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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7) - 공성무기

by uesgi2003 2012. 5. 6.

이제 탐색전을 지나 본격적인 공성전에 돌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설명하려고 했었던 핵심은 이미 지난 이야기에서 제가 참지 못하고 이미지로 모두 풀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재미있는, 그리고 저도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이야기들이 있으니 여러분도 재미있는 차례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좀 걸렸던 만큼 이야기가 좀 길어지니까 여유있는 시간에 즐기시기 바랍니다.

모든 이미지는 IE9으로 보셔야 이미지와 설명이 제대로 연결되며 클릭하면 좀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 처음 오신 분은 아래 이야기 순서대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시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1) - 크레시 전투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2) - 푸아티에와 아쟁쿠르 전투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3) - 원정에 나서기까지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4) - 수성전을 준비하며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5) - 대치와 협상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6) - 탐색전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7) - 공성무기

 

양쪽이 맹렬하게 서로를 공격했다. 피에 굶주린 무기가 허공을 가르며 쓰러진 병사를 베었다. 투석기와 활은 돌과 화살을 쏘아댔고 부상당한 병사들이 낙엽처럼 땅에 떨어졌다. 성 안의 병사들은 뜨거운 납과 유리 녹인 물 등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던 쏟아 부었다. 공격군은 방패 뒤에 숨어 파성추(Battering Rams)와 원거리 공성무기를 동원했지만 해자 근처에 접근하면서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고 피에 젖은 칼은...

 

갈란드의 존이 1218년 톨루즈(Toulouse) 공성전을 묘사한 글이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 탐색전을 끝낸 양쪽은 공성무기를 설치해 본격적인 공성과 수성전을 펼칠 차례이지만 공성무기를 만들어 자리잡는 데까지 최소한 며칠 또는 몇 주의 시간이 걸린다. 그 때까지는 프랑스군의 석궁과 영국군의 장궁이 간헐적인 소모전을 펼치게 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성안의 주력은 프랑스 본대의 호출을 받아 떠났기 때문에 성안에는 영주의 사병과 근처 마을에서 징집한 농노병이 전부다. 잡병에 불과한 농노를 이끌고 전투에 이골이 난 영국군을 상대로 성을 지키려면 농노를 석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석궁은 1066년 헤이스팅(Hastings) 전투에서 노르만족이 가장 먼저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궁의 위력은 중장갑 기사의 갑옷을 가볍게 뚫을 수 있을 정도였고 바티칸은 1139년에 기독교 국가들의 전투에서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석궁을 사용하지 말고 이교도 상대로 사용하라는 공표를 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농노를 징집한 후에 석궁으로 무장시키면 별다른 훈련없이도 전투에서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영주들은 서로를 상대로 서슴없이 석궁을 사용했다.


석궁은 조준간까지 있어서 별다른 훈련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그림과 같이 장전하는데 기구(윈치, 도드레, 염소발 등)를 이용해야 했고 발사속도가 너무 느려 엄폐물이 반드시 필요헸습니다. 백년전쟁에서 압도적인 숫자에 방심한 제노바 석궁병이 거치형 방패없이 영국의 장궁병에 맞섰다가 궤멸당하면서 참패하게 됩니다. 


석궁은 강력한 위력에 비해 너무 느린 발사속도라는 분명한 단점이 있기 때문에 파비스(Pavise)라는 거치형 대형방패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지만 성벽 뒤에서 사용할 경우에는 다른 어떤 무기보다도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발사한 후에 몸만 비틀면 성벽 뒤에서 안전하게 재장전할 수 있고 궁수와 장전수 2인 체제로 역할을 나누면 사격 훈련도 필요없고 발사속도도 크게 높일 수 있다.


프랑스군이 성벽을 향해 길을 파고 공성무기를 제작하는 인부들을 저격하는 동안, 영국군은 장궁병을 동원해 엄호를 한다. 영국군에게는 장궁병 말고도 원거리 전력이 더 있었다. 가장 매서운 원거리 공격은 원시적인 새총(Sling)으로 무장한 농노들이었다.

성경에서도 다윗이 새총으로 적을 쓰러뜨렸던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투석병은 훈련도 필요없고 공격무기를 조달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중세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농노들은 어릴 때부터 새총으로 사냥을 해왔기 때문에 실전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숙련된 투석병이며, 주변에서 징집한 농노들 수 천 명이 쏘아댄다면 분 당 수 만 개의 돌을 프랑스 석궁병 머리 위로 날려 그들이 제대로 조준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투석병은 고대 전투부터 중요한 원거리 전력 중 하나였고 중세 초에도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림은 앗시리아 투석병입니다. Sling을 우리 말로 그냥 새총이라고 바꿨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새총보다 훨씬 큰 돌을 훨씬 멀리 던질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장궁병에 대해서는 역사를 한동안 주름잡았던 정예병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전설에 걸맞는 별도의 이야기에서 설명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영국이 장궁병에 얼마나 심취했었는지만 설명하도록 하자.
장궁병의 가치를 깨달은 영국 왕들은 건강한 남성은 전부 활쏘기 연습을 시켰다. 심지어 에드워드 4세는 1466년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16~60세의 모든 남성은 자신의 키만한 장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왕명을 내렸을 정도다. 1474년 에드워드 왕은 수 십 년 동안 훈련된 14,000명의 장궁병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의 몸을 지지대삼아 큰 화살을 발사하기 때문에 오랜 훈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건장한 남성이어야만 했습니다. 적의 전열을 흐트러놓고 기병의 접근을 방해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갑옷과 같은 무장은 하지 않았고 백병전이 벌어지기 전에 후방으로 빠졌습니다.

활 외에 보통은 작은 손도끼 정도로만 무장을 합니다. 그리고 전투대열에 들어서면 앞에 화살을 꽂아두었고 소년병들이 마차를 오가면 쉴새 없이 화살을 재공급했습니다. 


장궁병은 허리에 24발 또는 36발의 화살을 매달고 전투를 시작한다. 1,000명의 장궁병은 분당 10,000~12,000 발의 화살을 적에게 퍼부을 수 있는데 우리의 시나리오에서는 700멍의 영국 장궁병이 분당 7,000~8,400발의 화살을 프랑스 성으로 날릴 수 있다. 여기에 몇 만발의 돌덩어리를 쏘아대는 투석병이 투입된다면 프랑스군은 성을 향해 진지를 파들어오는 인부를 제대로 저격할 수 없게 된다.


성을 함락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 그대로 땅굴을 파거나 성벽에 구멍을 내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탐색전부터 시작하듯이 이성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공성무기를 동원해 성벽의 내구성과 프랑스군의 저항의지를 먼저 시험해볼 것이다.

대형 공성무기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원정길에 가지고 나설 수 없다. 배로 실어 나를 수 없다면 핵심 장치만 수레에 실어 운반하고 뼈대는 모두 현지에서 나무를 베어 조달하게 된다. 그래서 주변에 울창한 숲이 우거진 성은 평상시에 목재를 팔아 보다 크고 튼튼한 성을 지을 수 있고 성안에 공성무기를 비축해 둘 수 있는 반면에 공성전에서는 적이 대형 공성무기를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 불리함도 동시에 가지게 된다.


 

1339년 Channel Islands로 소형 공성무기와 부품을 옮기는 프랑스군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프랑스군도 영국군의 침공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공성무기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영국군이 대형 공성무기를 제작하고 있는 동안 영국군 진영을 먼저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돌아가는 지휘관이라면 가장 약한 공성무기를 몇 대 동원해 영국군 진영 근처에도 훨씬 못 미치는 공격을 할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공성전은 체스 경기와도 같다. 단, 내가 어떤 말을 가지고 있는지 상대가 알지 못한다는 점을 빼고.

적에게 턱없이 약한 말을 보여주었는데 적 지휘관이 경솔하거나 경험이 없다면 프랑스군의 미끼를 문다음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공성무기를 제작하기 시작할 것이다. 무기가 제한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공성무기가 실전에 투입되기 직전에 가장 강력한 공성무기를 총동원해 몇 주 동안 공들인 영국군의 수고를 무너뜨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을 벌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시나리오에서는 양쪽 지휘관이 모두 어느 정도의 경험과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유인은 실패로 돌아가고 영국군은 대형 공성무기 제작을 마치고 본격적인 포격전에 돌입한다.

 

화약무기가 도입되기 전까지의 대형 공성무기는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기술이 뒤섞여 사용되었는데, 크게 인장력(Tension), 염력(비트는 힘, Torsion), 반동력(Counterweight)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인장력 공성무기는 대형 석궁이 대표적이며, Torsion 공성무기는 망고넬(Mangonel), 캐터펄트(Catapult). 발리스타(Ballista)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반동력 공성무기는 페리에(Perrier)와 트레부셋(Trebuchet)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가장 큰 공성무기였다.

 

다빈치가 미술품 외에도 무기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빈치가 생각했던 대형 석궁입니다.

 

공성무기는 현대 폭격기 노즈아트와 같이 다양한 별명을 붙였는데, 목숨을 걸지 않고 공성무기만으로 성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다빈치가 그린 또 다른 인장력 공성무기입니다. 앞의 대형 석궁과 달리 이런 형태의 공성무기는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염력(텔레파시 초능력이 아닙니다^^) 공성무기의 대표주자인 캐터펄트입니다.

비틀어진 로프더미에 투석기(Arm)을 끼워 비틀어진 힘을 이용해 돌을 날렸는데, 그림보다 큰 캐터펄트는 5~10kg 정도의 돌을 최대 500미터 날려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클릭해서 설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백년전쟁 당시로 가서 귀중한 사진을 찍어 온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발리스타는 무게가 가볍고 조작이 간편해서 성벽이나 탑 안에서 응사하는데 아주 좋은 무기였다. 유효 사거리는 다른 공성무기에 비해 짧지만 높은 성벽이나 탑 위에 올리면 그만큼 사거리가 늘어나서 적의 공성무기를 충분히 공격할 수 있었다.
885년 파리 포위전에서는 한 발의 발리스타 화살에 4명이 관통 당해 그대로 주방으로 가져가 꼬치요리를 해도 되겠다는 농담을 했을 정도로 심리적인 위협이 대단했던 무기다.
염력 공성무기의 최대 단점은 사거리와 위력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계속 사용하다 보면 염력 반동이 느슨해지면서 사거리가 줄어든다. 그리고 비를 맞게 되면 염력의 핵심인 밧줄이 풀어져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탑 안에서 비를 피한다고 해도 아침의 축축한 습기를 피할 수는 없다.

 

 

염력의 또 다른 대표주자 발리스타입니다.

사용법은 그림을 클릭해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른쪽의 저 사람 인터뷰하느라 고생했다는 것 아닙니까 ㅡ.ㅡ

프랑스 사람이라 영어를 못하더군요.

잘 싸우게 생겼다고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블로그 글써야 한다고 달래고 왔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중세 사람들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는 법이 없다고... 삐져서 제게 등돌리고 화살을 쏘는 척 하고 있습니다^^;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 역사 왜곡을 한 것 빼고는, 빼어난 고증때문에 감탄에 감탄을 하면서 봤던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입니다.

성벽 위에 캐터펄트가 배치된 것이 보이죠?

리들리 스콧 영감님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 로빈 후드는 왜 그렇게 만드셨나요???

 

염력 공성무기는 단단한 성벽을 상대로는 아무런 위력이 없지만 성 안의 수비군에게는 제작과 운용이 간편하기 때문에 가장 인기있는 대응무기였다.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을 지탱할 지지대만 있다면 세상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간단한 명제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반동력 공성무기인 페리에와 트레부셋 이다. 반동력 공성무기는 의외로 13세기 아랍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아랍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형태는 여러 명 또는 말이 잡아당겨 발사하는 초기 형태였고 유럽에는 페리에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트레부셋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클릭해서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성의 규모와 내구성이 발달되면서 공성무기도 함께 대형화되었고 근육의 힘만으로는 충분한 위력을 얻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중세 공학자들은 구조적인 반동력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역사기술 센터가 재현한 옆 그림의 트레부셋은 1.5톤의 무게로 160kg의 돌을 날려보낼 수 있었다. 중세기술로만 제작되었는데도 발사방향과 각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1189~91년 아크레(Acre) 공성전에서, 프랑스왕은 페리에를 동원해 성벽을 무너뜨렸다. 영국왕이 가진 공성무기는 단 한 발로 12명의 병사를 죽였다. 너무 놀란 사라센은 돌을 주워 살라딘에게 보냈다....

 

킹덤 오브 헤븐과 같은 영화를 보면 성벽에 돌을 쏘는데도 마치 폭탄이 터지듯이 화염이 솟구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잠시 후에 설명할 그리스 불을 붙인 인화물질을 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장관이 연출되는 것이죠.

 

위력과 사거리가 크게 늘어난 트레부셋은 이탈리에서 12세기 말에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곧이어 초기 십자군 원정에도 동원되었다. 영국에서는 1216년, 프랑스 루이왕자가 도버(Dover) 포위전에서 처음으로 동원했는데 배에 실어 템즈강으로 접근하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웠던 탓에 배가 가라앉았고 프랑스군은 샌드위치(Sandwich)에서 참패를 당했다.
수비군에게 있어서 트레부셋이 가장 무서운 공성무기였던 것은, 위력이나 사거리도 있지만 같은 곳을 반복해서 정확하게 포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1244년 듀란드 주교는 Montsegnur 성을 공격하면서 트레부셋을 동원해

한 지점을 24분에 한 발씩 총 88발을 쏘아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영국 에드워드 1세가 1304년 스코틀랜드가 점령한 스털링 성을 포위했을 때에는 초대형 트레부셋을 제작하느라 50명의 목수와 50명의 인부를 투입하고도 몇 주가 걸렸고 핵심부품은 30대의 마차와 세 척의 배에 실어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털링의 스코틀랜드군은 트레부셋이 완성되기도 전에 항복을 했는데, 에드워드는 그 동안의 수고가 아쉬웠던지 아니면 스코틀랜드를 너무나도 싫어했던 성격때문이었던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을 봉쇄한 다음 공포에 질린 수비군에게 포격을 했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예루살렘 성벽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찾아낸 후에 집중 사격해서 성벽을 허무는 장면이 나옵니다.

 

트레부셋은 수비군에게도 귀중한 무기였다. 주변에 숲이 있다면 공격군 못지 않은 위력의 트레부셋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공격군에 충분한 대응사격으로 맞설 수 있었다. 1340년 Montagne 포위전에서는 수비군의 프레부셋이 3발 만에 공격군의 트레부셋을 박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반지제왕:왕의 귀환에서 수비군의 대응사격 장면이 나오죠?)

전쟁영화를 즐겨본 사람이면 투석기에 사람을 날려보내는 충격적인 장면을 기억할텐데 과장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흔히 있었던 일이다. 성을 재활용하고 싶다면 외부에서 조심스럽게 공략해야겠지만 성을 완전히 파괴시켜 전력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트레부셋을 이용해서 다양하게 공략할 수 있다.

트레부셋으로 불붙은 인화물질을 쏘아 성에 불을 지른다던가 말과 양 심지어 사람의 시체를 일부러 썩힌 다음에 성안으로 쏘아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1422년 캐롤스타인(Carolstein) 요새를 공격하면서 수레 몇 천대 분량의 똥을 성안으로 쏜 적도 있었다. Auberoche 포위전에서는, 성에서 항복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전령을 보냈는데, 공격군은 극단적인 거부의 뜻으로 전령을 트레부셋으로 쏘아 돌려보냈다.

더 충격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그들은 전령의 목에 협상거부 편지를 매단 다음 트레부셋으로 쏘아 돌려보냈다. 전령은 성 안에 떨어지자 마자 즉사했으며 그가 성 안으로 날아오는 모습을 본 병사와 기사 모두 충격에 말을 잃었다.

 

제가 참조한 책에 깨알같이 이 장면이 연출되어 있습니다. 고문하고 트레부셋으로 날려보내는 장면인데... 어이 영국군 엑스트라 그래도 거길 차면 안되지.... 내가 고자라니....어차피 죽을 것이지만....

 

당시 도덕관념이 거의 없던 유럽에서는 이런 행위가 당연한 전술이었습니다.

멋지게 보이는 기사들이 사실은 일자무식의 조폭형 몸빵들이었고, 프랑스 식사 예절은 너무 단순해서 기가 막힐 정도였죠.

 

대형 공성무기에 휩싸인 수비군에게도 그리스 불이라는 무서운 반격무기가 있었다. 끈적끈적한 점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공성무기 표면에 달라붙어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는 상당히 무서운 무기였다.
그리스 불은 674년 콘스탄티노플이 다마스커스 칼리프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절망적인 상태였을 때에 칼리니쿠스(Callinicus)라는 시리아 화학자가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제조법은 극비에 붙여져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칼리니쿠스의 발명품을 뒤집어 쓴 이슬람 함대는 전멸했고 그 후 8세기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13세기 정도에 일부 도서를 통해 그리스 불의 재료가 유황, 기름, 소나무 진액, 고무수지, 질산칼륨이라는 것이 누출되었고 그 후부터는 수비군의 중요한 반격무기가 되었다.
공격군이 다가오면 수비군은 펌프나 양동이로 진액을 공격군에게 붓고 불을 붙였다. 그 효과는 엄청났는데, 심지어 해자에서도 물 위에서 불이 붙어 물에 뛰어든 병사도 모두 타죽었다.
공격군도 성에 불을 지를 목적으로 그리스 불을 사용했다. 브르테이(Breteuil) 포위전에 대한 기록을 보자.

 

...공격군은 공성무기로 탑에 그리스 불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탑 지붕에 불이 붙었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타 죽지 않으려고 탑에서 달려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타죽었는데, 살아 남은 사람들도 어디로 피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그리스 불을 끌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삭힌 오줌이나 강산성 식초를 뿌리는 것이었다. 신선한 오줌에는 암모니아가 너무 많아 효과가 없었고 이미 맹렬한 붙은 불에 오줌 몇 줄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공성전이 장기전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면, 양 진영의 병사들은 그리스 불에 대비하기 위해 오줌을 저장하고 삭혔다. 그리고 본격적인 공성전이 시작되면 수비군은 외부에 노출된 모든 목재 벽과 지붕에 오줌을 뿌리거나 오줌을 흠뻑 먹은 가죽으로 덮었고 공격군 역시 운제차와 파성추와 같은 돌격형 공성무기에 오줌을 충분히 뿌렸다.

 

그리스 불을 사용한 공성전 중세 그림인데, 글자로 봐서는 이슬람쪽 자료로 보입니다.

 

삭힌 오줌에서 나오는 가스는 너무 지독해서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병사들이 쓰러질 정도여서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장엄한 공성전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장면이었다.


 

킹덤 오브 헤븐의 장엄한 공성전 모습이 실제로는 지린내와 구린내가 진동하는 아주 더러운(?) 전투였다는 새로운 사실입니다.

 

우리의 시나리오로 돌아가서, 영국군이 공성무기를 동원해 성에서 취약해 보이는 부분을 집중 포격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대응사격으로 영국군의 공성무기 3대를 부수는 대전과를 올렸다. 영국군에게는 이제 2대의 트레부셋과 한 대의 페리에만이 남았는데, 프랑스군의 맹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겁을 먹지 않은 공병들이 계속 포격을 집중시켜 귀퉁이의 한 탑을 부수고 그리스 불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그 탑을 포기하게 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성 전체의 5%도 안되는 탑 하나 공략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제 공성전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된 것이다.
영국군은 무방비 상태의 탑으로 향해 인부를 동원해 참호나 땅굴을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영국군의 다음 작전이 눈에 빤히 보이는데 프랑스군이라고 그냥 두고 볼 수 만은 없으며 적의 시도를 무력화시킬 작전을 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