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의 7대 전차전 - 할힌골전투
할힌골Khalkin Gol전투는 1939년 5~9월 기간 동안 소련, 몽골과 일본이 벌인 우발적인 전투였다. 할힐골전투가 끝나고 몇 주 후에 소련과 독일은 각각 폴란드를 침공했다. 일본 제6군은 노몬한 Nomonhan마을 부근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북쪽확장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신에 더 약하고 소규모 지역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 전투는 소련의 동맹인 몽골인민공화국과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사이에 국경분쟁이 벌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만주국은 할힌골강이 국경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몽골은 그보다 최소한 20km 안쪽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은 빠르게 공세로 나설 기회가 있었는데도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물러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공세로 나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할힌골전투는 일본 관동군과 꼭두각시 만주국이 멋대로 벌인 국지전이었습니다. 이들의 계획은 무척 거창했습니다만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거의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 소련군과 일본군의 복장입니다. 양국 모두 본격적인 2차대전 무장과 거리가 먼 상태입니다.
신임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는 유럽에서 전쟁발발이 임박했기 때문에 하루빨리 소강상태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주코프는 전차여단 3개(4, 6과 11), 기계화여단 2개(7과 8, 보병지원을 받은 장갑차부대)를 모았다. 소련군은 보병사단 3개, 전차사단 2개, 전차여단 2개, 기계화보병사단 2개, 전투기와 폭격기 550대로 늘어났다. 전차는 BT-5와 BT-7 500대 정도였다.
몽골은 기병사단 2개를 지원했는데 일본 정보망은 러시아군의 증원과 공세규모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코마츠바라Komatsubara의 23보병사단이 여러 곳에서 증원을 받아 경보병사단 2개 규모로 늘어난 것이 전부였다. 더구나 일본사령부는 전장에서 150km 떨어진 하일라르Hailar에 있어서 전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2차대전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주코프입니다. 종전 후에는 토사구팽당해 좌천되었다가 스탈린 사후에 명예회복했고 다시 군개혁에 반대해서 밀려났다가 명예회복했습니다. 천수를 누리고 1974년에 사망했습니다.
8월 20일, 주코프는 폭격과 포격으로 동시에 시작했다. 세계최초로 전투기와 폭격기를 동원해 제압폭격을 한 후에 기갑부대가 측면으로 돌아 후방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노모한 부근에서 일본군 전체를 가두었다.
포위망에 갇힌 일본군은 항복하지 않고 탈출을 시도했다. 코마츠바라는 남북 양면으로 반격에 나서 전황을 뒤집을 생각으로 7월 1일에 남쪽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성공을 거뒀지만 그 이후는 별 전과가 없었다.
소련군전차는 보병의 지원없이 반격하는 일본군에게 포격을 퍼붓고 포위망을 유지했다. 일본군은 대대적인 포격의 엄호를 받으며 2개 사단병력이 강을 건넜지만 멀리 가지 못했다.
소련군과 일본군 병력은 비슷했지만 전술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소련군은 초반의 기습효과를 유지하면서 일본군을 계속 밀어붙였다. 일본군의 반격은 번번이 실패했고 소련군은 일본군을 만주국경까지 밀어냈다.
러시아와 일본은 불가침조약을 맺고 휴전했고 러시아는 이제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일본은 8,500명 전사에 비슷한 부상자를, 소련은 9,000명 사상으로 기록했는데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역사가는 일본군 피해를 45,000명까지 추산하고 있는데, 선전과 사기문제 때문에 초반 피해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병력손실뿐만 아니라 사고와 고장 등으로 인한 비전투손실도 상당했다. 소련은 전투에서 폭격기 40대와 전투기 160대를 잃었고 폭격기 50대와 전투기 380대가 손상되었다. 일본군은 거의 전투기 100대, 폭격기 25대와 정찰기 몇 대를 잃었고 전투기 130대, 폭격기 50대와 일반항공기 40대가 손상되었다.
러시아는 공중전에서 총 200명을 잃은 반면에 일본은 210명을 잃었다. 일본은 이 전투 후에 시베리아를 포기하고 광물이 풍부한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노렸고 해상공격을 시작했다. 일본이 그대로 러시아와 계속 충돌했다면 진주만공습을 없었을 것이다.
영화 마이웨이 초반에 할힌골전투 장면이 거창하게 나옵니다만... 공상과학수준의 히어로물입니다. 소총으로 전투기를 잡고 달리는 전차 위로 뛰어 오르는 유치한 장면이 연이어집니다. 뒤로 갈수록 더 황당해집니다만.
일본은 할힌골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감추며 개인의 명예와 용기를 부각시켰고 여전히 구시대 전략전술에 집착했다. 더구나 할힌골전투는 일본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소련은 할힌골전투에서와 같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공전력과 전차의 합동작전으로 독일군을 협공해서 궤멸시켰다. 여기에서도 주코프가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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