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5) - 대치와 협상

 

이제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당시 병사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공성과 수성전이 펼쳐집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성앞에 이르자마자 바로 공격해서 수비군을 기습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지만 실전에서는 가장 멍청한 짓이고 대치->협상->탐색전을 거쳐 길게는 몇 년까지도 계속되는 포위와 대치 상황이 벌어지면서 성밖에는 공격군의 새로운 마을이나 도시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몇 년씩이나 포위한다는 것이 미련스럽게 들릴 수 있어도 2차대전 동부전선의 레닌그라드 전투도 900일 가까이 포위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기가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포위가 더 길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1) - 크레시 전투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2) - 푸아티에와 아쟁쿠르 전투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3) - 원정에 나서기까지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4) - 수성전을 준비하며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5) - 대치와 협상

 

이제부터 이야기는 영국군 주력과 프랑스군 주력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상관없이 계곡을 막아선 성을 둘러싸고 수비군과 영국군 별동대의 힘겨루기에만 집중할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수비군은 영국군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이고 영국군도 최소한 2개월 동안의 식량을 가져왔고, 등 뒤의 프랑스 구원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무난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상태다.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공성전은 상당히 조심해야 하는 전투이며 성 앞에 가자마자 대낮에 전병력을 동원해 공격할 바보는 없다. 성은 꼭 무력으로 무너뜨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대한 조건을 내건 협상, 반란조장, 굶주림과 같은 방법으로도 공략할 수 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설득과 협상으로 또는 아사직전까지 몰아넣어 수비군이 걸어 나오게 만드는 것이 졸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안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성에 도착한 영국군은 마치 마상경기를 주최하는 것과 같은 협상작업부터 시작한다. 완전무장한 전체병력과 줄지어 세우고 온갖 깃발을 세워 성을 완전히 둘러싸서 자신들이 얼마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랑한다.
프랑스군은 반대로 성벽과 탑 위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세워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군은 성 안의 정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허수아비 병사까지 동원한다.

 

2천 명의 영국군과 400명의 프랑스군이 서로 대치하면서 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10여명만 보이는 분은 이번에 투표안하신 분입니다.^^

 

양쪽이 전력을 과시하며 서로를 협박하는 대치는 체스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말이 서로 대치하고 있고 공격거리나 강도는 비슷한 상태에서 결국 승패를 가르는 것은 지휘관의 자질이다. 공격과 수비준비, 대치, 협박, 협상을 모두 거친 후에 첫 번째 말을 움직이고 피비린내나는 공성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력을 즐기는 지휘관이라도 협상을 거쳐야 한다.
영국군은 성을 향하는 모든 보급로와 탈출로를 끊은 후에 성벽으로 전령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한다. 공성전은 공격하는 영국군은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수비군도 기약이 없는 구원군을 기다려야 하고 만약 프랑스 주력이 패배를 한다면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잔인한 보복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협상조건을 신중하게 검토하게 된다.
만약 공격 측 지휘관이 워낙 유명한 인물이어서 그가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성의 사기를 떨어뜨려 협상에 나서게 만들 수 있다. 뛰어난 전략가로서의 명성도 중요하지만 아주 잔인하기로 악명을 떨친 것도 큰 도움이 된다.

프랑스군이 성문을 열기로 결정한다면, 보통은 무기를 포함한 모든 장비를 가지고 떠나도 좋다는 조건일 것이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영국군의 목표는 배후를 노리는 성이지 그 안에 있는 병사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동대는 하루라도 빨리 본대에 합류해야 하는 사정도 한 몫을 한다.

 

(우에스기 왈: 아주 후한 협상으로 수비군을 끌어낸 후에 전멸시키면 되지 않느냐는 분이 있을 텐데, 그렇게 했다가는 그 이후의 어떤 성도 성문을 열지 않습니다. 후한 조건으로 성문을 열게 만들고 안전을 보장하면 앞으로 만날 성의 지휘관은 상황을 가늠한 후에 협상에 응하게 됩니다. 약속을 뒤집고 보복하는 것은, 성을 함락시킨 후에 아무도 살려두지 않고 학살하는 것보다도 훨씬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앞에서 나왔듯이 잔인한 것으로 이름이 높은 지휘관이 나타나면 수비군은 끝까지 버티다가 당할 운명을 놓고 결정하게 됩니다. 심약한 수비군이라면 성을 비워주는 것으로 선택하겠죠.
약속을 뒤집고 보복했다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 실제 전사는 상당히 많습니다. 술레이만 황제의 압도적인 병력과 후한 조건을 보고도 비엔나 수비군이 끝까지 버틴 것이라던지, 시바타 가쓰이에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만약 항복제안을 수비군이 거절한다면 영국군은 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그 안의 사람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수비군은 협상조건을 상급지휘관 또는 왕에게 보내 그의 결정을 기다리겠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시간을 벌기 위한 전술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한 명의 병력이라도 더 필요한 왕이 성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공격군은 시한을 두고 이것을 허락하기도 한다.

우리의 시나리오에서는, 프랑스 수비군은 아주 불리한 상황이 아니며, 지휘관과 기사들은 성벽에 올라 영국군의 전력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들만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협상조건을 거절한다.

"한 개의 벽돌이라도 서있는 동안에는 너희 영국군은 이 성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실망스러운 대답을 받은 영국군은 사다리를 동원한 전초전으로 프랑스 수비군의 전력과 의지를 실험해보기로 한다.
영국군은 성문에 화살을 쏘아 프랑스군에게 협상종료와 전투시작을 알린다. 수성전을 준비한 성이 단 한차례의 전초전으로 함락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성의 어느 지점이 약점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영국군은 성문을 포함한 전역을 넓게 공격해야 하고 최소 10%에서 최대 25% 정도의 병력을 잃을 수도 있다.
영국군은 24시간 하루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을 공격해 다음 작전에서는 어디를 집중공략할 것인지를 찾는 동시에 성벽을 공격할 병력을 여러 개로 나누어 4시간 단위로 교대를 시키며 치료와 휴식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은 24시간 동안 단 일분도 쉬지 못하고 전초전 내내 시달려야 한다.

공격대의 최전위가 무거운 사다리를 들고 성벽에 다가서고 성벽에 사다리를 걸치는 동안, 영국군 진영에서는 큰 방패 뒤에서 장궁병, 석궁병, 투석병이 엄호사격을 한다. 프랑스군보다 훨씬 많은 엄호사격덕분에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들판을 건넌 공격대가 첫 번째 장애물인 도랑을 만나게 된다.
도랑은 보통 물이 채워져 있지만 그 밑에는 날카로운 말뚝이나 별모양의 징이 뿌려져 있어서 부주의하게 뛰어드는 병사들의 발을 꿰뚫을 것이다. 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미 사다리를 운반하고 있어서 이번 전초전에서는 헤엄쳐서 건너는 수 밖에 없다.

 

최전위가 사다리를 기어올라가는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바닥에서 성벽 위까지는 보통 15m 정도가 넘고 공격대가 갑옷과 무기를 지닌 채로 엉금엉금 올라가는 동안 수비군이 공격을 하고 사다리를 쓰러뜨릴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공격이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병사가 절반까지만 올라가면 무게중심이 잡혀 사다리를 걷어차거나 밀어낼 수 없지만 반대로 수비군의 공격에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아래로 뛰어내리지도 못하는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