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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꿈으로 끝난 폴란드 공수여단의 조국해방

by uesgi2003 2019. 11. 25.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세미나때문에 2차대전 자료를 찾다가 고른 이야기가 '꿈으로 끝난' 시리즈가 되었군요.

꿈 시리즈를 계속 정리해볼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도 해봅니다.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전쟁영웅의 운명이 참 기구하군요.


꿈으로 끝난 폴란드 공수여단의 조국해방


제1 폴란드 공수여단장 스타니슬라브 소사보흐스키Stanislaw Sosabowski(사진 참조)는 자신의 여단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도 원치않는 사생아로 태어나, 정상아의 건강, 인내, 의지가 결여된 군대.‘

1941년 9월 23일, 자유폴란드군Free Polish Forces사령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Wladyslaw Sikorski는 2,000명도 안되는 병력만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공수여단을 창설했다. 

서부전선의 다른 폴란드부대처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가까스로 탈출한 폴란드장교와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육군, 해군, 공군은 연합군 최고사령부Supreme Allied Command의 지휘를 받았지만, 공수여단은 폴란드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독특한 편성이었다. 

공수여단은 폴란드 본국에서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나면 조국을 투입되어 해방시키는 목적으로 창설되고 유지되었다. 

여단의 구호는 ‘최단거리The Shortest Way’였고 모든 병사는 하늘을 날아 바르샤바Warsaw를 해방시키는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사보흐스키는 ‘우리 망명자 모두는 귀국해서 조국 해방전에 참전하는 꿈을 가졌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우리는 죄인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마켓가든 작전 그리고 관련 주요 인물을 정리하면서, 머나먼 다리 A bridge too far가 보고 싶어지는군요. 



그날이 올 때까지 훈련에만 집중했고 여단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여단의 훈련을 지켜본 미군병사는 암살자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의 사령부는 ‘지상의 지옥’이라고 불렸다. 점프타워와 훈련용 공격로가 있었고 훈련강도는 매우 높았지만 여단장은 능력을 뛰어넘는 시도는 요구하지 않았다. 여단장은 정중한 태도인 반면에 화를 참지 못하는 급한 성격도 있었다. 

아른헴Arnhem에 참전했던 어커트Urquhart의 기록에 따르면 소사보흐스키는 병사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와 복무한 모든 사람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44년 3월, 모든 전투부대를 순시한 몽고메리Montgomery원수는 공수여단에 관심을 보였다. 



제1 공수사단장 로이 어커트입니다. 영화에서는 숀 코너리가 멋지게 연기했습니다. 


몽고메리는 ‘귀관은 정예병사를 가지고 있군. 전부 죽여버리겠어’라고 말했고 소사보흐스키는 ‘아닙니다. 적만 죽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연합군 공정군단 사령관이 되는 프레데릭 브라우닝Frederick Browning장군도 여단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다양한 연합군작전에 먼저 투입하고 폴란드 지휘권으로 복귀하는 것을 제안했다. 

사소보흐스키는 예비부대는 격전이 벌어지는 전장에 투입되기 때문에 영국군부대에 섞여 있더라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수여단뿐만 아니라 모든 폴란드부대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노르망디Normandy상륙작전의 부담이 다가오면서 모든 정치외교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몽고메리는 폴란드 공수여단을 중요한 자원으로 생각했고 신임 폴란드 총사령관 소사보흐스키도 여단을 연합군 지휘권에 넘겨주었다. 

그는 공수여단이 폴란드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몽고메리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영국참모부가 폴란드봉기 기원을 위해 여단을 적절한 시기에 공중수송해 줄 것으로 믿는다’는 편지를 보냈다. 



제1 공수군단장 브라우닝입니다. 네덜란드 주둔 독일군에 대한 첩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른 지휘관과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임무에 확신을 가지면서도 "But I think we might be going a bridge too far"이라고 말했는데 영화 제목이 되었습니다. 


폴란드 공수작전을 위해 대규모 수송기를 지원할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오갔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공수여단이 그렇게 바라던 순간이 드디어 왔다. 7월 25일, 폴란드 국내군Poland Home Army(사진 참조)는 ‘바르샤바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었다. 공수여단이 온다면 군사와 정치면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바르샤바 공군기지를 폭격해주기 바란다. 봉기를 시작하면 알려주겠다’는 전신을 보내왔다 

영국은 전신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보냈다고 해도 너무 늦은 상태였다. 폴란드 공수여단이 아른헴의 하늘에서 투하되는 동안 바르샤바는 실패가 결정된 63일간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소사보흐스키는 종전 후에 ‘우리의 참담한 심정을 알기나 할까?’라고 기록했다. 



가까운 소련군은 폴란드 자체봉기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해, 독일군 무기로 무장한 폴란드 국내군입니다. 폴란드 공수여단이 폴란드로 날아가기에는 너무 멀고 위험했기 때문에 투입될 수 없었습니다. 소련은 당연히(?) 폴란드 공수여단이 사용할 기지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공수여단은 더 이상 독립부대가 아니었다. 소사보흐스키와 브라우닝의 사이는 크게 벌어졌고 해결되지 않았다. 공수작전을 거의 모르는 누군가가 막연한 낙관으로 다양한 작전을 기안했다. 마치 마술사가 모자 안에서 토끼를 꺼내는 것과 같았다. 

15가지 작전계획이 검토되다가 마켓 가든Market Garden작전이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몽고메리가 1944년을 넘기기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야심차게 결정한 이 작전은 준비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겨우 5일 만에 병사들에게 새 전투계획을 숙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수여단은 서로 다른 날에 다른 비행기로 투하되었다. 



대전차포대는 제1 공정여단Air Landing Brigade과 함께 북쪽 강둑에 내릴 예정이었던 반면에 본대는 아른헴 남쪽 2km 지점의 라인강 하류Neder Rhine 남쪽 강둑에 내리기로 되었다. 

‘작전초기에 중화기도 없고 탄약보충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임무가 다른 부대가 뒤섞여 싸워야했다.’

첫 번째 집단은 아른헴다리를 확보한 후에 강을 건너 아른헴 동쪽외곽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두 번째 집단은 엄호를 하면서 부교를 확보하는 것으로, 세 번째 집단은 대공포와 탐조등부대를 궤멸시키고 주 다리를 장악해 병력과 장비를 합류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독일군이 퇴각 중이었지만 패잔병이 아니었다. 우리의 목표를 알면 그물을 피하려는 쥐처럼 싸울 것이 분명했다. 경화기로 무장한 우리는 상대가 안되었고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영국사령부는 독일군부대에 대한 네덜란드 저항조직의 보고를 계속 무시했다. 소사보흐스키는 독일군의 전력이 훨씬 강할 것으로 염려했다. 

아른헴 주변은 독일군에게 요충지였고 공수부대만으로는 착률지역과 다리를 점령유지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투하되면 독일군은 공중이나 착륙직후의 무방비상태를 마음껏 공격할 수 있었다. 장교들에게 이번 작전은 소풍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연합군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계획과 달리, 독일군은 SS 기갑사단 2개와 보병사단 2개 외에 다양한 전투부대가 있었습니다. 


영국 제1 공수사단이 목적지에서 몇 km 밖에 투하되면서 기습효과라는 가장 큰 무기가 사라졌다. 폴란드 공수여단은 글라이더를 타고 9월 18일과 19일에 착륙했고 독일군은 각 집단을 따로 상대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대전차화기를 가진 두 번째 집단은 독일군의 포위망에 착륙해서 곧바로 격전이 벌어졌다. 

글라이더가 상공과 지상에서 산산조각나면서 많은 병사가 중상을 입었다. 기상악화 때문에 본대는 영국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9월 21일에야 출발했다. 

소사보흐스키는 무전교신이 안되어 신문으로 아른헴 전투상황을 보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기습효과가 사라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시간은 독일군의 편이었다.’ 공수여단의 착륙지는 마지막 순간에 7km 더 떨어진 곳으로 변경되었다. 




실제로는 작전이 취소되었지만 겨우 41대의 다코타Dakota 글라이더(제1 대대)만 명령을 받고 회항했다가 23일에 다시 투입되었다. 나머지 73대는 명령을 못듣고 그대로 목적지로 갔다가 독일군의 맹렬한 대공포화를 맞았다. 젊은 미군조종사들은 주변의 글라이더가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는데도 침착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소사보흐스키아 1,067명이 착륙했지만 곧바로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뒤집어썼다. ‘총을 맞은 병사들이 땅에 떨어졌다. 흰 낙하산이 천천히 날리면서 시신이 끌려갔다. 마치 전장의 전우를 도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백병전을 벌인 끝에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집합지점으로 향했다. 새로 설치한 사령부 무전기가 동작하지 않았고 제1 공수대대를 찾을 수 없어서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2, 3 대대와 연락이 되었다. 



전반적인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아른헴은 독일군 수중에 있었고 이전에 투하되었던 영국군과 폴란드군 일부는 오스테르베크Oosterbeek에 고립되어 악전고투 중이었다. 폴란드대위 한 명이 강을 헤엄쳐 건너 강 양쪽의 폴란드부대를 연결시켰다. 독일군이 연락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단이 북쪽 강둑으로 건너가 1사단을 지원할 수 있도록 어커트가 뗏목을 보내겠다고 했다.

‘영국군과 아군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북쪽에서 죽어가는 동안, 반대편에서 무기력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지는데도 뗏목이 보이지 않자 여단을 그대로 노출된 강변에 둘 수 없었다. 독일군의 압박이 점차 심해지고 라인강 북쪽 상황은 그만큼 악화되었다. 1시단은 증원이 필요했다. 뗏목도 없이 건너갈 방법이 없었다. 



초소형 보트Dinghy를 타고 건너온 마이어스Myers중령덕분에 고무보트로 병력을 실어나르기로 했다. 독일군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약 200명의 병력을 옮길 수 있었다. 

오스테르베크와 아른헴 외곽이 화염에 휩싸였고 폴란드 공수여단은 탄막을 뚫고 접근해야 했다. ‘폴란드군은 연거푸 총격세례를 받았다. 비가 내리듯이 퍼붓는 총탄세례를 견디며 접근해왔다.’

날이 저물자 보트가 지그재그로 독일군의 총탄을 피하며 건너기 시작했지만 독일군의 조명탄 때문에 겨우 50명 정도만 강을 건너 합류할 수 있었다. 


‘위기의 연속이었다. 양쪽 어느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전황이 오락가락했다.’

9월 23일, 브라우닝은 공수여단에게 강을 건너라고 명령했다. 이번에는 43사단이 보트를 지원하기로 했다. 소사보흐스키는 정예 공수부대에게 왜 강을 건너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명령은 명령이었기에 음식과 탄약을 요청했다. 이번에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도착한 보트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옮기기 힘들었다. 전날밤에 건넜던 지점은 이제 위험했고 근처의 공장이 갑자기 불타면서 부근을 환하게 비췄다. 독일군의 기관총세례로 첫 번째 보트의 병사들은 모두 사상당했다. 

새 도강지점을 찾았지만 역시 독일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총탄과 포탄의 지옥이었다. 약 200명이 가까스로 강을 건너 오스테르베크의 시가전에 합류했다. 


9월 24일 오전, 장갑차를 타고 도착한 호록스Horrocks장군은 소사보흐스키에게 작전회의에 참석하라고 알려주었다. 두 곳에서 강을 건넌다는 계획이었다.

영국과 폴란드 2개 대대가 페리가 침몰한 지점에서 보급품과 중화기를 가지고 도강하고 나머지 폴란드 공수여단이 이전에 실패한 지점에서 세 번째 도강을 시도하기로 했다. 소사보흐스키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도 연락이 끊겼던 폴란드 제1 대대가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브라우닝은 소사보흐스키에게 도강시도보다는 네이메헌Nijmegen에서 아인트호벤Eindhoven까지의 도로를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제2 대대는 도강지점에 자리를 잡았지만 보트가 제대로 도착하지 않아서 작전이 지연되었다. 결국 독일군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300명 중에 겨우 100명만 되돌아왔다. 장비와 탄약도 나타나지 않았다. 


9월 25일,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는 베를린Berlin작전이 결정되었다. 시내의 시체는 급히 매장하고 부상병은 그대로 남겨 포로가 되었다. 남쪽 강둑으로 철수하는 동안 포탄이 날아들었다.

‘죽음이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우리는 죽음을 보있다. 환상적인 전설을 그린 그림을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죽음이 우리를 잡기 전에 힘이 먼저 빠졌다.’

폴란드군 2개 중대가 후위로 남아 엄호했고 저녁 9시 30분부터 강으로 병력이 빠져나갔다.




연합군 사령부의 조급한 작전기획과 진행으로, 최대 17,000명의 정예부대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피해는 기록마다 다른데 3,300명부터 최대 13,000명까지 다양합니다. 


‘전투는 위험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지휘관은 반드시 이 위험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어커트는 정예의 경무장 공수부대를 보병부대로 사용하면서 증원과 지원을 하지 않는 말도 안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소사보흐스키가 처음부터 지적했던 마켓 가든의 문제점은 실제로 드러났는데도 작전실패의 책임을 폴란드 공수여단에게 물으려했다. 브라우닝과 호록은 소사보흐스키의 명예를 짓밟았다. 브라우닝은 몽고메리에게 소사보흐스키의 해임을 주장했고 몽고메리는 폴란드 공수여단이 싸울 준비가 전혀 안되었다고 기록했다. 

1944년 12월, 소사보흐스키가 해임되었다. 


‘몸은 떠났지만 정신은 부대원과 남았다.’

소사보흐스키는 다시는 지휘를 하지 못했고 조국으로도 귀국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정부는 서부전선에서 싸운 병사들을 반역자로 낙인찍어 많은 폴란드병사가 그대로 서유럽에 남았다.

소사보흐스키는 런던의 공장창고 직원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바르샤바봉기를 지휘한 보르 코모로프스키Bor Komorowski장군은 런던에서 가구수리공이 되었다. 팔레스 포위망Falaise Pocket에서 성공적으로 제1 폴란드 기갑사단을 이끌었던 스타니스와프 마체크Stanislaw Maczek는 에딘버러Edinburgh에서 바텐더로 일했다.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 목숨을 바쳐 조국을 해방시키려던 공수부대원과 소사보흐스키의 희망은 영원히 꿈으로 남았다. 



독일의 폴란드침공 당시, 마체크 기갑여단은 단 한 번도 패전하지 않은 채로 분투를 벌이다가 헝가리로 넘어가 해산되었습니다. 


영화 머나먼 다리는 당시 유명한 영화배우는 모조리 출연한 초대형 전쟁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전차는 현대전차에 대충 표식만 그려넣은 헐리우드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해서 비웃음을 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