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어느 쪽에서 쳐다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특히 이번 이야기처럼 독일군전차 팬과 연합군전차 팬이 거품물고 싸울 주제는 더더욱 그렇죠.
그래서 다시 한 번 당부하지만 실생활에 도움이 안되는 잡상식일 뿐입니다. 그냥 하나의 지식으로 그리고 재미로만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인터넷 카더라를 퍼온 것이 아니라 2차대전 전사의 대가인 스티븐 잘로가Steven Zaloga의 자료입니다.
이 분은 지난 번 Death Trap의 저자 벨튼 쿠퍼Belton Cooper와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쿠퍼가 셔먼전차의 기술적인 우수성에 집중했다면 잘로가는 셔먼전차와 관련된 모든 변수를 다 종합해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쿠퍼는 셔먼전차가 판터에 상대조차 안된다고 단언한 반면에, 잘로가는 실제 전사를 예로 들며 생산량, 가동률과 전차병의 훈련수준까지 종합해 셔먼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시각과 주장이 모두 맞습니다. 두 분이 인정하듯이 대전차전은 누가 먼저 발견하고 첫발을 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집니다. 미군이 유럽에 상륙한 초기에는 독일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거리에서 첫발을 쏘았기에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였고, 독일본토가 위협받던 후기에는 무리한 작전으로 모든 장점을 버리고 달려 들어 셔먼이 첫발을 쏠 수 있었기 때문에 밑졌던 빚을 모두 되갚아주었습니다.
판터전차
1941년 6월, 독일육군은 러시아침공 중에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겪으면서 판터전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판터는 전차설계를 상당히 발전시켰다. 1942년까지, 독일중형전차는 무게와 크기 면에서 적과 비슷하거나 더 가벼웠다. 독일기갑사단의 주 임무는 보병이 침투할 진격로를 뚫어주는 선봉역할이었기 때문에 속도와 기동성이 더 중요했고 장갑과 화력은 그 다음의 우선순위였다.
3호와 4호전차는 대전차전에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기동전에 맞게 신뢰성과 내구성이 좋았다. 1942년, 독일군의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공격지향전략에서 수비지향전략으로 바뀌었고 소련군전차의 화력과 방어력이 큰 부담이 되었다.
1942년 당시 히틀러는 1944년 봄에는 장갑전투차량AFV생산을 매달 1,400대(판터 600대 포함)로 늘리라고 명령했다. 1943년 1월, AFV 생산량은 1,200대에 머물렀고 1944년 동부전선 최대의 고비인 여름작전에도 늘어나지 않았다.
화가 난 히틀러는 스피어Speer를 불러 생산량을 최대 2,000대까지 늘려 소련과 미군수준으로 맞추라고 명령했다. 생산자원을 전차에만 2배로 늘렸고 덕분에 AFV 생산량은 1942년 6,180대에서 1943년 12,013대로 급증했다.
소련의 T-34에 충격을 받고 영감도 받아서 개발한 판터입니다. 오버 엔지니어링으로 내부는 엉망이었지만 겉은 참 깔끔하게 생겼습니다. 고질적인 내구성 문제만 아니었다면 공수주 3박자가 완벽한 2차대전 최고의 전차였을겁니다.
러시아의 평원에서 숫자가 더 많은 소련군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장거리 75mm 포로 결정했고 판터도 더 두터운 장갑을 걸치면서 무게가 점점 늘어났다. 1941년 원설계에서는 22톤이었지만 양산형은 40톤이었다.
철합금 부족으로 고탄소 혼합물의 장갑을 사용했고, 용접이 어려워져서 장갑판을 복잡하게 짜맞췄다. 다급한 생산일정때문에 무게와 출력균형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했고 고질적인 내구성문제가 발생했다.
판터는 중Heavy전차였다. 원래 3호와 4호를 교체할 중형Medium전차였지만 너무 비싸고 복잡해서 생산량을 늘리지 못했다. 1944년에도 독일육군은 판터와 4호전차를 함께 편제해서 보급과 훈련의 부담이 컸다.
판터는 생산성보다 최적의 설계를 중요시하는 독일산업의 장인정신을 그대로 반영했다. 예를 들어, 벤츠의 리프 스프링Leaf Spring서스펜션(첫번째 그림 참조) 대신에 첨단의 토션바Torsion Bar서스펜션(두번째 사진 참조)을 채택한 데다가 복잡한 겹침형 로드휠로 더 복잡해졌다.
험지에서는 승차감이 좋았지만 전차의 실제성능과 무관했고 생산과 유지보수 비용만 올라갔다. 판터는 ‘완벽함은 우수함의 적이다’라는 엔지니어링 명언의 대표적인 예였다. 최신 기술을 모두 적용한 판터는 생산량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전쟁 말기에는 고무를 수입할 방법이 없어서 전차 휠이 철제 그대로 굴러 다니며 굉음을 냈습니다. 그래서 저 멀리에서도 '음 독일전차가 온다'를 알 수 있었죠.
1943년 여름, 쿠르스크Kursk에서의 데뷔전은 내구성문제로 끔찍한 재앙으로 끝났다. 1943년 기갑연대에 배치된 판터 D형 중 25%만이 움직였다. 모든 무기가 이런 저런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판터는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만슈타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쿠르스크 작전개시를 계속 미뤘을 정도로 기대가 컸던 판터입니다. 그렇지만 고장이 너무 심해서 데뷔전에서 스스로 링에서 내려오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1943년 내내 이런 문제점이 조금씩 해결되어갔다. 판터의 가동률은 1943년 7월 말 황당한 16%에서 12월에는 37%로 올라갔다. 판터 F형으로 부르는 개선형은 신형 지휘관 큐폴라와 포탑을 장착했다.
1944년까지 이어진 개선으로 동부전선에 투입된 판터의 가동률은 5월 말에 78%까지 치솟았다. 서부전선에는 1944년 2월 안치오Anzio에 데뷔했지만 큰 전투는 없었다. 군단지휘관은 진흙지형때문에 판터대대를 후방에 남겨두었고 이탈리아전역에서는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연합군은 독일전투기공장이 일차 목표였기 때문에, 독일전차공장, 특히 판터공장은 연합군의 전략폭격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판터생산량은 원래 목표인 매달 600대는 고사하고 최대 379대가 고작이었다.
연합군은 독일전차공장으로 눈을 돌렸고 판터와 타이거의 엔진이 마이바흐Maybach라는 것을 알고는 영국공군이 마이바흐공장을 공습했다. 1944년 4월 27일 밤에 있었던 이 공습으로 엔진생산이 9월까지 중단되었다.
만약 스피어가 지크마어Siegmar로 생산공장을 미리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판터는 그대로 사라질 뻔했다.
판터에 들어간 마이바흐 HL230 엔진입니다.
1944년 봄, 독일군수프로그램은 설계단순화로 생산량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판터의 경우에는 취소된 판터 2의 측면장갑을 판터 G형에 적용해 50mm로 늘어났다. 차체 해치, 운전병용 페리스코프 마운트, 파워트레인 냉각시스템 등도 개선되었다.
1944년 3월, 판터 G형이 생산되었고 1944년 여름부터 서부전선에 투입되었고 종전까지 계속되었다. 판터생산은 계속 증가했다가 연합군의 공습과 철 생산지 점령으로 다시 곤란을 겪었다. 우크라이나의 마그네슘 광산을 잃었고 노르웨이의 몰리브덴 광산도 폭격을 맞았고 핀란드와 일본에서 들여오던 금속공급도 끊겼다.
장갑의 몰리브덴함량은 1943년 0.55%에서 1944년 중반 0.25%로, 1945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아 판터장갑의 성능은 크게 악화되었다. 판터장갑 중 절반 정도가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판터공장 인부 중 대부분이 외국인강제노역으로 바뀌면서 판터의 연료와 윤활계통을 일부러 고장내는 일이 잦아졌다.
1944년 8월, 영국과 미국공군은 독일전차와 자동차공장을 체계적으로 공습하기 시작했다. 뉘렘베르크Nuremberg의 만MAN공장은 1944년 9월 10일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645대의 전차가 사라졌다. 벤츠공장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하노버Hanover의 MNH공장은 1945년 3월까지 가동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카셀Kassel의 헨셀Henschel킹타이거 공장을 파괴한 후에 성과가 별로라고 오판하고 공습목표를 돌렸다. 덕분에 스피어는 트럭 등의 자원을 돌려 전차생산량을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부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약물량의 30% 정도 밖에 공급하지 못했는데, 교체용 마이바흐엔진은 1944년 여름에 겨우 15%였다가 가을에는 8%로 떨어졌다. 벌지Bulge전투 등 독일이 계획한 결정적인 반격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1944년 12월, 판터를 아르덴느Ardenne로 보내면 전선에 투입하지 않고 해체해서 교체부품으로 사용했을 정도였다.
1944년 여름, 루마니아 유전지대를 잃으면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연료부족때문에 부대간 합동훈련은 고사하고 신병훈련도 중단되었다. 판터는 까다로운 전차였고 훈련부족의 신병이 몰면 고장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판터부대의 가동률이 낮고 전장에 버려지는 판터가 많았다.
판터는 기술면에서 아주 우수했지만 1944년 여름에 미육군을 상대로는 전반적으로 한심스러운 전과였다. 7월 중순, 전차교도Lehr사단의 반격은 많은 전차를 잃고 참패로 끝났다. 사단장은 판터는 프랑스 관목지대에 맞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프랑스의 독특한 지형은 독일과 미영전차 모두에게 위협이었습니다.
8월 뤼티흐Luttich작전(지도 참조)은 패튼Patton의 3군의 진격을 막는 반격이었는데 전술적 실수로 또 다시 참패를 당했다. 이번에는 판터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패튼은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방면으로 진격하자, 히틀러가 공들여 새로 편성한 전차여단 여러 개를 로렌느Lorraine에 투입해 패튼을 노렸다.
판터에 처음 탄 신병들은 아라쿠르Arracourt에서 대대적인 전차전을 벌였는데 겨우 미4전차사단의 1개연대의 방어선도 뚫지 못하고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아라쿠르 반격에서는 동부전선의 전차전 전문, 만토이펠Manteuffel을 불러들이고 최전선의 다급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남겨 두었던 신형판터를 대거 투입했지만, 5기갑군이 겨우 1개연대의 방어선도 뚫지 못하고 궤멸당합니다. 262대의 전차 중에 200대를 잃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벌지반격을 다시 준비합니다.
M4A3 (76mm)는 2세대 셔먼전차였다. 셔먼 1세대는 M3 리/그랜트Lee/Grant중형전차를 교체하기 위해 1941년 봄에 설계를 시작했다. 1942년 2월에 생산을 시작해서 수많은 변형은 주로 엔진으로 구분했다. 용접차체 M4와 주조차체 M4A1은 컨티넨탈 가솔린비행기엔진을 사용했고, M4A2는 트럭디젤엔진 2개를, M4A3는 포드 GAA 가솔린 비행기엔진을, M4A4는 버스엔진을 별모양으로 결합했다.
비행기생산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셔먼은 그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엔진을 장착해야 했다. 셔먼Sherman은 영국군이 붙인 이름으로 2차대전 당시의 미군은 사용하지 않았다.
셔먼은 전선돌파가 목적이었고 장갑보다는 기동성과 화력에 더 무게를 두었다. 독립전차대대와 같은 기갑부대는 장갑보호를 더 선호했지만 육군전력사령부Army Ground Forces (AGF)사령관 맥네어Mcnair는 전차설계의 표준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전투는 디트로이트공장에서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유지보수를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맥네어는 전차설계에 전투가치battle worthiness와 전투수요battle need, 2가지를 요구했다. 전투가치는 유지보수 부담이 과도하지 않으면서 험난한 전투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이었다. 혁신보다는 안정을 선호하는 정책이었다. 전투수요는 전투가 거듭되면서 새 장비가 필요하거나 지역지휘관이 새 장비를 요청하지 않는 한 그대로 사용한다는 뜻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일지 몰라도 일선 지휘관의 의견과 요청이 새 장비의 개발과 배치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았다. 맥네어의 정책결정으로 셔먼은 장점과 단점을 모드 가진 전차가 되었다.
1942년 가을, 엘 알라메인El Alamein에서 데뷔전을 치른 셔먼은 화력, 장갑, 기동성을 모두 갖춘 최고의 연합군전차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렇지만 튀니지Tunisia에서는 전과가 신통치 않았는데, 특히 카세린협곡Kasserine Pass전투의 패배는 연합군지휘관, 실전경험부족, 미숙한 전술교리가 원인이었다.
튀니지에 이어 시실리Sicily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셔먼의 성능개선을 위한 응급조치가 준비되었다.
(자세한 설명은 http://blog.daum.net/uesgi2003/1530 참조)
M1 76mm 주포는 M10 구축전차의 3인치 포를 개량한 것으로 작은 포탑에 겨우 장착할 수 있었고 포신이 너무 길어서 포탑의 균형과 선회성능이 떨어졌다. 당시에는 대전차전 능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신을 잘라내서 이런 문제를 해결했지만 장갑관통력은 10% 정도 저하되었다.
미군의 안일한 대응과 달리, 영국군은 계속 전차의 화력과 장갑을 보강했고 1939년의 40mm(2파운더)에서 1941년에는 57mm(6파운더), 다시 1942년에는 75mm로 주포를 늘렸다. 영국군은 17파운더로 알려진 76mm 신형포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성능 전차개발에도 주력했다.
대전차포탄의 관통력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탄에 화약을 더 넣고 포신을 늘려서 포신을 따라 탄이 더 오래 가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7파운더 포신은 M1 76보다 약간 더 길었지만 영국군은 미군의 1.63kg보다 2배 더 많은 4.1kg의 화약을 넣었다. 독일 판터는 3.7kg이었지만 포신이 훨씬 더 길었다.
미군 주포는 500m 거리에서 115mm를 관통할 수 있었던 반면에 영국과 독일 주포는 165mm를 관통할 수 있었다. 미전차교리는 대전차전 중심이 아니었고 실전경험이 많지 않아 탄약 중 3/4를 철갑탄이 아닌 고폭탄으로 장비했다.
셔먼에 영국군 17파운더 포를 장착한 파이어플라이Firefly입니다. 셔먼 중에 유일하게 판터와 타이거에 맞대결을 벌일 수 있는 전차였습니다. 소수인 2,200대만 생산되었고 당연히 독일전차는 멀리에서도 구분할 수 있는 장포신의 파이어플라이부터 공격했습니다.
1943년 여름, 미육군은 판터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적군Red Army이 쿠르스크전투에서 판터 여러 대를 노획했고 모스크바에 있던 연합군 연락장교가 장갑배치 등의 기본적인 사양을 사진으로 보고했다.
판터의 역할에 대해 완전히 오판한 나머지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합군정보부는 판터를 타이거처럼 군단 수준의 독립전차대대로 소규모 배치되는 것으로 분석했다. 연합군은 튀니지, 시실리, 이탈리아에서 타이거를 만나면서 엄청난 성능에 놀랐으면서도 투입된 양이 너무 적다며 평가절하했다. 1944년 봄, 노르망디 상륙직전에야 독일군이 판터를 표준 중형전차로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육군이 판터에 대응해 1944년 전차프로그램을 변경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미육군은 76mm 주포면 400m 거리에서 판터를, 200m 거리에서 타이거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실전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미육군은 신형 76mm M1A1 대신에 영국군 17파운더를 장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1943년 가을 영국에서 있었던 시험사격을 참관했던 미육군병기창 장교는 거대한 포구화염과 폭풍에 놀라 설계가 잘못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렇지만 76mm M1A1 주포 대신에 새 장비를 요구하는 강한 전투수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1944년 1월, M4A1 차체부터 76mm를 장착하고 M4A3 차체에도 장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셔먼의 탄약화재가 심각한 위협이었는데 76mm 장착은 셔먼차체 개조와 시기도 잘 맞아떨어졌다.
76mm를 장착한 첫번째 M4A1 130대가 1944년 4월에 영국으로 선적되었다. 그렇지만 일선 전차지휘관은 75mm 탄의 고폭약보다 절반이나 줄어든 76mm 고폭탄을 경멸하다시피 했다. 패튼은 아예 대놓고 수령을 거부했다.
M1A1 76mm 원형은 주포 소염기가 없어서 발사 후에 먼지가 일어나서 적 전차를 명중시켰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영국에 보내진 초기 130대는 어떤 부대에도 배치하지 않고 정비창에 보관하기로 했다.
1944년 여름에 투입된 셔먼의 숫자는 판터와 완전히 반대였다. 미육군은 전차의 안정성을 각별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충분한 테스트를 거쳐 생산되었고 설계할 때부터 단순화와 표준화를 염두에 두어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셔먼은 미군뿐만 아니라 영국, 소련, 프랑스군에게도 제공되었다.
일선 셔먼부대의 가동률은 90% 이상을 유지했고 판터보다 정비하기 훨씬 쉬었고 예비부품도 부족하지 않게 공급되었다. 1943년 셔먼생산량은 21,250대로 판터 1,830대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독일과 미국은 전차철학과 군의 전략방향에서 차이를 보였다.
독일육군은 초기 전격전을 단행할 때에는 셔먼과 같이 가볍고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차를 선호하다가 1943년 이후 전선방어에 몰리면서 대량생산, 내구성과 기동성보다는 화력과 방어력의 우선순위가 가장 앞으로 나왔다.
셔먼과 판터의 포탑 내부 비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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