 버텼다. 

로베르는 팔레르모항구(그림 참조)를 봉쇄할 함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로베르는 바리Bari를 공략해서 선박과 선원을 모으는 동시에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이탈리아 영지를 무너트려 아풀리아를 안정시킬 생각이었다. 1065년부터 바리를 포위했지만 비잔틴제국의 방해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했다.

1071년, 로제가 비잔틴해군 전함 20척을 요격해 9척을 노획했고 희망이 사라진 바리는 성문을 열었다(그림 참조). 오트빌가문은 처음으로 해양원정에서 성공했다. 로베르는 바리에서 충분한 해군전력을 모은 후에 팔레르모로 향했다. 

1071년, 로베르는 팔레르모 외곽의 아프리카함대를 상대했다. 이제 노르만군은 해전에 능숙해졌고 무슬림함대를 항구 안으로 몰아 넣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팔레르모를 포위한 로베르와 로제는 포위 몇 개월 만인 1072년 1월에 팔레르모를 함락시켰다. 로베르는 동생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다음 원정에 나섰다. 




로베르는 1073년 초에 트라니Trani항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 아말피Amalfi도 손에 넣었다. 로베르의 처남인 살레르노Salerno공 기술프Gisulf 2세는 아말피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비난하며 무자비하게 아말피선박을 공격하고 있었다. 

아말피가 로베르에게 성문을 열었는데도 기술프는 여전히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로베르는 이것을 빌미로 기술프의 살레르노Salerno를 포위했다. 해군전력을 충분히 갖춘 로베르는 살레르노를 완벽하게 봉쇄헸다. 시민은 쥐는 물론이고 대변까지 먹다가 6개월만인 1076년 12월에 항복했다. 

로베르는 이탈리아 남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로베르는 이제 비잔친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1074년 미하일 7세 두카스Michael VII Doukas의 아들과 로베르의 딸의 혼인이 취소되자 다시 이것을 빌미로 삼았다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Nikephoros III Botaniates가 1078년에 모반을 일으켜 황제를 몰아내자 로베르는 1981년부터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최소 50척에 1,300명의 기사를 싣고 아드리아해를 따라 북진해 발칸반도로 들어섰다. 여름태풍이 닥쳤는데 공성용으로 전함에 높게 세운 공성탑이 무너지면서 함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로베르는 포기하지 않고 두라조Durazzo(현재의 두러스Durres. 지도 참조)를 포위했다. 노르만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베네치아군을 만났다.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Alexios Komnenos는 비잔틴해군전력이 약하자 지중해교역권을 베네치아에게 양도했고 베네치아는 몇 세기 동안 지중해 동부를 지배했다. 당연히 노르만군의 등장을 반가워할 리가 없었다.



도제Doge(베네치아의 최고지도자 직위)인 도메니코 셀보Domenico Selvo는 두라조 북쪽 몇 km에 베네치아함대를 접근시켰고 로베르는 아들 보에몽Bohemond에게 베네치아군과의 협상을 맡겼다. 베네치아함대는 마치 해상항구를 만든 것처럼 거대한 수송선을 반원형으로 배치해두었다. 

보에몽은 함대를 보는 순간 협상은 물건너갔다고 판단하고 바로 달려들었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보에몽의 기함도 침몰했고 간신히 다른 배에 올라 부근의 해안으로 달아났다. 두라조의 그리스 수비대는 이 광경을 보고 성밖으로 나와 노르만군을 공격했다. 

로베르는 라구사Ragusa궁병의 분전덕분에 참패를 모면했고 선박ㅇㄹ 모두 뭍에 올려 베네ㅣ아군의 공격을 피했다. 게르만군은 바다를 내주었지만 육지에서는 막강했다. 1081년 10월에 비잔틴제국군을 격파한 후에 베네치아귀족의 도움을 받아 1082년 2월에 두라조를 함락시켰다. 




당시 이탈리아의 2단 갤리선입니다. 


카스토리아Kastoria를 점령하고 계속 진격하던 중에 본토에서 조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의 앙리Henry 4세가 로마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로베르가 충성을 맹세한 그레고리Gregory 7세가 위험했다. 

로베르는 아들에게 발칸공략을 맡기고 바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보에몽은 베네치아와 비잔틴해군이 본토와의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점차 밀릴 수 밖에 없었다. 

1083년 가을, 비잔틴군은 카스토리아를 탈환했고 베네치아군은 두라조를 탈환했다. 1084년 봄, 비잔틴-베네치아연합함대가 코르푸Corfu를 탈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